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질서江湖秩序
황실과 관이 세운 법규에 저촉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강호다. 소위 명문정파는 안 그러는 것 같지만, 언제든 그럴 능력이 있고, 실제로 몰래 그러고 있다는 게 강호인들의 중평이다.
그럼 강호는 전혀 질서가 없는 곳인가?
대답은 '아니오'다. 강호 역시 강호 나름의 질서가 있다. 선비들이 책상머리에서 만든 질서 말고, 훨씬 야생에 가까운.
"기사멸조를 할 셈이냐?"
전중광이 검에 베인 오른팔을 꽉 잡아 지혈하며 이를 갈았다.
"네가 내 사조라도 돼?"
반정이 비아냥댔다.
"너와 내가 검종과 기종으로 유파가 다르다고 하지만, 난 네 사형이다."
"그래서 우릴 보자마자 다짜고짜 검을 날려 황 사제를 저 꼴로 만든 건가?"
황상엽은 전중광의 기습에 당해 어깨를 깊이 찔린 탓에 한쪽에 쓰러져 있었다. 반정 역시 얼굴에 난 상처에서 피가 간간이 흘렀다.
"난 그저 제압하려 했는데 네가 황 사제를 밀쳐서 저리 다친 게 아니냐."
"나 역시 널 제압하려 했는데 반항이 거칠어서 이리된 거다."
그때, 바닥을 뒹굴면서도 용케 안 꺼진 미약한 횃불의 권역에.
"웃기는군."
구후영이 불쑥 나타났다.
반정과 황상엽 모두 풍애협이 처음이다. 그 탓에 동굴 입구를 찾는 데 시간을 한참 썼고, 동굴에 들어온 다음에도 길을 꽤 헤맸다.
전중광은 장문검을 얻고 바로 동굴에 들어갔으나, 내상을 치료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바람에 여태 문이 있는 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덕분에 반나절 이상 늦게 출발한 구후영이 셋을 따라잡았다.
"구후 장문. 난 그대를 해칠 마음이 없었소."
전중광이 다급히 말했다.
"구후 장문께 가장 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날 텐데?"
반정은 구후영을 보자 손발이 떨렸다. 머리로는 자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자꾸 위축되었다.
"화산 검종 칠 대 제자 황상엽은 거짓으로 낙화문의 장문 구후영을 속였고, 목숨을 해할 목적으로 공격했다."
"사형!"
한쪽에 쓰러져 있던 황상엽이 다급히 반정에게 도움을 청했다. 반정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는 거로 황상엽의 애탄 눈길을 매몰차게 외면했다.
"이는 기사멸조의 죄에 해당하여 즉참의 형을 집행한다."
말을 마친 구후영이 뚜벅뚜벅 걸어서 황상엽에게 다가갔다. 황상엽이 연신 쿨럭이며 두 사형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를 기대했으나, 전중광도 반정도 그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쓱.
구후영이 무심한 듯 휘두른 천공교검에 황상엽의 머리가 잘려 데구루루 굴렀다. 전중광과 반정 모두 으스스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수련으로 절정의 경지에 이른 둘은 직접 사람을 죽인 적 없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몇 번 봤으나, 지금은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고 지내던 사람이 자신들의 방관으로 죽은 거여서 느낌이 달랐다.
"화산 기종의 제자."
"반정이오."
"그래. 화산 기종의 제자 반정은 황상엽이 중요한 서신을 찢고 독물을 막아주던 피독단을 가져가는 걸 방조 및 종용했지. 본 장문은 강호의 법도에 따라 생사결을 신청한다."
구후영은 잠깐 말을 멈추고 전중광에게 눈길을 줬다.
"화산 검종의 칠 대 제자 전중광은 이의가 있는가?"
"없소."
화산 기종과 낙화문은 남남이기에 기사멸조의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방금 황상엽을 처단하는 일은 화산 장문이 직접 와도 말릴 명분이 없으나, 구후영이 반정을 죽이려는 건 화산 제자라면 누구나 나서서 막을 수 있다.
