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수연화大手蓮花
전조도 없이 쏟아진 봄비가 작별도 없이 후다닥 사라졌다.
"좋구나."
봄비에 적셔진 부토腐土가 싱그러운 봄 내음을 잔뜩 풍기는 가운데, 등봉현에 하나밖에 없는 객잔의 한 객실에선 은은한 다향이 맴돌았다.
"차도 술 못지않게 풍미가 있구나."
옥무영이 아직 뜨거운 차를 단숨에 삼키곤 연신 감탄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원경이 말했다.
옥무영은 배분을 따지면 구후영의 사형이지만, 나이는 구후영의 사부인 임초현이나 원경의 어머니인 취연보다 많다.
입으론 형과 아우로 부르지만, 구후영도 원경도 옥무영을 연장자로 대했다.
둘이 차로 심심한 입을 달래던 중, 구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땅한 약재가 없어서 보혈하는 약과 간의 기운을 북돋는 약만 달였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의원이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으나, 사실 취연은 딱히 아픈 데가 없었다. 가난한 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나이는 드는데 먹는 건 점점 부실해지며 몸이 허약해졌을 뿐이다.
그대로는 진짜 오래 못 살 거겠지만, 원경을 만나고 구후영을 만난 지금은 다르다.
"아무래도 서안부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안물한테 보여 보약으로 몸을 추스르지 않으면 평생 잔병치레를 면치 못할 겁니다."
필요 없는 걱정은 덜고 더불어 해결책도 찾고.
"네 침술로는 안 되느냐?"
원경은 어머니가 하루라도 빨리 건강한 모습이 되길 바랐다.
"약은 내공 같은 거고, 침술은 운기 같은 겁니다. 내공이 없는데 운기가 무슨 소용입니까?"
사람이 아픈 건 기운의 흐름이 원활치 않아서다. 침술은 기운이 정체되는 곳을 자극해 소통을 회복게 하는 거로 병을 고친다.
그러나 취연은 기운의 흐름이 아니라 기운 자체가 약해진 거기에 침술만으론 소용없다.
문제는 구후영이 병을 치료하는 처방이나 알지 몸에 좋은 보약에 관해선 조예가 깊지 않다. 몸이 어느 정도 건강한 사람이면 약을 대충 써도 괜찮을 텐데, 취연은 약 기운이 강하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
"안물이란 작자는 돈밖에 모른다고 들었는데."
"아우, 걱정하지 마라. 나나 사제나 돈에 쪼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맞습니다. 제겐 돈이 많습니다."
"고맙다. 형님도 고맙습니다."
원경은 옅은 잠에 든 취연을 깨워 구후영이 달인 약을 먹인 후 다시 재웠다. 그 모습에 예전에 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라 구후영은 콧등이 시큰했다.
옥무영 역시 열두 살에 무당으로 가면서 어머니와 자주 보지 못한 탓에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런데, 원정이 왜 그랬을까요?"
취연이 다시 쌔근거리며 잠들자 원경이 옥무영에게 질문했다.
"어차피 오정이 방장이 되면 원자 항렬은 원로가 되어 실권을 잃는데, 왜 치부를 들추면서까지 숙청했을까요?"
"사제, 너도 영문을 모르겠느냐?"
옥무영의 질문에 구후영이 고개를 저었다.
"너흰 무공이 강한 게 참 다행이다. 아니면 절대 내 나이까지 못 산다."
"거기에도 뭔가 뜻이 있는 겁니까?"
구후영의 질문에 옥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봉문이 뭔지는 너희도 알지?"
구후영과 원경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소림이 왜 봉문해야 하는지 말해줄게."
옥무영의 말에 둘은 기대로 눈을 빛냈다.
"요새 강호가 평소 같지 않은 건 너희도 느꼈지? 마교의 일도 그렇고, 호북의 일도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얼마나 커졌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황제도 거의 귀문관鬼門關까지 간 걸 네가 끌어왔다는 소문이 있고."
"맞습니다. 저도 이번 일이 소림과 무당을 싸우게 하여 강호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림은 봉문을 선언했다. 오늘부터 삼십 년 동안 강호의 모든 은원에서 한발 비켜나는 거지. 강호가 혼란스러운 지금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없구나."
봉문은 문을 닫아걸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단 뜻이 아니다. 스님들은 여전히 소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다만 강호의 시비에 일절 끼어들지 못하며, 누군가 시비를 걸어도 절대 무공을 펼칠 수 없다.
즉, 이제부터 밖으로 나가는 소림승은 무공 고수가 아닌 그저 스님일 뿐이다.
"그렇군요."
대신, 누군가가 봉문한 소림 제자를 다치게 하거나 죽인다면.
