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훌륭한 심판님들을 위하여2
“어?”
“지금 영국 2부 리그팀 콜체스트를 인수 협상 중이거든. 거기 구단주도 겸임해라. 어차피 일은 직원분들이 다 할 거야.”
“2부면 챔피언쉽인가. 또 이름만 올리라고?”
“니가 의무적으로 할 일은 없고, 보다가 문제 있다 싶으면 끼어들어. 일단 퓨쳐스포츠마케팅그룹 법인을 세울 거고, 거기서 야구단하고 축구단이 파생되는 형식으로 조직을 만들고 있어. 거기 회장을 하면서 하고 싶은 거 해. 하고 싶은 거 없으면 하지 말고.”
“축구단도 개혁 할 거야?”
“아니. 이건 돈 벌려고 하는 거야. 돈 벌면서 동시에 펀드 홍보도 하고. 일은 관련 전문가들이 잘 할 테니, 넌 구단주로 이름만 올리고 직원이 미친 짓 하는 것만 막아.”
홀란도 샀고, 기억나는 유망주 열 명 정도 살 테니 곧 프리미어 리그 올라가겠지.
슈퍼리그 시작 전까지만 빅클럽으로 만들면 된다.
“그럼 내가 영국 한국 왔다 갔다 해야 하나?”
“실무는 할 필요 없으니까 가든 말든 원하는 대로 해. 지원은 다 해줄게.”
“음. 한국을 떠나기 힘든데.”
라며 길영주를 본다.
“아. 비서로 뽑아서 같이 다니든가. 가장 잘 도와주시겠지.”
흔한 일이잖아.
“그럴까? 영주야. 내 비서할래?”
길영주씨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목소리도 작다.
비슷한 성격 둘이 잘 만났네.
맥주캔을 부딪쳐 치어스 하고 경기를 봤다.
4회 말 점수는 5:12.
원정팀 미래펀딩 로보츠가 지고 있다.
저쪽 홈팬좌석쪽만 신나게 축제 중이다.
“아 저새끼 또!”
작은 소리였는데 길영주의 입에서 나온 소리 같다.
잘못 들었겠지.
굉장히 수줍음 많은 전통적 현모양처 스타일인데.
“아 또 장난질이네 저새끼.”
또 영주씨 입에서.
“에휴 저시키들 진짜 너무하네. 다 죽여버리고 싶다.”
투수가 공을 던지면 포수가 받고 심판이 판정한다.
딱 그것밖에 안 보이는데 옆의 야구팬 커플은 굉장히 화가 많다.
뭐가 보이긴 하냐?
“화를 줄이시오. 딱딱딱딱딱딱. 화는 만병의 근원이오 딱딱딱딱딱.”
스님드립을 쳐봤는데 듣지 않는다.
둘이 열심히 심판을 욕하고 비판하는데 잘 모르겠다.
닥똥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우리 팀 잘하냐? 성적이 어떤데?”
샀지만 안 봤다.
별 관심 없다.
마케팅 효과만 좋으면 됐지.
“지금까지 5승 15패. 9위.”
“어.... 많이 이겼네. 그거면 잘한 거 아니냐? 꼴찌도 아니네.”
0승 20패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성적이면 역대급 꼴찌야. 그보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음. 선수들은 생각보다 잘해. 확실히 니 투자가 맞는 거 같아. 유망주들이 생각보다 훨씬 잘해. 대신 실책이 많고, 어이없이 무너지는 것도 많지만 이길 땐 확실하게 이기고, 투수들도 가능성이 넘쳐나.”
“후후후. 투자의 신께 경배하여라.”
“문제는 심판. 우리 팀을 아예 매장하려는지 대놓고 편파판정이야. 지금도 스트 될 걸 다 볼 주고 지랄인거 봤잖아. 이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말이 많아.”
경배하라니까 딴소리하네.
나도 똑같이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는걸.
공이 슝하고 끝인데 뭘 보라는 겨.
“편파판정?”
“우리한텐 불리한 판정을 하고 우리의 상대에겐 유리한 판정을 내려. 상대팀이 어디든 상관없이. 간단히 우리가 찍혔단 말이지.”
“그쯤은 예측했잖아.”
“그렇긴 한데 너무 심해. 항의도 하고 떡도 돌려봤지만 똑같아. 어린 선수들은 억울해서 미치려고 하고 멘탈 무너져서 진 경기가 많아. 항의 한마디 했다가 감독이며 선수며 다 퇴장당하니 할 수 있는 게 없어. 이 와중에 5승이나 거둔 게 기적이지.”
“심하네. 대놓고 그래도 돼?”
“법무팀에 알아보니까 법적으로 처분할 수 없다는데? 판정은 감성의 영역이라서 법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래.”
감성의 영역. 시발.
“음. 그래. 이 형이 해결해주마.”
돈으로.
얘기하는 사이 5회 말이 끝났다.
닥똥과 맥주 마시며 계획을 얘기하는데, 예하는 저쪽에 가서 길영주와 폰 번호 교환에 톡방까지 만들었다.
