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허밀공幻虛密功
역근경과 세수경의 달마. 태극권의 장삼풍.
그러나 왕중양이 뭘 남겼는지는 강호는커녕 전진교 사람들한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나마 구후영은 왕중양이 남긴 선천기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절실하게 체감한 덕분에 왕중양이 달마와 장삼풍과 함께 대종사로 불리는 데 이견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중원을 한참 벗어난 북녘의 땅에서 왕중양이 남긴 또 하나의 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
어렵게 생긴 빈틈을 잡아 전력을 다한 팽창회의 공격이 실패하자 풍불지 등이 못 참고 감탄을 뱉었다. 방금의 참격은 사대신협의 남은 셋으로서도 저리 가볍게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절대 아니었다.
"하하!"
허둥지둥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팽창회를 바라보며 위종이 즐겁게 웃었다.
"왕중양의 환허밀공이다. 사실 나도 이걸 익힐지 말지 꽤 고민했었는데 실로 제대로 된 선택이었구나."
물론, 환허밀공이라고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만약 풍불지나 구후영이었으면 방금 공격을 피하고 반격까지 했을 것이다.
환허밀공은 그저 피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줄 수 있소?"
옥무영이 수정벽 너머의 팽창회를 향해 외쳤다.
폐관 중이라고 도움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던 팽창회가 언제 그리고 왜 여기에 온 걸까? 모든 게 막막한 일행한테 팽창회는 천창天窓을 열어 방 안을 밝혀줄 유일한 존재였다.
"설명은 천천히 할 테니, 날 도와 저놈의 무공에 무슨 약점이 있는지 찾아내!"
환허밀공.
왕중양이 만들었으나 강호에 단 한 번도 선보인 적 없는 이 무공은 신공이란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같은 무공을 익혀도 자질에 따라 강약이 선명하다. 그래서 무공보다는 익히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있다.
대표적으로 소림의 무공이 그렇다. 더 대단한 무공을 익힌 자가 꼭 그렇지 않은 자보다 강하진 않다. 낮은 수준의 무공을 더 큰 위력으로 익히는 일이 비일비재다.
환허밀공은 아니었다.
선천기공이 입문이 어려우나 후속 수련은 단순한 것처럼, 환허밀공 역시 입문이 어렵다. 그러나 입문만 하면 자질이 평범해도 대단한 고수가 된다.
단순하고 지루한 수련을 꾸준히 버텨낼 수만 있다면.
기회를 엿보던 팽창회가 다시 위종을 덮쳤다. 위종의 몸이 높은 곳에서 던진 수건처럼 펄럭이며 팽창회의 공격을 완벽히 피했다.
그러나 아까와 똑같이 팽창회가 원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펄럭이기만 하면서 반격은 꿈꾸지도 못했다.
"협공하면 될 듯한데."
확실한 건 아니지만, 팽창회의 공격을 회피한 건 위종의 의지가 아닌 듯했다. 상대의 공격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다음 몸이 알아서 피하는 방식 같았다.
이럴 땐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을 펼쳐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 세 명이 협력해야 한다.
"아니면 긴 무기를 사용하거나."
옥무영의 말을 악불형이 받았다. 그에 구후영은 고개를 돌려 팽창회의 무기를 자세히 살폈다.
'호두도虎頭刀?'
일반적인 칼보다 일 척 길고 두 배로 넓은 칼인데, 칼끝과 가까운 곳의 칼등에 범 머리를 연상케 하는 도두刀頭를 씌웠다.
이는 강한 힘만 추구하는 삼류나 이류 무인들이 쓸 법한 무기로, 사대신협의 일원인 팽창회가 쓰기 적합한 칼은 아니다.
그러나 방금 확인한 두 번의 공격으로 구후영은 팽창회가 왜 호두도를 쓰는지 알 것도 같았다.
'오호단문도에 매우 적합한 무기겠지.'
오호단문도는 범이 먹이를 덮치는 동작에서 나온 무공이다. 이 도법엔 총 육십사 개 초식이 있는데, 이를 줄이고 줄여서 다섯 개로 만들면 대성한 거로 친다.
