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망필노鋒芒畢露
날카로운 송곳은 아무리 튼튼한 주머니에 숨겨도 끝내는 구멍을 뚫고 그 예기를 자랑한다. 숨긴다고 숨겨질 게 아니다.
돌은 가만히 있고 근처를 지나던 사람이 부주의하여 다치는 건데, 결국 정을 맞는 건 모난 돌이다.
그렇기에 봉망(칼날)을 드러낼 때 조심해야 한다. 아주 날카롭고 든든하지 못하면 그저 모난 거로 여겨져 정을 맞는다.
구후영은 예기를 하나도 숨기지 않고 완전히 개방했다.
"이리도 많은 분이 미련한 소생의 취임식에 오실 줄은 몰랐소."
내공을 잔뜩 실은 구후영의 인사가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내공이 많으나 경지는 이제 일류라서 부드러움이 부족하고 강함이 과했다.
그러나 불청객들을 놀라게 하는 데는 차고 넘쳤다.
"강호 경험이 부족하여 오신 분들을 일일이 알지 못하는 점 양해 바라오."
구후영은 녹색 비단옷을 입고 바닥을 두껍게 댄 노루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머리엔 푸른 영웅건을 둘렀는데, 영웅건에 박힌 붉은 마노보다 그 밑에서 빛나는 눈이 더 귀해 보였다.
연무장의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고도 낯빛에 전혀 변화가 없으며, 호흡이 안정되고 걸음걸이마저 흐트러짐 하나 없다.
'인호도 보기 드문 인재인데, 낙화문이 와호장룡이었구나.'
사부도 놀랍고 제자는 더 놀라웠다. 담진웅은 손녀의 성화를 못 이겨 경솔하게 일을 벌인 게 너무 후회됐다.
그때, 어린 제자들이 태사의를 들고 등장했다. 만균이 구후영에게 잘 보이려고 통나무를 깎아 만든 귀한 물건이었다.
"놀랍구나!"
열 살에서 열두 살 정도의 어린 제자 넷이서 꽤 묵직한 태사의를 아무렇지 않게 옮기는 모습에 손님들이 너나없이 감탄했다.
힘이 세고 내공이 가장 많은 넷이 태사의 옮기는 연습만 열흘 넘게 한 줄도 모르고.
격동한 마음을 수습하고 태사의에 앉은 임초현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대제자 유저는 장문인의 중임을 맡을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합니다."
"사제들을 친형제처럼 아끼고 보살필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합니다."
"문파의 명예를 무엇보다 높이 받들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합니다."
"장문검을 전한다."
그새 만든 검집으로 초라한 모습을 감춘 장문검이 임초현의 손에서 구후영에게 전해졌다.
"이로써 낙화문은 새로운 장문을 맞이하고 도약의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장문검을 손에 든 구후영이 사제들에게 명했다.
"태상장문께 예를 올린다."
열한 명의 제자가 구후영 뒤에 도열하고 함께 임초현에게 절을 올렸다. 장문 자리를 떠나는 임초현에 대한 예다.
절을 받은 임초현이 태사의에서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그 자리는 구후영이 차지했다.
"장문 사형께 예를 올리거라."
임초현의 말에 열한 명 제자가 구후영에게 절을 올렸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난 너희 형이고 너흰 내 형제다. 너희 기쁨이 내 기쁨이고 너희 아픔이 내 아픔이다. 장문으로서 더 큰 책임으로 너희를 이끌고 보살필 것이니 잘 따라와 주기 바란다."
"장문 사형의 팔다리가 되어 문파의 중흥에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연습한 대로 실수 없이 해낸 낙화문 제자들 얼굴이 흥분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승계식은 끝났소. 횃불은 넉넉하니 날이 밝을 때까지 실컷 먹고 마시기 바라오."
구후영이 태사의에 앉은 채 말했다.
그때, 상석에서 장인호가 일어났다.
"장문 취임을 축하하오. 그런데 장문의 성함은 어찌 되시오. 성함을 몰라 호칭하기 불편하오."
"그대는 누구시오? 주인의 이름을 묻기 전에 손님부터 정체를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망신을 주려는 의도가 너무 뻔히 보여 구후영은 코웃음을 칠 뻔했다.
"용호표국의 장인호요."
구후영이 유저라고 대답할지 구후영이라고 밝힐지 결정이 어려워 시간을 더 끌려던 차에.
