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밀지검藏密之劍
높이 올라 아무리 둘러보아도
고향은 어디에도 없어
진한 그리움이 거둬지지 않누나.
"형님, 이만 돌아갑시다."
소실산 맞은편의 태실산太室山 꼭대기에서 소림을 멍하니 바라보는 원경에게 구후영이 말했다.
"그래."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원경은 여전히 눈에 내공을 집중한 채 소림에서 공유, 원호, 오득의 시신을 화장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그에 구후영도 더는 재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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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과 작별하고 온 둘을 또 다른 이별이 기다렸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구후영이 건넨 편지를 품에 소중히 간직한 최종필과 길잡이 형제가 홍엽산장을 향해 먼저 출발했다.
최종필은 장선의 제자가 될 생각에 한껏 신난 모습이었고, 길잡이 형제는 굳은 얼굴이었다.
길잡이 일을 하면서 자주 떠돌았지만, 나서 자란 항주를 영영 떠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울적한 듯했다.
"연 선생이란 자의 조사는 절대 무리하지 마시오."
원경이 말한 초 선생, 소림이 말한 한 선생, 길잡이 형제가 아는 하오문 총타주 연 선생이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연 선생은 하오문 총타를 처음 발기한 자로, 여러 지역 하오문의 공감을 끌어내 밑에 뒀다. 다른 건 몰라도 심계와 수완이 남다른 자다.
한 선생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의 코를 꿰고 질질 끌고 다녔다. 소림이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을 전혀 안 했던 건 절대 아닐 테니, 역시 만만치 않다는 판단이다.
초 선생은 원경과 대련해 이겼다. 생사를 두고 다툰 게 아니지만, 경지나 초식의 운용은 원경을 확실히 넘었다는 뜻으로,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이렇게 따로 봐도 하나하나 대단한데, 셋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경계되었다.
그에 옥무영이 나서서 연 선생을 어느 정도 아는 길잡이 형제를 설득해 홍엽산장으로 의탁게 했다.
"풍 대협을 만나게 해준다는 약속을 절대 잊지 마시오."
무당 제자들도 작별했다. 이들이 무당을 떠난다고 했던 말은 전혀 진심이 아니었다.
지금은 소림이 봉문을 선언한 덕분에 슬그머니 무당 제자의 신분으로 돌아가도 따질 사람이 없기에 여덟은 편한 마음으로 무당에 복귀하기로 했다.
이렇게 떠날 사람이 떠나고, 뜻밖의 손님들이 방문했다.
"손속에 사정을 두신 점 감사드리러 왔습니다."
먼저 찾아온 건 유수형이었다.
"사정이 여의찮아 손속이 과했소. 나도 사과하오."
"아닙니다. 이리 멀쩡하게 살려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유수형의 단전은 하루 만에 돌아왔다. 구후영이 침술을 응용해 기운으로 유수형의 단전 주변 혈도를 전부 점혈한 건데, 전에 없던 수법이 고명하기까지 해서 소림의 노승조차 속았던 거였다.
"그럼 우리 사이엔 아무런 원한이 없다고 생각해도 되겠소?"
"그럼요."
유수형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몇 번이나 더 굽신거리고 떠났다.
"이게 강호군요."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하게 떠나는 유수형의 뒷모습을 보며 구후영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다. 망신을 당한 사람이 먼저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다니."
강호 경험이 많고 무당 장문으로서 온갖 사람을 상대했던 옥무영조차도 지금은 헛웃음이 나왔다.
"원경 대협의 모친은 저희 정가장에서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찾아온 정가장 일행 때문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내가 등신으로 보이는가?"
화가 난 원경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에 정해원과 강 총관 모두 몸을 움츠렸지만, 그대로 물러나진 않았다.
"대협의 모친은 정가장에서 자랐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듯한데, 익숙한 환경에서 더 빨리 회복할 겁니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말에 원경이 구후영에게 눈길을 줬다.
"아가씨라도 있으면 모를까. 오히려 악화할 가능성이 크오. 제안은 고맙게 생각하나, 거절하겠소."
구후영의 단호한 거절에 강 총관이 나섰다.
"그럼 이거라도 받아주십시오."
