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포규찰血袍糾察
가을비 촉촉하니 하늬바람 스며들어,
늦가을의 장안이 슬픔에 젖는구나.
중원을 일통해 천하를 호령하던 영정을 그리느냐,
대당의 성세를 일으킨 이세민을 추억하느냐.
옥면비룡과 전대 배월교주는 십 년이나 지속한 쫓고 쫓기는 생활에 지칠 대로 지쳤는데 오기로 어떻게든 버텼었다. 그런 상황에 구후영까지 셋이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심경의 변화가 왔다.
구후영은 십 년 만에 마음을 트기 시작한 둘과 작별하고 뗏목으로 강을 건넌 다음 꾸준히 서안부로 달렸다.
안타깝게도 중간에 길을 두어 번 잃은 바람에 일찍 도착할 것 같다던 예상을 깨고 시월 초하루 오후에야 서안부 성문을 지났다.
정확히 약속 날짜에 맞춰 도착했건만, 마음이 급한 구후영은 곁눈 한 번 안 팔고 두전이 알려준 서안부의 주루를 곧장 찾았다.
"손님, 뭘 드시겠습니까?"
창가 자리에 앉은 구후영에게 점소이가 질문했다.
"얇지도 굵지도 않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면 반 그릇 주시오."
"고명으론 닭고기를 올릴까요? 소고기를 올릴까요?"
"붕어나 잉어는 없소?"
"우린 그런 음식 안 팝니다. 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걷다가 세 번째 골목에 가시면 찾는 집이 있습니다."
구후영은 엽전 한 개를 점소이에게 건네고 주루 밖으로 나가 왼쪽으로 걷다가 세 번째 골목에서 멈췄다.
잠시 후, 그간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에 잔주름이 는 길잡이 형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원. 오랜만이오."
구후영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둘에게 포권했다.
"소생의 일에 이리도 마음 써주시니 감격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 때문에 의원이 고생한 건데 이리 말하니 부끄럽소."
구후영이 낙화문의 대제자임을 알고 두전에게서 백화궁 궁주 둘을 죽인 사실까지 전해 들은 형제기에 예전과 달리 격식을 차렸다.
"아닙니다. 여러분 덕분에 저도 살고 동생도 살았습니다."
그날 구후영이 제대로 찾아갔다면 네 대주는 구후영을 반드시 죽였을 거고, 자룡도 십중팔구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오해가 겹쳐서 그간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건 맞지만, 결과만 따지고 보면 이들이 구후영과 자룡의 목숨을 모두 구한 셈이다.
"그리 좋게 말하니 우리가 더 부끄럽소. 마음이 급할 테니 당장 출발하는 게 어떻소? 필요한 물건은 우리가 다 준비했소."
구후영은 천년 고도의 정취가 코끝에 느껴지기도 전에 서안부와 작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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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협, 잠깐 멈추시오."
형제와 함께 서안부 성문을 나선 구후영을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고개를 돌린 구후영이 조금은 놀란 얼굴로 질문했다.
"두 분이 어쩐 일로?"
구후영을 불러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옥면비룡과 전대 배월교주였다.
"우리끼리는 도통 해결이 안 되어 이렇게 공자를 찾아왔소."
"내가 말하마."
배월교주가 옥면비룡의 말을 끊었다.
"이자는 면사를 벗어 얼굴을 보여줘야 나랑 혼인하겠다고 한다. 나는 교의 율법에 따라 혼인해야만 면사를 벗을 수 있다."
"누가 옳은지 공자가 시비를 가려주시오."
구후영은 고민을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골치가 아파져 왔다.
"무슨 시비를 가릴 게 있어. 나는 교의 율법이고 넌 그냥 개인의 고집이잖아. 네가 양보해."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종신지대사를 논하고 싶지 않소."
"얼굴이 못생겨도 나랑 혼인한다며?"
"그러니까 내 말 믿고 면사부터 거두시오."
점점 언성이 높아갔다. 십 년 동안 쫓고 쫓기며 둘만의 세상을 살았던 남녀는 주변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잠시만, 두 분은 내 얘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온 거 아니오?"
이대로 다투게 놔두면 골만 깊어진다. 구후영은 일단 둘의 언쟁을 끊어 놓고 고민을 시작했다.