"철혈방 금검당 공 당주와 일행입니다."
두전의 외침이 연무장을 흔들었다.
'금검당?'
깜짝 놀란 구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려한 복식을 한 중년과 수행인으로 보이는 눈빛이 강인한 청년 네 명이 보였다.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걷는 공형선과 달리, 수하들은 좌중을 면밀히 관찰했다.
"금검당 당주 공형선이 구후 소협을 처음 뵈오."
구후영은 공형선을 의젓하게 맞이했다.
"명성은 익히 들었소. 어서 오시오."
상석을 차지한 담진웅이 어색한 얼굴로 고민했다. 용호표국이 산서에서 대단한 건 맞지만, 금검당과 비벼볼 처지가 아니다.
원래대로는 상석을 내줘야 마땅하지만, 여기가 용호표국은 아니어도 태원부 근처여서 자리를 쉽게 내주기 망설여졌다.
"공 모가 복이 있어 잔칫날을 골라 왔군."
공형선의 말에 초청을 받고 온 게 아님을 안 담진웅은 상석을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용호표국은 필경 청첩을 받고 온 거기에 불청객인 금검당에 자리를 양보 안 해도 딱히 구설에 오를 일이 아니다.
"서두르거라."
눈치를 살피던 경 총관이 하인들을 지휘해 금검당의 자리를 급히 만들었다.
"오늘은 구후 모가 낙화문 장문 자리에 오르는 기쁜 날이오. 청하진 않았으나 늦었으니 벌주 석 잔 마시시오."
용호표국 맞은편에 마련한 자리에 앉기 바쁘게 들린 구후영의 말에 공형선이 기쁘게 웃으며 술 석 잔을 연거푸 마셨다.
구후영은 분명히 벌주라고 했다. 이는 육비나타의 일에 책임만 지면 은도당 편에 서서 금검당을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암시나 다름없다.
"금검당이 일전에 한 실수는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하오. 아직 자초지종을 밝힌 건 아니지만, 관련자를 전부 색출해 소협 앞에 무릎을 꿇리겠소."
공형선의 말에 연무장의 사람들은 구후영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보다 열 배 정도 놀랐다.
'낙화문에 뭐가 있길래 금검당 당주가 직접 사과하러 여기까지 왔지?'
금검당은 호남에 있기에 여기까지 삼천 리 정도로 멀다. 그 먼 길을 철혈방의 허수아비 방주를 제치고 일인자 소리를 듣는 공형선이 직접 찾아올 정도면 정말 큰 잘못을 했거나 낙화문이 소림 정도로 강해야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둘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만 보면 큰 잘못은 아닌 것 같으니 영문 모르는 자들은 의문만 무럭무럭 자랐다.
"지난 일을 추궁하고 싶진 않으나 그대로 봉합하면 곪아 터질 게 분명하오. 철혈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를 건 자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오."
"소협이 철혈방을 그리 생각하니 공 모도 무척이나 기껍소."
말을 마친 공형선이 술을 가득 부은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후 공자가 밖에서 이렇게 인복이 있는 줄을 몰랐소. 산서 무림의 호걸들이 전부 모인 것 같으니 이 공형선이 부족하나마 철혈방을 대표해 여러분께 술 한 잔 권하겠소."
감히 누구 권주라고 거절할까.
연무장에 손님으로 온 자들이 분분히 일어나 공형선을 따라 잔을 비웠다. 공형선의 권주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게 변한 그때.
"여의경천如意競天 연무쌍 대협입니다."
평소 흠모하던 고수를 직접 만난 두전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외침과 함께 연무장에 들어온 연무쌍은 구후영이 어디 있는지 연신 두리번거렸다.
"연 대협, 공 모가 인사드리오."
공형선이 연무쌍을 향해 반갑게 외쳤다.
"여긴 어떻게 알고?"
연무쌍은 하나도 안 반가운 얼굴이었다.
"구후 소협께 죄를 용서받으려고 회초리 들고 찾아왔소."
말을 마친 공형선이 소매에서 회초리 한 묶음 꺼내곤 혼자 껄껄 즐겁게 웃었다. 장난스러운 모습에 화내기도 무엇해 연무쌍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삼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구후영이 신분을 숨기려 했던 건 철혈방의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다. 금검당이 이미 찾아온 마당에 더 숨길 것도 없었다.
