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유서天魔遺書
사람이 뭔가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일행도 그랬다.
"난 놈들을 찾아내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네."
홍기영의 말에 풍불지와 악불형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대신협의 생각은 간단했다.
천마와 같은 절대강자가 쭉 군림한다면 무림엔 희망도 미래도 없다.
손발이 부르트도록 초식을 연마하고 내상과 주화입마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내공을 수련하면 뭐 할까? 누군가는 약관 정도의 나이에 무공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 천하를 오시하는 고수가 되는데.
연 선생만 봐도 천마와 비슷하게 초식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이 강한 내공과 수준 높은 초식을 대량으로 익히는 거로 사대신협의 셋과 정면으로 대치하면서도 특별한 위기에 몰리지 않았다.
구후영의 백화총총이 예상을 벗어난 위력을 보인 덕분에 그나마 신창이 일점공격술을 펼칠 기회라도 얻었지, 아니었으면 결국엔 연 선생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무인들은 깨달음보단 그저 강한 내공과 수준 높은 다양한 초식을 원하게 될 거고, 천 년 이상 발전해온 무공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물론, 셋은 강호를 위한다기보단 천마와 같은 강자가 쭉 자기 머리 위에 있는 게 싫었다.
상대가 천마라면 그간의 친분 때문에 망설였겠지만, 지금은 천마가 잠들고 다른 소생자가 생긴 듯한 상황이어서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난 그냥 진시황이 싫어."
옥무영의 이유는 더 간단했다.
"다들 한다고 하니 나도 하겠소."
물론, 원경만큼은 아니었지만.
"저도 할게요."
귀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일행의 실력을 믿어서인지 위기감을 전혀 못 느끼는 모습이었다.
"끼워준다면 나도 목숨을 걸겠소."
위종도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건 구후영과 청빈이었다.
청빈은 자기 실력으로 감히 이 무리에 껴도 되냐는 자격지심 때문에 망설였고, 구후영은 단아 때문이었다.
혹시 이 과정에 구후영이 죽는다면 단아를 치료할 유일한 사람이 사라지는 셈이다.
#
호 선생은 단전을 잃고 양다리에 한철을 두드려 만든 무겁고 단단한 족쇄를 찼다.
그러나 얼굴은 오히려 좋아진 듯했다.
"귀검이 왜 필요한 거요?"
호 선생의 질문에 청빈이 얼굴을 굳혔다.
"굳이 뭘 알려고 하지 마시오."
한때 칠살문 자객이었던 청빈은 누구보다 호 선생에 대한 적의가 컸다.
"귀검에 관한 기록은 칠살문의 오랜 문서에서 발견했소."
호 선생이 귀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약 사 년 전의 일이었다.
호 선생은 연 선생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대가로 칠살문의 암호문을 받았고, 덕분에 칠살문의 오랜 문서 중 일부를 해독했다.
거기서 귀검동과 귀검에 관한 자료를 얻었는데, 아쉽게도 귀검동의 위치나 안에 뭐가 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위씨 가문의 암호문을 찾으려 애썼고, 제 발로 찾아온 위종을 가두고 고문했다.
"연 선생이 강호말살지계를 가동해서 혼란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했소. 그 대가로 위씨 가문의 암호문을 주기로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았소."
어차피 호 선생도 무인의 숫자를 어느 정도 줄일 생각이었기에 흔쾌히 대답했다. 그 과정에 기록을 통해 찾아낸 귀검 중 일부를 강호에 풀었다.
"귀검에 관한 기록 중에 특이한 사항은 없었소?"
구후영이 질문했다.
"글쎄. 소생자를 영원히 잠재운다는 말이 있어 기억에 특별히 남았소. 그것 빼고는 귀검동의 열쇠라는 것과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 약한 불에 사흘 정도 달구면 모양을 변형할 수 있다는 정도밖에 없소."
