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점진循序漸進
예전의 위정자들은 백성에게 법이 어떠한 건지 숨겨야 두려움을 주어 효과를 본다고 여겼다. 이러한 상황에 누구는 법을 지켜야 했고 누구는 지키지 않아도 됐고, 상황에 따라 법이 생기기도 바뀌기도 했다.
이천 년 전 법가의 대표 인물인 자산子産은 정나라의 재상이 되자마자 주형서鑄刑書를 만들어 법을 성문화했다. 이러한 행위는 법을 위정자의 통치 수단이 아닌 국가의 기틀을 유지하고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로 전환했다.
호 선생의 생각은 꽤 괜찮았다.
모두가 지키는 법을 공표해 모든 사람에게 명확한 행동강령을 준다. 아무래도 이천 년 동안 칭송받은 자산처럼 본인 이름을 역사에 굵직하게 남기고 싶었던 듯했다.
문제는 호 선생이 너무 서둘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가올 미래니 준비만 탄탄히 하고 때를 기다려도 되건만, 어떻게든 자기 손으로 이루고 자기 눈으로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급공근리急功近利(단기적인 성공과 이익에 급급함)의 행태 때문에 결국 호 선생은 실패하고 말았다.
구후영만 없었으면 된다고?
어차피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에 구후영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호 선생을 제지했을 것이고,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호 선생의 방식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쌍의 반절도를 든 연 선생을 상대하면서 구후영 역시 순서점진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막급했다.
사실 구후영은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칠살문의 잔당을 정리하는 일도 있고, 수거한 문서를 살피는 일도 있고, 대신들의 심복이나 시종 등이 칠살문의 문도가 아닌지 확인하는 일 등.
여기서 칠살문의 잔당을 정리하는 일만 해도 무림수호맹에 속한 십수 개 문파의 역량을 어떻게 움직이고 행동 시기를 어떻게 조율할지, 현지 관과 군의 도움을 어떻게 받을지 등 처리할 문제가 무수했다.
그러나 구후영은 이 모든 걸 무시하고 연 선생을 찾았다.
연 선생만 제거하면 더는 구후영을 위협할 자가 없다.
그렇게 되면 구후영은 강호에 은퇴를 선포할 거고, 단아의 총명함이라면 은퇴 소식만 듣고도 구후영이 원하던 바를 이뤘음을 알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어차피 강호에 휘말릴 일이 더는 없기에 내공을 전부 잃어도 된다는 이유로 단아를 설득해 치료를 진행할 계획이고, 치료만 성공하면 아무런 미련도 없이 강호를 떠날 생각이다.
이러한 조급한 마음으로 구후영은 악불형을 찾아내자마자 바로 연 선생을 급습했다.
상대의 무위에 따라 어떻게 상대할지 간단한 계획을 짜긴 했으나, 천마와 비견하는 고수를 어찌하기엔 준비가 너무나 조촐하고 부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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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촌장一寸長 일촌강一寸强.
무기는 길수록 더 강한 힘이 실린다.
그러나 연 선생의 반절도는 이러한 상식을 위배했다.
반절도는 이름 그대로 일반적인 칼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저 짧은 칼이라고 반절도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반절도는 귀한 금속 십수 가지를 섞어 만든 신병神兵이다.
십수 가지 금속을 녹여 섞은 다음, 명인 소리를 듣고도 남을 야장이 무겁고 단단한 망치로 쉬지 않고 두들긴다.
그 과정에 약한 금속, 섞이지 못한 금속, 양이 많은 금속 등이 나가떨어진다.
가끔 단조 과정에 칼이 부러지기도 하는데, 그러면 전부 녹여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녹이고 두드리고, 두드리고 녹이고, 녹이고 또 두드리며 덩치가 점점 줄어든다.
그러다 연속 열 번을 두드려도 무게가 변하지 않을 때 비로소 칼이 완성되는데, 단조 과정으로 유추하다시피 반절도는 작으면 작을수록 더 단단하고 강하다.
"대단한 검이군."
옥무영은 한 쌍의 판관필마저 잃고 청빈이 있는 곳까지 물러난 지 한참 되었다.
홍기영 역시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곤 있으나 감히 반절도에 맞설 생각은 못 했다.
