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점풍운酒店風雲
근심과 걱정은 물에 닿은 눈꽃처럼 술에 녹아 사라진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주향이 실리지 않아 잔을 바라보니, 한바탕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비워졌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만큼 아낌없이 부었더니 따뜻한 술이 잔을 넘쳐흐른다.
"칠석에 왕가장에서 경매를 여는데, 유저 너도 구경하고 싶지 않으냐?"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깬 어린 사제가 허공에 둥실 떠서 빠르게 움직이는 물동이를 보고 귀신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그 탓에 사람들이 다 깼고, 애꿎은 물동이가 임초현의 검에 박살 났다.
이어서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상봉이 이뤄졌고, 날이 밝자마자 임초현과 약초꾼이 구후영을 끌고 추영주점에 왔고, 왕가장에 사람을 보내 왕제상까지 불렀다.
"두 호법이랑 난 이미 한 번 봤는데, 검이 목에 들어올 때보다 더 긴장되더라."
약초꾼의 이름은 두전杜錢이다. 돈 많이 벌라고 가난한 부모가 지어준 이름인데, 약초를 많이 캐서 이름대로 부자가 됐다.
"아닙니다. 당분간은 수련에 집중하겠습니다."
사부와 호법에게 끌려 주점에 온 지금도 구후영의 머릿속에는 난화검법의 초식들이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동생. 내가 사부께 들었는데 무공이 수련만큼 휴식도 중요하다고 하네. 그러니 며칠에 한 번씩 내 술친구를 해주게."
만균이 세공한 온갖 보석을 경매에 올리면서 왕제상의 위신도 한껏 올라갔다. 예전에는 그저 명목이 가주고 왕 부인이 죽으면 왕가장을 실질적으로 이끌 사람이어서 마지못해 숙여주는 게 없잖아 있었는데, 요즘엔 진심으로 존경하는 티가 역력했다.
덕분에 왕제상도 예전과 달리 눈치를 덜 보고 놀 수 있었다.
"경 총관은 일 잘합니까?"
구후영은 화제를 돌리는 거로 왕제상의 요구를 완곡히 거절했다.
"잘해. 너무 잘해서 탈이야. 토납법이랑 육합권을 가르쳤는데 일로 바빠서 도통 수련을 안 해."
근골은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후천적인 영향도 크다. 경 총관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잘 먹고 컸기에 근골이 괜찮았다.
그걸 아쉽게 여긴 임초현이 토납법과 육합권을 가르쳤는데, 무공에 뜻이 없는 경 총관은 수련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심검은 무슨 얘기냐? 두 호법한테 몇 번이나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구후영은 풍불지가 빈손으로 허공에 초식을 펼쳐 백화궁의 두 궁주에게 내상을 입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거 말고, 너도 심검 펼쳤다며?"
"제가요?"
구후영은 적혈장을 맞은 다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백화궁의 자매를 물리쳤다는 건 들어서 아는데, 구체적인 과정은 몰랐다.
"하긴. 생사의 순간은 기억 못 하는 일이 많지."
임초현도 실력이 대등한 고수와 싸우다가 얼떨결에 이겼는데 무슨 초식을 어떻게 썼던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난 이제부터 의원을 뭐라고 불러야 하오?"
두전이 말했다. 낙화문의 호법이 된 바람에 구후영을 호칭하기가 애매해졌다.
"호법은 문파 배분에 구애받지 않으니 조카처럼 대해도 되고 형제처럼 대해도 되오. 적절한 호칭이 없으면 장문제자라고 부르시오."
임초현이 나서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어, 술이 없네?"
별 시답잖은 얘기만 한 것 같은데 어느새 술을 네 단지 비웠다.
"소이. 여기 같은 술로 두 단지 더 올리거라."
왕제상의 외침에 점소이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올리겠습니다."
점소이의 목소리를 들은 임초현이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안주를 툭 떨궜다.
"저놈이다."
"네?"
"문파에 불 지른 놈 말이다. 왼쪽 어깨에 검 맞은 자국이 분명히 있을 거다."
임초현의 확신 가득한 말에 구후영이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저랑 두 호법이 알아보겠습니다."