'이들이 날 찾은 건 시비를 가리려는 게 아니고 어떻게든 생각의 차이를 좁히고 싶어서다. 그러니 조금 억지를 부려도 괜찮다.'
자룡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구후영의 머리는 전에 없이 영활하게 돌아갔고, 바로 돌파구를 찾아 설득을 개시했다.
"옥면 대협은 혼인하기로 한 거요?"
"그렇소. 그간 겪은 바로는 나쁜 사람이 아니고, 계속 쫓기는 것도 지쳤소."
"배월교주도 혼인을 결심했소?"
"그럼. 난 십 년 전부터 쭉 같은 마음이었다."
원하는 답을 들은 구후영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천지에 절을 올리고 부모께 예를 드리는 거 다 허례허식이요. 중요한 건 당사자들의 마음에 있소. 혼인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두 분은 이미 부부나 다름없소. 그러니 옥면 대협은 더는 면사를 벗는 일에 집착하지 마시고, 배월교주도 면사를 쓰는 일에 집착하지 마시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좋아."
배월교주가 얼굴을 가린 면사를 치웠다. 전혀 꾸미지 않은 얼굴이건만 누구도 부정 못 할 대단한 미인이었다.
"얼굴 봤지? 마음에 들어?"
옥면비룡이 붉게 상기한 얼굴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예쁘오. 낭자."
예쁘다는 칭찬과 낭자라는 호칭에 배월교주가 얼굴을 붉힌 채 두 손을 맞잡고 몸을 배배 탈았다.
'역시 하늘은 공평해.'
처음부터 촌극을 지켜본 길잡이 형제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남자나 여자나 외모는 출중한데 어딘가 이상했다. 길잡이 일을 하면서 온갖 괴이한 손님을 봤던 둘로서도 이런 조합은 생경했다.
"소협은 우리 부부를 맺어준 월하노인이오. 사례로는 부족하지만, 사양하지 말고 받으시오. 내가 뭔가 떠오를 때마다 적어둔 거요."
옥면비룡이 품에서 책자 하나를 꺼내 건넸다. 그간의 도주 생활이 쉽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듯이 표지부터 더러웠으나 구후영은 사양할 생각도 떠올리지 않고 덥석 받았다.
경공요결輕功要訣.
화산과 종남이 있는 섬서에서 경공만큼은 언쟁할 여지 없이 최고인 옥면비룡의 깨달음을 적은 책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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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이 모든 방어와 회피를 무시하고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공청석유 덕분에 더위와 추위를 잘 안 타는 구후영도 시림을 못 참고 몸서리쳤다. 그런데 길잡이 형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두 분은 추위를 안 탑니까?"
"내공으로 온기를 내고 있소."
길잡이 형제는 무공이 별로다. 누가 친형제 아니랄까 봐 복잡하고 어려운 초식을 익히는 데 똑같이 어려움을 느꼈다.
둘이 훌륭한 무공보다는 좋은 병장기에 집착하게 된 이유다.
그러나 내공만큼은 웬만한 절정이 안 부러울 정도로 심후했다.
"그거 위험하지 않습니까?"
내공을 돌려 온기를 만드는 건 내상 입기 딱 좋은 짓이다. 경공을 펼쳐 달리는 중에 하는 건 훨씬 위험하고.
"내공이 얼마 없을 때부터 추위를 물리치려고 해온 일이라 위험한 줄은 딱히 모르겠소."
형제의 말에 구후영은 큰 울림을 받았다.
'무위자연. 내공은 꾸밈이 없는 게 최고다.'
엉겁결에 얻은 깨달음을 소중히 갈무리한 구후영은 그제야 잊고 못 했던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제 동생은 어디에 있고 누구랑 함께 있습니까?"
서안부에선 짐을 나누느라 정신없었고, 나오자마자 옥면비룡과 배월교주의 조합을 만나는 바람에 얼이 쏙 빠졌다.
"천산의 마교 총단 근처에 있소. 의원의 동생을 데리고 있는 자들은 혈포규찰대血袍糾察隊라고, 천마의 친위대요."
마교에서 최흉最凶과 최악最惡으로 알려진 무리다. 구후영도 이들에 관해 믿기 어려운 소문을 몇 개나 알고 있다.
"위험한 자들 아닙니까?"
구후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했다.
