황성입궁皇城入宮
영락 사년에 시작해 영락 이십년에 완성한 자금성은 동서남북에 네 개의 문이 있는데, 남쪽의 문은 오문午門으로 부르고, 북쪽의 문은 현무문玄武門으로 부른다. 동쪽의 문은 동화문東華門, 서쪽의 문은 서화문西華門이다.
오문으로 들어가면 외국 사절을 접견하고 황제 등극을 포함한 국가적 행사를 진행하는 봉천전奉天殿이 있고, 행사 전에 황제가 잠깐 머무는 화개전華蓋殿이 있고,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하는 근신전謹身殿이 있다.
삼대전의 동쪽엔 문화전文華殿이 있는데, 태자가 사무를 보는 공간이다. 서쪽엔 무영전武英殿이 있는데, 황제와 대신들이 조회朝會를 보는 장소다.
이들을 합쳐 외궁外宮으로 부른다.
내궁內宮은 황제가 기거하는 건청궁乾淸宮과 황후가 기거하는 곤녕궁坤寧宮 그리고 둘 사이에 낀 교태전交泰殿을 중심으로, 후궁과 황족이 기거하는 동육궁東六宮과 서육궁西六宮으로 이뤄졌다.
"구후 장주는 이제부터 정팔품의 태의원太醫院 이목吏目이오. 당분간은 문화전에 기거할 거고, 금의위에서 호위 여덟 명을 붙일 거요. 금의위의 소기가 품위가 더 높긴 하나 구후 이목의 수하니까 마음껏 부리셔도 괜찮소."
공현이란 이름의 환관은 구후영에게 꽤 호의적이었다. 처음엔 끝도 없이 쏟아내는 유치한 질문 때문에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는데, 관과 황궁의 사람 여럿과 접촉하다 보니 공현만큼 편한 상대가 없었다.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소?"
"내궁에선 내가 함께할 거고, 건청궁 밖에선 금의위가 늘 곁을 지킬 거요. 혹시 알아야 할 게 있으면 그때그때 말해줄 거니까 미리 걱정하지 마시오."
오문은 공현의 명패로 통과했고, 건청궁은 공현의 얼굴로 통과했다.
"저 안에 폐하가 계시오. 오는 길에 가르친 예법은 잘 기억하고 있소?"
"물론이오."
"혹시 기억나지 않으면 그저 날 따라 하시오."
말을 마친 공현이 앞장섰다.
"공 태감께서 배알을 청합니다."
문을 지키던 자들이 공현을 보자마자 바로 외쳤다.
"들라 하라."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배알을 윤허했다.
"먼저 황제 폐하, 그다음에 황후 마마요. 잊지 마시오."
말을 마친 공현이 구후영보다 두 걸음 앞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사례감司禮監 수당태감隨堂太監 공현이 태의원 이목 구후영을 대동하여 황제 폐하를 배알합니다."
"폐하 만세."
구후영은 환관들과 함께 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동상 인물이 황후 마마께 문안을 올립니다."
"마마 천세."
"몸을 일으키라."
구후영은 명에 따라 몸을 일으켰으나 고개는 들지 않았다.
"만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폐하를 위해 수고한 공 태감의 충정은 내 깊이 기억하겠네."
"폐하와 마마를 위해서라면 제 심장과 간이라도 꺼내 바치겠습니다."
"근데, 저자가 용한 의원인 건 맞는가? 아직 약관도 안 되었다 들었네."
"진나라의 감라甘羅는 열두 살에 계책을 내 군사 한 명 움직이지 않고 조나라의 성을 다섯 개 빼앗아 상경上卿(높은 벼슬)이 되었습니다."
"저자가 감라와 비견할 정도의 천재란 말인가?"
공현이 목청을 가다듬어 황후의 질문에 대답했다.
"구후 이목은 여섯 살에 천자문과 이천자를 뗐고, 열 살에 소학과 대학과 논어를 마쳤습니다. 침술은 아홉 살 때 이미 신 명의의 모든 재주를 물려받았고, 여기 오기 전엔 무당에 기거하며 장로들에게 태극권을 가르쳤습니다."
"공 태감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후 이목은 불세출의 기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구나."
"대기는 만성한다고 합니다. 제 그릇이 작아 빨리 채워진 것뿐이니, 마마의 칭찬은 황송하나 감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구후영의 대답에 황후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무당 장로들이랑 태극혜검을 토론하는 게 편하겠다.'