구후영이 굳이 전중광에게 확인을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전 사형. 아무리 검종의 뿌리가 저쪽이라고 해도 여태 함께 한솥밥을 먹은 건 기종이 아닌가? 날 죽이고 전 사형을 살려준다는 보장도 없는데, 연수하는 건 어떻소?"
"난 어제 갓 절정의 경지에 들었다. 현재 내공이 없을 테니 나랑 네가 양패구상하면 전중광에겐 훨씬 좋은 일이 아닌가?"
구후영의 말에 전중광은 얼굴을 붉혔고 반정은 뭔가 해탈한 듯한 표정이었다.
"억울하군."
반정의 말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결에서 지면 반드시 죽고, 이겼다고 해도 전중광의 손에 죽을 테니 억울한 만도 하지."
"단지 그게 아니오. 솔직히 여기서 제일 심계를 덜 부리고 해악을 적게 끼친 사람이 난데, 전중광보다 먼저 죽는다니. 그게 제일 억울하오."
"내가 황상엽을 죽이면 화가 가라앉아서 자신을 살려주지 않을까 생각했지? 어쩌면 내가 자신과 손잡고 전중광을 처리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지? 그런데 어째. 내가 독에 쓰러졌어도 너희 대화는 다 들었는데."
시작은 부끄러움이었지만, 끝은 분노였다. 구후영의 지적에 반정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지고 눈도 붉게 충혈됐다.
구후영은 반정이 분노로 평정심을 잃은 듯 보이자 바로 접근해서 천공교검을 휘둘렀다.
그에 반정은 검에 내공을 잔뜩 실어 천공교검과 부딪쳤다. 내공이 없는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쓱 소리와 함께 반정의 청안검이 잘렸다.
보검 같은데 제가 써도 될까요?
이어지는 휘두름에 숨통이 잘려 쓰러지던 반정의 머릿속에 문득 황상엽이 했던 말이 떠오르며 심장이 멈춘 순간까지 눈을 감지 못했다.
"내 차롄가?"
반정을 죽인 구후영이 여전히 천공교검을 손에 잡고 있자 전중광이 쓰게 웃었다.
"억울한 건 없지?"
구후영의 질문에 전중광이 고개를 저었다.
"있지. 왜 없겠어. 너도 날 속였는데 나만 잘못한 것처럼 당당한 건 못 봐주겠는데."
"내가 뭘 속였지?"
"넌 골짜기에 내려가서 동굴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잖아."
'내 행동이 본심과 다르게 비칠 수도 있구나.'
피독단을 얻은 구후영은 여전히 낙화검법의 오의에 욕심이 없었다. 그저 피독단의 힘을 빌려 안전하게 풍애협을 벗어난 다음, 낭떠러지 위에 가서 밧줄을 내려 전중광을 구할 생각뿐이었다.
"내가 먼저 속인 거라고 비난하고 싶은가 본데, 너도 처음부터 날 속이려 했으니 선후를 따지는 게 의미 있나?"
"그래. 네가 잘못한 게 없다고 치자."
구후영은 괜한 말싸움으로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낙화문 장문 구후영이 화산 검종의 전중광에게 생사결을 신청한다."
"명분은?"
"강호에 힘보다 강한 명분이 있는가?"
말을 마친 구후영이 전중광을 향해 훌쩍 도약했다. 거의 동굴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이 뛴 구후영을 보며 전중광은 기절초풍했다.
'내공을 회복했어.'
그러나 놀란 건 놀란 거고. 전중광은 화산 검종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제자답게 바로 대응할 방법을 찾아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적절한 시기에 오골쟁쟁을 위로 펼치면 구후영의 천공교검이 닿기 전에 가슴을 찌를 수 있다. 물론, 구후영의 천공교검에 팔을 잘릴 위험은 감수해야 하겠지만.
그런데.
'어떻게!'
구후영이 팔을 공격할 것까지 대비하여 삼 할 정도 여유를 두고 펼친 오골쟁쟁은 허공을 찔렀다. 병아리를 낚아채는 매처럼 하강하던 구후영의 몸이 아주 잠깐 허공에 둥실 멈췄고, 그 탓에 청안검은 구후영의 가슴에서 칠 푼이나 되는 곳에 멈추고 말았다.
