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동인十八銅人
당나라 시절의 소림은 무공을 익히는 스님이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무공에 푹 빠진 젊은 법여는 대련 상대가 궁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인을 직접 설계하고 주조해 자신의 적수로 삼았다.
하지만, 법여는 무공이 일취월장하는 데 반해 동인은 정해진 움직임밖에 보이지 못해 대결이 점점 시시해졌다.
그에 법여가 심혈을 기울여 십팔 개의 동인으로 진법을 구성했는데, 투로套路가 다양하여 수련에 큰 도움이 됐다.
강호의 다양한 소문과 다르게 십팔동인진이 탄생한 진정한 배경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십팔동인진은 법여의 경지가 높아짐에 따라 함께 강해졌고, 칠십이절기가 십팔동인진에서 비롯됐다는 소문 때문에 대단한 명성을 떨치게 됐다.
천 년 가까운 기간 십팔동인진을 통과한 사람이 셋밖에 없을 정도로 실제로도 대단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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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최종필은 글자도 제대로 못 익힐 정도로 머리가 나쁘다. 대명삼대포두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건 이게 사람인가 싶은 정도로 대단한 직감 덕분이었다.
"우문현 이 개잡놈의 새끼가."
진법은 음양·삼재·오행·육합·팔괘·구궁을 꽤 깊은 수준으로 익혀야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학문인데, 익히는 데 드는 공이 열이라면 하나만큼의 실효實效도 없어 아주 사장되다시피 했다.
당연히 글 익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최종필이 진법에 관해 아는 게 있을 리 없지만.
"날 함정에 밀어 넣었네?"
뛰어난 감으로 알아차렸다.
"함정인 걸 빼면 다 진실인 것 같으니, 일단 사람부터 찾자."
최종필은 실리적인 사람이고,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다. 이왕 속은 김에 화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단 길잡이 형제의 행방부터 찾기로 했다.
그런데.
"최 포두가 여긴 어떻게?"
최종필이 길잡이 형제를 찾아내기 전에, 길잡이 형제가 먼저 최종필을 발견했다.
"소림에서 두 분을 데려갔다고 해서 구하러 왔소."
최종필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장 대협이 어지간히 좋나 보오."
"무슨 섭섭한 소릴. 구후 대협께서 이미 날 장선 대협께 연결해준다고 약속했는데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두 분을 찾으러 온 거요."
진실을 파헤쳐 구후영을 도우려면 길잡이 형제의 증언이 필수다. 최종필은 둘을 싫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처럼 친한 척을 해댔다.
그때.
형제의 뒤로 머리카락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긴 젊은 스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주가 말한 구후 대협이 혹시 구후영이오?"
'누구지?'
스님이 말할 때 술내가 진동해 코가 썩을 것 같았다. 대충 걸친 승복은 물때와 기름때로 거지조차 마다할 정도로 더러운데 신발만 바닥에 가죽을 대고 콧등에 작고 동그란 수구繡球를 단 비싼 놈을 신었다.
"그렇소."
비록 상대의 정체가 의심스러웠지만, 형제와 아는 사이로 보였다. 그에 최종필도 머리를 굴리는 대신 솔직히 대답했다.
"내 동생이랑 아는 사이요?"
최종필은 그제야 눈앞의 스님이 바로 원경임을 알아챘다.
'공유 스님의 유일한 제자가 이런 사람일 줄이야.'
백련교는 불교의 정토종淨土宗의 지파 중 하나인 백련종이다. 문제는 송나라 때 관의 탄압을 받은 마니교의 교도들이 대거 백련교에 들어오면서 백련교가 마니교라는 인식이 생겨버렸다.
이러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더 심해졌는데, 심지어 순수한 백련교 출신도 자신과 마니교 출신을 동일시했다.
최종필은 마니교가 아닌 순수 백련교도로서, 술과 고기를 입에 대고 비싼 신발을 신은 원경이 전혀 고깝지 않았다.
그러나 싫은 건 싫은 거고.
"소림 방장이 원경 스님을 공유대사를 살해한 흉수로 지목했소."
우선 진실을 확인해야 했다.
"혹시 방장의 말이 사실이오?"
"틀린 말은 아니오."
원경의 눈이 음울하게 빛났다.