강 총관이 내민 건 이백 냥짜리 전표였다. 미리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특별히 준비하진 않았을 테니, 정가장의 두꺼운 재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맙소. 마침 필요했는데."
원경이 거절하기 전에 옥무영이 나서서 전표를 잡아챘다.
"사정이 넉넉해지면 꼭 갚겠소."
"고맙습니다."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여 인사한 둘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떠났다.
"달란 적도 없는 돈을 바치고 오히려 고맙다며 인사하는 건 뭐지?"
원경이 허탈하게 웃었다.
"뭐겠어. 사람 사는 세상이지."
옥무영이 전표를 코에 대고 먹 냄새를 힘껏 들이켰다.
"왜 받은 겁니까? 돈이 궁한 것도 아닌데."
"안 받을 이유가 없잖아."
"네?"
옥무영이 답답하다는 듯 자기 가슴을 쾅 때렸다.
"안 받으면 저들은 우리가 정가장을 어찌 생각하는지 몰라 맨날 전전긍긍할 거 아니냐. 부처와 신선을 섬기는 사람이 그리 무자비해서야 되겠느냐? 정가장을 친구로 둬서 딱히 나쁜 것도 없고."
"돈을 받는 게 친구가 돼주는 거군요."
"그래. 넌 내가 괜히 뇌물을 받는 줄 알아? 안 받아주면 속에 걱정이 남아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마음 푹 놓고 일 제대로 하라고 내 청명을 더럽히면서까지 뇌물을 받아준 거지."
얼핏 얼토당토않게 들리나,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청렴하고 고고한 관리는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에서나 나오지, 현실에선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사람의 정도 옳은 말로 서로의 단점을 지적하며 싹트는 게 아니라 재물이나 술을 통해 이뤄진다.
구후영과 원경만 봐도 술로 맺어진 사이고, 구후영과 옥무영도 처음엔 돈으로 시작했다.
"너희가 서른이 지나도 지금과 같은 마음이라면 강호를 떠나 어디 조용한 데 은거해 사는 게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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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잔소리로 치부하지 말고 새겨듣거라. 그 강한 천마도 마교에 가선 손발이 묶이지 않았느냐. 강호가 그렇게 무서운 곳이다."
옥무영이 끓인 차가 깊은 향을 풍기며 길어진 잔소리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그러나.
"그나저나. 소림은 역근경과 세수경이 목적인데, 한 선생인가 하는 작자는 뭘 원했던 걸까?"
잘 끓인 차를 마시며 속이 편해지고 머리도 맑아진 둘에게 잔소리를 끝낸 옥무영이 더 골치 아픈 화제를 꺼냈다.
"이상한 일이 그것뿐이 아니잖습니까."
구후영의 말에 옥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대회를 왜 열었는지도 의문이고, 한 선생은 왜 굳이 소림의 코를 꿸 수 있는 역근경과 세수경을 쉽게 포기했지? 차라리 안 나서면 될 텐데, 굳이 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모험했을까?"
조용히 듣던 원경이 낮게 중얼거렸다.
"한 선생이 가져간 거라곤 동생의 검뿐인데."
그에 옥무영이 벌떡 일어섰다.
"사형, 갑자기 왜 그러는 겁니까?"
"사부가 예전에 그러셨어. 세상에 열 자루의 관은검이 있었는데 개중 특별한 하나가 있다고."
구후영은 관은고검이란 말에 반색하던 옥무영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천공교검에 뭔가 대단한 비밀이 있지 않을까? 천하제일의 검법이라든가 보물 지도라든가."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천공교검을 얻은 곳부터 범상치 않고.'
당시 목숨을 부지하는 게 최우선이었고, 일이 끝나곤 얻은 재물로 낙화문을 강하게 키울 기대에 깊이 생각지 않았는데.
천공교검은 그저 대단한 보검이 아니다.
광오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간단해도 너무 간단한 유일검법 때문에 '이천 년 전의 무공이 그러면 그렇지'라는 섣부른 생각으로 천공교검마저 가볍게 여겼었는데, 천공교검은 안문도의 명인이 전력을 다한 망치질도 부러뜨리지 못한 특별한 검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카롭고.'
날도 안 세운 천공교검인데 예기가 너무 강하다. 특이한 보라색으로 쇠가 특별해서 그런 거려니 추측했는데, 그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렇다는 건."