유독 구후영만 전대모검의 단단함과 초식의 교묘함으로 수백 합 동안 단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연 선생에 맞섰다.
"당신은 조금 실망스러운데?"
연 선생의 내공은 일행 중 최고인 옥무영보다 강하다. 내공의 회복 능력 역시 홍기영보다 낫다.
반절도를 다루는 솜씨는 평생 도법만 수련했다고 여겨도 될 정도로 능숙했고, 익힌 초식 역시 구후영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냥 생각 없이 초식만 익힌 사람 같잖아."
연 선생은 깨달음 따위 없이 그저 자신이 아는 초식을 펼칠 뿐이었다.
강한 내공에 따른 무지막지한 힘과 빠른 속도. 타고난 재능인지 수련의 결과인지 모를 더없이 정확한 구사력.
거기에 구후영의 전대모검 빼고는 어떠한 무기도 가볍게 자르는 반절도로 사대신협의 둘에 강호의 신성 셋을 상대하면서도 우위를 점했을 뿐, 결코 수준 높은 무인이라고 평가하기 힘들었다.
"아까 말했을 텐데? 경지는 천마가 조금 더 높다고."
그에 뒤로 물러나 있던 옥무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 말을 듣자 하니 마치 천마도 힘만 세고 경지는 별로인 것 같소?"
"몰랐어? 사대신협은 천마랑 싸워본 적 있다면서?"
악불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천마 정도로 강하면 경지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지 않은가?"
"그렇지. 그럼 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대꾸를 마친 연 선생이 반절도를 크게 휘둘러 구후영과 홍기영을 물러서게 만든 다음 뒤로 훌쩍 물러났다.
"더 싸우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당신들 중 하나라도 죽이려면 나도 팔 하나 정도는 내놔야 할 거 같고, 내가 무리하지 않는 이상 당신들도 날 어쩌지 못할 테고."
구후영과 홍기영 모두 숨긴 재주가 있다.
구후영의 가장 번잡한 초식은 백화총총이고 가장 단순한 초식은 일지한매다.
하나는 백화가 만발한 여름이고 하나는 매화만 가지 끝에 꽃을 피우는 늦겨울. 상반된 검의의 두 초식을 동시에 펼친다면 연 선생에게도 충분히 위협을 줄 수 있다.
홍기영 역시 사대신협의 한 명으로서 일격필살의 재주가 하나 있다. 비록 신검이나 신창의 재주에 미치지 못하나 이룬 경지가 있어 전혀 만만치 않다.
문제는 연 선생이 쉽게 무리하지 못하듯이 구후영과 홍기영 역시 함부로 절초를 펼칠 수 없다.
설사 두 명 모두 초식을 정확히 펼쳐냈다고 해도 합이 안 맞으면 원한 효과를 볼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일행 중 한둘은 목숨을 잃고 만다.
그때.
"안 늦었지?"
풍불지와 귀연이 등장했다.
일행을 연 선생 앞까지 안내한 귀연은 다시 밖으로 가서 지원군을 기다렸다.
구후영은 사대신협의 둘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으나 홍기영은 신중하게 풍불지의 장원과 하북 팽가에 서신을 보내 둘에게 한 손 거들 것을 요청했다.
팽가는 가주가 폐관했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풍불지 역시 자리를 비워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풍불지는 자기 경공을 천하제일로 평가한 천마의 안목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일행과 거의 비슷한 시각에 용연협龍淵峽에 도착했고, 일행이 속수무책일 때 한 줄기 햇살처럼 눈부시게 등장했다.
"이러면 조금 골치가 아픈데?"
사대신협 중 누가 제일 강한지는 의논이 분분하나 가장 척지기 싫은 사람이 누구냐면 다들 신검을 꼽는다.
평소는 무골호인처럼 누구한테나 호의적이나 얼굴을 붉히는 순간 나찰이 순해 보일 지경이다. 뛰어난 경공 때문에 방비하기 힘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건 성질이 거머리 같아 한 번 꽂히면 절대 멈추지 않는다.
게다가.
"봤지? 이건 검망劍芒이라는 것이다."
경박하다는 평가와 달리 무공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누구보다 천재적이다.