"내가 오대산에서 자신을 초 선생이라고 소개한 자와 내기해서 진 바람에 독단을 삼켰고, 사부께선 내 해독을 돕는 과정에 내공을 전부 잃고 돌아가신 거요. 원래 다한 수명을 나 때문에 억지로 잡고 계셨던 것이니, 내가 흉수인 거나 마찬가지요."
'방장은 이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돌파구가 생겼다는 생각에 최종필은 피가 끓는 느낌이었다.
"어떤 내기를 한 거요?"
"무공을 겨뤘는데, 지면 독단을 삼키고 이기면 역근경과 세수경을 받기로 했소."
너무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란 최종필은 갓 끓기 시작했던 피가 싸늘하게 식은 느낌이었다.
"역근경과 세수경은 소림 거 아니오?"
"달마 조사의 유일한 제자인 혜가 스님이 주해를 단, 한문으로 된 역근경과 세수경이오. 달마 조사가 남긴 건 범문으로 되었는데, 범문 역시 그간 많이 달라져서 현재로선 해석이 어렵소."
원경의 대답에 최종필의 머리가 팽이처럼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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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로 백련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술을 입에 댄 적도 없는 최종필이다. 그래서 처음엔 스님이면서도 술을 마시는 원경이 싫었지만, 대화하면서 생각이 달라졌고 돕고 싶은 마음마저 생겼다.
"이번 일은 이상한 데가 한둘이 아니오."
최종필은 자신이 소림에 도착한 다음 보고 들은 모든 일을 원경한테 자세히 들려줬고, 의문스러운 점도 하나둘 열거했다.
구후영의 검이 항주에 나타난 일. 그 검이 공유의 가슴에 꽂힌 일. 소림이 공유의 죽음을 공개한 일. 무림대회를 소집한 일. 구후영을 흉수로 몰려고 무당의 혐의를 쉽게 벗겨준 일. 급작스럽게 원경이 흉수라고 발표한 일.
"제일 의심스러운 건, 우문현이 날 여기로 유인한 거요."
우문가는 강호에 유명하지 않으나 관에선 팽가와 비교해도 손색이 얼마 없는 대단한 가문이고, 우문현은 정직하고 청렴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허명이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소문은 과장이나 왜곡이 있을망정 없는 걸 만들어내진 않소."
소문만큼은 아니어도 우문현은 정직한 사람이다.
"짐작 가는 이유라도 있소?"
원경이 질문했다.
"우문현은 성격이 담백한 편인데, 무공에 관한 욕심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크다고 보오."
"원호가 대단한 무공을 알려준다고 유혹했다는 뜻이오?"
원래 버릇이 없는 건지, 최종필의 말을 듣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원경은 소림 방장을 승호로 불렀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소림은 속가에 무공을 어디까지 가르치는 거요?"
최종필의 질문에 원경이 난처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문파에 관심이 별로 없다 보니."
"그건 우리가 아는데, 속가엔 칠십이절기 중 위력이 약한 몇 개까지만 허용하오."
소림의 무공은 수련이 고된 대신 초식 자체는 복잡하지 않다. 형제도 한때 소림의 속가제자가 되려고 알아본 적이 있어 원경 대신 대답했다.
"우문현이 그 정도로 만족하진 않았을 테니, 뭔가 더 대단한 무공을 미끼로 걸었다는 건데."
최종필이 꺼낸 가설은 바로 형제한테 부정당했다.
"그럴 리 없소. 소림은 선대가 남긴 규칙을 지키는 걸 무엇보다 우선하오. 아무리 방장이어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을 거요."
잠깐 고민한 최종필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우문현이 평소라면 절대 안 할 짓을 했고, 그럴 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소. 그 이유가 무공일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소림에도 규칙을 깰 만한 사정이 있다는 거 아니겠소?"
길잡이 형제와 원경 모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뭐가 됐든, 여기서 나가 방장의 거짓말을 폭로하면 구후 대협을 도울 수 있소."
우문현은 뭔가를 탐내 평소라면 절대 안 할 짓을 했다. 평생 그렇게 중요시한 진실을 찾는 것마저 뒷전인 채로.
최종필은 원래부터 사명감이 강한 인간이 아니었는데, 원경과 함께 나가서 공을 세우면 장선의 제자가 되어 여의권을 배울 수 있단 생각에 더더욱 진실이 뒷전이었다.
