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귀빈魔敎貴賓
밝은 달이 천산에 떠서 구름을 헤치며 유영했다. 어디서 시작한지 모를 차가운 바람이 달빛에 젖은 적막한 대지를 쓰다듬고 사라졌다. 산도 땅도 그대로인데, 산과 땅을 차지하려고 싸우던 인간은 이미 백골이 진토 되어 흔적조차 없었다.
산도 땅도 그대로인데, 길을 잃을 것에 대비해 전날 오후에 출발한 구후영은.
"난 왜 이 모양일까."
또 한 번 오던 길로 돌아가며 투덜거렸다.
형제의 설명은 매우 자세했으나, 구후영에겐 역부족이었다.
'여기서 오솔길을 걸으라고 했지.'
다행히 아는 지형으로 돌아간 덕분에 바른길을 찾았다.
"저기, 소형제."
그때, 누군가가 구후영을 향해 외쳤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회색 장삼 위에 털조끼를 입은 초로의 사내가 보였다. 눈은 갓난아이처럼 맑고 입가에 머문 미소도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는 사람처럼 순수했다.
내공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외공을 익힌 듯했다.
"혹시 마교 총단으로 가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잘됐군. 난 초행이라 길을 모르는데, 부탁 좀 하겠네.".
"저도 초행입니다. 다행히 가는 길은 들어서 압니다."
말을 마친 구후영이 앞장섰다.
"자네는 마교 사람이 아닌 것 같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부분 마교 출신은 천강구절이 바꾼 새 이름을 좋아하지 않네. 더구나 마교 사람이면 낯선 사람한테 등을 쉽게 안 보여."
사내의 말에 구후영은 몸을 흠칫 떨었다.
'여긴 마교인데 내가 너무 방심했구나.'
혈포규찰대와 며칠 어울려 보니 소문이 그대로 믿을 바는 못 되나, 마교가 그만한 악명을 떨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마교 사람이라고 모조리 나쁜 건 아니지만, 그만큼 악한 자가 많을 게 분명하다.
"사람을 해칠 마음은 없어야 하나 경계하는 마음마저 없으면 안 되네."
"조언 감사합니다."
"뭘 감사하기까지야. 자세를 보니 검법을 익혔고 걸음을 보니 정파야. 내공이 나이보다 많은 걸 보면 명문이 틀림없으니 자네 사부나 사숙 중에 내 친구 한두 명이 있을지도 몰라."
"선배의 존성대명을 여쭙습니다."
"뭘 존성대명까지. 친구들은 날 용천이라고 부르네."
"저는 태원부 낙화문의 구후영입니다."
"미안하군. 내가 꽤 오랜 기간 두문불출하여 요즘 강호는 잘 모르네."
"스무 명도 안 되는 작은 문파라 원래 아는 사람이 적습니다."
"소형제 같은 제자를 둔 걸 보면 곧 강호에 큰 명성을 떨치겠군."
구후영은 현재 아주 오묘한 상태다.
예전엔 검술 경지가 높으나 내공이 거의 없었다. 무공 경지라는 게 그냥 눈으로 보고 알기는 어려운 거여서 사람들이 구후영을 과소평가했다.
지금은 막대한 내공을 품은 덕분에 누구나 구후영을 고수로 생각했다.
예전과 정반대로 과대평가를 받는 중이다.
정작 구후영 본인은 막대한 내공을 제대로 써먹지 못해 예전보다 높아진 검술 경지나 지닌 재능과 비교해 무위가 무척이나 아쉽다.
"격려로 듣겠습니다."
"겸손하긴. 그 나이에 그만한 내공을 품었으면 조금 오만해도 괜찮네."
그때, 잘 걷던 구후영이 갑자기 멈췄다.
"혹시, 우리가 방금 소나무 세 그루 있는 곳을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네."
"거기서 길을 바꿔야 했습니다. 돌아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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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빌려 부지런히 걸은 둘이 마교 총단이 있는 백옥봉에 도착했을 땐 새벽이었다. 두꺼운 가죽옷을 입은 사내들이 하얀 입김을 불며 멜대와 물통을 들고 강으로 물 길으러 갔다.
눈이 녹는 늦봄에 생긴 내들이 늦가을 추위가 시작됨에 따라 마른다. 중원의 북방에서 가을이 되면 장작을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듯이, 백옥봉에 사는 자들은 물 긷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연회는 점심부터 시작할 거 같으니 일단 쉴 곳을 찾으세."