매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걸음으로 옥청전에 갔던 구후영인데, 진짜 도살장에 도착하니 그때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신 명의를 부르거라."
잠시 뒤에 신한천이 부축받으며 등장했다. 워낙 무뚝뚝한 사람이라 정이 깊이 들지 않았는데, 기억 속보다 훨씬 노쇠한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예를 면하고 의자를 허락한다."
혼자 거동도 불편한 신한천인지라 예식을 면했다.
"신 명의. 침술을 시행할 사람을 구했으니 폐하의 치료를 시작해라."
환관이 갖다준 의자에 앉은 신한천이 나직이 말했다.
"유저 맞느냐?"
"어르신, 접니다."
구후영의 대답에 신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변하긴 했으나, 말투를 보니 맞는구나."
"맞습니다."
"단전의 형성이 미숙하고 주변 혈도가 약해 무인으로 대성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숨이 깊고 고른 게 내 예상이 틀린 모양이구나. 그간 칼을 휘두르느라 침을 손에서 놓은 건 아니지?"
"어르신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어려운 자들에게 침술을 베풀며 살았습니다."
"숨이 불편하구나. 내게 침을 놓아라."
구후영은 침통을 꺼내 신한천의 머리와 목과 손 그리고 어깨에 침을 놓았다.
"숨이 불편하다고 했는데 왜 엉뚱한 곳에만 침을 놓는 것이냐?"
"가슴과 등에 침을 놓는 건 증상을 완화할 뿐입니다. 저의 관觀과 감感으론 경맥 두 개가 막힌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에 신한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면 제가 원하는 치료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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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신선이 꿈이었으나 주변의 극렬한 반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약술을 독학했고, 단약도 직접 만들었다.
사람들은 황제를 너무 몰아붙이는 게 우려되었고, 좋은 약재만 쓰는데 문제 될 게 없겠지 싶은 마음으로 황제의 일탈을 눈감아줬다.
그런데 지난 이십여 년간 건강하게 지내던 황제가 최근에 갑자기 쓰러졌다. 나이가 들면서 젊을 때 건강에 도움이 되던 약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당연히 황궁이 발칵 뒤집어졌고, 유명하다는 의원을 전부 소환했다. 그러나 약왕으로 불리는 안물마저 약을 쓰면 오히려 수명이 단축될 뿐이라며 고개를 저은 바람에 그저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담진웅의 수작에 걸린 예부상서 홍권이 침술에 일가견이 있는 신한천을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수전증으로 치료가 불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침술에 능한 의원을 수소문하던 중에 은근슬쩍 구후영을 언급했다.
철혈방을 무너뜨리고 양왕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우려던 세력의 음모로 알고 부랴부랴 장문과 방주와 장주 자리를 내놓고 모든 친인과 의절한다는 내용의 편지까지 작성했던 구후영으로선 다소 억울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정을 전혀 모르는 구후영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음모에 빠진 거로 착각하며 어떻게든 치료에 성공해 살아남으려고 모진 애를 쓰는 중이다.
"시침試針을 시작한다."
시침은 환자의 혈도들에 침을 꽂은 후 맥의 반응을 보며 증세가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는 사전 작업이다.
"폐유혈을 감 방위에서 삼 푼 깊이로 찔렀습니다."
구후영의 말에 신한천이 그나마 덜 떨리는 왼손으로 황제의 맥을 진찰했다.
"다음 혈도."
진맥을 마친 신한천이 구후영에게 다음 침을 꽂으라고 지시했다.
"다음.","다음.","다음."
오랜만에 손발을 맞추는 거지만, 신한천이 워낙 대단한 의원이고 구후영도 그간 놀지만 않아 둘의 시침은 거침없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침을 뽑아라."
구후영이 침을 다 뽑자 궁녀들이 와서 황제의 의복을 정리했다.
"신 명의. 폐하께서 언제쯤 용체를 회복하고 용안에 웃음을 띌 수 있겠소?"
공현이 질문했다.
"장담하긴 힘드나, 길어도 두 달 이상 걸리지 않을 거요."
"그 말이 진실이냐?"
황후가 기쁜 말투로 질문했다.
"침으로 폐하의 몸에 깃든 기운을 모조리 제거하면 건강을 금세 회복하실 겁니다."
'왜 거짓말을 하지? 후환이 두렵지 않나?'
황제는 이미 오장육부가 상해 독이 되는 기운을 다 제거하더라도 건강을 회복하기 어렵고, 길어야 반년 정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제자와 치료법에 관해 상의해야 하는데, 공 태감께 자리를 부탁하오."
