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복산천占卜算天
세상엔 일흔두 개의 진법이 있다.
개중 서른여섯은 오행의 기운을 끌어당기는 술의 진법. 서른여섯은 음양의 기운 중 하나를 끌어당기는 무의 진법.
수호자는 상고의 존재가 아닌 그저 인간이다. 이들은 인간의 몸으로 상고 시대의 존재들이 남긴 기억을 받아들이고 진법을 깨우고 보수하는 역할을 맡았다.
술의 수호자들이 훨씬 일찍 깼고, 진법을 가동하고 보수했다. 서불은 서른여섯 수호자 중 가장 늦게 깬 자로, 앞선 자들의 기억을 모두 물려받았다.
즉, 서불은 서른여섯 개 술의 진법의 위치를 전부 안다.
마찬가지로 무의 마지막 진법 수호자인 위종 역시 서른여섯 개 무의 진법의 위치를 모두 알고 있다.
"연 선생. 그러니까 당신 사제는 왜 죽인 거지?"
구후영이 질문했다.
"그놈도 영생을 꿈꿨거든."
위종이 코를 실룩였다.
"당신처럼?"
"나? 난 아니야. 저런 몸이면 몰라도, 이런 몰골로 평생 살고 싶진 않아. 발이 멀쩡하더라도 말이지."
확실히 천마의 얼굴과 몸이면 오래 살아도 살맛이 날 만하다.
"그런데 이게 왜 당신을 도와 천마를 죽여야 하는 이유인 거지?"
팽창회가 질문했다.
"저자가 죽으면 서불의 기억이 수호자인 나한테 온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 기억은 그대로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방사는 부활할지 몰라도 수십 혹은 수백 년 이후 무인은 반드시 사라진다."
위종은 무공을 인질로 잡고 천마는 술법을 인질로 잡은 상황이다.
안타깝게도 일행 중 귀연 빼면 모두 무인이다.
둘 중 더 돕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왜 무인이 사라진다는 거지?"
옥무영이 질문했다.
"단전이 사라지니까. 음양의 기운이 장기간 불균형하니까 그에 대항해 인간의 몸에 단전이 생겼다. 진법이 모두 멈춰 균형이 이뤄지면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지극히 높은 확률로 단전이 없을 것이다."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단전이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뛰어난 재능에도 평생 삼류에 머무는 자들이 있다.
"내공만 사라지는 거잖아. 어차피 무공 초식은 그대로 아닌가?"
위종이 코웃음 쳤다.
"지금 내공과 무관한 초식이 얼마나 있지? 지금의 강호가 형성되는 데 최소 수백 년 걸렸다. 그런데 내공을 익힐 수 없어서 소림과 무당 그리고 아미 같은 문파들이 무너진다고 생각해 봐. 그 파장이 얼마나 클지."
위종의 말이 맞았다. 사천 지역의 유지 대부분이 아미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그런 상황에 아미가 무력을 잃으면 사천 지역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는 무당이 자리 잡은 호북 지역이라고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젠 대유방이 된 철혈방이 머릿수로 무당을 밀어버릴지도 모른다.
소림은 그나마 괜찮다. 가까운 지역에 큰 세력이 없는 건 물론이고, 무림 문파로서가 아닌 불문 성지로서도 꽤 입지가 탄탄하니까.
그러나 소림이 힘을 잃으면 주변에 흑도 방파들이 창궐할 거고,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서불이 사라진 이후 방사들이 저질렀던 짓을 생각해 봐."
위종과 천마 모두 강함의 끝에 있다. 모용건이 죽어 그 힘이 돌아오고 있는 지금, 서로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사대신협의 도움을 받으면 상대를 죽일지도 모르기에 위종은 일행을 설득하려 애썼다.
"마찬가지로 소림이나 무당 등도 어떻게든 과거의 영광을 유지하려고 온갖 애를 쓸 거고, 그 과정에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볼 것이다."
술법이 힘을 잃어가자 방사 혹은 도사들이 간교한 혀로 황제를 구슬려 나라를 망하게 한 일이 잦았다.
당나라가 불교를 대대적으로 밀어준 것 역시 도교의 껍데기를 쓴 방사들이 온갖 해악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왕중양이 나타나서 전진교를 세우며 도교의 사상을 재정립한 덕분에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지게 되었지만, 왕중양과 전진교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도교의 맥이 아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초 형은 뭐 할 말이 없소?"