소림은 모든 힘을 기울여 복수한다. 봉문을 선언한 소림이 강호의 일에 나서지 못하는 건 맞지만, 창으로 심장을 쑤시는데도 겨울잠 자는 곰이 절대 안 깨는 건 아니다.
"강호가 어지러운데 소림은 약해지고. 마침 역근경과 세수경을 해독할 시간도 필요하고."
원경 역시 느끼는 바가 큰지 연신 중얼거렸다.
"하지만, 봉문한 소림은 어쨌든 강호로 나가는 게 불편한 상황이다. 이럴 때는 누군가가 대신 움직여주면 좋지."
"속가 말씀입니까?"
소림이나 아미나 속가가 넓은 지역에 분포되었다. 특히 소림의 속가는 각 지역의 유지인 경우가 많아 굳이 무력이 없어도 만만하게 여길 수 없다.
"아니. 파계승."
"파계승?"
원경이 눈을 껌뻑이자 옥무영은 기가 차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 어쩜 소림 제자인 네가 나보다 더 소림을 모르느냐."
차로 목을 살짝 축인 옥무영이 자세히 설명했다.
"소실산 아래엔 절간이 열 개 넘게 있다. 그 모든 절간이 소림인 건 아니다."
원경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개중 그나마 규모가 좀 되는 소림동원, 소림서원, 소림남원, 소림북원, 소림외원은 소림의 파계승을 맡아 관리하는 역할이다."
승적을 박탈했고 쫓아냈다. 그러나 소림의 영향력 아래 있는 가까운 절간에 기거하며 여전히 소림을 위해 움직인다.
"원정처럼 젊은 제자가 사십 중반이고, 대부분 오십에서 육십 사이다. 무림인으로선 경험과 무공 모두 절정인 나이지."
삼십 대가 육체적으로 가장 완벽하고, 사십에서 육십 사이가 내공 면에서 가장 완벽하다.
"시간이 흐르면 강호 활동을 멈춘 소림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멍청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십수 명의 소림에 충성하는 파계승이 그런 멍청이가 멀쩡하게 숨 쉬게 보고만 있진 않겠지?"
"그 짧은 사이에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단 말입니까?"
"그런 거 같아. 다만, 이게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궁금할 뿐이지."
옥무영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때에 맞춰 당사자가 나타났다.
"원정이오. 원경이랑 잠깐 대화했으면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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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오?"
옥무영과 구후영은 객실에 남고, 원경과 원정만 따로 앉아 대화했다.
"전해줄 말이 있다."
원정은 원경이 듣고 싶은지 묻지도 않고 바로 이번 일의 전말을 자세히 전달했다.
물론, 원정이 모르는 부분은 추측으로 때웠지만, 그래도 모든 흐름이 얼추 맞았다.
"내가 나선 건 원호 사형이 구후영의 손에 죽게 놔두면 큰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사형이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자신에게 태형을 내려달라고."
"양심의 가책이오?"
"아니. 시간을 벌려는 거지. 태형을 당하는 내내 사형은 내게 어떻게 소림을 지킬지 알려줬다."
원경은 얼굴을 작게 꿈틀거렸으나, 그 이상의 감정은 표현하지 않았다.
"소림을 수호할 파계승 십수 명을 만든 것도 원호의 뜻이었소?"
"내가 널 잘못 봤구나."
원정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른 사형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찌 알겠느냐. 다 원호 사형이 알려준 거지. 오정한테 방장 자리를 넘긴 것도 사형의 지시였다."
"그럼 오정이란 자도 원호의 지시대로 움직인 허수아비란 말이오?"
그에 원정이 고개를 저었다.
"사형은 기절하기 전까지 내게 끊임없이 전음을 보냈다. 절대 아니라고 하긴 어렵지만, 내 생각에 사형이 두 사람에게 다른 전음을 보낼 정도로 경지가 높은 것 같진 않구나."
오정이란 자는 소림 방장을 맡겨도 될 정도로 출중한 자라는 말이었다.
"역근경과 세수경을 얻고 봉문으로 강호의 분란을 피하게 됐다고 자랑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날 찾아온 이유가 뭐요?"
"사형의 부탁 때문이지."
원호의 부탁이란 말에 원경은 긴장으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부탁이요?"
"아버지의 사랑 따윈 기대하진 마라. 원호 사형이나 원병 사형이나 무엇보다 소림이 우선인 사람이다."
"기대 따윈 애초에 없었소."
속마음과 다른 얘기를 하며 원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행이구나. 우선, 여인을 겁탈한 건 심마 때문이다. 보리심공을 익히다가 어마어마한 심마가 와서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 저지른 짓이고, 정신을 차린 다음 그곳에 돌아가서 동굴을 찾았는데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그저 악몽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
"이젠 상관없는 일이오."
"그리고 널 구한 거."