여자 둘이 어떤 톡을 하려나... 불길하다.
우오오오.
“사장님.”
뒤에서 경호원이 불렀다.
돌아보니 손가락으로 유리창 밖 외야쪽 대형 스크린을 가리킨다.
거기엔 VIP실 안의 우리가 비춰지고 있다.
“뭐야 저거?”
“키스타임이네. 아놔 이새끼들.”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관중들은 응원단장의 신호에 맞춰 한목소리로 합창하고 있다.
“보통 VIP실을 찍을 것 같지 않은데.”
“내가 만만한 거지. 야구계에 밉보여서 유치하게 괴롭히는 거야. 여긴 투산구단 홈이니까 우리한테 텃세부리는 거고.”
키스해. 키스해.
“나갈까?”
“에잇.”
닥똥이 옆에 앉아있는 길영주를 확 안고 키스했다.
우오오오오오.
관중의 열띤 환호.
“야야...... 너...... 이러면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앗 그러네. 영주야 책임질게. 결혼할까?”
어?
프로포즈?
“네......”
네?
뭐요?
잘못 들었나?
이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는 거야?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환호성과 함께 상황이 끝난 줄 알았는데 전광판의 화면이 안 움직인다.
아예 초점을 길영주 옆에서 놀란 눈으로 보고 있는 예하에게 맞춘다.
밀폐된 공간이라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는데 유명 BJ제시를 진작 알아봤나보다.
당혹스럽게 날 바라보는 예하.
“카메라맨 씹새들이.”
야구 계약 체계를 옳게 바꾸려 한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곤란하게 괴롭히는 거냐?
“닥똥아. 저 카메라는 방송국에서 관리 하냐? 아니면 구단에서 관리 하냐?”
“클리닝 타임엔 방송 송출 안하니까 홈구단이 요구하는 대로 해줄 거야. 반반이려나.”
결혼날짜를 잡고 있는 닥똥이 대답했다.
“건방진 투산 해체시킨다.”
니들 뒤졌다. 배터리만 빼먹고 버려주마.
다같이 VIP실을 빠져나와 신천의 룸에서 맥주 한 잔 하고 헤어졌다.
삼일 후 투산 푸우스의 홈경기가 올 시즌 첫 만원관중을 달성했다.
정확히는 전 좌석 예약에 현장판매분까지 전부 팔렸다.
그리고 단 한명의 관중도 입장하지 않았다.
이게 진정한 돈지랄이지.
속 시원하다.
원주에 사는 기수현 씨는 로보츠의 20년 팬이다.
소규모 팬클럽 중 하나인 로보츠포레버, 줄여서 로뽀의 회장이다.
미래펀드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짓을 할 때마다 격렬하게 화냈고, 구단사무실까지 찾아와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그가 한 건 열정적인 응원이다.
사실 모든 야구팬이 그렇다.
구단을 욕해도 경기는 챙겨보고, 선수를 응원한다.
그랬기에.
“심판 매수를 멈춰라!”
“공정한 판정을 내려라!”
“우리 어린 선수들의 노력을 짓밟지 마라!”
심판의 편파판정에 가장 격하게 항의하던 이였다.
구단 홍보팀은 당연히 그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었고, 기수현은 구단의 제의를 바로 받아들였다.
사흘 후 43살 농기구 수리가게 주인 기수현 씨가 성수동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BJ제시예요.”
“아. 아. 아.”
어 그래.
평범한 반응이네.
제시가 옆에 붙어서 방송 순서를 설명해도 기수현은 얼굴이 빨개져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예하야, 너 때문에 방송사고 나겠다.
그리고 저녁 방송이 시작되었다.
“...... 다음 소식은 특별히 모신 초대 손님이 전해 줄 거예요. 원주에서 오신 미래펀딩 로보츠의 팬클럽인 로보츠뽀레버의 회장 기수현씨입니다.”
전형적인 강원도농부 스타일의 남자가 화면에 등장했다.
“제씨님아 우린 먹고 있자아아.”
모닥불과 제시가 나란히 앉아 저녁밥을 맛있게 먹는 중에 기수현 혼자만의 무대가 열렸다.
“아아. 안녕하세요. 원주광역시에서 온 기수현이에요. 저는 그동안 프로야구 심판들이 너무도 고생하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귀는 기수현의 목소리에, 눈은 제시와 모닥불의 먹방에 가겠지.
“그래서 심판을 위한 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저와 뜻이 같은 분을 만나서 특별한 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송피디가 창을 조절해 띄웠다. 기수현씨 뒤로 인터넷 사이트가 떴다.
“크보심판상. 최고의 심판을 뽑는 사이트입니다. 일 년 간 가장 정확한 판정을 한 훌륭한 심판에게 매의 눈 상과 백원의 상금을 줍니다. 또 일 년 간 가장 공정한 판정을 한 훌륭한 심판에게 천칭좌 상과 백원의 상금을 줍니다.”
우리는 말한다.
