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장구팽弓藏狗烹
비조진飛鳥盡 양궁장良弓藏 교토사狡兎死 주구팽走狗烹.
새를 다 잡으면 활은 장롱에 버려지고,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는 솥에 삶아진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가 월왕 구천에게 죽자 절치부심했고, 끝내 월나라를 대파하고 구천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승리로 교만해진 부차는 오자서의 권유를 듣지 않고 구천의 목숨을 살려줬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쇠퇴케 했다.
그에 손무는 건강을 핑계로 은퇴해 손자병법을 편찬하는 데 전념했고, 손무의 충고를 무시한 오자서는 충언을 일삼다가 부차가 내린 검으로 자결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한편.
오나라의 속국이 되고 부차를 왕의 예로 대하는 치욕을 당한 구천은 와신상담했고, 범려와 문종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복수를 이뤄냈다.
이때 범려는 손무처럼 바로 월나라를 떠나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강과 호수를 떠다녔고, 일신의 안전을 도모한 후 월나라에 남은 대부大夫 문종에게 서신을 보내 구천을 떠나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문종은 범려처럼 모든 걸 털고 떠나지 못했고, 결국엔 구천이 내린 검으로 자결했다.
"기종이 마교랑 손잡은 거요?"
구후영은 그저 자신이 칠성진을 상대하며 느낀 바를 솔직히 얘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딱히 의도한 게 없을지 모르나, 듣는 사람은 연신 무릎을 칠 수밖에 없는 금과옥조의 연속이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해졌었는데.
옥무영의 말에 다시 가라앉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기종이 무림대회를 핑계로 자기편을 다 끌고 소림으로 갔소. 우린 마교만 상대하면 되오."
옥무영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막불위가 태평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다고 쳐도, 화산 검종과 종남과 우리 셋으로 마교를 막을 수 있겠소?"
사람은 검종이 많지만, 실력은 기종이 위다. 현재 기종이 떠난 화산은 무력이 평소 반에도 못 미친다.
마교의 무리에 자칫 강석을 위수로 하는 혈포규찰대의 고수들도 포함될지 모르니, 화산 검종과 종남이 그간의 원한을 잊고 한마음이 된다고 쳐도 막아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옥 대협은 하나 간과한 게 있소."
막불위는 여전히 태연한 기색이었다.
"마교의 전력이 그토록 강하다면 굳이 종남에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거요."
이치에 맞는 얘기라 옥무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우리 목표는 화산을 구하는 게 아니오."
막불위의 말에 구후영은 얼음을 삼킨 듯 가슴이 시려왔다.
"화산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마교를 최대한 죽이는 게 목표요."
"하긴. 무당 제자들 보고 소림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라면 아무도 따르지 않겠지."
옥무영의 중얼거림에 구후영도 아까 막불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막불위는 분명히 '화산을 돕자'가 아니라 '마교를 저지하자'고 말했다.
"마교가 너무 약해지면 북원에 토사구팽당할 거요. 그러니 우리가 만만치 않음만 보여주면 마교가 알아서 계획을 포기할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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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불위 등이 자리를 피해주며 셋만 남았다.
"어떻게 할까요?"
구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주는 게 좋겠지."
옥무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칠성진이 종남에 아주 중요한 진법인 것 같던데. 그걸 빌미로 설련을 요구해도 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원경은 자신 때문에 구후영과 옥무영이 마교와 원한을 맺는 것을 원치 않았다.
"너희는 참 단순해서 좋겠다."
옥무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네?"
"소림의 일은 지나간 일이지 끝난 일은 아니잖느냐."
구후영은 누가 봐도 답 없는 위기의 상황도 곧잘 헤쳐나왔다. 원경은 웬만한 사람이면 몇 년을 의기소침할지도 모를 일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면에선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이럴 땐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한 선생인가 하는 작자가 소림에 너희 둘을 죽이라고 했잖으냐."
그제야 구후영과 원경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지요."
"종남의 막 장문을 봐라.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명확히 알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확실히 아니까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망설이지 않잖아."
옥무영의 말에 둘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우리 문제는 그자가 왜 너희를 죽이려 했는지 모른다는 거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원경 아우는 초 선생인가 하는 자와 무공을 겨룬 적 있고 구후 아우는 천공교검의 주인이란 건데."