원경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원정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사형은 어차피 보리심공을 대성하지 못할 거 알고, 언제든 원병과 원철에게 추월당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원까지 상해가며 네 목숨을 구했다. 덕분에 파공으로 보리심공을 잃었지만, 방장 자리를 차지했지."
"제길."
원경이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자비심으로 구했으면 자라는 동안 널 계속 지켜봤겠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이 구한 아이가 너인 줄도 모르고 있었잖아."
"무슨 얘긴지 알겠고,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마지막 일말의 기대까지 버린 원경은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굳이 찾아와서 알려주는 건 심술 때문이오?"
"허허."
원정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달마원에 갔을 때 사숙께서 소림의 그릇이 작아 널 담을지 모르겠다더구나."
"그랬소?"
"오늘 내가 느낀 소림의 그릇은 작으나 단단하다. 사실 그릇된 욕심으로 일이 엉망이 되었는데, 결과도 좋고 수습도 잘되지 않았느냐? 그 과정에 사람이 죽긴 했지만."
원정은 오득과 원호를 떠올리며 작게 한숨을 지었다.
"문제는 네가 소림보다 크고 더 단단한 것 같단 말이지. 이렇게라도 해서 네가 소림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는 발 뻗고 자지 못할 것 같더라."
"그게 목적이라면 기우라고 말하고 싶소. 난 애초에 소림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소."
"그래. 잘됐구나. 그래도 서로 이렇게 속내를 확실하게 보이니 훨씬 편하지 않으냐?"
"맞는 얘기요. 얘기해줘서 고맙소."
원경이 비꼼 하나 없이 진심을 담아 말하자 원정은 애석한 마음이 들었다.
'소림의 그릇이 조금만 더 컸어도.'
"그래도 사형을 너무 미워하진 말아라. 부자의 정을 생각해서 꼭 네게 전하라고 특별히 분부한 말이 있으니."
"부자의 정을 생각해서 들어줄 테니, 편히 얘기하시오."
원경이 담담하게 대응했다.
"네가 얻은 금강인은 완성이 아니다. 금강불괴신不壞身, 금강불괴심心, 금강불괴의意 셋을 다 얻으면 卍이 아니라 十 모양이 나와야 맞는다."
"사부께 들어서 알고 있소."
"연화인을 얻는 방법도 말해주더냐?"
원정의 질문에 원경이 고개를 저었다.
"토번으로 가라. 가서 대수인을 배워라."
"대수인?"
"탁발효선이 역근경과 세수경을 읽고 만든 대수인. 대수인을 대성하면 연화인을 얻을 수 있다. 금강인과 연화인 모두 얻으면, 넌 어쩌면 천마를 능가하는 무인이 될지도 모른다."
말하는 원정의 눈이 격동으로 빛났다.
- 작가의말
소림과 원경의 거리를 벌리려는 건지, 원경과 소림의 거리를 벌리려는 건지는 원호만 아는 거로.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는데, 2부의 마무리는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황궁은 3부 중반의 내용이고 마무리가 소림이었습니다.
즉, 3부의 마무리였던 소림을 3부의 초반으로 끌어왔습니다.
이는 기존 사건 순서론 개연성을 살리는 게 어려워서 내린 결단입니다. 사건 A와 사건 B 다음이 황궁과 소림이었는데, 현재는 황궁, 소림, A, B의 순서가 되었단 얘기죠.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소림 파트는 3부의 마무리로 아주 굴곡적으로 짰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앞으로 당겨서 뼈대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 살이 너무 잘 붙었습니다. 솔직히 제 현재 필력의 한계를 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탓에 A와 B가 너무 밋밋해졌습니다. A와 B에서 의문을 심고 궁금증을 유발하여 소림에서 빵 터뜨릴 생각이었는데, 번개가 치기도 전에 우레가 먼저 울어버린 격이 됐죠.
그래서 A와 B를 다시 쓸 생각입니다. 기본 뼈대는 유지하나 사건을 추가하고 흥미로운 인물도 추가하여 소림 파트와의 낙차를 최대한 줄이려 합니다.
중이염은 거의 나았고 약의 후유증도 약해서 이대로 연재를 이어가려 했었지만, 뒷부분을 읽으면서 처지는 느낌을 받았고, A와 B에 소림처럼 색을 입히려는 욕심도 생겼습니다.
올해 안으로 꼭 완결하겠다는 약속과 남은 분량을 최대한 잘 쓰고 싶은 욕심을 적절히 가늠하여 9월 중순쯤에 다시 연재할 생각입니다.
응원 혹은 지적으로 애정을 보여주신 분들께 송구하고, 부족한 글 추천해주신 분들께도 미안합니다.
건강 때문이나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라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욕심 때문이니 또 한 번의 연재 지연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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