구후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대신협의 셋은 천마가 남긴 흔적을 찾기로 했다. 칠살문의 분석과 달리 천마는 자신에 관한 얘기를 아주 많이 했다.
셋은 천마가 너무 강해 정신적인 금제를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직접적으로 진시황이 있는 곳을 밝히지 못하더라도 단서를 남겼을 거라고 확신했다.
남은 사람은 소생자를 죽이려면 귀검으로 심장을 찔러야 한다는 기록 때문에 귀검의 행방을 찾기로 했다.
옥무영 등은 강호에 널린 귀검을 회수하기로 하고, 구후영과 청빈은 호 선생에게서 귀검에 관한 정보를 캐내는 임무를 맡았다.
"칠살문의 옛 문서들은 어디에 있소?"
"서안. 거기에 칠살문의 총단이 있소."
"들어가는 방법은?"
호 선생은 순순히 자신이 아는 바를 토로했다. 자기 뜻을 따르는 심복을 모두 잃은 지금, 호 선생의 유일한 집착은 자기 생각을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남기는 것이기에 괜히 무관한 일로 귀찮음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지키는 사람은?"
"둘만 알아도 진정한 비밀이 아니오. 나도 사부가 죽고 칠살문 문주가 되어서야 총단의 존재와 위치 그리고 출입하는 방법을 알았소."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 그만이지. 배배 꼬기는. 책 많이 읽은 놈들은 이래서 피곤해.'
속으로 욕을 실컷 한 청빈은 고개를 돌리다가 구후영을 보고 한마디 보탰다.
'동생은 빼고.'
#
"고민이 깊어 보이는구나."
청총은 달이 어느 정도 밝으면 밤에도 곧잘 달렸다. 그러나 구름이 달을 가리거나 하면 멈춰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영특함이 사람 못지않은 대단한 말이나 밤에 달리지 않는 습성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쉬는 틈에 청빈이 질문했다.
구후영은 자신과 단아의 일에 관해 청빈에게 자세히 들려줬다.
"나는 배움이 깊지 못하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도움이 되는 말은 해주기 힘들구나."
청빈이 탄식했다.
"그러나 이런 내게도 장점이 하나 있다. 바로 모든 일을 간단하게 생각한다는 거다."
청빈의 말에 구후영이 눈을 빛냈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복잡한 생각을 간단하게 바꾸는 것. 바로 지금의 구후영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세상엔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이 일은 내게 해야 할 일이고 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내 실력으로 할 게 없는 것 같아서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제겐 해야 할 일. 하고 싶지 않은 일이군요."
"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형님은 왜 그리 생각하셨어요?"
"난 정학 진인의 제자니까. 태극권을 익힌 자로서 조화에 위배하는 일이 있으면 당연히 바로잡아야지 않겠느냐?"
청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구후영이 자기 생각을 솔직히 토로했다.
"연 선생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연 선생이 하려던 일은 좋은 일이고 옳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자를 죽였으니 그자가 하려던 일을 내가 하는 게 맞는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으면 고루하다고 욕했을 청빈이다. 그러나 구후영이 말하자 더없이 찬성하는 마음이 되었다.
"그래. 사내라면 그 정도 책임감이 있어야지."
"그러나 난 죽어도 안 되고 내공을 잃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 걱정이 큰 거냐? 연 선생이 천마랑 비슷한 실력이라고 하는데 우리 손에 죽었잖아. 새로운 소생자가 벌써 천마만큼 강하다는 보장도 없고."
"위종 때문에요."
"위종? 실력이 나랑 비슷한 것 같던데."
위종의 예전 실력은 지금의 청빈보다 강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경지나 내공 등만 보면 청빈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연 선생, 호 선생, 위종의 말은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집니다. 그간 우리가 찾은 칠살문의 문서들도 그렇고. 저는 그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너무 의심이 많은 거 아니야? 셋이 같은 편이라고 보기 힘들잖아. 심지어 연 선생은 위종 손에 죽었으니. 솔직히 연 선생이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뭘 속이려 했단 말이야?"