"왕 공자는 일단 왕가장으로 가는 게 좋겠소."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는 둘을 일별하며 임초현이 왕제상에게 말했다.
"친한 포두 몇 명 있는데, 여기로 부를까요?"
"아니오. 왕 공자는 그저 왕가장으로 돌아가시오. 강호의 일은 강호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오."
강호 문파는 관의 힘을 빌렸다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반은 망했다고 보면 된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다들 보중하십시오."
당부를 마친 왕제상이 비틀거리며 주점을 떠났다.
"온다."
왕제상이 나가고 곧 점소이 둘이 술 한 단지씩 들고 힘겹게 걸어왔다.
"어허, 그러다 쏟겠다."
두전이 일어나서 술 단지를 받으며 점소이를 어깨로 슬쩍 밀었다. 동작은 크지 않았지만, 두전의 무공이 일류는 너끈하게 넘어 미는 힘이 약하지 않았다.
술 단지를 두전에게 넘기고 허리를 펴던 점소이는 강한 힘에 속절없이 넘어졌다.
"호법, 취하셨습니다."
구후영이 일어나며 한 손으로 비칠거리는 두전을 잡고 한 손으로 쓰러지는 점소이의 옷을 잡았다.
뿌직 소리와 함께 점소이의 옷이 찢겼다. 장사 잘되는 주점이라 꽤 튼튼한 옷감을 썼는데, 구후영의 악력을 못 이겼다.
"맞다."
우연히 목소리가 비슷할 수 있다. 우연히 어깨에 베인 상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상처가 난 위치와 각도마저 같을 순 없다.
"낙화승천으로 난 상처가 분명합니다."
구후영도 상처의 모양을 보고 사부의 솜씨임을 확신했다.
두전이 술 단지를 상 위에 던지고 남은 점소이를 마저 제압했다.
"우린 낙화문 사람이다. 무슨 얘긴지 알겠지?"
구후영이 점소이에게 말했다. 구후영과 눈을 마주친 점소이가 바들바들 떨더니 급기야 오줌을 지렸다.
"말해. 배후에서 사주한 자가 누구냐?"
두전은 태원부에 오고 형제와 소식이 끊겼다. 어떻게든 하오문과 접촉해서 다시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다른 곳과 달리 태원부의 하오문은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근처 여러 도시의 하오문에 얘기해뒀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깨자마자 자룡에 관한 일부터 질문하고 실망했던 구후영이기에 어렵게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으로 간절함이 흘러넘쳤다. 그 마음이 그대로 겉으로 드러나 엄청난 위압감을 조성했다.
"루, 루, 루주가 시켰습니다."
추영주점은 한 층밖에 없다. 그래서 추영루 대신 추영주점으로 불렸는데, 특이하게 주인만큼은 루주로 불렀다.
"루주는 어디 있느냐?"
그때, 작고 검은 물체가 점소이를 향해 날아왔다.
구후영은 급한 나머지 젓가락을 잡아 날아오는 물체를 튕겨냈다.
'뭐지?'
전문적인 암기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젓가락이 부러진 걸 보면 바둑알 따위는 아닌 거로 보였다.
이어서 몇 개가 더 날아왔다.
구후영은 상 위에 놓인 술 단지를 집어 던져 암기를 막았다. 그러는 사이 임초현이 구후영의 천공교검을 검집째로 던졌다.
구후영은 검을 받아 손잡이에 손만 댔는데 마음이 안정됐다. 자룡을 찾는 단서라고 여겨 조급하고 긴장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리며 평정심이 돌아왔다.
덕분에 당금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장궤掌櫃구나.'
객잔이나 주점은 장궤가 곧 주인이다. 그러나 점소이의 반응을 보면 암기를 부지런히 던지는 저 장궤가 루주는 아닌 듯했다.
'예삿일이 아닌데? 일개 장궤가 이런 암기술이라니.'
작고 검은 암기는 주판알이었다. 주판알은 보통 대나무를 깎아 만드는데, 추영객점 장궤의 것은 철로 되었다. 그렇다고 쳐도 주판알에 이 정도 힘을 실어서 던지는 건 웬만한 경지로는 어려운 일이다.
재빨리 검을 뽑은 구후영은 낙화분분의 초식으로 날아오는 주판알을 일일이 쳐냈다.
