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연합武林聯合
범이나 곰은 아니지만, 대부분 맹수는 무리를 짓는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맹수 하면 쉽게 늑대나 들개를 떠올릴 수 있다. 범이나 곰처럼 강한 힘과 날카로운 이빨이 없기에 여럿이 힘을 합쳐 사냥감을 이리저리 몰다가 지친 다음 잡아먹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풀 뜯는 짐승도 무리를 지은 경우가 많다. 이들은 맹수가 덮치면 도망가는데, 체력이 약하거나 느린 놈이 잡아먹힌다. 그러면 당분간 남은 짐승은 안전하다.
인간 역시 사냥하거나 사냥 안 당하려고 무리를 짓는다.
"얘기 들은 사람도 있고 못 들은 사람도 있겠지. 저기 매우 깊숙한 곳에서 움직임이 있소."
중원에서 가장 깊은 곳은 궁궐이다.
"동입니까 서입니까?"
"서로 추측하오."
원래는 금의위가 가장 강했다. 약 만사천 명으로 구성된 금의위는 황제의 직속 기관으로 황제만 빼고 누구든 수사할 권한이 있다.
당연히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에 이르렀고, 이를 견제코자 동창을 만들어 우두머리를 환관에게 맡기고 실무는 금의위에서 차출해 썼다.
그런데 동창의 권위가 또 하늘을 찌르게 되어 이를 견제코자 서창을 만들었는데, 서창은 하는 짓이 동창보다 몇 배는 악랄하여 순식간에 동창을 압도했다.
현재 서창의 우두머리는 다름 아닌 환관 유근이다. 자신을 내치라고 주상한 유건을 내각대학사 자리에서 내쫓을 정도로 위세가 강하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이 꼭 어울리는 자다.
"담 대협은 무슨 고견이 있습니까?"
"이렇게 우연히 모인 김에 산서연합을 만들어야지 않을까 생각하오. 칼바람이 세게 불 텐데 모여서 온기를 나눠야지 않겠소?"
담진웅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연합이요? 호북의 철혈방이 어떤 꼴이 났는지 보지 않았습니까? 이익 관계로 모인 자들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려를 표명하는 사람이 없진 않았다.
"우리 표국 연합은 산서뿐이 아니라 하북과 섬서의 표국도 포함하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잘 굴러갔지 않소? 비록 여기 모인 사람들 사이에 이익 관계가 별로 없다고 하나, 목숨 걸린 일인데 연합하지 못할 게 뭐 있소?"
"목숨 걸린 일이요?"
담진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철혈방이 최근에 큰 홍역을 앓았다고 하더군. 더구나 조정에서 무당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거로 철혈방을 쭉 견제해 왔으니 굳이 그쪽으로 손을 쓰지 않을 거요."
담진웅의 말에 대부분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섬서 역시 마찬가지요. 원 황실에 부역한 종남파를 견제하려고 조정은 화산을 쭉 지원했소. 게다가 종남파는 철혈방보다 훨씬 단단하니 건드리기 부담이 될 거요."
전진교는 원나라 황실에 부역하는 바람에 욕을 많이 먹었다. 원이 명으로 바뀌면서 전진교와 선을 긋고 종남파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지만, 뿌리가 전진교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히 황실의 미움을 샀음에도 마교라는 큰 위협이 버틴 덕분에 철혈방과 종남파는 직접적인 탄압을 받진 않았다. 그러나 무당과 화산의 빠른 성장으로 느리게나마 하락세를 걷고 있다.
하지만, 서창이 건드리기엔 여전히 부담이 크니 아무래도 두 문파를 향해 직접 칼을 휘두를 확률은 희박하다.
"절강과 강소는 딱히 칼 댈 곳이 없군요."
절강엔 큰 문파가 없다. 이쪽은 여전히 혈연 위주로 뭉치기에 큰 문파가 형성되기 어려운 환경이다.
강소는 주원장이 장사성을 지지하던 문파를 깨끗이 청소하여 강호 문파는 별로 없고 흑도 방파만 가득한데, 흑도 방파를 어떻게 한다고 서창이 공적이랍시고 떠벌리기 어렵다.
"하북과 산동의 무림은 관과 가깝게 지냅니다."