구후영도 옥무영도 사대신협도 모두 위종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증 따위는 물론이고 심증이라고 할 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제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의심의 끈을 완전히 놓을 순 없습니다."
"참. 네 고민 얘기를 한다는 것이 또 이상한 쪽으로 샜구나. 이렇게 하자. 네가 이번 일을 한다면 나도 하마."
구후영은 청빈에게 새 생명을 준 부모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절대 구후영 혼자서 위험한 일을 하게 지켜볼 순 없었다.
#
석 달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세상은 늦가을에 접어들었다.
울긋불긋한 단풍들이 빛이 바래가며 추운 겨울을 예고했으나, 강호는 구후영의 은퇴 소식으로 뜨거웠다.
장삼풍과 공유, 천마와 사대신협.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홀로 천하를 호령했을 강자들이 유독 많은 시기였다. 그렇게 수많은 강호인을 흥분케 했던 거목들이 하나둘 스러지고 사대신협에 대한 열광도 시들해지던 무렵에 혜성처럼 나타나 모두의 주목을 샀던 구후영이 갑자기 은퇴를 발표했다.
더구나 지난 삼 년 동안 거의 활동이 없던 구후영이 갑자기 은퇴를 발표하여 그 충격이 꽤 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음산의 현월궁 궁전에 모인 사람들은 그간 수확한 것들을 꺼내 공유했다.
"귀검은 사십 자루 모았소."
옥무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강호를 삼 년이나 어지럽힌 귀검을 모은다는 건 어찌 보면 강호 전체와 싸우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고작 석 달 사이에 사십 자루나 모았으니 옥무영이 우쭐거릴 만했다.
"물론, 구후 동생의 도움이 컸소."
구후영이 전한 정보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던 귀검을 얻어낸 게 삼십 자루에 가깝다.
"어렵게 배산을 찾아내 천강구절이 남긴 것들을 모두 긁어왔다."
풍불지가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탁자 위에 올렸다.
단지 소리만으로 보따리 안에 든 것이 전부 종이임을 알아챈 일행이 얼굴을 굳혔다.
칠살문의 문서를 해독하는 일은 암호문이 있음에도 엄청 귀찮았는데, 암호문 따위가 없는 천마가 남긴 글에서 단서를 찾는 건 얼마나 어려울지는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진나라 시절의 지도를 찾아냈습니다."
구후영은 칠살문의 총단에서 진나라 시절의 지도를 얻었다.
분서갱유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진나라 시절에 관한 기록은 사마천이 사기에 쓴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진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지도는 일행에게 꽤 유용했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은 당시 꽤 중요한 곳들이고, 진시황이 대놓고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에서 일을 벌이지 않았을 테니 그러한 곳들은 간단히 배제할 수 있다.
"이젠 천강구절의 유서들을 통해 진시황과 삼천 동남동녀들이 있을법한 곳을 찾아내면 되겠군."
"또 하나. 새로운 소생자가 천마만큼 혹은 천마보다 더 강하다고 가정하고 어떻게 죽일지 방도를 찾아내야 해."
연 선생은 일행과 양패구상할 생각이 없었다.
대결 과정에 일행의 실력을 가늠하는 듯한 느낌을 풍겼고, 풍불지가 나타나고서야 최선을 다한 거로 미루어 짐작건대, 일행을 잠재적인 협력자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소생자는 다를지도 모른다.
어차피 자기 몸을 내주더라도 다른 자가 소생하면 그만이니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난 그럼 천마를 상대하는 법을 연구하지."
유서를 해석하기 싫었던 풍불지를 위수로 몇 명이 빠져나왔다.
- 작가의말
유서 : 죽은 사람이 남긴 글과 책.
유언서 : 죽은 사람이 남긴 말을 글로 작성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법적 효력을 가짐.
보통 유서 하면 유언서인데, 여기선 천마가 남긴 기록을 의미합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