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지성迷失之城
지하에 우뚝 선 거대한 궁전은 연기인지 안개인지 모를 하얀 것들로 자신을 희미하게 가렸다.
만약 심지가 약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염라전 앞에 와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면서 사시나무 떨듯이 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꽤 담대하다고 자부하던 일행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부들부들 떠는 추태는 부리지 않았지만, 궁전이 가까워질수록 하나같이 걸음 폭이 줄었다.
그 탓에 미약한 횃불의 빛으로 먼 궁전이 보이는 이상함에 관해 소홀하고 말았다.
"독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구후영이 앞장서서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하얀 것이 독인지 확인했다.
일행은 제자리에 멈춰 구후영이 돌아오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독은 아닌 것 같긴 하나 혹시 모르니 좀 더 기다려 볼까요?"
무려 일각이나 안개를 흡입한 구후영이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구후영이 이룬 백독불침은 진정한 의미의 백독불침과 다르다. 진정한 의미의 백독불침은 어떤 독이 들어와도 몸에 해를 끼치지 못하는 걸 말한다.
구후영은 독이 들어오면 아주 빠르게 기운으로 전환해 흡수하고, 흡수할 수 없는 건 밖으로 버리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진정한 백독불침을 이룬 자들이 독에 당했는지도 모르는 것과 달리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겠지. 여기까지 와서 고작 독 때문에 일을 망칠 순 없잖아."
신검과 옥무영은 내공이 심후해 웬만한 독에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홍기영은 내공의 회복이 빠른 거지 둘만큼 깊지 않다.
천마만큼 강한 소생자를 상대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홍기영은 필요한 사람이니 괜히 급한 마음으로 일을 그르칠 순 없었다.
다행히.
얼마 안 지나 분 시원한 바람이 궁전을 감싸던 흰 안개를 깨끗이 몰아냈다.
"장관이구나."
궁전은 그저 크기만 한 게 아니었다.
총 칠 층으로 된 이 석조 궁전은 좌우가 반듯하게 대칭됐고 기와 하나하나가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닿은 모습이었다.
처마나 벽이나 기둥도 온갖 아름다운 문양을 정교하게 새겨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옥황상제가 사는 궁전이라고 해도 믿겠다."
크기는 압도적인데 그렇다고 투박하지 않았다. 단지 외관이 보여준 품격만으로도 이 궁전은 평범한 자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자, 천천히. 천천히 갑시다."
일행은 아까 대열 그대로 움직였다.
선두에 선 구후영은 바닥과 난간에 새겨진 문양을 세심히 살폈다.
'신록神鹿?'
사신수는 동쪽의 청룡, 남쪽의 주작, 서쪽의 백호, 북쪽의 현무다.
그러나 고대엔 현무 말고 신록이었다.
현무가 신록을 대체한 건 춘추 말기다. 만약 이 지하궁전이 진시황 때 만든 거라면 북방을 상징하는 자리에 신록이 아닌 현무를 새겼어야 했다.
'지하도시도 그래. 절대 진시황이 만든 게 아니야.'
당장 명나라 황실에 지하도시나 지하궁전을 만들라고 하면 절대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고 기술도 투박했던 진나라 시절에 이러한 건물을 만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땐 보물에 눈이 멀어 이상하다는 생각을 아예 못 했지. 이번엔 정신 제대로 차리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일행이 궁전 대문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냥 열면 돼요."
기관 혹은 진법이 없는지 한참 살핀 귀연이 말했다. 그에 옥무영과 원경이 함께 대문에 달린 고리를 잡고 힘껏 당겼다.
끼익 소리와 함께 몇 장 높이의 커다란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먼지가 없다.'
지하도시는 원래 먼지가 있었으나 독 선생이 흔적을 숨기느라 치웠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구후영은 무엇보다 먼저 바닥을 살폈고, 쌓인 먼지가 거의 없음을 확인했다.
"누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닥에 먼지가 전혀 안 쌓였군요."
"아까 그 바람이 자주 분다면 먼지가 쌓일 틈이 없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먼지조차 안 들어올 정도로 밀폐되었다든가."