팽창회는 천마를 싫어한다. 홍기영은 당연히 위종보다 천마와 더 친하지만, 이런 중대한 일에선 최대한 개인감정을 배제하는 사람이다.
풍불지는 종잡을 수 없다. 천마와 더 친하긴 하나 누구 편을 들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백 마디 옳은 말 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한 마디로 결정을 내리고도 남을 정도로 즉흥적인 사람이다.
악불형은 넷 중 유일하게 천마의 도움을 받은 자다. 팽창회 역시 오호단문도의 초식과 심법을 받긴 했으나, 그건 거래였지 도움이 아니었다.
"너희가 저자를 돕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천마가 워낙 잘생긴 얼굴을 더 잘생겨 보이게 하는 미소를 지었다.
"너희가 들어와 저자를 돕는다고 하면 난 도망칠 것이다."
그에 구후영이 손뼉을 짝 쳐서 일행의 주의를 끌었다.
"문이 열리면 천강구절을 돕습니다."
"왜?"
"위종은 어떻게든 천강구절을 죽이려 합니다."
머리꼬리 다 자른 대답이지만, 대부분 사람에겐 충분했다.
"게다가 위종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렵기도 하고 말이죠."
아까 모용건이 깨면서 천마의 힘이 유실될 때 위종은 너무 기고만장했다. 그 모습과 지금의 간절함을 동시에 떠올리면 위종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었다.
"결국엔 둘이 결판을 봐야겠군."
위종은 현재 결과에 만족했다. 비록 밖의 사람들을 설득해 같은 편에 세우지 못했지만, 천마를 돕는 길도 어느 정도 차단했다.
"결판이 나긴 나는 건가?"
풍불지가 물었다.
"새로 얻은 힘을 누가 먼저 소화하는지가 승패를 가르겠지."
대답은 천마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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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단절된 후 천마와 위종은 시진마다 한두 번씩 싸우는 걸 빼면 조용히 명상했다.
"뭐 하는 거지?"
청빈이 속삭여 질문했다.
"위종은 사제의 힘을 흡수하고 천마는 서불의 힘을 흡수하는 듯합니다. 중간중간 싸우는 건 상대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고요."
자신이 얻은 걸 숨기는 동시에 상대가 뭘 얻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는 매우 머리가 아픈 일로, 자칫 상대가 얻은 걸 알아내지 못한 채 자기 밑천만 털릴 수 있다.
그렇기에 천마와 위종 모두 극도로 조심하며 아주 짧게만 손속을 겨뤘다.
"둘 다 강함의 끝이라면서?"
"강한 것과 잘 죽이는 건 다른 얘기니깐요. 둘은 아마 상대를 죽일 방법을 얻으려 애쓰고 있을 겁니다."
그제야 현재 상황을 이해한 청빈이 한숨을 푹 쉬었다.
딴에는 구후영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몸을 던져서라도 한 번 막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왔는데, 상황을 읽는 것조차 힘들었다.
"우린 어떻게 해야지?"
"좀 더 상의해야죠."
문을 열면 천강구절을 돕기로 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만 남았을 때 어찌할지는 별개의 얘기다.
사대신협은 이에 관해 의견을 합치려고 지속하여 대화하는 중이었다. 옥무영은 사부인 풍불지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고, 원경은 구후영의 결정에 따른다고 했다.
팽창회는 누가 살아서 나오든지 무조건 죽인다는 쪽이고, 풍불지와 홍기영은 진법의 위치와 어떻게 보수하는지 등을 알아내자는 쪽이다. 죽일지 말지는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고.
악불형은 위종은 죽이고 천마는 적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위종을 죽이려는 사람은 둘이고 천마를 죽이려는 자는 하나다. 그렇기에 구후영의 의견이 매우 중요했다.
구후영은 원경까지 해서 두 개의 의견을 대표하기에 단번에 판도를 결정할 수 있다.
구후영이 팽창회와 같은 의견이라면 위종을 죽이자는 의견은 네 표가 된다. 천마를 죽이자는 의견은 세 표에 그치지만, 풍불지나 홍기영 중 하나만 설득하거나 옥무영을 같은 편으로 끌어오면 역시 다수 의견이 되고 만다.
그래선지 팽창회가 구후영의 눈치를 무던히도 보고 있었다.
그때.
천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서불의 재주 중에 점괘술이 있군."