그런데.
"이틀 동안 찾았는데, 길이 없소."
희망에 부푼 최종필에게 형제가 얼음물을 끼얹었다.
"왜?"
최종필은 신혼 첫날밤에 새색시를 도둑맞은 신랑처럼 억울하고 화난 심정이었다.
"진법으로 막힌 것 같소."
"저 개소리가 사실이오?"
형제의 말이 믿기지 않은 최종필이 고개를 돌려 원경에게 질문했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요. 방금 만나서 몇 마디 나누지 못했는데 최 포두가 나타나서 대화가 중단됐소."
원경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구후영이 살짝 겹쳐, 최종필은 화가 잔뜩 치민 상황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 사람이어서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아니면 자신감이 넘쳐 대단한 사람이 된 걸까?'
원경에 관해선 오늘 처음 알았지만, 방장이 공유를 죽인 흉수로 원경을 지목했을 때 반대하는 스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진실과 무관하게 원경의 실력이 공유를 해칠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정녕 아무런 방법도 없소?"
"길은 없는데, 뛰어내리면 나갈 수 있는 낭떠러지는 있지."
말을 마친 형제가 앞장서고, 원경과 최종필이 뒤를 따랐다.
"여기요."
물 한 주전자 끓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일행 앞에 음침한 동굴이 하나 나타났다.
"이 동굴을 통과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소."
"근데 왜 안 나간 거요?"
"동굴 안에 십팔동인진이 있소."
"십팔동인진이라면, 백팔나한진보다 더 어렵다는 그 진법 아니오?"
백팔나한진은 필경 사람으로 이뤄졌다. 무려 백팔 명이 되기에 한둘이 실수한다고 진법이 무너지거나 하진 않지만, 어쨌든 틈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십팔동인진은 무려 당나라 때 만든 거지만, 천 년 가까이 된 지금도 그 원리를 깨우친 사람이 없다. 위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십팔동인의 단단함 역시 어떤 병장기로도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 대단한 진법이 이렇게 허름하고 음침한 곳에 있다고?'
형제의 말이 믿기지 않은 최종필은 동굴 입구에 있는 글자들을 찬찬히 뜯어봤다.
'저건 십이고 저건 팔이고 저건 인이고.'
다행히 낯익은 놈이 몇 있었다. 그러나 낯선 놈이 훨씬 많아 최종필은 낯가림을 타기로 했다.
'이들이 날 속일 이유는 없으니 사실이겠지.'
그때, 걷는 내내 뭔가 고심하며 입 한 번 열지 않던 원경이 최종필에게 질문했다.
"소림이 왜 내 동생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라고 생각하시오?"
"그 초 선생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방장한테 구후 대협을 죽여달라고 한 게 아니겠소?"
어차피 진실은 뒷전인 최종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은 별생각이 없었어도 듣는 사람은 아니었다.
'동생이 위험하다.'
술에 절어 묵직했던 원경의 머리가 영활하게 돌아갔다.
'원호는 사부의 가슴에 꽂힌 검이 동생 거고, 동생이 봉마림에 있다고 했다.'
원경은 문파의 일에 관심이 별로 없다 보니 봉마림에 진법이 있단 사실을 미처 몰랐다. 그 바람에 별로 대단치도 않은 방장의 꾀임에 순순히 넘어갔다.
'내가 동생을 구해야 한다.'
마음을 굳힌 원경이 정색한 얼굴로 셋한테 말했다.
"난 지금 동굴로 들어가서 십팔동인진을 부술 거요."
셋은 원경의 말에 놀라 입을 헤벌리고 듣기만 했다.
"세 분은 반 각 뒤에 들어오시고, 밖으로 나가면 등봉현登封縣에 가서 사람 하나 찾아서 소림으로 데려오시오."
찾아야 할 사람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마친 원경이 대답도 듣지 않고 동굴로 사라졌다.
- 작가의말
십팔동인진은 법여가 무공을 수련하려고 만든, 달마가 천축을 떠날 때 들고 온 메인보드를 이용해 만든 세계 최초의 AI 탑재 로봇입니다. 로봇은 우주선에 쓰는 합금으로 만들어서 절대 부서지지 않고, AI는 자율학습형이라 끊임없이 강해집니다.
바둑에 알파고가 있다면 무림엔 십팔동인진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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