범은 참을성이 강한 맹수로 수풀에 가만히 숨어 사냥감을 기다리거나 아주 느리고 은밀하게 사냥감한테 다가간다.
그러다 사냥 거리가 되면 단숨에 사냥감을 덮치는데, 사냥감이 피할 것을 생각해서 여력을 남기거나 하는 거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한다.
오호단문도 역시 그랬다. 상대가 피할 것을 생각해 후초를 남기거나 하는 거 없이 단순하고 강하고 빠른 일격으로 끝장을 보려 한다.
그렇기에 호두도처럼 칼끝이 무거운 무기가 제격이었다.
문제는 호두도가 일반적인 칼보다 길긴 하나 창만큼은 아니었고, 공격 방식 역시 근접해서 강한 일격을 날리는 게 다였다.
환허밀공을 혼자서 파하려면 강한 공격을 연속적으로 펼치거나 창 같은 장병기로 넓은 범위를 동시에 공격해야 한다.
아니면 환허밀공을 속일 정도로 변화가 급격한 공격을 펼치거나.
문제는 빠르거나 변화가 급격한 초식엔 보통 강한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때 위종의 손이 또 한 번 번뜩였고, 하나의 '시체'가 가루 되었다.
#
위종은 약 일각을 간격으로 귀검을 뿌려 '시체'를 하얀 가루로 만들었다.
팽창회는 틈이 보일 때마다 필살의 일격을 가했고, 늘 아무런 성과도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문을 열어."
내내 조용하던 풍불지가 갑자기 외쳤다.
그에 일행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건물이 주는 압박감이 아니다.'
문을 열어 일행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행 모두 환허밀공의 허점을 찾아달라는 팽창회의 말에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연이 못 느낄 정도로 은밀한 진법이거나, 파악이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진법이거나.'
"위종이라는 자의 몸에 진법이 있는 게 아닐까요?"
갑자기 울린 귀연의 목소리가 구후영을 상념에서 깨웠다.
"몸에 진법이 있다고?"
"우리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저자가 사라진 다음이에요. 그리고 여기 와서 다시 멍청해졌죠. 저 아저씨도 그래서 멍청해졌을 거예요."
"아니야!"
멍청해졌다는 말에 팽창회가 발끈했다.
"내 뒤에 둘이 천강구절하고 팽가의 조상님이야. 그래서 못 움직이는 거야."
'팽가의 조상이 소생자였다고?'
문득 의심이 들었으나, 이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세가는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모용가의 조상은 나라를 세운 적이 있고, 우문가 역시 마찬가지다.
당나라 초기에 황제인 이세민과 힘겨루기를 할 정도로 대단했던 공손가 역시 그 역사가 천 년도 훨씬 전으로 뻗어간다.
홍엽산장이 강호와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은 것 역시 양양이 점령당할 때의 의거에서 시작해 대대로 선행을 거듭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팽가는 아무런 조짐도 없이 불쑥 나타나 강호에 명성을 떨쳤고, 초대 가주가 장군이 되면서 군부에 단단한 인맥을 만들었다.
'소생자라면 손견 이후로 사라졌던 오호단문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도 이해가 가지.'
오호단문도는 진나라 시절 군부에서 장수들이 사용하는 초식을 모아서 규격화하려던 것에서 비롯됐다.
당시엔 내공 없이 그저 근력으로 무기를 휘둘러야 했기에 모든 장수는 근력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무거운 걸 원했다. 당연히 초식 역시 속임수보단 뻔히 보이나 강한 일격 위주였고.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무기가 점점 날카로워져 갑옷을 베거나 뚫을 수 있게 되면서 강하기보단 적절한 속임수를 곁들여 상대를 확실히 가격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 탓에 오호단문도는 손견이 사용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들고 움직이면 되잖아."
'멍청함'에서 벗어난 풍불지가 외쳤다.
"누굴 버려?"
팽창회가 짜증이 섞인 말투로 되물었다.
"조상님은 오호단문도의 초식을 정확히 알고, 천강구절은 오호단문도에 꼭 적합한 심법을 준다고 했단 말이야."
'조상님이라서 지키는 게 아니었어?'
