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사냥시작
얼떨결에.
예하는 편의점 앞에서 그냥 의미 없이 말했다.
머릿속에 자살을 떠올리던 날이었고, 세상 모든 걸 저주하며 모든 걸 내려놓았던 날이었다.
천만 원만 달라고.
그건 그냥 숨 쉬는 것처럼 내뱉은 무의미한 말이었다.
그런데 아무 댓가없이 엄마 병원비를 받았다.
늪에 서서히 잠겨 팔 다리에 더 이상 힘을 줄 수 없어 발버둥치길 포기하던 순간, 누군가 늪에서 끄집어 내 줬다.
얼결에 구출됐다.
술 취한 조승학이 불렀고, 병원비 해결했으니 너랑 섹스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그의 집에 끌려가던 날이었다.
천사오빠가 그를 구타할 땐 무서웠지만, 멋있고, 속이 시원했다.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어쩌다보니 호텔에서 동거하게 되었다.
어... 사실 약간 의도한 바가 있다.
그는 정신없이 주식 비슷한 거래를 했고, 그 옆에 붙어 있었다.
교대로 그의 일을 도왔고, 너무 바쁜 일정에 기절하듯 자다보니 곁에서 잤다.
확인결과 그는 신사다.
그러고 보니 1600억을 벌었다고 한다.
1600억이래. 세상에.
그리고 다음엔 얼마? 3000억? 거짓말이겠지?
어거지로 그의 집에 들어갔다.
일 도와줘서 고맙다며 수십억을 준다는데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사람이 염치가 있지.
그 돈으로 집구해서 살라는데 그 돈을 어떻게 받아?
솔직히... 그의 곁을 떠나기 무섭다.
죽고 싶지 않다.
세상은...
그를 제외한 세상 모든 게 무섭다.
그리고...
얼떨결에 비서라고 선언했다.
그때서야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우린 무슨 관계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데 아무관계도 아니라니. 이게 뭐야.
이 오빠는 내가 별론가?
솔직히 나 시그널을 계속 찌릿찌릿 보냈는데 바보야.
“오빠. 오빠오빠아.”
“얘 좋은 세상 갔네. 에휴. 자라.”
“아이참. 그게 아니라아. 우린 무슨 관계야?”
“비서라며? 비서랑 고용주지 뭐.”
“에잉. 그거 말고. 진짜아.”
“취했어 너. 화장실가서 찬물 뒤집어쓰고 와라.”
하아.
취했나?
술을 거의 마셔본 적 없는데 오늘 마신 술이 엄청 향기롭고 달다.
복숭아향 사과향 등등 향기가 너무 좋다.
댑따 독해서 삼킬 땐 목이 타는 거 같지만, 마시고 나면 곧장 기분이 좋아진다.
예하가 헤실헤실 웃었다.
“오빠. 왜 이렇게 멋있어? 너무 멋있는 거 아냐? 사냥 시작하죠. 꺄아~ 막 이래.”
성대모산가.
내일아침 이불을 뒤집어쓰고 발길질을 할 게 눈에 선하다.
눈이 살짝 풀린 것도 같고.
자기만 할 말이 없으니 술만 마셨나보다.
동욱은 일어서서 예하를 부축했다.
“얘 화장실 데려가서 정신 챙겨 올게요.”
다행히 다들 예쁜 예하의 술주정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막내조카 재롱 보듯 얼굴에 삼촌미소가 그려진다.
그래도 예하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싶다.
사실... 나 혼자 보고 싶다.
“우와. 친절해. 자상해. 천사오빠 짱짱.”
비틀대는 예하를 데리고 화장실 세면대에 얼굴을 들이 넣고 찬물을 틀었다.
“웁. 꺄악. 웁.”
물고문 아님.
화장 좀 번지겠지만.
“야. 가자.”
“...... 저 자요.”
“시끄럽고 가자.”
“혼자 있고 싶어요. 나가주세요.”
기억이 살아 있었나보다.
작은 방을 잠근 예하가 나오지 않는다.
저러니 더더욱 얼굴을 보고 싶다.
얼굴 보고 놀리고 싶다.
“비서라며? 안가? 하루 만에 짤릴래?”
벌컥.
잠옷 입은 예하가 문을 확 열었다.
“진짜야?”
“뭐가?”
“나 진짜 비서 맞아?”
“어. 니가 비서라며.”
“힝. 그건 내가 어쩌다보니 말한 거고.”
“비서해. 재산도 공개했는데 내보낼 수 없지.”
“꺄아. 비서다. 취업했다. 이 혼란한 세상에 취업성공!”
막춤을 추며 기뻐하는데... 잘 추네.
예하를 데리고 여의도로 갔다.
거의 모든 증권사, 자산운용사 등 금융계 업종은 전부 여의도에 있다.
미래그룹의 미래자산운용사 또한 여의도에 자리 잡았다.
