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망회회天罔恢恢
바위는 물론이고 단단한 철벽도 베는 천공교검이 심장에 박혔음에도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는 예리한 칼이 살을 베고도 피 한 방울 안 묻는 현상과 다르다.
칼에 피가 안 묻는 건 반질반질하게 날을 잘 갈아서이고, 베인 살에선 피가 흘러나와야 맞는 일이다.
끙.
작게 신음을 토한 위종이 창백한 얼굴로 벽에 상체를 기댔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지.'
위종은 단지 천마를 죽이고 서불의 기억을 회수하길 원했었다. 모든 기억을 얻은 다음엔 다음 생을 위한 안배만 하고 자결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천마가 깼고, 만일에 대비한 안배 역시 천마한테 들켜 실패로 돌아갔다.
다행히 천마가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게다가 천공교검에 천마가 품었던 어마어마한 힘을 갈무리하기까지 했다.
천마가 깨는 건 계획에 없었던 위종으로선 그야말로 커다란 횡재였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본 점괘가 나가면 반드시 죽는다고 나왔다.
수호자가 죽으면 지식과 기억은 그대로 다음 몸에 전이되나 힘은 아니다.
위종의 지금 몸은 발 하나 다친 데다가 늙었다.
물론, 다친 발은 자르고 새로 자라게 하면 그만이다. 늙은 것도 왕중양의 선천기공을 익혀 젊어지게 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평균보다 작은 덩치와 평균에 못 미치는 외모는 그대로다.
천공교검엔 그간 죽은 수호자들의 '힘'이 들었다.
귀검자가 사백 년이나 살았던 것도 무공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수호자들을 죽이며 얻은 '힘' 덕분이다.
대부분은 천공교검에 가고 극히 일부의 '힘'으로 사백 년의 수명을 누렸었다. 만약 막야의 기억을 얻어 천공교검의 비밀을 풀어 모든 힘을 얻는다면?
영생은 아니어도 수천 혹은 수만 년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계획에도 없는 삼천 동남동녀의 '힘'까지 얻었다. 수호자들도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생각하면 위종은 원래 예상했던 것의 사십 배에 가까운 힘을 얻게 된다.
영생도 그저 꿈이 아니었다.
이대로 나가서 천공교검을 숨기고 자결하면 참으로 완벽한 결말일 텐데.
아쉽게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대로 자결하면?
천공교검은 영원히 이 방 안에 남는다. 위종이 새로운 몸에 가서 열심히 수련해 강자가 되어 다시 찾아오려면 어느 세월일지 모른다.
자신만 아는, 그러나 손이 쉽게 닿는 곳에 천공교검을 두고 마음에 드는 육신을 얻으면 바로 천공교검의 힘을 흡수하는 것과 천양지차다.
게다가 구후영 등이 먼저 벽을 부수고 천공교검을 얻는다면? 천공교검을 만 장 깊이의 바다에 빠뜨리거나 모든 걸 녹이는 화산의 용암에 던진다면?
현재 위종의 힘으로도 수정벽은 고사하고 건물 벽조차 부술 수 없다. 그러나 구후영 등이 십 년 혹은 이십 년의 공을 들인다면 물방울이 바위 뚫듯이 건물 벽에 구멍을 내는 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다.
주먹 크기의 구멍이면 격공섭물과 비슷한 수단으로 천공교검만 홀랑 꺼내는 건 쉽다.
결국, 위종은 필사의 운명을 피하고자 당장 천공교검의 힘을 취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볼품없는 지금의 몸으로 영생을 도모해야 했다.
게다가 마음에 걸리는 일은 이것뿐이 아니다.
천공교검의 흡력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연결이 유지되게 애쓰는 와중에도 위종의 눈은 구후영과 원경을 지속하여 살폈다.
태극혜검과 선천기공을 수련한 구후영일까.
금강인과 연화인을 얻은 원경일까.
필사의 점괘가 나오게 한 자는 둘 중 누구일까. 혹시 내가 천공교검의 힘을 얻고도 저들의 손에 죽지 않을까?
천공교검의 힘은 인간의 수명과 관련한 '힘'이지 강함과 관련한 힘은 아니다.