"구후 이목은 문화전에 기거하기로 했소. 차라리 신 명의도 거기로 거처를 옮기는 게 좋겠소."
"그리해주시오."
부축받으며 건청궁 밖으로 나온 신한천을 건장한 사내가 등에 업었다. 궁에서 가마를 타는 건 정일품의 대신도 못 누리는 호사로, 신한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나이가 들면 약해지는 게 세상의 이치다. 내가 칠십이 넘었는데 멀쩡하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겠느냐?"
"버틸 만하다는 말로 듣겠습니다."
일행은 자금성의 모든 궁전 중에 가장 큰 봉천전을 지나 문화전에 도착했다.
"내일부턴 금의위의 여덟 위사衛士가 이 길을 함께할 거요. 그럼 푹 쉬시오."
공현이 신한천과 구후영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침실은 여기고, 측간은 저기요. 최대한 방에서 나오지 마시고, 문화전은 절대 벗어나지 마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최대한 구해드릴 테니, 무슨 일이든 우리를 통하는 게 좋소."
금의위 소기小旗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종칠품의 관직으로 구후영 같은 애송이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게 꽤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폐하의 치료법을 상의해야 하니, 누가 엿듣지 못하게 주의를 기울여 주게."
신한천의 말에 금의위가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이구나. 눈이 침침하니 손으로 좀 만져보자꾸나."
'뭐지?'
구후영이 기억하는 신한천은 절대 이리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적 모습이 조금밖에 안 남았구나. 눈이 멀쩡해도 우연히 마주치면 못 알아봤겠구나."
'아문혈. 청궁혈.'
말하지 말고 듣기만 해라.
'백회혈. 완골혈.'
이렇게 만나 유감이다. 곱게 죽기 힘들 거다.
'협차혈. 인영혈. 객주혈.'
그래도 살길은 있으니, 내 말을 따라라. 내가 너 대신 죽으마.
신한천은 구후영의 얼굴을 만지는 척하며 혈도를 짚어 자기 뜻을 전달했다. 뜻밖의 온정에 구후영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손가락 끝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걸 보니 그간 놀지만은 않았구나. 내가 나이가 있어 언제 쓰러질지 모르니, 폐하의 치료 방법을 모두 알려주마. 반드시 잘 기억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신한천은 자신이 어떻게 치료하려는지를 구후영에게 세세히 설명했다.
'경이롭다.'
신한천의 치료법은 구후영이 상상하기도 벅찬 수준이었다.
'난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었어.'
침술은 크게 세 개 경지로 나눈다.
어디가 아프면 어딜 치료하는 건 하의 경지다.
숨이 불편한 신한천을 두 개의 경맥에 침을 놓는 거로 해결한 구후영은 중의 경지다. 이 경지는 침술 위주에 약을 보補로 쓰는 일이 많다.
상의 경지는 신한천이 방금 구후영에게 말해준 방식으로, 약을 전혀 안 쓰고 침과 환자의 기운만으로 치료를 완성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엔 중의 경지가 효과가 더 빠르고 수고도 적지만, 약을 전혀 못 쓰는 황제한텐 신한천이 이룬 상의 경지로만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약 기운이 오장육부를 망칠 대로 망쳐 상의 경지로도 완치는 불가하다.
"제게 다른 생각이 있는데, 어르신께서 들어보시고 이게 가능한지 정확히 판단해 주십시오."
구후영은 자신이 떠올린 치료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 작가의말
그간 고심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2부를 완성한 다음, 한동안 연재를 쉬며 글을 다듬겠습니다. 원래는 3부까지 사건이 쭉 진행되고 4부에서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방식인데, 4부에서 글의 피로도가 확 올라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2부의 마무리를 3부로 보내고, 3부의 황궁 파트를 2부로 가져왔습니다. 배후 역시 2부부터 등장할 예정이고, 3부에서도 사건의 진행과 함께 간간이 등장시킬 생각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분간은 2부 마무리에 집중하고, 순서가 바뀌며 혼란해진 뒷부분의 수습은 2부를 끝내고 하겠습니다.
이미 결말까지 구상이 끝났기에 이대로 연재를 이어가도 되지만, 최대한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어렵게 내린 결정입니다.
2부의 마무리는 5월 중순으로 예상하며, 비축분을 정리하는 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컨디션이 매일 좋으면 1주일도 안 걸리고, 컨디션이 별로면 한 달 이상 걸릴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공지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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