이건 심판을 엿 먹이기 위함이 아니라 칭찬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제 선정 기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선정하는 사람은 사이트에 가입하신 여러분 입니다. 방법을 알려드리죠. 심판의 공 1구 1구를 판정합니다. 예를 들어 사흘 전 투산 푸우스와 미래펀딩 로보츠의 경기를 보죠. 투산의 1구. 사각형을 공 두개만큼 빠져나갔는데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중계기술이 좋아져서 공이 스트존을 통과할 때 사각형 네모를 그려준다.
그걸 보고 채점하면 된다.
“볼인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를 줬군요. 이제 여러분의 주관적 판단을 해 주시면 됩니다. 마이너스 10점에서 플러스 10점 사이에 옳다 싶은 점수를 채점하십니다. 저는 방금 판정이 썩은 동태눈깔이라 생각하므로 마이너스 10점 주겠습니다. 다음공은 사각형에 정확히 닿았네요. 어려운 공이지만 스트라이크가 맞습니다. 심판도 스트라이크를 줬군요. 이건 어려운데 잘했으니까 플러스 5점을 주겠습니다.”
공을 하나하나 보고 잘했는지 잘못 했는지 채점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공을 채점해보니 마이너스 92점이 나왔습니다. 그럼 전 해당경기로 가서 -92라 적겠습니다.”
경기명 5월 1일 투산 VS 미래펀딩 작성자 : 로뽀지기 구심 : 채규순 정확도 -92
“힘든 작업이죠? 사람마다 주는 점수도 다를 겁니다. +140 +10 -1 -15 이런식으로 나오겠죠. 이걸 일일이 통계낸 후 최종 점수는 다수결로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정확도 -92를 준 사람이 가장 많으면 그 점수가 옳은 걸로 표시되는 거죠. -92점을 맞추신 사람 중 한명을 랜덤으로 뽑아서 상금 100만원을 드립니다. 올바른 채점을 한 데 대한 상이죠. 사실 100만원 안 주면 귀찮아서라도 하지 않겠지요.”
세 시간씩 경기를 보면서 각 공의 판정을 채점한다.
모든 야구팬이 이 작업을 한다면 심판의 정확도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알 수 있게 된다.
“공정성은 다릅니다. 홈팀에 유리한 판정을 했다면 +로, 홈팀에 불리한 판정을 했다면 -로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아까 1구는 홈팀에 유리했죠. 그러니 +10점 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정성을 체크해보니 +174점이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 채규순 심판은 홈팀 투산 푸우스에 매우 유리한 판정을 했군요.”
이것도 사이트에 적었다.
경기명 5월 1일 투산 VS 미래펀딩 작성자 : 로뽀지기 구심 : 채규순 정확도 -92 공정성 +174
“당연히 공정성은 0점인 게 가장 좋겠죠. 이와 같이 최고심판상 사이트는 1년간 모든 경기에 대한 채점을 수집하겠습니다. 각 경기당 정확도 1명, 공정성 1명의 채점자에게 100만원씩 주겠습니다. 매일 다섯 경기가 열리니 매일 천만 원의 상금이 뿌려지겠군요. 이 작업을 시즌이 끝나는 날까지 하며 시즌이 끝났을 때 정확도 +점수가 가장 높은 심판께 매의 눈 상금 백원을 주며 공정성 점수가 0점에 가장 가까운 심판께 천칭좌 상금 백원을 드리겠습니다. 불철주야 파울볼 맞아가며 고생하시는 심판님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심판 칭찬하기 위한 사이트다.
그러니까 크보협회 소속 심판들아 저항하지 마라.
“상금은 어디서 나오느냐? 광고비에서 나옵니다. 사이트에 야구팬 분들이 와서 회원가입을 하고 채점을 하기 위해 방문해주시면 사이트 상단의 광고창이 팔립니다. 올 한해 광고가 10억에 팔렸습니다. 이 돈 전부 상금으로 뿌려집니다.”
사이트 상단에 미래펀드에 가입하세요, 란 광고가 달려 있다.
요식행위다.
“더운 날씨에 두꺼운 방호도구를 줄줄이 달고 고생하시는 심판님들 힘내시라고 백원의 상금을 준비했습니다. 전국의 모든 야구팬 분들은 이 사이트에 오셔서 모든 경기의 정확도와 공정성을 꼭 채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처음에 떨던 기수현씨는 말하다 보니 신나서 한껏 떠들었다.
방송을 보던 야구팬들도 함께 들떴다.
- ㅋㅋㅋㅋㅋ 젖대바라
- ㅋㅋㅋㅋㅋ 공개박제처형이네
- 채규순 재 아직 안짤림? 돈 먹다 짤린 줄 알았는데
ㄴ 야구심판은 먼ㅈㄹ을 해도 평생직장 ㅋㅋ
고작 10억을 써서 심판의 눈깔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바꿔줄 수 있다면 개이득이지.
그리고 아마도 이 사이트의 홍보효과는 10억원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 작가의말
누가 만들고 운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적자는 보지 않을 것 같은데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