'힘'이 강하면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기에 강함과 아예 무관하다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공격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민도 천공교검과의 연결에 성공하고 안에 깃든 힘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눈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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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연, 진법을 쳐. 우린 위종을 볼 수 있으나 놈은 우리 존재를 헷갈리게 해야 해."
구후영의 말에 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바로 움직이지 않고 점괘를 바라봤다.
위종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예견한 세 개의 점괘가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풍 대협이 놈의 목을 노리고, 악 대협은 심장을 노립니다."
위종이 천공교검에서 무슨 힘을 얻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머리를 잘리고 심장이 터지면 살긴 힘들 것이다.
"팽 대협은 놈의 허리를 노립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후영은 팽창회한테 위종의 허리를 자르게 했다.
"홍 대협은 놈의 오른팔을 맡고, 이형은 놈의 왼팔을 맡습니다."
홍기영은 위종의 오른팔, 원경은 위종의 왼팔을 감당하기로 했다.
"사형이 오른 다리, 제가 왼 다리를 맡겠습니다. 놈이 심장이 터지고 머리가 잘리더라도 절대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제압해야 합니다."
구후영의 안배에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난?"
가만히 듣기만 하던 청빈이 질문했다.
"삼형은 귀연을 지키고, 힘에 부치는 사람이 보이면 한 손 거드십시오."
그때.
수정벽 건너편의 위종이 기침을 터뜨렸다.
"색이 변했어."
짙은 보라색이던 천공교검의 검신이 눈에 띄게 희미해졌다.
반대로 위종은 얼굴에 혈색이 완연했고, 다쳐서 쪼그라든 발이 어느새 정상적인 형태로 돌아왔다.
겉모습만 멀쩡해진 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음을 자리한 사람 모두 알았다.
"돌아가서 이 일을 알리고 황실과 강호의 모든 힘을 합쳐 놈을 상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위종의 기세를 잠깐 가늠한 홍기영이 신중론을 펼쳤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놈을 죽이지 못하는 건 싫어."
풍불지 역시 홍기영과 같은 의견이었다.
"아니에요."
그에 진법을 준비하던 귀연이 고개를 저었다.
"저기 점괘가 아직도 그대로예요. 그리고."
귀연이 머뭇거렸다.
"괜찮으니까 그냥 얘기해 봐."
"저 점괘는 위종이 반드시 죽는다는 점괘예요. 밖으로 나와야 죽는 게 아니라."
"진짜?"
위종이 갑자기 입을 열어 질문했다.
"내가 반드시 죽는다고?"
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죽을 가능성은 힘의 흡수에 실패하는 것밖에 없는데."
천공교검엔 아직도 막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 현재 위종의 다친 발을 완치하고 몸도 이십 대로 젊어지게 한 힘은 전체의 일 푼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느낌상으로 '힘'은 성질이 아주 온순했다. 과하다고 해서 몸을 해치거나 하는 그런 유형도 아니고.
"도사, 천마는 왜 자결했을까?"
위종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귀연한테 질문했다.
"당신은 죽으면 기억을 갖고 다른 사람이 되잖아요. 죽여봤자 복수가 안 되니까 점괘를 믿어보려 한 게 아닐까요?"
"컥!"
귀연의 대답을 들은 위종이 화들짝 놀라며 피를 연신 토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나 보군요."
귀연이 눈을 반짝였다.
"설마, 고대 주술이 본인마저 멍청하게 만든 건가요?"
위종은 귀연의 비아냥처럼 들리는 질문을 무시한 채 양손으로 천공교검의 손잡이를 잡고 가슴에서 뽑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연결이 완성된 천공교검은 단순한 팔심만으로 뽑히지 않았다.
그에 위종은 천공교검과의 연결을 끊으려 애썼다.
"그렇군."
구후영이 손뼉을 짝 쳤다.
"넌 죽으면 기억을 갖고 다른 사람이 돼. 어쩌면 가장 가까운 천마의 몸을 뺏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천마의 복수는 실패하는 거야. 그저 실패도 아니고 아주 참패지."
