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역망順昌逆亡
부음양夫陰陽 사시四時 팔위八位 십이도十二度 이십사절二十四節 각유교령各有敎令 순지자창順之者昌 역지자불사즉망逆之者不死卽亡.
사기史記·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나오는 말이다.
사시는 일 년을 사계절로 나눈다.
팔위는 일 년을 팔괘에 따른 여덟으로 나눈다.
십이도는 해와 달과 다섯 별의 위치로 일 년을 열두 개로 나눈다.
이십사절은 일 년을 입춘에서 시작해 대한으로 끝나는 이십사 개 절기로 나눈다.
음양가들이 일 년을 이리 다양하게 나누는 건 각 시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사시를 예로 들면, 봄에 뿌리고 여름에 키우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엔 종자를 지킨다.
팔위로 예를 들면, 진에 싹이 트고 손에 자라고 이에 형태를 이룬다. 곤이 되면 성장이 멈추고 태가 되면 열매를 떨군다. 건에 추위가 오고 감엔 만물이 잠들며 간에 깰 준비를 한다.
세상의 법도는 이리도 엄정하니, 이를 따르는 자는 창성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죽지 않더라도 망할 것이다.
황제 역시 신한천과 구후영의 순리에 따른 치료 덕분에 약에 상했던 오장육부가 회복하며 자연스럽게 깊고 오랜 잠에서 깼다.
"폐하, 절 알아보시겠습니까?"
황후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동梓童(황제가 황후를 부르는 호칭) 아니오?"
황제가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소자도 있습니다."
"태자도 있었군. 근데, 무슨 일로 여기 몰린 거요?"
"폐하. 오늘이 팔 월 삼 일입니다."
황후의 말에 황제가 화들짝 놀랐다.
"과인이 그리도 오래 잤단 말이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신 명의가 직접 설명할 겁니다."
황후가 신한천을 가리켰다.
"아니. 그대는 신 어의 아닌가? 과인이 지금 꿈을 꾸는 겐가?"
궁녀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킨 황제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죄인 신한천이 폐하를 뵙습니다. 그간 폐하께서 드신 단약이 독이 되어 용체를 갉아 먹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황후 마마의 충절과 태자 전하의 효심에 감동하여 이리 회복하셨습니다."
황제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몸을 갉아 먹었다기엔 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팔다리엔 힘이 잘 안 들어오나, 몸은 잠들기 전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지는구나."
"신 명의와 구후 태의의 공이 컸습니다."
황후가 말했다.
"구후 태의?"
"여기 구후 태의는 신 명의의 관문제자입니다. 신 명의가 앞을 못 보아 구후 태의가 대신 손발이 되었습니다."
황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구후영에게 말했다.
"구후 태의는 얼굴을 들어 과인을 보라."
구후영은 분부대로 얼굴을 들었으나 황궁 예법에 따라 눈길을 황제의 침대 아래에 뒀다.
"오호. 선기가 넘치는 상이로다. 신선술을 익혀 후천지기의 침해를 안 받고 선천지기를 지키면 상이 은은히 밝고 눈에 맑은 정기가 머문다고 하더니. 태의는 분명히 과인을 선계로 데려갈 인로동자引路童子가 분명하다."
구후영의 얼굴을 본 황제가 기쁘게 외쳤다.
"태의를 어의로 승진하여 곁에 두고 싶은데, 황후의 생각은 어떻소?"
"폐하. 태의는 무공을 익힌 무인입니다. 상이 밝고 눈에 정기가 넘치는 건 강호에 유명한 고수기 때문이지 신선술을 익혀서가 아닙니다."
"무슨 소리요. 과인이 무당과 소림의 대단한 고수도 봤건만, 태의처럼 귀한 상은 아니었소."
"폐하, 태의는 신검과 검을 논할 정도의 대단한 고수입니다. 이번에 태극혜검을 남기고 우화한 무당의 현현자 역시 태의와 내공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황후의 말에 황제가 이마를 찌푸렸다.
"태의가 직접 말하라. 그대는 진짜 신선술을 익히지 않았는가?"
"소신은 신선술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럼 왜 얼굴에 선기가 머무는 건가?"
마음을 단단히 조인 구후영이 황제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실 폐하는 소신이 치료한 게 아닙니다."
