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운동
죽음과 헬스클럽은 미룰수록 좋다.
하지만 결국 끌려왔다.
“세계 최고의 남자. 이제 여유있게 몸도 가꾸고오. 운동하고 나면 상쾌해에에.”
“음머~”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울며 본관으로 갔다.
본관 4층은 헬스장이고 본관 5층은 수영장과 노천탕이 있다.
천장을 유리로 덮고 개폐할 수 있는 온천.
정치인에게 바치는 뇌물이라더니 연구소에 이런 걸 설치해 놨다.
참 대단해.
“반가워요. 트레이너 오한주입니다.”
몇 번 인사했는데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하네.
트레이닝은 처음이니까.
트레이너 오한주는 갓 딴 사과 같은 싱그러운 미녀였다.
건강하고 과즙미 넘치는 미소를 달고 있고 몸에도 사과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전신 레깅스 위에 권투선수의 헐렁한 트렁크바지 비슷한 걸 걸치고 있는데, 저 해병대 반바지 같은 게 없었으면 하는 마음과 저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덕분에 사과 같은 가슴 쪽에 시선이 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환하고 시원하게 웃으며 예하와 대화하는데 0.5예하정도 된다.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덤.
“우선 인바디 체크부터 할게요. 이리로.”
온갖 과학기술의 총아가 덕지덕지 붙은 기계들.
이것들은 따로 주문했다.
“그냥 건강을 위해서죠?”
“네. 힘들지 않게. 가볍게. 급사만 피할 정도로 건강 유지.”
“네. 고민 좀 해 보죠.”
기계에서 뽑아져 나오는 기록을 유심히 본 오한주가 수첩에 뭐라 뭐라 잔뜩 적는다.
운동 2시간 전 호출. 하루 한번 호출 가능.
이 조건으로 매달 8000만원에 계약했다.
싸다면 싸고 비싸다면 비싼 가격.
어딜 가도 피티당 월 천 만 원 이상 받는 최고의 트레이너다.
예하가 옆에 붙어서 조언했다.
“오빠는 운동이 필요한데 의지가 부족해요.”
“흐음.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나요?”
“필요성은 느끼는 거 같아요. 저한테 운동 얘기를 먼저 꺼낸 적도 있어요.”
“그렇군요. 확실히... 많이 필요하네요.”
오한주 트레이너가 한참 수첩에 적더니 결론을 내렸다.
“호홋. 사람스런 몸매를 원하고 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는데 자꾸 귀찮은 마음에 미루게 되는군요. 결국 필요한 건 채찍이군요.”
“채찍요?”
오한주가 손으로 채찍 휘두르는 시늉을 하면 차앗 차앗 소리를 냈다.
미녀의 저런 제스쳐가 꽤나 므흣하다.
예하보단 못한 미모라도 굉장한 베이글 몸매에 무엇보다도 모르는 여자라는 장점이 있다.
“하기 싫은 운동을 하게 만드는 능력. 이 부분에선 제가 1인자죠. 출석 100%의 위엄. 믿고 따라오시면 된답니다. 오호홋.”
오한주가 입을 가리며 웃는데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세상 거의 모든 남자는 이 여자와의 1:1 강습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비용이 비싼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시작해보죠. 스트레칭부터 할게요.”
오한주가 살랑살랑 웃으며 4층 한구석의 요가매트로 안내했다.
세상 모든 운동기구가 모여 있는 듯한 헬스클럽.
트레이너와 예하가 상의해서 추가한 기구도 많다.
“두 분이 서로 도울 수 있는 스트레칭을 가르쳐 드릴게요. 클럽 오자마자 하시고, 저녁에도 시간이 된다면 식사 후 한 타임 해 주시면 좋아요.”
이후 오한주가 왔다 갔다 하며 설명을 했다.
트레이너의 지시대로 예하와 서로 붙어 누르고 당기며 스트레칭을 했다.