"천마가 복수하려면 널 죽여야 하는데, 넌 죽지 않아. 수호자를 죽일 수 있는 무기는 세상에 단 하나니까."
천공교검!
천마는 점괘를 믿고 자신의 목숨을 가볍게 던졌다. 그 결과, 현재 천공교검이 위종의 가슴에 꽂혔다.
그것도 위종의 손으로.
"천공교검엔 서불을 뺀 모든 수호자의 '힘'이 깃들었지. 게다가 동남동녀 삼천의 힘까지. 아마 어느 순간 천공교검이 네 힘을 모조리 뽑아 영면으로 안내할 거야."
자신의 추론이 맞는지는 구후영도 별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럴듯한 말을 지껄이는 거로 위종을 심란하게 만들어 차질이 생기게 한다면 그야말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구후영의 부추김 탓인지 아니면 본인의 확신 탓인지.
위종은 천공교검을 잡은 양손에 더 큰 힘을 가했다.
그때.
누군가가 천공교검의 손잡이에서 위종의 양손을 치웠다.
위종의 양손엔 천근거력이 서려 있었는데, 불청객은 마치 세 살배기 손에서 당과 뺏듯이 손쉽게 해냈다.
"어!"
양손을 제압당한 위종이 불신과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방 안에 나타난 불청객을 바라봤다.
"어!"
그건 밖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에 나타난 사람은 중원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대신협이 아니었다.
위종이 시종 걱정하던 구후영과 원경도 아니었다.
풍옥문 역사상 가장 많은 내공을 얻은 옥무영도 아니었다.
진법으로 못 하는 거 빼고 다 하는 모산파의 장문도 아니었다.
위종의 양손을 제압한 자는 절정 초입에 이르렀으나 내공은 일류 정도 수준밖에 안 되는 청빈이었다.
"어!"
청빈이 양손으로 위종의 손을 잡고 애들이 장난하듯 흔들어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위종의 양손이 청빈의 왼손에 잡혀버렸다.
뜻밖의 사태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중원 유수의 고수들도 청빈이 어떻게 한 건지 알아채지 못했다.
왼손으로 위종의 양손을 제압한 청빈이 오른손으로 천공교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악!"
위종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이 푸석해졌다.
탱탱하던 얼굴이 탄력을 잃으며 주름졌다.
다쳤던 왼발은 물론이고 멀쩡하던 다른 팔다리까지 뼈만 앙상한 모습이 되었다.
무공을 익힌 덕분에 단단하던 어깨가 축 처지며 한결 볼품없어졌다.
그러나 밖의 일행은 물론, 코앞에서 지켜보는 청빈마저도 일말의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
"으어어."
관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 노인의 모습을 한 위종이 침이 질질 흐르는 입으로 뭔가 토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위종의 노력이 무색하게 천공교검은 점점 진한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컥!"
끝내.
위종이 머리가 함몰된 괴이한 모습으로 축 늘어졌다.
'점괘술이 참으로 대단하구나.'
위종이 죽음으로써 천마의 점괘도 위종의 점괘도 정확함이 증명됐다.
찰칵!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청빈은 천공교검을 위종의 몸에서 뽑아냈고, 다시 천공교검에서 손잡이를 돌려 뽑았다.
그 순간, 짙은 보라색이던 검날이 순식간에 검푸른색으로 변화했다.
청빈은 검푸른색으로 변한 검날을 바닥에 던지고 왼손 손가락 두 개를 손잡이 안으로 집어넣었다.
잠깐 뒤적거리다 나온 청반의 손가락 사이에 보라색의 보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청빈은 손잡이마저 버린 다음, 보석을 손바닥 사이에 끼운 채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 중얼거렸다.
잠시 후, 다시 멀어진 손바닥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헤헤.
즐거운 듯 웃던 청빈이 몸을 돌려 구후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다들 청빈이 무슨 의도인지 궁금해하던 그때, 청빈이 오른팔을 돌려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풀썩.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동그라미를 본 일행은 경지의 높고 낮음과 상관없이 동시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작가의말
초콜릿 팔아서 부자 됐습니다. 곧 삼성이랑 카카오를 함께 인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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