"그럼?"
"상고신의上古神醫 편작扁鵲이 소신의 몸을 빌려 폐하를 치료한 겁니다."
구후영의 말에 황제가 기쁘게 웃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냐?"
"아니면 일개 무부인 제가 어찌 열 살도 되기 전에 잠깐 배운 솜씨로 신 명의의 침술을 펼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구후영이 말을 하다 말았다.
"뭐냐. 어떤 말을 해도 탓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의선醫仙께서 육신의 수행은 충분하니 단약을 끊고 마음을 다스리라 전했습니다."
"과유불급이라더니. 과인이 탐념에 눈이 가려 금기를 범했구나. 참으로 큰 죄업이로다."
황제가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선연仙緣은 가우불가구可遇不可求(원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뜻)라고 하더니, 과인이 더 욕심을 부리면 안 되겠구나."
황제의 말에 구후영은 큰 시름을 덜었다.
'공현 아니면 큰일 났겠구나.'
공현이 알려준 방법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어의가 되어 평생 황궁에서 지낼 뻔했다.
"폐하. 신선은 아무 몸에나 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폐하를 살린 건 의선이지만, 신 명의와 구후 태의한테도 상을 내려야지 않겠습니까?"
"지당한 얘기요. 그럼, 신 어의를 태의원 우원판右院判에 즉시 임명한다."
신한천이 바닥에 엎드려 만세를 불렀다.
"구후 태의는 과인을 살린 것도 모자라 의선의 말씀까지 전했는데, 재동은 무슨 포상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오?"
그에 황후가 입을 열었다.
"폐하. 천하에 선연이 닿는 자가 또 있을지 모르니, 구후 태의한테 면사금패를 내려야지 않겠습니까."
구후영은 긴장한 나머지 몸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소리요. 선기를 품은 자는 하늘이 지켜줄 텐데, 굳이 면사금패가 왜 필요하단 말이오."
구후영은 다른 의미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의 혜안은 당할 수가 없군요."
황제의 비위를 맞춘 황후가 공현에게 눈짓했다.
"폐하. 구후 태의는 송나라 말에 목숨으로 양양의 지사들을 지킨 홍엽산장의 직계 후손입니다."
황후의 눈치를 받고 공현이 나섰다.
"과연. 의선께서 바르지 않은 자에게 들 리가 없지."
"게다가 작년에 철혈방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태의가 방주가 된 이후로 철혈방은 기왕의 무도한 행동을 뉘우치고 무당의 가르침을 받아 교화했으며, 진무대제(장삼풍)를 기리는 진무관을 짓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공현의 말에 황제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호북은 물론 귀주까지 안정되었습니다."
"참으로 공이 크구나."
그에 구후영이 넙죽 엎드렸다.
"철혈방은 과거의 과오를 뉘우치고 조정에 충성하며 지방의 안녕에 이바지하려 합니다. 철혈 두 글자는 살기가 강한 듯하니, 폐하께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기를 감히 청하옵니다."
'이럴 땐 또 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구후영이 계획에 없던 청을 올리자 공현이 속으로 감탄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황제가 잠깐 고민하고 입을 열었다.
"주역의 열네번 째 화천대유火天大有의 괘가 순천의시順天依時를 뜻하니, 철혈방에 딱 알맞겠구나. 어지御旨를 내려 철혈방에 대유방의 이름을 하사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구후 태의의 공을 생각하면 포상이 작아 유생들이 황실의 부덕함을 성토할지도 모릅니다."
황후가 적절히 끼어들었다.
"그도 그렇겠군."
"홍엽산장의 대부인 연추상은 부군과 자식을 일찍 잃고 여인의 몸으로 가문을 이끌었는데, 양양 지역에 수재가 발생할 때마다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휼하여 칭송이 자자합니다."
"대단한 여인이오."
"연추상에게 영서대부인寧西大夫人의 호칭과 함께 후의 작위를 내리는 건 어떻습니까?"
후는 왕과 공과 더불어 봉토를 받을 수 있는 작위 중 하나다.
"양양엔 왕이 하나 있지 않소?"
"양왕이 얼마 전에 순천부에 와서 작위를 반납할 것을 청원했습니다. 그간 폐하께서 용상에 누워 깨지 않으셔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양왕도 왕 노릇보다 더 나은 게 있음을 깨달은 모양이군. 참으로 훌륭하도다."
