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승전서死僧傳書
최초로 병장기와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주병지신主兵之神(병장기를 지배하는 자)으로 불린 치우는 세력을 확장하려고 끊임없이 싸웠는데, 전투가 끝난 다음 주검을 부족까지 옮기는 게 늘 일이었다.
그에 치우의 군사 추鄒가 하나의 계책을 냈는데, 누군가가 치우처럼 꾸민 다음 부절符節을 들고 앞장서면 충성심 높은 주검들이 가짜 치우의 뒤를 따라 자기 발로 부족까지 돌아가는 것이었다.
덕분에 치우는 주검을 이끄는 수고를 덜어 더 많은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고, 결국 주변 팔십일 개 부족을 병합했다.
이때 추가 만든 부절로 주검을 자신이 태어난 곳까지 이끄는 이 방법은 간시赶屍라고 하여 호남의 서부 지역에서 여전히 전해지고 있다.
"무슨 일이냐?"
기다린 한 선생은 그림자도 안 보이고 대신 접객원의 오득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는 짓이냐!"
부르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들어오고, 사숙이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는 오득에게 접객화상이 호통쳤다.
그러나 오득은 귀머거리라도 된 듯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오득!"
화가 잔뜩 치민 접객화상이 꾹 눌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득은 뻣뻣한 걸음으로 스님들 앞에 가서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씩 놓았다.
"제길."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쳐 내용을 확인한 나한당 당주 원병이 서신을 와락 구겼고, 다른 스님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범어梵語라. 생각보다 대단한 분이셨군."
유일하게 범어로 적힌 서신을 받은 방장이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스님들 손에서 하나같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방장 역시 내용을 확인한 서신을 양 손바닥 사이에 끼워 내공으로 불태웠다.
그렇게 서신의 내용들이 종이와 함께 사라져가던 무렵.
쿵.
오득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넘어졌다.
"일단 오득을 살피지."
방장의 말에 접객화상이 서둘러 움직였다. 그러나 정작 오득의 맥을 짚은 다음엔 입을 꾹 다문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원정 사제. 무슨 상황인가?"
보다못한 원철이 질문했다. 그에 접객화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겨우 대답했다.
"죽었소. 죽었는데."
접객화상이 살짝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죽은 지 꽤 되었소. 손발은 물론 목도 차갑기 그지없소."
접객화상의 말에 방장을 포함한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혜가의 주해본을 소유한 자가 평범한 사람일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나, 주검을 움직이는 건 범상치 않은 것과 한참 거리가 있다.
"한 선생의 짓이겠지?"
방장의 중얼거림에 스님들은 몸에 소름이 쫙 돋았고, 한 선생의 담백한 말투와 사람 좋은 웃음이 떠오르며 욕지기가 치미는 사람도 있었다.
"경고인가?"
무당의 기염을 누르는 건 소림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그렇기에 무당에 망신 주라는 한 선생의 요구에 선뜻 응했다.
그러나 한 선생이 고분고분 주해본을 내놓을 거란 순진한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아 제자들을 보내 한 선생을 추적게 했는데, 아무래도 그에 대한 경고 같았다.
"제기랄 놈."
원병이 서신이 타고 남은 재를 밟아 부스러뜨리며 욕설을 뱉었다.
"방금 서신에서 무당은 그냥 놔두는 대신 사람 두 명을 처리하면 약속했던 주해본의 남은 부분을 넘기겠다고 했다."
분위기가 한없이 가라앉자 방장이 화제를 돌렸다.
"그게 누구요?"
원병의 질문에 방장은 원철에게 눈길을 줬다.
"한 명은 구후영인데, 원철 사제가 수고해야겠군."
제자의 죽음을 목격한 데 이어 무고한 자의 죽음을 언급하면서도 부처를 섬기는 스님들의 얼굴엔 한 톨의 거리낌도 없었다.
"남은 한 명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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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걱정이 있는 얼굴로 보입니다."
최종필이 난리를 피운 덕분에 소림과 무당이 싸우는 일은 물 건너갔다. 실제로 공유 스님이 수명이 다한 게 아니라 피살되었다고 쳐도 소림은 그 누명을 무당에 씌울 수 없게 됐다.
이미 구후영이 원철과 대등한 모습을 보인 마당에 소림 제일의 고수로 알려진 공유를 해친 게 무당이라고 우기면, 평판은 어떨지 몰라도 명성은 무당이 상승하고 소림이 하락한다.