길바닥에서 멍청한 자를 속이거나 그저 좋은 소리를 해서 기분 좋게 해주는 그런 하찮은 점괘술이 아니다.
술법의 한 갈래로 인간의 길흉은 물론이고 세상의 흐름과 왕조의 흥망성쇠를 정확히 알아내는 상고의 비술秘術이다.
"나한테 점괘가 있는데."
심심한 나머지 바닥에 선을 긋고 혼자서 바둑을 두던 귀연이 생기를 찾았다.
"그래. 동자가 날 대신해서 점괘를 던져주게."
귀연이 짐에서 점괘를 꺼냈다. 거북 등딱지, 사슴 넓적뼈 조각, 학의 부리, 그리고 뭔지 모를 물건들로 만든 일견 조잡한 점괘였다.
"북두의 위치를 밟고 서쪽으로 던지시게."
서불의 기억을 흡수해서일까? 천마의 말투가 조금 달라졌다.
귀연이 북두의 위치를 찾아 밟은 다음 서쪽으로 점괘들을 던졌다.
괜히 단단한 돌바닥에 부딪혀 점괘들이 부서지는 게 아닌지 걱정하던 일행은 눈앞의 결과에 깜짝 놀랐다.
백 개의 점괘 중 대부분은 바닥에 널브러졌지만, 세 개의 점괘가 누가 손으로 잡기라도 한 것처럼 꼿꼿이 섰다.
"길비흉吉非凶 흉비길凶非吉. 선흉필길先凶必吉 선길필흉先吉必凶. 극흉즉성極凶卽成 극길필실極吉必失."
점괘 결과를 읽은 귀연이 입을 헤벌리고 천마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지?"
천마의 굳은 얼굴을 확인한 풍불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귀연에게 질문했다.
"혼괘混卦라고. 해석은 당사자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귀연의 대답에 풍불지는 천마를 바라봤다.
천마는 풍불지의 눈길을 무시한 채 자리에 앉아 명상했다.
'흉이 길이고 길이 흉이라. 시작이 길하면 끝이 흉하고, 시작이 흉하면 끝이 길하다.'
앞의 두 구절은 쉽다.
길흉이 함께하는데, 둘이 섞인 게 아니라 순차적으로 온다는 뜻이다. 먼저 좋은 일이 생기면 끝은 반드시 흉하다.
마지막 구절은 어렵다.
극도로 흉하면 성공하고, 극도로 길하면 실패한다.
천마가 현재 하려는 일은 복수다.
극흉은 본인이 위종한테 죽는 거고, 극길은 본인이 위종을 죽이는 거다.
그런데 위종을 죽이면 복수에 실패하고 위종한테 죽으면 복수에 성공한다니.
이 무슨 개 같은 점괘란 말인가.
마치 여자와 동침하면 후손을 볼 수 없고, 안 하면 자식이 생긴다는 개소리하고 똑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저 점괘라고 무시하기엔 지금도 꼿꼿이 서 있는 학의 부리나 넓적뼈 조각이 의심의 여지를 없앴다.
"점괘를 받아들여 하늘의 뜻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힘을 믿고 역천逆天할 것인가."
다들 심란하던 그때.
위종이 입을 열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군."
위종을 죽이면 천마는 산다. 그러나 복수는 실패한다. 이게 말이 안 되지만, 서불의 기억을 받아들인 천마는 점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복수에 성공하려면 천마는 목숨을 던져야 한다. 그저 팔다리를 잘리는 정도론 극흉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면 충분한 영약만 있으면 잘린 팔다리를 회복하는 건 시간 문제니까.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있지."
위종이 천마를 향해 득의에 찬 웃음을 지었다.
"난 지금 필살의 일격을 날릴 것이다. 환허밀공은 공격할 땐 발동하지 않는다. 즉,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단 말이다. 네가 죽을지 내가 죽을지는 이제 전적으로 네게 달렸다."
말을 마친 위종이 지팡이를 들고 천마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천마는 앉은 자세 그대로 위종의 지팡이가 자기 심장을 쪼개는 걸 지켜만 봤다.
- 작가의말
아~아~
주최 측의 안내 말씀 있겠습니다.
천하제일무술대회 결승전에 참가한 두 선수가 오랜 대결 끝에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관계로 제비뽑기로 우승자를 결정하겠습니다.
30분 뒤, 유튜브에서 제비뽑기 과정을 생중계할 예정이오니 다들 부디 시청하시고, 널리 알리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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