이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예하를 만지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아프지 않게. 강하지 않게. 몸을 푼다는 느낌으로 쭈우우욱.”
설명도 조근조근하고 부담주지 않는다.
“유연성이 심각하네요. 이 부분은 좀 더 내려도 되요. 쭈우우욱.”
등 뒤를 덮듯이 누르는데 커다란 가슴이 느껴진다.
그 상태로 귓속말을 한다.
“이 동작을 제대로 해낼 수 있으면 평소 못하는 체위를 할 수 있어요. 멋진 남자가 되고 싶습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프로다.
이 여자는 프로야.
프로의 세계는 냉엄하며 거기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 다는 건 그 분야에 최고란 뜻이다.
운동을 하게 만드는 프로.
진짜 열심히 운동해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샘솟는다.
“저녁에 할 땐 예하씨가 여기를 꾸우우욱 눌러주시면 되요. 절대 아프지 않게. 아시죠? 동욱씨도 하다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해야 해요. 남자의 가오 어쩌고 하며 안 아픈 척 하다간 인대 늘어나요. 아프면 꼭 말해요.”
사건사고가 많았는지 핵심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이 스트레칭을 저녁에 예하와 둘이 해야지.
으흐흣.
즐거운 시간이다.
웅성웅성.
경호팀 사람들이 십여명 오고, 비서진에서도 교대로 운동하러 오고, 사장들의 가족들도 가볍게 운동하러 온다.
여기가 만남의 광장인가보다.
다들 아는 사람이니 슬쩍 목례만 하고는 자기 운동을 하러 간다.
스트레칭을 끝내고 앉은 채로 팔다리를 털며 마무리를 하는데 예하의 가슴이 으드드드 흔들린다.
덩달아 내 가슴도 흔들리고, 주위 남자들의 시선도 몰린다.
어... 예하가 운동할 땐 출입금지로 만들까.
그건 너무 갑질인데.
사람 한명 없는 무인도에서 살 것인가,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과 함께하며 살 것인가.
선을 정하는 건 너무 어렵다.
“자 러닝 해보죠.”
나란히 서서 러닝머신에 올랐다.
천천히 걷다가 오한주가 올려주는 속도에 맞춰 뛴다.
슬쩍 옆을 보면 예하의 가슴이 농구공처럼 통통 거린다.
포인트가드. 드리블의 장인.
윽.
정면. 정면을 보자.
북한산자락에 자리한 아름다운 정원과 그 너머의 웅장한 숲.
화면조정시간.
“그만. 안 돼요. 러닝 금지.”
“네?”
“근육이 부족해서 무릎 관절이 체중을 떠안아요. 연골은 소모품이라서 나중에 문제 되요. 최소한의 근육부터 키워야겠어요.”
내가 그 정도라고?
“5층으로 갈게요. 예하씨는 원래 루틴대로 할래요?”
“아뇨 저도 같이 갈게요.”
멀쩡히 잘 뛰던 예하까지 함께 이동했다.
5층의 절반은 수영장이다.
유리천장을 통해 9월의 가을햇살이 내비치는 이곳.
야구 동영상에서 많이 본 수영장 같다.
누구 가족인지 아줌마 세분이 선베드에 누워 수다를 떨고 있다.
외부인이 있는지 멀리서 여자 경호원 한명이 지켜보고 있다.
연락받은 코디가 준비해둔 수영복을 가져다 줬다.
“한동안 수영장에서 운동해야겠어요.”
난 쇠질 할 자격이 없다는 건가.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래쉬가드를 받았다.
물 샤워만 하고 래쉬가드를 입고 나오니 잠시 후 오한주와 예하가 래쉬가드를 입고 나란히 나온다.
두꺼운 재질임에도 몸매가 겉으로 드러난다.
전문가인 오한주는 더없이 건강한 느낌의 힙과 가슴을 갖고 있었는데, 예하는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예쁘다.
가슴이 크다, 엉덩이가 힙업 됐다, 같은 구체적 느낌이 없다.