일행의 시야가 닿는 곳엔 문은커녕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창문으로 보였던 건 모두 벽에 새긴 문양일 뿐이었다.
"일단 누군가 있다고 가정하고 움직이는 게 낫겠지."
홍기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할 일이 뭐지?"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며 구경에 여념이 없던 풍불지가 질문했다.
"진시황을 찾아 죽여야지."
일행 모두 진시황을 죽이는 데 이견이 없었다.
역사상 장생불로에 심취한 황제가 여럿이었다.
개중 진시황은 국고를 거덜 내 중원 최초의 제국이 무너지게 했고, 한무제 역시 앞선 여섯 황제가 어렵게 마련한 밑천을 모두 털어버렸다. 다행히 그 뒤에 현명한 황제 둘이 연속 나타난 덕분에 나라가 망하진 않았으나, 거의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둘처럼 유명하진 않으나 나라를 말아먹은 왕은 더 있었는데, 이미 망할 나라에 멍청한 황제가 나타난 거여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천마처럼 강한 자가 황제 자리를 노리면 천하가 태평할 리 없고, 황제가 된 후에도 백성이 안락한 삶을 살 수 없어."
홍기영의 말에 '죽지 않는'이라는 수식이 빠졌지만, 다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글로만 접해도 두려운 진시황의 폭거를 수십 년도 아니고 수백 년도 아니고 수천 년, 심지어 수만 년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절로 모골이 송연했다.
"함께 다니는 게 낫겠지?"
"그래야지. 천강구절만큼 강한 자가 작심하고 죽이려 들면 누가 세 합 이상을 버틸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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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엔 어떠한 진법도 기관도 없었다. 그러나 일행 모두 작은 방심도 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일 층엔 아무것도 없네요."
칠 층의 궁전 중 일 층이 가장 컸다. 그런데 백 개가 넘은 기둥을 빼면 그저 휑했다.
"이 층으로 가지."
일행은 한쪽 귀퉁이에 있는 돌층계를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허!"
이 층에 올라가자마자 일행은 알몸을 한 수백 명 젊은 남녀가 잠자듯 누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일단 여자는 배제하고, 남자만 살피지."
일행은 재빨리 얼굴을 살펴 진시황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두 번이나 살폈음에도 진시황으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삼 층에 갑시다."
일행은 삼 층으로 갔고, 마찬가지로 수백 명의 남녀를 발견했다. 그러나 몇 번이나 살펴도 진시황은 없었다.
사 층과 오 층도 마찬가지였고, 육 층은 일 층처럼 비어 있었다.
"진시황이 천강구절처럼 동안은 아니겠지?"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이 의봉군체술을 시도한 건 불혹 이후다. 최소 불혹을 넘은 진시황이 수염을 깨끗이 밀었다고 쳐도 절대 십 대의 청년으로 보일 순 없다.
피부나 모공은 그렇다고 쳐도, 뼈대 자체가 청년과 확연히 차이 날 수밖에 없다.
"잠깐. 소생자는 나이를 먹지 않소?"
구후영의 질문에 위종이 대답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노쇠한다고 했소. 천마는 내공이 깊어 계속 젊은 모습이라고 들었으나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고 하오."
"근데 방금 우리가 살핀 사람 중에 나이 든 자는 하나도 없지 않았소?"
구후영의 말을 듣고 다들 고민에 잠겼다.
"어쩌면 한 번 소생한 자는 안 돌아올지도 모르지."
풍불지가 가설을 제기했다.
"소생한 자는 다른 곳으로 가고, 그곳에 진시황이 있다면?"
풍불지의 추측에 악불형이 반대했다.
"천마가 진시황이 있는 곳을 모른다면 우리 이번 출행이 무의미해진다."
그에 풍불지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일단 여기 있다고 믿고 최대한 찾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토론이 침체하자 구후영이 나섰다.
"최소한 여기서 진시황의 행방에 관한 단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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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흩어져서 단서를 찾기로 했다. 그러나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무작정 흩어지지 않고 둘이나 셋이 무리를 지었다.
구후영은 귀연과 청빈과 함께 일 층을 살피기로 했다.