머리가 하얘진 전중광은 구후영의 이어진 휘두름에 자신의 검이 잘린 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었다.
"유언 같은 거 있는가?"
구후영의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전중광은, 그제야 천공교검이 자신의 가슴에 꽂힌 걸 알았다.
"구후 장문은 참 무서운 사람이군요."
구후영이 황상엽을 죽이고 반정을 죽일 때까지 누구도 연합하여 구후영과 싸울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게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구후영의 은연한 기세에 위축하여 셋 모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도 누구한테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과 강호가 그걸 허락지 않는구나. 넌 이미 심장이 찔려 살 가망이 없으니, 어서 유언이나 말해라."
"비급을 얻으면 화산 검종을 그만 놔주십시오."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전중광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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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 건가?'
심장에 꽂은 검을 뽑자 전중광은 즉사했다. 드디어 원하던 결과를 얻은 건데, 구후영은 마음이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괜히 우물쭈물하며 살려뒀다가 내가 곤경에 빠지는 것보단 낫다.'
확실한 이유가 있음에도 여전히 속이 갑갑했다.
'설마. 내가 여길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 때문인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아선지 갑갑하던 속이 한결 나아졌다.
'멍청이. 장문검을 얻은 화산 검종이 낙화문의 씨를 말리려고 했을걸.'
예전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짧은 이틀 기간에 강호의 깊고 어두운 곳을 살짝 들여다본 덕분에 구후영은 자신의 추측을 확신했다. 정당하지 않은 경로로 장문검을 얻은 화산 검종은 어떻게든 낙화문의 씨를 말려 구설에 오르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잘한 건 아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최선이지.'
구후영은 자기 합리화에 급급해하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려 애썼다. 현현자 덕분에 높은 경지로 갈 길이 열렸기에 예전보다 마음 수양에 훨씬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강호에 몸을 담근 이상 이런 일을 아예 피할 순 없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나 이보다 더한 상황이 온다면 난 어떻게 해야지?'
전중광의 품을 들춰 장문검을 회수했지만, 구후영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착하게만 살려면 정학 진인처럼 모든 연을 끊고 쇄악곡 같은 사람이 찾지 않는 곳에 숨어 살아야 한다. 그러나 난 낙화문이 있고 홍엽산장이 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뽑아 허공에 휘둘렀다. 난마와 같던 고민과 마음을 괴롭히던 갑갑함이 천공교검에 잘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호에 있으면 강호의 법도를 최대한 따른다."
천 년이 넘은 시간이 흐르며 강호에는 자체적인 법도와 질서가 생겼다.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황실과 관에서 법률을 만들어 반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호의 법도 역시 강호라는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즉, 강호의 법도를 따르면 누구도 구후영을 강호라는 세상에서 축출할 명분이 없다.
"끊임없이 강해져서 나는 물론 주변 사람들을 지킨다."
자신의 결정을 꼭 지키기 위해 구후영은 말로 뱉어냈다.
"위의 둘이 상충할 때, 난 후자를 택한다."
생각을 명확히 정리한 구후영은 한결 시원해진 마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군데군데 갈림길이 있었지만, 전중광에게 들은 게 있고 확실한 흔적도 있어 전혀 헷갈리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거대한 문 앞에 이르렀다.
'저기가 열쇠 구멍이구나.'
특이하게 열쇠 구멍이 매우 높은 곳에 있었다. 만약 황상엽과 전중광에게 열쇠 구멍이 있단 말을 듣지 못했다면 그저 동굴이 끝난 줄 알고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돌아갈까?'
구후영은 신중히 고민했다.
'사실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구후영의 목적은 셋을 죽이는 거였다. 아까까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으나, 구후영이 여길 온 이유는 셋을 처단하지 않으면 자신과 낙화문이 위험함을 은연중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대로 돌아가도 크게 아쉽진 않았다.
'아니다. 더 강해지기로 했으니 들어가는 게 맞는다.'
- 작가의말
구후영한테도 순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정이 짓밟혔습니다. 그땐 구후영이 곽철용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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