더할 부분이나, 뺄 부분이나, 크네, 작네,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느낌 없이, 그냥 완벽하네 라는 느낌만 준다.
진짜 얘는 다른 세상에서 온 외계인이다.
셋이 함께 풀에 들어갔다.
길이 20m에 가슴 하단까지 미지근한 물이 올라온다.
160 중반 대인 예하와 오한주는 쇄골 위까지 잠겼다.
“걸어갈게요.”
나란히 서서 물속을 걷는다.
이거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다.
“꿈속에서 도망쳐본 적 있죠? 마음은 빨리 도망가고 싶은데 영화 속 슬로우비디오처럼 되게 느리게 도망쳐서 답답한 기분 알죠?”
“아. 그러네요. 후후. 진짜 꿈속에서 도망치는 거랑 똑같아요.”
양쪽에서 걷는 예하와 한주가 농담하며 운동하는데 나는 입도 못 열고 있다.
엄청 힘들다.
군 제대 땐 몸이 좋았는데, 코인에 1년 올인하니 몸이 완전 망가졌다.
최근엔 바깥활동도 잦고 예하와 운동도 꽤 많이 했지만, 아직 체력이 바닥이고 몸매도 엉망이다.
연금술사의 등가교환 법칙에 따른다면 내 몸매의 가치는 세계 1위 재력과 동급!
세계 1위의 재력과 맞바꾼 몸매!
캬! 이것이 나의 가치인 것인가.
“헉헉.”
왕복 네 번을 하니 허벅지가 터질 것 같다.
“20m 걷는데 평균 52초 걸렸어요. 다음은 45초로 줄일게요.”
“에? 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오?”
“후후후. 다 방법이 있지요.”
한주는 예하를 끝에 세우고 두 걸음 앞에 나를 세웠다.
자신은 그 앞.
“제가 출발하면 절 따라잡으세요. 잡아서 뒤에서 업히면 되요. 업혀서 편하게 이동하기. 보상인거죠.”
성추행? 시켰으니 해도 되겠지? 그보다 그렇게 자신 있다는 건가? 남자의 성욕을 무시하는군.
“그리고 뒤에 있는 예하씨는...”
어? 뒤는 예하인가. 예하가 날 따라잡으면 예하가 내게 업히나? 예하를 업고 간다면... 이게 더 좋을 지도. 빨리 걸어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느리게...
“앞사람을 따라잡으면 똥침을 놓으세요. 아시죠? 똥꼬깊숙이.”
“예에에?”
“히익. 아니 그건 아니ㅈ.”
“출발.”
한주가 먼저 출발했다.
놀라서 따라갔고, 뒤엔 개구장이 표정이 된 예하가 따라왔다.
“흐아. 흐아.”
나란히 걸을 땐 숨소리를 조절했지만, 위기감을 느끼자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속도는 아까보다 훨씬 빠른 것 같다.
역시 시험공부는 시험 직전에 잘 되듯이 사람은 위기감이 있어야 성과가 오른다.
“제가 앞서가서 물의 저항이 덜할 거예요. 더 빠르게 달려 봐요.”
그거였구나. 당신의 그 말이 부대원의 사기를 10 떨어뜨렸습니다.
“잡았드아. 간다아아아 똥치이이임.”
예하가 뒤에서 무서운 소리를 한다.
놀라 돌아보니 바로 뒤에서 두 손을 깍지끼고 검지 두 개만 펴 모으고 있다.
완벽한 권총자세.
“너. 찌르지 마. 찌르면 혼난다. 찌르면 해고.”
“빨리 달립니다. 빨리.”
물속에 넣은 예하의 권총이 슬쩍 슬쩍 허리나 엉덩이 인근을 스친다.
진짜 찌르진 않겠지만, 위기감이 날 불타오르게 한다.
“짠. 42초. 역시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군요.”
오한주가 헛소리를 하지만 반박할 힘도 없었다.
“지금 쉬면 말짱 꽝이니까 이어서 갈게요. 대열 역전.”