그렇다고 모든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무림대회가 마음에 걸려."
"무림대회가 왜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구후영이 반문했다.
"이번 일은 이상한 데가 한둘이 아니다. 공유 스님의 죽음을 덮지 않은 게 첫째고, 황제를 치료한 널 무리하게 소림까지 데려다가 연금한 것이 둘째고, 무림대회를 연 것이 셋째다."
옥무영의 말에 구후영도 자신이 놓친 부분들을 깨달았다.
'공유대사가 피살되었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는 건 소림의 명성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당의 기염을 누르려고 공유가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건 닭과 달걀을 맞바꾸는 어리석은 짓거리다.
'달리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인데.'
공유가 누군가의 손에 죽었다고 세상에 공표해서라도 꼭 이뤄야 하는 뭔가가 있다면, 소림이 이대로 그만두지 않을 게 분명하다.
"소림은 처음부터 무당에 죄명을 뒤집어씌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네 검을 핑계로 추궁해서 무당과 흉수가 모종의 연계가 있는 것처럼 몰아가려는 거겠지. 비록 공유 스님이 피살된 게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긴 했으나, 네 검은 여전히 이번 일을 해결할 단서다. 그러니 정도가 약해졌을 뿐, 소림의 추궁은 끝나지 않았다."
구후영은 자신의 검이 소림 스님의 가슴에 꽂힌 게 절대 우연이 아니고, 길잡이 형제가 검의 행방을 발견했다고 알린 것도 의도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동창과 서창 혹은 미지의 배후가 떠올랐고, 그 목적이 소림과 무당을 충돌케 하여 강호에 큰 분란을 일으키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나서서 두 거대 문파의 충돌을 적극적으로 막은 건데.
'여전히 시야가 좁구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거지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닌데 방심하다니.'
옥무영의 말로 위험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음을 깨달은 구후영은 몸에 잔류한 원철의 내공을 배출하는 데 힘썼다.
덕분에.
"아까 중단한 대결을 속개하겠소."
원철이 나타나서 대결을 이어가자고 했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렇게 민심을 잃어가면서까지 소림이 이루려는 게 도대체 뭘까?'
옥무영은 무림첩을 받고 온 문파들이 놀라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치 태극혜검을 얻었을 때 현영자가 정신이 반쯤 나갔던 모습과 같은데. 공유 스님도 뭔가 비급을 남기고 돌아가신 건가?'
공유가 죽기 전에 태극혜검처럼 대단한 비급을 남겼는데 어떤 자가 나타나서 공유의 가슴에 검을 꽂은 다음 해당 비급을 가져갔고, 비급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현재 사달을 일으켰다는 추론을 옥무영이 강하게 떠올리고 있을 때.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소."
구후영이 활활 타는 장작더미에 기름을 끼얹었다.
"나도 최선을 다할 거요."
원철 역시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에 연무장 분위기가 한여름에 화로를 지핀 방처럼 후끈 달아올랐다.
"시작하겠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후영이 검을 들어 원철을 찔렀다.
'뭐지?'
빠르지도 않고 강한 힘이 실린 것도 아닌 평범한 찌르기에 원철은 매우 궁금했으나, 깊이 생각지 않고 양손을 교차해 전대모검을 사이에 끼웠다.
이는 소림의 원앙퇴鴛鴦腿의 초식 중 하나인 동자삭두童子削頭로, 원래는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동작을 흉내 낸 퇴법腿法(다리 무공)인데 원철은 손으로 펼쳤다.
"하!"
원철이 전대모검을 사이에 끼우고 발경하려는 순간, 구후영이 기합을 외치며 검에 힘을 실었다.
그에 느리고 평범하던 찌르기가 세상의 모든 방패를 뚫을 듯한 날카롭고 예리한 척격刺擊으로 탈바꿈했다.
'어!'
검이 얼굴에 닿기 전에 부러뜨리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원철은 전대모검이 아예 휘지도 않자 다급한 마음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덕분에 구후영의 찌르기에 얼굴이 뚫리는 위기는 넘겼으나.
상대가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유추공油鰍功!"
바닥에 주저앉은 원철은 소탕퇴掃蕩腿로 구후영의 접근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구후영이 양패구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이 내디딘 오른발을 그대로 둔 채 아까 허공에서 보여준 어마어마한 내려치기를 펼쳤다.