당장은 임시로 사무실 하나 빌려 팀 하나만 돌릴 뿐이지만, 나중에 MBS사옥을 자산운용사 건물로 써야지.
“여~ 왔어, 동생. 예쁜 비서도 하이~”
사무실에 올라가니 혼자 있던 권순진이 인사한다.
“아아. 안녕하세요.”
예하가 오징어처럼 몸을 비틀며 인사한다.
권순진을 보자 어제의 추태가 떠올랐나보다.
권순진.
라잉자산운용사 운용팀장.
175, 75 통통한 몸매에 M형 탈모가 시작된 35세 증권맨이다.
라잉자산운용은 백제 계열의 펀드인데 나중에 환매중단이라는 대형사고를 친다.
그 와중에 수습하려고 뛰어다니다가 끝까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로 기억한다.
그래서 데려왔고.
물론 원래대로라면 끝까지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인 죄로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다.
세상은 착한 사람이 벌 받는 구조다. 원래.
“팀 구성은 끝났어요?”
“어. 분야별로 7명 뽑았고, 블과장과 로대리도 뽑았어.”
“블... 과장? 성이 블이에요?”
내 질문에 권순진이 컴퓨터 한대를 탁탁 친다.
“얘. 블룸버그 단말기. 일 년 사용료가 55000달러야. 그래서 블과장이라 불러.”
“이게... 뭔데 그렇게 비싸요?”
컴퓨터를 사는 것도 아니고 1년 사용료가 그렇게 비싸다니.
44살까지 살았지만, 증권맨이 아니다보니 처음 들어봤다.
“정보가 조금 더 빠르다고 보면 돼. 과거의 옥수수나 유가 선물 같은 각종 데이터도 가장 방대하고.”
“그래도 너무 비싼 거 같은데요.”
돈은 많지만 굳이 쓸 필요 없는데 쓰고 싶진 않다.
“평소엔 데이터 검색으로 쓰지만 위기 시에 얘가 제값을 하지. 일본 주가가 갑자기 출렁인다면 전 세계 모든 증권맨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우고 검색을 해. 무슨 일이지? 지진? 테러? 세력의 장난질? 그렇게 검색할 때 가장 빠르게 정보를 알려주는 게 이 블과장이야. 대충 1분정도 빠르다 보면 돼. 소속된 경제 기자만 8000명이야.”
“음... 1분이라......”
“돌발 상황엔 그 1분에 수천억의 이익과 손해가 갈리지. 블룸버그는 이 단말기 하나로 세계 8위 부자가 되었어.”
“헐.”
고작 이거 하나로?
세계 8위면 내 재산의 수백배 되려나.
“준비는요?”
“다 됐지.”
컴퓨터가 열대정도 있는데, 증권사 창이 열려있고, 구매버튼에 커서가 올라가 있다.
팀원이 출근하면 각자 구매를 하고, 안 오면 두 대씩 맡아 할 수도 있다.
8시가 넘자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한다.
“이쪽은 내 대학 후배. 이쪽은 본사 기획실 신입사원.”
권순진은 한명씩 소개를 해 주었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팀장님~ 아니 사장님~”
굉장히 텐션높은 여자가 출근과 동시에 권순진에게 달려들었다.
“이쪽은 김하나. 기업조사팀 맡길 생각이야. 힘들게 데려왔지. 이쪽은 본사 기획실 신입사원 윤동욱.”
“안녕하세요. 아니 팀장님. 사장님. 이것부터 봐요. 이거. 여기 꼭 투자해야 해요.”
“어. 그래. 그건 다시 확인해 볼 테니까 일단 할일부터 하자. 오늘 할 일 많어.”
“아니 이게 중요해요. 백배짜린데 지금 투자자 못 찾아서 우리한테까지 왔을 때 사야 해요. 나중가면 없어서 못 산다니까.”
기업조사 전문가로 데려왔다더니 출근 첫날부터 먹잇감을 들고 왔구나.
키 작고 삐쩍 마른한 몸매인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일품이다.
슥 보니 들고 있는 서류엔 백셀바이오라고 적혀 있었다.
저게 2020년 최고 핫한 주식이었나.
손을 뻗어 서류를 펼쳤다.
투자 제의서. 주당 8000원. 20억 모금.
싸다.
나중에 60만원 찍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관심있어?”
권순진이 슬쩍 눈치 보며 물었다.
“괜찮네요. 시간 날 때 투자 넣으세요. 지분 최대한 늘려도 될 거 같아요.”
“아니. 투자라는 게 그렇게 제목만 보고 하는 게 아닌데. 물론 그 회사는 정말 좋은 회사가 맞지만. 에.”
김하나는 말리다가 동의하다가 혼란스러워했다.
벤처투자의 규모를 늘려야겠다.
백셀바이오처럼 아직 상장 안한 회사를 찾아보면 되겠지.
주식을 전문적으로 한 건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내가 이름을 들어본 회사인데 아직 상장하지 않았다면 무조건 이득이겠지.