"제가 연회에 참석할 거란 건 어찌 아셨습니까?"
"마교가 중원 문파들에 청첩을 돌렸네. 설마, 자네도 초대 안 받고 온 건가?"
"그렇다는 건, 선배도 초대받은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골치 아프구먼. 자네한테 빌붙으려고 했는데."
둘은 똑같이 황당한 얼굴로 서로 쳐다봤다.
"제가 듣기론 찾아온 손님을 굳이 내쫓지 않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건 그렇지. 그러나 안엔 들어 못 가고 마당에서 싸구려 술이나 먹어야 할걸?"
용천의 목적이 뭔지 모르나, 구후영은 반드시 배산 공자를 만나 대화해야 한다.
"그럼 어떡하죠?"
"일단 배부터 채우세."
둘은 산자락의 객잔에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밖으로 나왔다.
"자네 도둑질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쁘게 생각합니다."
"그래. 나쁘게 생각해야지. 그렇다면 아주 잠깐 다른 사람의 청첩을 빌린 다음, 똑같이 만드는 건 어찌 생각하나? 빌린 청첩은 당연히 돌려줄 거고."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젊은 친구가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군."
용천이 뿌듯한 얼굴로 청첩으로 보이는 붉은 종이를 꺼내 흔들었다.
"이걸 똑같이 만들어야 하네."
용천은 입을 딱 벌린 구후영을 끌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청첩을 펼쳤다.
"다행이야. 문파 이름은 안 적혔어. 자넨 붉은 종이와 붓과 먹 그리고 인주를 구하게. 난 인장을 만들겠네."
"제가 길치라서 여길 못 찾을지도 모릅니다."
"길치라고? 부럽군. 무공 익힐 때 참 편하겠어."
"무슨 말씀입니까?"
"육합 중에 넷이 없으니 초식 펼치기 얼마나 편하겠어."
구후영은 용천의 말에 머리가 간질거렸다.
"무공 얘긴 따로 시간 내서 하고, 자네가 인장을 만들게."
말을 마친 용천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구후영은 나무 하나를 골라 굵은 가지를 벤 다음, 천공교검으로 글자를 새겼다.
'왜 이리 쉽지?'
원경이 들고 온 돌을 조각하며 깨달음을 얻었는데, 천산까지 오며 수련을 쉬는 사이에 체화되었다. 근래 검술을 펼치지 않은 구후영은 경지가 오른 것도 몰라 인장을 너무 쉽게 위조한 게 신기하기만 했다.
"자네,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처음입니다."
"글씨도 자네가 하게. 글은 알지?"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들어 붉은 종이에 글을 적었다.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인장까지 찍은 용천이 거듭 감탄했다.
"청첩을 만든 사람이 봐도 구분하지 못하겠어."
"그런데 종이와 인주는 어떻게 똑같은 거로 구했습니까?"
"자네 머리는 조금 나쁘군. 마교가 서안부에서 종이랑 인주를 사다가 청첩을 만들었을까? 당연히 여기 백옥봉에서 산 거고, 가장 큰 점포를 찾으면 똑같은 걸 구하는 게 뭐 어렵다고."
오랜 기간 두문불출했다더니, 강호 경험은 구후영의 백 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용천이었다.
"이래도 괜찮을까요?"
구후영은 정작 일을 저지르고 나니 후환이 걱정되었다.
"괜찮아. 나만 믿게. 혹시 탄로 나면 자네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게."
"그럴 순 없습니다. 함께 한 일이니 같이 감당해야죠."
"하하. 내 말 명심하게. 문제가 생기면 자네랑 나는 모르는 사이인 거야. 내가 모든 걸 뒤집어쓰고 도망칠 테니, 자넨 미리 변명할 말이나 생각해 두게."
말을 마친 용천이 객잔으로 가서 청첩을 돌려주고 나왔다.
'강호에 이런 재밌는 사람이 많을까?'
자룡을 집에만 데려가면 더 바랄 게 없는 구후영이다. 원래는 무공을 열심히 수련할 생각이었지만, 강호를 돌며 재밌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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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구절 네 글자가 적힌 커다란 편액이 지은 지 오래지 않은 장원의 대문 위에 걸렸다. 그 앞엔 중원을 비롯한 천하 각지에서 온 고수를 구경하러 수백 명 인파가 모였다.