예하가 선두고 내가 가운데다.
이 구도 좋구나.
“앞 사람 잡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자. 예하씨부터 출발~”
“히에에엥.”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예하가 도망쳤다.
잡는다.
잡고야 만다.
꿈속에서 달리 듯, 마음만 빠르게 뛰는 예하를 쫓는데 속도가 안 난다.
앞서가는 예하의 둥근 어깨만 보며 내달렸다.
확실히 선두는 물살을 갈라야 해서 더 힘들다.
조금씩 가까워진다.
잡는다.
허리를 감싸 백드롭을 푸아아아.
“잡았다.”
한주의 목소리가 귀에 들린다.
히익.
진심 놀랐다.
오한주가 내 골반을 잡아 살짝 들어 올리니 다리가 공중에서 버둥거린다.
힘도 좋으셔.
“후후후. 일똥침 적립이오.”
그 사이 구원받은 예하는 저 멀리 도망갔고.
헉. 헉. 헉.
비겁한 게임이다.
여자 둘이 동맹 맺고 선량한 남자 괴롭히는 게임이다.
“안 해. 이거 반칙이야.”
“그러시다면 대열을 바꿔보죠. 예하씨가 가운데, 동욱씨가 맨 뒤. 자 출발~”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여자 둘에게 농락당하며 운동을 마쳤다.
“꽤 재밌네요. 생각보다 백배 힘들고.”
“적응하고 나면 안하는 게 힘들어질 거예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전 확실하고 거대한 행복을 만들 수 있는데.”
“아하하. 그래도 자기 관리는 다른 즐거움이예요.”
그래. 돈은 넘치게 벌었잖아.
가볍게 근육을 풀어주는 마무리 운동을 하고 인사를 하고 한주와 헤어졌다.
오한주는 이제 자기 클럽으로 가서 다른 이를 가르치겠지.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트레이닝을 해 준다.
프로의 바쁘고 힘든 삶.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예하 너도 이렇게 운동 해?”
“아니. 난 잔 근육 하나하나 잡는 운동.”
“잔근육?”
“몸매를 봐서 부족한 부족을 채우고, 과한 부분을 덜어내는 운동. 오빠한테 더 사랑받아야지. 오선생님이 그런 거 잘 가르쳐주셔. 내가 몰랐던 부분도 집어주시고, 시키는 대로 하면 곡선이 더 예뻐져. 가슴도 좀 더 커지고.”
타고난 것도 있지만 노력도 필요한 거구나.
“내일부턴 네 운동 해. 나도 내 운동 할 테니까.”
“내일도 할 거지?”
“지금 마음 같아서는.”
내일도 운동 할지는 내일 가봐야 안다.
샤워하고 나니 슬슬 근육이 피로를 호소한다.
내일 전신에 알배기겠네. 이거 100퍼다.
내일 운동 어렵겠는데.
“마사지 받고 가자.”
마사지사도 고용했지.
상주하는 마사지사는 50대 아줌마 두 분인데 굉장히 잘한다.
비밀유지 조건으로 급료가 많아서인지 정말 엄청 시원하게 잘한다.
운동은 안 해도 마사지는 자주 받았지.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마사지를 받는데 수영장 벽 너머 노천탕 입구가 보인다.
관리실에 말해 열쇠를 받는 방식인데 안에서 문을 잠그면 키 높이 벽에 갇히고 천장은 뚫린 노천탕이 나온다.
“예하야. 마사지 받고 노천탕에 좀 누워있을까.”
“어머어머. 대낮부터?”
“...... 니 머릿속에 마구니가 끼었구나.”
물론 그런 의도도 있었지만, 너 되게 노골적이다.
예하와 놀며 마사지를 받고, 노천탕에 누우니 세상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알몸으로 예하를 안고 누워 파란 가을하늘을 보다가 탕 안에서 잠들었다.
- 작가의말
운동 당했다
리메전과 동일하므로 한편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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