"그럼 폐하의 뜻에 따라 양왕의 작위를 거두고, 연추상에게 영서후의 작위를 내리겠습니다."
공현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황께 아뢰옵니다. 구후 태의의 공이 이리도 크니, 소자가 아무런 표시도 없으면 천하 사람이 불효자라고 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태자는 어떤 포상을 내릴 생각인가?"
"홍엽산장에 충효양전忠孝兩全의 편액과 함께 최상급 비단 열 필을 내려 소자의 고마움을 표하려고 합니다."
얼핏 구후영의 충정과 효심을 칭찬하는 듯하지만, 자신 역시 충과 효를 아는 사람임을 과시하는 편액이었다.
"그래. 그럼 과인도 태의한테 뭔가 하사해야 하겠구나."
"폐하. 소신은 철혈방 방주이고 홍엽산장의 장주이며, 또한 낙화문의 장문입니다. 철혈방과 홍엽산장 모두 폐하의 크나큰 은덕을 입었으니, 저보다는 낙화문에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감히 청합니다."
구후영의 청에 황제가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구후 태의에게 붉은색 망포를 내리고, 낙화문엔 전화낙田花落 춘수류春水流의 석조편액을 내린다."
낙화유수는 원래 봄이 와서 곳곳에 꽃이 피고 얼음이 녹으며 물이 흐르는, 만물이 소생하는 모습을 그린 좋은 뜻이었다.
그런데 송나라 때 누군가가 전장에서 일패도지하는 모습을 낙화유수라고 한 바람에 현재는 나쁜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
황제는 그걸 고려하여 글귀를 지었다.
전화낙은 들에 꽃이 내림을 뜻하고, 춘수류는 봄에 얼음이 녹아 냇물이 붓는 모습이다.
이를 거꾸로 읽으면 낙화전 유수춘인데, 낙화유수의 원래 뜻을 살리면서도 밭 전田과 봄 춘春으로 자신을 치료한 구후영의 공을 칭찬했다.
'대단한 학식이다.'
구후영은 황제의 종종 행위에 대해 불만이 없잖아 있었는데, 출중한 학식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태후 마마께서 왕림하셨습니다."
문을 지키던 환관이 크게 외쳤다. 그에 황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제가 어느 시점에 깨는지는 구후영과 신한천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러니 황제가 깨자마자 누군가가 소식을 전했다는 뜻인데, 이는 황궁에 태후의 세력이 얼마나 방대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폐하. 무사히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모후께서 오셨군요."
"태후 마마께 인사드립니다."
태후의 인사가 끝나자 황후와 태자를 위수로 모든 사람이 태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황후께서 애 많이 쓰셨소."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애초에 이런 일 안 생기게 폐하를 잘 돌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약점을 잡았다고 기고만장했구나.'
태후는 지금 대놓고 황후에게 약점을 잡았다고 과시하는 거고, 자리한 사람들에게 누가 황궁의 진정한 주인인지 각인하려는 목적이었다.
"송구합니다. 태자는 이런 일 없도록 잘 살피고 있습니다."
이대로 고개를 숙이면 따르는 자들이 동요한다. 황후는 일부러 가시를 바짝 세워 태후에게 맞섰다.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다들 물러나거라."
"폐하께선 갓 용태를 회복해 일단 쉬셔야 합니다."
두 여인이 팽팽하게 맞붙자 황제가 한숨을 푹 쉬었다.
"태후 마마와 조용히 할 얘기가 있으니 다 밖으로 나가라."
황후가 시퍼런 얼굴로 황제의 침실을 가장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도 순서대로 나갔다.
- 작가의말
황제 : 무슨 소리야. 주인공은 글쟁이가 지켜줄 텐데, 굳이 면사금패가 왜 필요해.
글쟁이 : 그냥 면사금패 줘. 그거 안주면 사건 만들어 유근 죽이느라 5만에서 10만 자 분량을 더 써야 한단 말이야.
황제 : 싫어.
글쟁이 : 그럼 다음 편에 갑자기 병세가 재발해 죽는 거로 한다.
황제 : 그럼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하느라 20만 자는 더 써야 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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