그에 원철은 어깨와 허리와 다리를 빠르게 꿈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이 마치 기름을 발라 절대 잡히지 않는 미꾸라지와 같아, 누군가가 외친 유추공이란 이름이 딱 어울렸다.
하지만.
'속았다.'
구후영이 펼친 건 내려치기가 아니었다.
풍불지가 가르친 요결과 도결은 둘 다 올려치기인데, 하나는 올려 베는 거고 하나는 상대의 병장기를 드는 거다.
구후영은 아래서 위로 드는 도결을 응용하여 위에서 아래로 누른 거였다.
당연히 원철이 뒤로 피했을 때 구후영의 검도 멈췄고, 원철이 뭔가를 시도하기도 전에 구후영이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화낙동로.
구후영이 펼친 건 피하면 따라가고 막으면 뚫는 낙화검법의 찌르기 초식이었다.
그에 화산파 제자들이 작게 경탄을 질렀다.
매화검법의 일지한매와 아주 비슷한 초식인데, 수준은 최소 몇 단계 높아 보여 저도 모르게 감탄한 거였다.
'기회다.'
원철은 여전히 바닥에 앉은 자세로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와 중지를 한데 모아 학 부리처럼 만들었다.
그러곤 학 부리로 구후영의 검 끝을 톡 찍었다.
소림 칠십이절기의 하나인 무상겁지無相劫指였다. 일지선과 마찬가지로 초식이 없는 무공인데, 손을 단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익혀둔 걸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런데.
'함정이다.'
구후영의 검이 너무 쉽게 밀려났다. 뭔가 잘못됐는데 그게 뭔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 원철은 무리하게 지곤룡地滾龍의 수법을 펼쳐 옆으로 일 장 거리를 움직였다.
'흐름이 끊겼다.'
구후영은 상대가 바닥을 구를 줄 몰랐던 탓에 원철이 공격권을 벗어나는 걸 미처 막지 못했다.
'그렇다면.'
구후영은 어렵게 잡은 우위를 버리고 가벼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옥무영이 속으로 감탄했다.
'음성양쇠, 양성음쇠의 이치를 잊지 않았구나.'
엉덩방아를 찧고 바닥을 쓸고 구르기까지 한 원철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기세가 폭발했다. 구후영은 그런 원철에게 맞서는 대신 주동적으로 물러서는 거로 자신의 기세를 줄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전대모검을 등의 검집에 수납한 후, 맨손으로 원철을 상대하려 했다.
'원철도 괜히 소림을 대표하는 고수인 건 아니구나.'
구후영이 뒤로 물러나고 검까지 거뒀는데도 원철은 무리하게 공세로 전환하는 대신 제자리에서 마음을 다스렸다.
"무당보다는 화산의 검법 같은데?"
마음을 진정한 원철이 입을 열어 대화했다.
"낙화검법이오. 화산 검종과는 연원이 조금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남남이오."
구후영의 대답에 화산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래도 낙화문과 화산의 관계를 모르는 제자가 대부분이다 보니 구후영의 발언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잠깐.'
대결의 시작과 동시에 멈췄던 옥무영의 머리가 다시 돌아갔다.
'아무리 화산과 소림이 사이가 좋다고 해도, 무림대회에 저리 많은 제자가 참석했다고?'
뭔가 단서를 잡은 것 같다는 생각에 옥무영은 대결에서 완전히 눈을 떼고 무림대회에 참석한 문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사승전서 - 죽은 스님이 편지를 전하다.
호남 서부는 궁벽한 산간 지역으로, 농사도 사냥도 여의찮아 대부분이 타지에서 일합니다.
한번은 중경인가 하는 곳에 홍수가 일며 한꺼번에 호서 사람 수백 명이 죽었습니다. 중국인은 죽은 다음 온전한 시체로 고향에 묻히는 걸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덕분에 시체를 옮기는 특별한 직업이 생겼는데, 바로 간시인입니다. 이들은 수백 명의 시체를 광주리에 담아서 고향까지 옮겨줬습니다.
홍콩 귀신 영화에서 얼굴을 하얗게 칠한 시체들이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양손을 앞으로 뻗은 채 점프하면서 이동하는 거, 바로 여기서 유래한 겁니다.
그리고 스포 하나 하겠습니다. 아마 글의 흐름상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텐데, 스포하는 제가 막 두근거리네요.
다음 화에 여래신장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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