"잠시만요."
비밀 문이 있는지 기둥과 바닥을 살피던 귀연이 갑자기 멈췄다.
"밖에서 볼 때 여기 몇 층이었어요?"
구후영과 청빈이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칠 층이었나?"
원하던 답을 들은 귀연이 손바닥으로 자기 얼굴을 짝짝 두드렸다.
"지금 우리 횃불이 없어요."
그제야 구후영과 청빈은 횃불 없이도 사물이 똑바로 보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자고 다짐했으면서도.'
구후영이 자책했으나, 딱히 구후영의 잘못은 아니었다. 구후영은 작은 빛만 있어도 대낮처럼 환히 볼 수 있어 사물이 잘 보이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밤눈이 어두운 청빈과 귀연이 이제야 알아챈 게 이상할 따름이었다.
"뭔가 문제가 있어요. 여섯 층밖에 없는데 칠 층 찾을 생각을 안 하고, 횃불 없이 밝은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한둘이면 지하궁전의 위압감에, 삼천에 가까운 '시체'에 놀라서 머리가 안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여기엔 사대신협의 셋에 구후영과 원경과 같은 젊은 고수 중에서 선두를 다투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동시에 바보가 될 리는 없으니, 그저 지하궁전에 사이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뭔지 알았다."
구후영이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무슨 수단인지 모르지만,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힘이 있어."
"진법은 아니에요."
귀연은 다른 건 몰라도 진법에 관해선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굳이 진법일 필요가 없지. 백만대군 앞에 서면 웬만큼 담대한 자도 벌벌 떨고, 갑자기 근처에 벼락이 치면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도 굳어버리지. 이 지하궁전의 규모와 구조면 충분히 위압감을 조성해 제대로 된 사고를 못 하게 압박할 수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려야지 않겠어?"
청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던 그때.
"위종이란 작자가 너희랑 함께 있었어?"
풍불지와 악불형이 일 층으로 내려와 질문했다.
"여긴 쭉 우리 셋밖에 없었는데요?"
귀연이 앞질러 대답했다.
"꼭대기부터 쭉 내려오면서 모든 사람과 대화했는데, 위종과 함께 움직였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풍불지와 악불형은 자신을 잘 안다.
둘 다 우둔한 사람은 아니지만, 단서를 찾는다든가 숨겨진 공간을 찾는다든가 하는 일엔 전혀 소질이 없다.
그렇기에 둘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일행의 안전을 보장코자 했다.
그런데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하던 중 갑자기 단 한 번도 위종과 마주친 적이 없음을 문득 깨달았다.
그에 육 층부터 시작해 '시체'까지 일일이 살피며 확인했고, 위종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일 층까지 내려왔다.
"안 그래도 이상한 점이 더 있습니다."
구후영은 자신들이 발견한 '칠 층과 육 층'의 비밀 그리고 횃불 없어도 시야가 확보되는 현상을 얘기했다.
"어, 진짜 그러네."
위종이 사라졌음을 늦게 발견한 것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거라곤 믿을 수 없는 웅대하면서도 섬세한 이 지하궁전엔 노강호라고 자부할 만한 악불형과 풍불지마저 홀릴 정도로 사이한 기운이 넘쳐났다.
"다 모여서 각자 어떻게 움직였는지 말해보는 게 좋겠어요. 우리 모두의 시야 사각이 바로 위종이 사라진 곳이 분명해요."
귀연의 제안에 풍불지가 사람들을 모으러 달려갔다.
- 작가의말
드래곤볼도 뒤로 갈수록 파워 인플레가 매우 심했죠. 초반에 에네르기파 하나로 놀라고 난리였는데, 뒤에 가선 손가락 튕기는 거로 지구를 소멸하는 정도죠.
무협 인기가 식어가는 게 이러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장르는 초사이언 3단계를 기본으로 깔고 가는데 여긴 아직도 에네르기파로 무쌍을 찍으니까요.그래서 다음부턴 세계관 자체의 파워를 키울 생각입니다. 물론, 파워가 클수록 밸런스 잡는 건 어렵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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