"싸움에 미친 놈들만 모여서 악명이 자자한 건 사실인데, 실상을 보면 또 다르오. 믿기 어렵겠지만, 천마의 명령 없이 사람을 죽인 적 없소."
혈포규찰대는 마교 출신이 아니라 천마에게 매료된 자 중에서 엄선하여 천마가 직접 무공을 전수했다. 이들은 마교에서 교주를 뺀 아무나 조사하고 벌을 내릴 권한이 있다.
중원인들이 욕하고 두려워하는 마교도들이 가장 경외하는 조직으로, 덕분에 중원에서 별다른 사건을 일으킨 적이 없는데도 악명이 자자하고 온갖 소문이 흉흉하다.
그 탓에 구후영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제 동생은 무사한 게 확실하죠?"
"우리가 직접 대면해서 말도 나눴소. 그런데 그만 의원 이름을 깜빡 잊어서 못 말한 바람에 데려오지 못한 거요."
길잡이 형제는 의원이라는 호칭이 입에 붙은 바람에 유저라는 이름을 그만 잊고 말았다.
그 탓에 자룡을 만났음에도 설득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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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산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불쑥 시야에 나타났다.
"저기가 천산이오. 산이 하도 커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이틀 정도 달려야 하오."
구후영이 경공요결을 읽고 경공이 일취월장한 덕분에 이동 속도가 매일 빨라졌다. 최근에는 오히려 두 형제의 각력에 맞추느라 구후영이 힘을 뺄 정도다.
"그렇군요."
아직 이틀이나 더 달려야 하지만, 천산이 눈에 보이니 마음이 격동으로 울렁였다.
"혈포규찰대가 악명이 자자하나 말이 안 통하는 자들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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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안내로 찾은 천산의 어느 이름 모를 골짜기에 백 명이 넘은 건장한 사내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숨만 쉬었다.
구후영이 오는 내내 걱정했던 곳곳에서 칼부림하고 도처에서 피가 튀는 잔악한 모습은 전혀 없었으나, 백 명이 넘은 무인이 모여서 내공을 수련하는 모습은 다른 의미로 전율이었다.
절정에 이르지 못한 무인은 내공을 수련할 때 외부 간섭을 받으면 쉽게 내상을 입고, 심하면 주화입마까지 걸린다. 그렇기에 웬만해선 숨어서 혼자 수련하는 게 상식인데, 혈포규찰대는 확 트인 곳에서 백 명 이상이 모여 수련했다.
'역시 마교는 마교구나.'
중원 무림에서 마교를 배제하는 이유 중엔 상식을 따르지 않는 위험천만한 수련법도 있었다.
'자룡은 괜찮은 건가?'
혹시 자룡도 위험한 마공을 익히는 게 아닌지 걱정이 치민 구후영은 수련하는 자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나 두꺼운 옷으로 체형이 가려져 뒷모습만 보고 동생을 찾는 건 구후영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수련이 끝나길 기다리는 게 좋겠소."
굳이 혈포규찰대의 악명이 아니어도 수련하는 중에 다가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구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급한 마음을 살살 달랬다.
그때.
"저 새끼 틀렸다."
혼자 차림새가 다른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그에 수련하던 자들이 벌떡 일어나 대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자를 넘어뜨리고 발로 마구 밟았다.
'자룡이다!'
성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자를 밟는 사람 중에 자룡이 보였다. 덩치는 훨씬 커졌지만, 얼굴은 마지막에 본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룡!"
동생 이름을 크게 외친 구후영은 울렁이는 마음으로 무작정 경공을 펼쳐 달렸다. 기운을 어떻게 움직이고 몸무게를 얼마로 하고 따위를 잊고 그저 달렸는데, 여태까지 펼쳤던 모든 경공보다 훨씬 부드럽고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누구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순식간에 구후영의 앞을 막았다. 구후영은 살짝 튀어나온 돌부리를 콕 밟은 후 공중제비를 돌아 대장의 머리 위를 지났다.
"제운종?"
"형!"
구후영을 발견한 자룡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왔다. 신난 얼굴로 불청객을 공격하려던 자들이 둘이 다정하게 그러안는 모습을 보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형! 얼마나 고생했길래 사람이 작아졌어!"
- 작가의말
혈포규찰대란 이름을 지으려고 며칠이나 고민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왜 그랬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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