"당시 연무장에서 본 얼굴은 분명히 초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원경이 말했다.
"세상엔 얼굴과 체형을 바꾸는 무공이 최소 다섯 가지가 있다. 게다가 태생적으로 얼굴과 체형을 바꿀 줄 아는 사람도 있고."
옥무영의 반박에 구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고민해도 상대가 왜 우릴 죽이려 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앞뒤가 척척 맞는다고 해도 결국 확신은 못 하니까요."
"말 잘했다. 그러니 마교의 일도 방해해서 놈이 꼬리를 드러내게 해야 한다. 그저 이대로 너희와 상관없는 일이 되길 바라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문제는 승산이 있냐는 건데."
마교를 막는 건 화산뿐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구하는 의로운 일이다. 위험이 크지 않다면 구후영도 원경도 당연히 선뜻 나설 생각이다.
"혈포규찰대에서 최고수로 불리는 강석은 어땠냐? 여기 원경 아우와 비교하면."
구후영은 신창과 강석의 대결을 자세히 떠올렸다.
'대단한 무인이었구나.'
당시 구후영은 운 좋게 절정의 경지를 밟은 애송이였다. 그나마 난화검법을 익힌 덕분에 신창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꼈지만, 강석에 관해선 별 인상이 없었었다.
다행히 태극혜검을 토론하며 무당 장로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소림에서 원철과 백팔나한진의 '가르침'을 받아 이제는 강석이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었다.
"싸우면 형님이 지지 않을 겁니다."
그럼에도 둘이 붙어 원경이 지는 장면은 그려지지 않았다.
"소림 무공은 특별하다."
옥무영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자신보다 약한 자는 숫자에 상관없이 압도한다."
기술보단 힘에 의존하는 경기공硬氣功의 특징이다. 무당이나 화산처럼 초식에 의존하는 문파는 상대가 많으면 손발이 어지러워서 본신의 실력을 다 꺼내지 못한다.
"그럼?"
원경의 의문에 옥무영이 확답을 줬다.
"만에 하나 혈포규찰대가 있다면 원경 아우 혼자서 상대해야 한다."
그에 원경이 시원하게 웃었다.
"아무리 마교에서 최악과 최흉이라고 불려도 십팔동인진만 하겠습니까."
원경이 두려운 건 자신보다 경지가 높고 초식 운용이 대단한 구후영 같은 무인이지 혈포규찰대처럼 힘으로 밀어붙이는 자들이 아니다.
"구후 아우는 마교의 장로들을 맡아줘야겠어."
원경에게 구후영이 성가신 것처럼, 구후영 역시 힘과 숫자로 밀어붙이는 자들이 성가시다.
비록 유사시에 위력이 대단한 일손구손의 수법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지만, 막대한 내공을 반 가까이 소모할 정도로 비효율적이다.
차라리 신체가 쇠퇴해 힘보단 초식으로 승부하는 장로들이 편하다.
"난 어중간하니까 마찬가지로 어중간한 자들을 상대해야지."
옥무영은 내공이 구후영보다 많다. 둘의 나이나 수련 기간을 따지면 당연한 일이지만, 구후영이 세 개의 구궁을 품어 단전을 수십 배로 키운 걸 생각하면 옥무영이 대단한 거다.
덕분에 원병의 기습에 속절없이 당하고도 작은 내상으로 그쳤지만, 아쉽게도 옥무영은 판관필로 점혈하는 기교에 의존하는 무인이다.
막대한 내공을 품었음에도 강한 공격은 펼치지 못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셋이 흩어지지 말자는 얘기 맞습니까?"
구후영의 말에 옥무영이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럴 때 보면 또 대단히 총명한데.'
부족한 전력으로 마교를 이기는 건 전기새마와 같다. 상대에 따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나서는 게 중요하다.
마교는 미처 셋이 어떤 무인인지 파악하지 못했을 테니, 초반에 확실한 승기를 잡아 상대의 위세를 꺾는다면 목적을 이루는 게 어렵지 않다.
그때.
"그런데, 안물이 설마 이 모든 걸 예상하고 우릴 여기에 보냈을까요?"
구후영이 의문을 제출했다.