"아니다.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온 거다."
대부인은 아명을 듣고 한 치 의심도 없이 구후영을 믿었지만, 연무쌍은 아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처음엔 분위기에 휩쓸려 친조카처럼 여겨졌으나, 구후영이 떠난 이후엔 자꾸 의심이 생겼다.
'본인도 모르는 이름을 같이 끌려간 자가 안다고? 거짓말 아닐까?'
결국 의심을 못 지운 연무쌍은 직접 대초원에 가서 구후영이 노예로 지냈다던 부족을 찾았다.
거기에서 둘째를 낳으며 큰 산통을 겪은 생모가 자신이 오래 못 살 것 같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구후영과 구후일이란 이름을 알리고 다닌 사실을 파악하고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괜히 미안했던 연무쌍은 낙화문이 어떤 문파인지 확인도 할 겸해서 태원부로 왔는데.
마침 장날이었다.
'맞다. 권왕 연남산이 홍엽산장과 인친이었지.'
임초현도 그제야 구후영이 권법 고수를 셀 때 무조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연무쌍의 조카임을 깨달았다.
'이젠 용호표국 따위를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굳이 철혈방까지 갈 필요도 없이 연무쌍 한 명이면 용호표국 정도는 무시해도 괜찮다.
"연 대협. 이리 와서 합석하세."
연무쌍은 공형선과 같은 상에 앉는 게 마뜩잖았으나 구후영과 가까운 곳에 딱히 다른 자리도 없고 해서 마지못해 합석했다.
"부당주 그 새끼가 한 짓은 내가 벌주로 사죄하리다."
공형선이 작게 속삭였다.
"좋아하는 술 처먹는 게 사죄라고? 그럼 나도 네 멱을 따고 십 년 폐관수련하는 거로 사죄할까?"
연무쌍이 이를 갈았다.
"어허. 조카가 일문의 장문이 되는 경사로운 날에 그리 심술을 부려야겠소? 내가 이틀 전에 태원부에 도착했으나 구후 소협의 면을 세우려고 일부러 오늘에야 방문했소."
홍엽산장 주인들은 대대로 성정이 대쪽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분위기 좋은 잔칫날을 고른 건데, 공형선은 마치 구후영을 위한 것처럼 꾸며서 말했다.
'장문?'
그제야 구후영이 주인을 상징하는 북쪽 자리의 커다란 태사의에 앉고 옷도 한껏 차려입은 게 그냥 심심해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떠올린 연무쌍은 아차 싶었다.
"연 모가 다른 일로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들러 사정을 몰랐소. 조카의 일에 이리 많은 분이 축하하러 왔다니 감격할 따름이오. 먼저 석 잔 마시는 거로 경의를 표하오."
말을 마친 연무쌍이 연거푸 석 잔을 입에 부었다.
"연 대협의 명성은 산서까지 울리는데 이리 만나니 반갑소. 담진웅이라고 하오."
담진웅이 먼저 온 손님들을 대표하여 연무쌍에게 술을 권했다.
"선친께서 생전에 용행호보권을 몇 번이나 언급하셨는데, 이리 만나니 영광이오."
"권왕께서 담 모의 부족한 용행호보권을 어찌 평가하셨소?"
"보법으로 상대를 궁지에 모는 데 능하니 강한 타격법 하나만 있으면 여의권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고 하셨소."
"권왕의 견식이 놀랍구려."
담진웅이 삼십 년째 고민하는 문제를 일면식도 없는 연남산이 콕 집어 얘기했다고 생각하니 놀랄 도리밖에 없었다.
"와. 대사형 진짜 대단하지 않아?"
구후영이 내공이 안 쌓인다고 푸념할 때도 감탄하던 사제들이다. 지금은 금검당 당주가 직접 사과하러 오고, 담 표국주도 함부로 못 대하는 사람이 삼촌이라고 하니 당연히 감탄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한테서 들은 건데, 대사형이 신검 목숨도 구했대."
"신검? 그게 누군데?"
"천마랑 싸운 적 있는 고수라던데."
"근데 대사형 아니고 장문 사형이야. 호칭 틀리면 망신이니까 다들 정신 차리자."
- 작가의말
낙화문이 가난하고 약하고 비전 없다고 나간 불쌍한 제자들을 위해 잠시 묵념 및 애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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