하북은 지금도 가을마다 북원 기병들이 약탈하러 오고, 친척과 지인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일이 많다.
그렇기에 무인이 군에 투신하는 일이 잦다. 더구나 하북 팽가에는 신도 팽창회가 있어 아무리 서창이라도 하북을 건드리긴 좀 그렇다.
산동은 대대로 무장이 많이 나는 곳이고, 거의 모든 문파가 군과 연관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창이 동창을 압도할 정도로 대단한 조직은 맞는데, 군을 건드릴 만큼 간이 크진 않다.
"그럼 산서밖에 없는 거네요?"
안휘는 주원장이 발족한 곳이다. 그렇기에 웬만해선 안 건드린다.
"하남이 있잖소."
담진웅이 말했다.
"거긴 소림이 있어서 건드리기 부담될 텐데요?"
"그럼 우리가 당할까?"
더 먼 곳은 건드리기 귀찮다. 가까운 곳 중에 하나를 적당히 건드려서 실적으로 삼고 싶은데,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이 산서와 하남이다.
그런데 하남에 있는 소림사가 산서엔 없다. 산서 무림이 하나로 힘을 모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연합한다고 달라질까요?"
솔직히 산서 무림의 무인이 다 모여도 소림사를 못 이긴다. 나한당만 해도 절정에 이른 고수가 서른이 넘는 곳이 바로 소림사다. 원로들만 든다는 달마원엔 또 어떤 고수가 얼마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왕가장을 끌어들여야지. 유건이 대학사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지지자는 꽤 많다고 들었소."
오늘은 구후영이 정식으로 장문인이 되는 날이다. 그렇기에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안에서 대기하며 바깥 동정에 귀를 기울였는데, 담진웅의 말을 듣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홍엽산장도 저래서 홍역을 치렀지.'
홍엽산장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홍엽산장을 이용했다. 표면적으론 홍엽산장을 받들어 모시는 듯하지만, 그건 단순한 자들이나 그런 거고 수뇌부는 홍엽산장을 쓸모있는 도구로만 생각해 왔다.
지금은 산서 무림의 문파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왕가장을 똑같이 이용하려고 한다.
'강호에서 힘이 없으면 먹히거나 이용당할 뿐이구나.'
담진웅의 말처럼 되면 유근도 산서를 건드리기 조심스럽다. 이미 삭관탈직한 유건인데 양자의 본가까지 건드리면 사람들이 분노한다. 중노여수화衆怒如水火(다수의 분노는 홍수나 들불처럼 빠르고 강하다)라고, 선을 너무 넘으면 뿌리 없는 권력은 순식간에 뒤집힌다.
"그런데 소림사도 조정에 줄이 적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연합을 이뤄야 하는 거 아니오. 이대로도 다 죽는 건 아니지만, 뭉치면 아무도 안 죽을 수 있소."
그에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그렇군요. 하남이야 소림사만 빼고 건드려도 되지만, 우리가 하나로 뭉치면 아무도 못 건드리겠군요. 용호표국이면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산서의 무림 동도를 위해 나서주시다니. 감격스럽습니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안에서 듣던 구후영이 생각했다.
'어쩌면 담 표국주가 말한 것보다 상황이 훨씬 엄중할 수 있다.'
조정이 그간 마교의 잔당이란 명목을 뒤집어씌워 강호의 문파를 처리한 게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규모의 연합이 생긴 적은 없다.
'아니면 다른 숨은 사정이 있든지.'
사건이 터지고 이유를 살피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일이 어떻게 흐를지 미리 판단하는 건 쉽지 않았다. 골머리를 앓던 구후영은 문득 배월교주가 생각났다.
'단 소저라면 무슨 연유인지 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그럼 오늘 여기서 산서 무림 연합을 결성하는 겁니까?"
설사 서창이 실적을 쌓으려고 뭔가를 하려는 게 사실이 아니라고 쳐도 연합을 맺는 건 대부분 문파에 좋은 일이다. 이 자리에 없는 경쟁자를 압도할 힘과 명분이 생기는 거고, 그럴 마음이 아니더라도 산서에서 용호표국의 후광을 입는 건 좋은 일이다.
"어허. 이 경우 없는 사람 봤나. 여기 주인은 낙화문일세. 허락을 구해도 내가 아닌 임 장문한테 구해야지."