원경이 입을 열어 구후영의 끝 모르고 이어지는 생각을 끊었다.
"천공교검의 비밀이 역근경과 세수경보다 더 대단하단 뜻인데?"
"아쉽구나."
원경의 혼잣말을 들은 옥무영이 입맛을 다셨다.
"내가 사제랑 일찍 만났으면 비밀을 풀었을 텐데. 사부는 대단한 보물을 눈앞에 두고 왜 아무것도 안 했지?"
"풍 대협 정도면 태극혜검도 눈에 안 들어올 겁니다. 자신만의 길을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는 게 훨씬 기꺼운 일일 테니까요."
"나도 그걸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니고."
옥무영도 안타까운 마음에 툴툴댔을 뿐이다.
"근데, 사제는 괜찮은가? 그 귀한 보물을 잃었는데."
구후영이 담담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린놈이 벌써 해탈했구나."
그 모습에 옥무영이 감탄했다.
"그래. 욕심이 없는 건 좋아. 그러나 외면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다. 네 검에 어떤 비밀이 있고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여 옥무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말인데. 검을 찾으면 비밀은 나랑 같이 푸는 거다."
구후영과 원경이 못 참고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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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광증을 머리에 난 병이라고 하고, 누구는 마음의 병이라고 한다.
그러나 느리게나마 건강을 회복하는 취연을 보면 마음의 병일 가능성이 큰 듯했다.
"네 이름은 정재鄭齋로 하자."
취연은 어린 나이에 정가장에 팔려 가서 성을 모른다. 가장 친근한 사람이 아가씨기에 원경의 성을 정 씨로 했고, 재는 원경이 스님이었던 걸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괜찮겠습니까?"
원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경만 스님이었던 게 아니고, 원경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원호도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방장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아라. 이젠 오히려 고맙구나."
처음에 어려운 사람 대하듯 조심스럽던 취연의 말투가 등봉현을 떠난 그날부터 변했다.
"내가 미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런 못난 남자랑 살 바엔 과부로 사는 게 나았지."
정가장이 맺어준 남자나 백정이나 차라리 곁에 없는 게 나은 자들인 건 분명했다. 물론, 원호 때문에 취연이 이십여 년이란 긴 세월을 고통으로 보냈지만.
"내 아들 목숨도 구해줬고."
가장 중요한 건 원호가 십중팔구 죽을 원경의 목숨을 살렸다는 거다. 알고 한 건 아니지만, 그래서 더 용서할 수 있었다.
"부처께서 악인을 벌하고 거짓을 일삼은 내게 이런 훌륭한 아들로 보상했는데, 무슨 화가 남고 원망이 남겠니."
취연이 원경의 짧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자애롭게 웃었다.
'내가 성격은 어머니를 닮았구나.'
원경도 끝난 일에 미련을 갖고 두고두고 되새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난 버림받은 줄 알았지만, 사실 늘 함께 있었다.'
원경은 문득 깨닫는 바가 생겼다.
사고를 종종 친 바람에 원호의 설교를 자주 들었다. 번번이 공유가 감싸줘서 다들 포기했으나 원호만 설교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 살쯤에 술에 맛 들인 후부턴 며칠이 멀다고 객잔에 가서 술을 샀다. 절에서 법사를 할 때 소주素酒(중들도 마시는 도수 낮은 증류주)가 필요한 일이 종종 있기에 객잔은 의심 없이 팔았고, 그때마다 취연의 얼굴을 봤다.
'진짜 부처께서 굽어살피시는 건가?'
덕분이라고 할까. 원경은 환속해서 스님을 그만둔 지금 오히려 불심이 더 돈독해졌다.
- 작가의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다들 무탈하게 지내셨길 바랍니다.
최근 문피아 서버가 아픈 듯합니다. 접속이 끊기는 일이 허다하네요. 그래서 3부의 2파트를 한꺼번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등 근육 부상과 눈병으로 고생하며 연약해진 마음에 차마 접속 불안 스트레스까지 견디라고 강요할 순 없네요.
3파트는 10월 초에 한꺼번에 올릴 생각이고, 4부의 연재 방식은 상황을 봐가며 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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