구후영과 용천은 접객을 맡은 자가 지치길 기다려서 늦은 시각에 대문 앞에 갔다.
"어디서 오신 누굽니까?"
예상대로 접객을 맡은 자가 청첩을 꼼꼼히 살피지 않았다.
"유수문에서 온 용천과 구후영이오."
용천이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청첩을 받은 귀빈이다. 안으로 모셔라."
접객 담당의 부름을 받은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시종이 쪼르르 달려와 용천과 구후영의 안내를 맡았다.
"절 따라오십시오."
아이를 따라 안에 들어가니 바로 커다란 연무장이 나왔다. 거기엔 수백 명 사내가 술을 마시며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둘은 아이의 안내에 따라 연무장 중앙을 가로질러 커다란 편액을 건 건물 앞에 도착했다.
"청첩을 받은 손님입니다."
정심당靜心堂 앞까지 안내한 시종은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청년에게 둘을 인계하고 대문으로 돌아갔다.
"여기부턴 제가 안내합니다."
꽤 정갈하게 차려입은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둘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안내하겠다는 말과 달리 청년은 가만히 서서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가짜 청첩이 들킨 건 아니겠지?'
구후영이 괜히 찔려서 걱정하던 그때.
"소인이 앞장서겠습니다."
드디어 청년이 걸음을 옮겼다. 둘은 성큼성큼 걷는 청년을 따라 정심당을 지나쳐 복도를 따라 걷다가 새로운 건물에 도착했다.
"안에 들어가시면 다른 사람이 자리까지 안내할 겁니다."
말을 마친 청년이 정심당으로 돌아갔다.
"혹시 자네가 강호에 유명한 고수거나 낙화문이 되게 강한 문파인가?"
쾌활당快活堂이란 편액이 걸린 문 앞에서 용천이 질문했다.
"둘 다 아닙니다."
낙화문과 구후영이 요즘 유명해진 건 맞지만, 산서에 국한된다. 소문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마교까지 전해질 리는 없다.
"무슨 착오가 생긴 건가?"
뭔가 미심쩍은지 용천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걱정입니까?"
"모든 손님을 똑같이 대접할 순 없네. 당연히 등급을 나눠 따로 접대하지. 우린 이미 일반 손님을 접대하는 곳을 지나쳤어."
그제야 구후영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내겐 싫은 일이 아닐세. 소형제는 어떤가?"
"저도 바라던 바입니다."
"그럼 가세."
용천이 쾌활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자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쾌활당에서 둘을 맞이한 건 어린 시녀였다. 정심당의 청년과 마찬가지로 시녀 역시 바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행히 정삼당에서 한 번 겪은 일이어서 구후영은 편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시녀가 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자네 진짜 무명인가?]
갑자기 들린 전음에 시녀를 따라 걷던 구후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날세. 용천. 설마 자네 전음을 모르는가?]
구후영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골치 아프군. 우린 지금 더 귀한 손님을 모시는 곳으로 가고 있네.]
쾌활당은 일지봉의 연무장만큼 컸는데, 계단을 두고 세 층으로 나뉘었다. 구후영과 용천은 시녀를 따라 계단을 밟고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이르렀다.
거기엔 검은 도관을 쓴 무당파와 푸른 도복을 입은 종남파, 옷깃에 하얀 매화를 수 놓은 화산파 등이 있었고, 강호 경험이 일천한 구후영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자도 서른 명 정도 있었다.
"더, 더 안으로 드시지요."
뭐에 놀랐는지 시녀가 말을 더듬거렸다.
[재밌군. 우린 무당보다 더 귀한 손님이 됐네.]
구후영과 용천은 망설임이 큰지 느리게 걷는 시녀의 뒤를 따라 제일 귀한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상석에 이르렀다.
상석엔 상이 여섯 개만 있었다.
- 작가의말
요 며칠 문피아 접속이 굉장히 불안하네요. 글을 수정하고 저장하면 오류 페이지가 뜨는 일이 잦습니다. 그럴 때마다 괜히 이미 쓴 분량이 날아갈까 봐 겁이 덜컥 납니다.
서버 그거 얼마 안 하는데 제발 몇 대라도 늘려서 좀 더 탄탄한 서비스를 구축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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