"멋지구나."
너무 완벽한 초식에 임초현이 대치 중임도 잊고 환호했다.
"어딜."
어느새 주판알을 다 던진 장궤가 경공을 펼쳐 도망쳤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두전이 쫓아갔다. 구후영 역시 점소이를 놔두고 장궤를 쫓았다.
임초현은 장궤를 쫓는 대신 검을 점소이의 목에 겨눴다.
"불을 질러 사람을 죽이려 했으니 죽어도 원망은 없겠지?"
"사, 사, 살려."
점소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초현의 검이 움직였다. 숨통이 잘린 점소이는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리다가 눈을 뒤집었다.
"그날 너도 있었지?"
"아닙니다. 저는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있었는지 압니다."
"누군데?"
"이홍루의 호원護院이요. 그중에 장씨 형제가 그날 같이 갔습니다."
"거짓말이면 세상 끝까지 쫓아가 네 팔다리를 자르고 혀를 뽑겠다."
"정말입니다."
"가라."
이른 아침이어서 다른 손님은 없었다. 임초현은 술 단지를 던져서 주점 곳곳에 술을 뿌렸다. 그러곤 불을 얻으러 부엌에 갔다.
숙수들은 이미 도망가고 쇠로 된 커다란 냄비 안에선 뭔지 모를 요리가 까맣게 타고 있었다. 임초현은 냄비에 기름을 잔뜩 부은 다음 부엌 아궁이에 댔다.
'받은 대로 돌려준다.'
불붙인 냄비를 들고나온 임초현은 팔을 휘둘러 불타는 기름을 사방에 끼얹었다.
커다란 주점이 금세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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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빨랐나?'
경공은 두전이 제일 낫지만, 지형을 잘 모른다. 장궤가 따라잡힐 것 같을 때마다 방향 전환을 한 바람에 몇 개 거리를 지났음에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경공 없이 그저 달리는 구후영이 크게 힘들이지 않고 경공을 펼친 둘 뒤를 용케 따랐다.
방향 전환이 잦아 둘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 덕분도 있지만, 긴 잠에서 깬 구후영에게 뭔가 큰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하다.
'앞질러 가볼까?'
비록 잘 따라가고 있지만, 간격이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구후영은 장궤의 방향 전환이 잦은 점을 이용해 앞질러 갈 생각을 떠올렸다.
'길만 안 잃으면 되는데.'
결심을 내린 구후영은 과감히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러곤 예상한 지점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젠장.'
아쉽게도 장궤와 두전이 구후영이 예측한 지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멀리 따라오던 구후영이 보이지 않자 장궤가 방향을 다르게 튼 탓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돌아가서 사부와 합류해 움직이자.'
강호 경험이 풍부한 임초현이라면 둘의 종적을 찾을 뾰족한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 구후영이 기억을 더듬어 오던 길을 되짚어가는데.
"혹시 낙화문 제자십니까?"
갈림길 앞에서 고민하는 구후영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누구시오?"
"목마하에서 노질하는 천한 놈입니다."
구후영은 몰랐지만, 청빈이 매홍을 죽이고 대화했던 그 사공이었다.
"누구신데 날 알고 무슨 용건으로 말을 건 것이오?"
"하오문주를 찾으시는 거 같은데, 제가 행방을 압니다."
상대가 무공을 안 익힌 듯 보여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구후영이다. 그러나 사내가 하오문을 언급하자 경각심이 생겨 천공교검의 손잡이에 손을 갖다 댔다.
"하오문의 문주가 태원부에 있는 거요?"
"오해하셨군요. 하오문은 하나의 문파가 아닙니다. 지역마다 문주가 있고, 그저 하오문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는 것뿐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땐 돈이나 정보를 대가로 건네는 데면데면한 사이입니다."
"추영주점의 루주가 혹시 태원부의 하오문 문주요?"
"그렇습니다. 원래는 이홍루의 루주였는데, 악행이 하늘에 닿아 비명횡사하고 동생인 추영주점의 루주가 문주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구후영은 잠깐 고민하고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내가 문주를 죽이면 당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건가?"
"일단 제 얘길 들어주시겠습니까?"
사내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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