"일단 종남에 우리 결정을 알리고 어서 서안부에 가서 확인해야겠습니다."
어머니의 안위가 걱정된 원경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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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답한 셋은 바로 경공을 펼쳐 서안부로 갔다.
"젠장."
"죄송합니다."
안물이 자취를 감췄다는 말에 구후영이 탄식하자 말을 전한 의원이 자기 잘못인 것처럼 사과했다.
그날 구후영의 대단한 침술을 직접 눈으로 보고 커다란 경외심을 느낀 탓이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시오?"
구후영이 제발 자신의 예상이 틀렸기를 바라는 마음을 듬뿍 담아 질문했으나.
"송구합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서신 하나 남기고 떠났습니다. 언제 돌아온다는 언질도 없었습니다."
역시나 듣고 싶은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 돌아오면 은도당에 알려주시오."
제발 아니길 바랐던 일이 사실로 확인되자 둘은 실망한 얼굴로 돌아섰다.
"무섭구나."
옥무영이 한탄했다.
"우리가 서안에 올 걸 알고 안물의 머리에 벌레를 심었다는 거 아니냐."
만약 초 선생과 한 선생과 연 선생이 같은 사람이고, 이 일을 꾸민 자이기도 하다면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밑바닥 인생이어서 사람을 잘 안 믿는 하오문의 충성을 받아내고, 원경과 무공을 겨뤄 이기고, 소림을 자기 손발처럼 자유자재로 휘둘렀을 뿐이 아니라 의술에도 정통하다는 뜻이니까.
약왕으로도 불리는 안물이 절대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자신이 있어 일을 벌인 게 틀림없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움직임에 맞춰 마교가 사신을 보내게끔 영향력을 끼쳤다는 추론도 가능합니다."
구후영의 말에 옥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종남을 끌어들이라고 한 게 그놈인지도 모르지."
빠른 걸음으로 은도당의 장원에 도착한 둘은 미리 와있던 원경에게 자신들의 추론을 말했다.
"어머니를 종남에 맡겼으면 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연 선생인지 다른 누군지 모를 배후가 굳이 취연을 해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작 닥치면 걱정할 수밖에 없는 게 자식의 마음이라, 원경은 만일에 대비하기로 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구후영이 동의하자 옥무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마음이 편하겠지. 종남도 우릴 더 믿을 거고."
"그런데, 종남은 믿을 만합니까?"
구후영이 주저하다가 말했다.
"소림의 일은 엉뚱하나 끝나고 보니 당연한 흐름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세한 맥락은 모르지만, 우린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종남이 음모의 일환이라는 추측은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다."
옥무영이 자신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옥씨는 종남의 후손이다. 풍옥문으로 독립한 후에도 종남을 큰 위기에서 구한 적 있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마음을 정한 셋은 가마를 구해 취연을 태웠다. 키가 비슷한 원경과 옥무영이 경공을 펼쳐 달리고, 누군가가 지칠 때면 구후영이 자리를 대신했다.
덕분에 무려 백이십 리나 되는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 날이 밝기도 전에 종남의 주봉인 태을산에 도착했다.
- 작가의말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한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 마음을 합쳐 닻을 거둬 배가 안 뒤집히게 했습니다. 위기 앞에서 원수도 손잡는 이러한 행위를 오월동주라고 하죠.
오와 월의 싸움은 합려, 구천, 부차의 세 왕. 신하로는 오자서, 손무, 범려, 문종. 그리고 사대미녀의 하나인 서시까지 등장합니다. 와신상담을 비롯해 수많은 사자성어를 낳았고 조진궁장과 토사구팽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문종은 위에 말한 사람 중 명성이 가장 떨어지는 자입니다. 그러나 부차가 문종에게 죽음을 권할 때 한 말을 들으면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이 일전에 오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곱 계책이 있다고 했고, 개중 세 개를 써서 오나라를 무너뜨렸소. 남은 네 개의 계책은 선생이 직접 선왕께 전하시오.
보통은 서시의 연인인 범려가 더 많이 알려졌지만, 위의 말에서 알 수 있다시피 오나라를 무너뜨린 진정한 책사는 문종입니다. 서시의 후광을 입은 범려한테 인지도가 밀렸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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