"와!"
풍불지가 바닥에서 주운 잘린 판관필을 잡고 내공으로 검날을 만드는, 무인이 아닌 도술을 수련한 술사가 보여야 할 법한 모습에 귀연이 누구보다 먼저 감탄했다.
"이게 그냥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야."
경공으로 표홀하게 다가간 신검이 기검을 휘둘렀다. 연 선생은 반절도의 단단함을 믿고 칼을 휘둘러 기검과 부딪치려 했다.
그런데 기검이 홀라당 사라져버렸다.
그 탓에 반절도는 허공을 갈랐고, 반절도가 지나기 무섭게 기검이 다시 생겨났다.
내공의 수발만 일정 수준에 이르면 상대의 수비를 완벽히 무시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검술이었다.
이걸 검술이라고 여겨도 될지는 아직 섣불리 정할 일은 아니지만.
"이제 놈은 나를 피할 수밖에 없다. 내가 몰고 홍 형이 잡고 영이가 가두면 되는 거야."
지금까진 연 선생의 수비를 뚫을 방법이 없었다.
즉, 연 선생이 수비할 수 있는 공간은 철저히 연 선생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젠 수비를 뚫을 방도가 생겼다. 연 선생의 공간을 풍불지가 빼앗은 것이다.
거기에 홍기영이 원경의 도움을 받아 연 선생에게 들러붙고, 구후영이 난화검법으로 공간을 제한하면 악불형에게 초식을 펼칠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냥 대놓고 말하네?'
청빈은 자객이 아닌 무인으로 활동한 기간이 짧은 편이고, 그 짧은 기간마저 대부분 감옥에서 지내며 견식이 몹시 부족했다.
그 탓에 서로가 자신이 뭘 할지 대놓고 말하는 지금의 방식이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무당과 소림 출신인 옥무영과 원경한테도 처음인 일이었고, 나이보다 훨씬 많이 경험한 구후영에게도 생소한 일이었다.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풍불지가 뭔가 알려주려고 한 말은 아니지만, 구후영도 원경도 숨은 뜻을 알아차렸다.
허접한 눈속임이나 요행을 바라는 꼼수가 통할 상대가 아니니 그저 자신의 실력을 최대한 뽑아내는 수밖에 없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풍불지의 가세로 깨졌고, 구후영 일행은 재빨리 우위를 점해갔다.
그러나 확연한 우위에도 구후영 일행은 서두르지 않았다. 이대로 우위를 조금씩 키워가며 상대의 여유를 줄이면 어느 순간 모든 걸 쏟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그 순간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고, 그 순간에 각자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 대결의 향방이 결정된다.
기다리던 순간은 일각이 훌쩍 넘어서야 도착했다.
사대신협의 둘이 손잡고 하나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음을 생각하면 연 선생이 일각이나 버틴 게 오히려 놀랄 일이다.
연대구품蓮臺九品.
원나라 말기에 백련교가 소림을 공격한 적 있다. 소림이 원 황실의 지시에 따라 백련교의 봉기군을 세 번이나 방해한 적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소림은 짐을 싸매고 하북으로 도주했는데, 그 과정에 일부 경전과 무공 비급이 유실됐다.
개중 하나인 연대구품이 홍기영의 선조 손에 들어갔고, 홍기영의 대에 이르러서 소림에 돌려줬다.
연대구품은 역근경과 세수경을 버린 탓에 소림조차 익혀내지 못해 칠십이절기에서 제외한 무공으로, 무공의 유출에 극히 민감한 소림도 홍기영에게 소정의 보답을 하고 잊어버렸다.
소림의 무관심에 용기를 얻은 홍기영은 몰래 연대구품을 익혔고, 가문의 장법과 결합해 경홍유룡장을 창안했다.
그러나 홍기영의 성명절기인 경홍유룡장도 그 위력이 연대구품의 반조차 미치지 못했고, 강한 무공에 대한 동경으로 홍기영은 몰래 연대구품을 따로 수련했다.
그간 관에 투신한 덕분에 다툼이 없어 이번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건데, 모르는 게 없을 것 같던 연 선생도 뜻밖의 무공에 놀라 허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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