"제가 실언했군요. 임 장문, 오늘 여기서 산서 무림 연합을 결성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시오?"
임초현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구후영의 당부를 잊지 않고 시종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이들의 대화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애써 유지하던 미소가 결국 허물어졌다.
'내가 아무리 강호에 무명이어도 절정에 이른 고순데. 일류들이 나를 아래로 보는구나.'
임초현의 사부는 낙화문을 강하게 키우는 게 평생소원이었고, 임초현도 마찬가지다. 그 탓에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기보단 돈을 벌고 자질이 훌륭한 아이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절정에 이르고도 변변한 별호 하나 얻지 못했다.
"무림 연합을 결성하든 말든 알아서 하시지 내 의견이 왜 궁금한 거요?"
임초현이 꾹꾹 누르던 화를 여감 없이 담아 말했다. 상상보다 강한 기세에 질문했던 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오늘은 내가 제자한테 낙화문 장문 자리를 물려주는 날이오. 그런데 손님들이 자기 안마당처럼 이리 주인 행세를 하니, 강호 동도들이 산서 무림이 경우가 없다고 비웃을까 두렵소."
말을 할수록 억울한 마음이 커지며 임초현의 기세도 점점 강해졌다.
그저 운 좋게 큰돈을 만진 작은 문파인 줄 알고 경시하던 자들이 감당하기 힘든 임초현의 기세에 조금씩 위축됐다.
"하하. 임 장문이 오해했군."
담진웅도 생각 이상으로 강한 임초현의 기세에 살짝 놀랐다.
구후영은 검술 재능이 대단하다. 기본기 수련도 없이 바로 초식을 가르치는 낙화문에서 높은 경지를 이룰 정도다. 구후영과 비교하면 조금 부족해 보일지도 모르나, 임초현 역시 범상한 자는 아니다. 비록 임초현이 구후영보다 스무 살 넘게 많고 수련 기간도 삼십 년 가까이 된다고 하지만, 어쨌든 구후영보다 높은 경지로 낙화검법을 익혀냈다.
경지도 절정에 이른 지 십 년이 넘고, 흠이었던 적은 내공도 자양단으로 해결했다.
받들어 모실 정도는 아니나 이리 무시당할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까 백 명이 넘은 초청도 받지 않은 분들이 정말 우연히도 같은 날에 일면부지의 낙화문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방문한 거군."
그제야 담진웅의 부름을 받고 낙화문에 온 자들도 자신들이 이용당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래서 임 장문은 축객령이라도 내릴 작정이시오?"
여긴 힘이 우선인 강호다.
세상 어딜 가서 따져도 누구나 임초현의 편을 들어주겠지만, 거만한 불청객들은 여전히 당당했다.
"본 장문이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어찌 장문 승계식을 축하하러 온 분들을 이대로 내치겠소? 마침 길시吉時가 됐으니 승계식을 진행하겠소."
임초현의 대처를 지켜보던 담진웅이 속으로 한탄했다.
'소문이 와전됐구나. 잘 품어 곁에 둬야 할 자인데, 내가 경솔했다.'
화가 많고 억지가 심하며 독단적이라던 호비 등의 평가는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참을성이 강하고 역경에 굴하지 않으며, 몇 마디 말로 불리하던 상황을 역전해버리는 기지도 있었다.
"낙화문 칠십 대 장문인 임초현이 대제자에게 장문인 자리를 넘기는 절차를 시작하겠소."
사실 임초현은 자신이 몇 대 장문인지도 모른다. 그저 비급으로 문파가 천칠백 년 정도는 됐다고 추측했고, 대충 칠십 대 정도가 아닐까 평소 생각했던 걸 입으로 뱉은 것이다.
"헉!"
임초현의 말에 대놓고 킥킥거리던 자들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문을 열고 나타난 구후영이 태산보다 무겁고 바다보다 깊은 기세를 숨김없이 쏟아냈다.
- 작가의말
어른이 이렇게 유치할 수 있냐고요? 사실 어른이나 아이나 유치한 건 똑같은데, 아이는 힘이 없어 유치하기만 하죠. 힘 있는 어른이 유치하면 정말 무섭습니다.
- XX 유치원 수석 졸업자 글쇠의 졸업 연설문에서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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