기억을 걷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짝.짝.
“다들 모여 봐.”
권순진이 팀원 일곱을 모으자 예하가 디지털카메라를 설치했다.
“자. 지금부터 중요한 제안이니까 잘 들어. 오늘이 첫 출근인데 이런 제안해서 미안하네. 오늘부터 매우 중요한 거래를 할 거야. 그래서 정보를 통제해야해. 앞으로 우리가 거래하는 내역과 목표 등 모든 내용을 절대 비밀로 할 것. 이게 제안이고 대가는 3개월 후 보너스 1억 원씩이야. 동의한다면 본사에서는 너희 모두에게 사람을 붙여 조사할거고 불시에 핸드폰이나 컴퓨터의 검사를 요구할 수도 있어. 동의한다면 동의한다고 말하고, 기분 나쁘다면 이 자리를 떠나도 좋아.”
“동의합니다.”
애초에 권순진이 사람을 불러 모을 때 이럴 수 있다는 걸 주지했다.
알고 모인 이들이기에 곧장 동의 했다.
출근 첫날부터 작전이 시작될 줄은 몰랐겠지만.
“그래. 그럼 각자 자리로 가서 준비해.”
“예.”
한켠에서 예하가 녹화하자 사람들이 긴장하는 게 보였다.
이 일이 장난이 아니지.
얼마 후 9시가 되었다.
“오빠. 시간 됐어.”
“어.”
핸드폰으로 유투브에 들어가자 찾는 동영상이 안 떴다.
새로 고침을 열 번쯤 누르자 동영상이 올라왔다.
5분 정도 기다렸다.
“됐어요. 권사장님.”
“어. 시작하자.”
긴장한 사람들이 권순진의 M형 이마로 시선을 모았다.
“각자 맡은 기관에 전화해 백제 계열사 주식을 빌린다. 최대한. 시드는 1조원이야. 시작.”
“예.”
목표를 미리 말할 수 없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비밀은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목표가 정해졌다.
백제 그룹과 계열사 전부.
“여보세요. 예탁결제원이죠~ 여기 허리케인 펀든데요...”
“여보세요~”
한순간 사무실이 시장통처럼 되었다.
2018년인데도 전화로 주식을 빌려야 하는 후진 금융당국.
왜 안 고치는 걸까?
앱 하나 만들면 간단할 텐데.
국내 모든 증권사와 관리기관에 백제 계열사 주식을 빌린다.
빌려온 주식은.
“공매쳐. 빨리. 최대한. 가격은 현재가 10퍼 이내로. 한 시간이 승부야.”
공매도에 들어간다.
백제그룹 주식을 현재 가격에 팔아서 한 달 후 가격에 산다.
그 차익만큼 수익이다.
백제종합병원 특실.
붕대를 푼 조승학이 앉아있다.
이빨이 박살나면서 퉁퉁 부었던 얼굴의 부기가 빠져 이제야 임플란트를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자식은 잡았어?”
침대 옆에는 아버지 조준선과 자신의 수행비서 허영수가 있었다.
허영수가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정체를 알아냈으나 경호가 너무 쎕니다. 경호원이 열 명씩 붙어있습니다.”
“거지새끼가 무슨 경호가 있다고.”
이빨이 부족한 조승학이 어눌한 말투로 화냈다.
“그게 저도 의문입니다. 옆집에 등록된 이름은 윤동욱 24세. 집안도 별거 없고, 등록된 재산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어떤 세력이 차명을 쓴 것 같은데, 윤동욱의 친부모에게도 경호원이 붙고, 유럽으로 여행간 걸 보면 세력에서 무슨 댓가를 준 것 같습니다.”
“허가야.”
조준선이 나직하게 말했다.
“예. 사장님.”
“변명은 필요 없고 잡아와라.”
나직한 음성에 허영수가 부르르 떨었다.
조준선이 골프채를 잡으면 골프채가 휠 때까지 팬다.
비서실에서 병신된 이도 몇 있다.
“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조사한 바로는 안마나, 호텔콜, 룸 등에 자주 가는 걸로 보입니다. 몇 군데 매수했으니 연락받자마자 가서 잡아오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주일 준다. 그걸 넘기면 내가 크게 실망할 거야.”
“흡.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
“사장님!”
감히 병실을 박차고 들어오는 자 누군가.
비서실장이다.
쟤가 저럴 놈이 아닌데.
“큰일 났습니다. 보십시오.”
실장은 다짜고짜 휴대폰을 내밀며 동영상을 보여줬다.
뭔가 해서 보던 그들의 얼굴이 굳었다.
조준선은 사랑스런 아들을 돌아봤다.
“너 이 자식.”
“아.. 아빠. 그게...”
“이 자식. 하. 지금 더 때릴 수도 없고. 배실장. 이놈 군대로 보내! 당장!”
“예. 사장님.”
“아 아빠? 나 아직 환... 자... 악.”
조승학은 다짜고짜 군대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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