구후영을 비롯한 몇몇이 잠깐 황당함을 느끼긴 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소생자는 기억을 공유한다고 했어. 천강구절을 들고 문을 열어."
악불형이 외쳤다.
"안돼!"
잠깐 갈등하던 팽창회가 확고한 얼굴로 외쳤다.
"조상님을 이대로 죽게 할 순 없어."
"이미 죽었잖아."
"아냐. 깰 수 있어. 천강구절이 그랬어."
팽창회의 말에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언제? 언제 말했는데?"
"십여 년 전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팽창회가 갑자기 화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저놈의 무공에 무슨 약점이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니까."
"쯧."
위종의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귀검 하나가 날아서 몇 남지 않은 '시체' 중 하나를 가루로 만들었다.
"멍청한 놈. 방금 들었잖아. 소생자는 기억을 공유한다고. 천강구절을 버리면 될 거 아니야. 천강구절이 만들었다는 심법을 네 조상도 안다는 뜻이니까."
팽창회의 얼굴에서 지렁이 몇 마리가 꿈틀거렸다.
그때.
"초 형을 버리면 안 돼."
악불형이 충고했다.
"기억을 내리 공유한다는 건 어느 정도 확인했다. 그런데 먼저 깬 자가 후에 깬 자의 기억을 공유하는지는 확실치 않아."
#
고요한 가운데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안엔 이미 천강구절과 팽가 조상을 뺀 모든 '시체'가 가루로 변했다.
부스럭.
몰래 건량을 꺼내던 귀연이 자신이 낸 기척에 놀라 굳어버린 채 눈치를 살폈다.
"당신은 언제 여기에 왔지?"
위종이 물주머니를 꺼내 목을 축인 다음 질문했다.
"몰라."
팽창회가 혀로 말라 터진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여기였어. 그러다 갑자기 밝아졌고, 덕분에 천강구절이 남긴 서신을 읽었지."
"서신?"
"다 읽으니까 가루가 되어 사라지더라고. 자기 몸을 지키면 곧 깨서 십여 년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더군."
악불형의 일점공격술은 천마가 알려준 거다. 비록 천마가 자신의 힘에 비례하는 경지를 이루진 못했지만, 악불형의 일점공격술을 견식한 팽창회로선 천마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건 나도 줄 수 있는데."
위종의 말에 팽창회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사이엔 믿음이 없어."
"먼저 주면?"
위종의 말에 팽창회가 흔들렸다.
"심법을 먼저 말해주지. 듣고 괜찮다고 생각되면 천강구절을 넘겨."
"속지 마. 꿍꿍이가 한둘이 아닌 놈이야."
홍기영이 힘 있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니면 먼저 초식을 알려줄까?"
위종이 팽창회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빈손으로 오호단문도의 초식을 펼쳤다.
"진짜인 거 같은데?"
사대신협이 서로 면목을 익혔을 즈음, 팽창회는 이미 오호단문도를 스무 초식으로 줄였다. 그렇기에 남은 셋도 오호단문도의 본래 초식들이 어떤 건지 모른다.
하지만 점점 동그래지는 팽창회의 눈만 봐도 위종이 펼친 초식이 대충 흉내 낸 게 아님을 유추할 수 있었다.
슉!
챙!
오호단문도의 초식을 펼치던 위종의 손에서 귀검이 날아갔고, 그걸 호두도가 쳐냈다.
위종은 경공을 펼쳐 튕겨 난 귀검을 도로 소매에 감춘 다음 탄식했다.
"아쉽게도 다섯 개 초식을 정확히 몰라. 그것만 아니었으면 진짜 거래해도 되는데."
그때.
"누가 또 온다."
풍불지가 이마를 찌푸리며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구후영 역시 접근하는 기척을 느꼈다.
"왜?"
갑자기 굳은 구후영의 얼굴에 사람들이 다그쳐 물었다.
"지금 오는 자, 제가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누군데?"
구후영이 불신이 역력한 얼굴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규찰대주. 혈포규찰대 대주의 기척과 흡사합니다."
- 작가의말
환허밀공은 자동회피용 패시브 스킬입니다. 요즘 말로는 자율주행이라고 하죠.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