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자치
“살쪄쪄!”
예하가 혀 짧은 소리로 칭얼거렸다.
“그래?”
모르겠는데.
예하의 배를 만져봤다.
똑같은데.
음.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삽입할 때 뱃살이 접히던가.
안 접히던 거 같은데.
마냥 예쁘기만 한데.
배를 만지는 게 싫었는지 예하는 내 손을 잡아 가슴에 올렸다.
“배 만지지마앙.”
또 칭얼거린다.
“야하네.”
“히잉. 배는 안 대. 차라리 가슴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 우러나는 얼굴로 이런 말을 하니 안 어울린다.
서로 적응하며 변화해가는 거지.
야하다는 말에도 화내지 않는 단계에 왔다.
이렇게 익숙해지는 게 살아가는 거겠지.
“요즘 캠핑을 많이 가서 그런가. 모닥불이가 잘못했네.”
“후우웅. 모닥불 언니 캠핑요리가 너무 맛있어. 맥주도 많이 먹고. 1킬로나 쪘어.”
“1키로? 그럼 49kg?"
내 선의의 거짓말에 예하가 우헤헤 웃다가 실토했다.
“50 넘어영. 48은 진짜 뼈만 있는 사람. 음...... 루비언니가 48정도일걸.”
루비가 48이라고?
루비몸매가......
엄청 말랐었지.
그 정도가 48이구나.
루비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때 기억을 되새기다가 아차해서 현실로 돌아오니 예하가 빤히 바라보고 있다.
함정!
함정카드였나!
빌드업 완벽하네.
“좋은 추억이었수?”
“어. 예하가 너무너무너무 좋아.”
“흥. 칫. 나도 48 만들거야. 나도 루비언니처럼 예쁜 몸매 만들 거야.”
루비랑은 연락도 안하는데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살찐 게 스트레스인가.
“살찐 스트레스를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 푸는 건 안 좋은 거라 생각해. 가까울수록 미움 받지 않으려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어...... 맞아. 오빠 말이 맞아. 미안해. 아아아 내가 왜 이러지.”
잘못을 지적하자 곧장 반성하는 착한 아이.
여기서 되려 역정 내면 버릴... 가능하려나.
“살 빼면 되잖아.”
“안 돼에에에. 1킬로 찌면 피부가 그만큼 늘어난단 말이야. 그런데 살을 빼면 늘어난 피부는 그만큼 쪼그라들어.”
“그럼 똑같잖아.”
“달라. 일단... 까매져.”
“어? 어디가.”
예하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얼굴이 빨개진다.
“유륜이 커졌다가 쪼그라들면서 까매진단 말이야. 피부가 늘었다 줄었다 반복하면서 까매지는 거래.”
그런건가.
남자가 많이 빨아서 까매지는 건 줄 알았는데.
“난 상관없는데.”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이 체중을 평생 유지해야 해에. 후엥. 화면에 엄청 부하게 나오는데.”
여자는 너무 예민한 생물이다.
“빼고 싶으면 빼. 난 이게 까매져도 좋아.”
입을 갖다 대 혀를 굴리며 말하니 예하가 고개를 뒤로 넘긴다.
“흐아아. 좋아? 까매져도 돼?”
“어. 까매져도 너만 좋아할게.”
“새까매지고... 몸무게 100kg 되도 좋아?”
“어 괜찮아.”
생각은 그때 생각한다.
일단 빨자.
“염산테러 당해서 머리카락 다 빠져도 좋아? 90살 되서 주름투성이 되도 좋아?”
얘가 스트레스 많이 받나보다.
미래그룹의 얼굴마담인 제시를 향해 기사엔 욕과 비난이 끊이지 않고, 뉴스에도 매번 비판이 쏟아지고, 두 번째 넘버 여명도 성적이 좋지 않으니 힘든가보다.
수없이 많은 악플은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사람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예하 넌 나 대머리 되도 넌 날 좋아할 거야?”
“어. 당연하지. 오빠밖에 없어.”
“나 몸무게 400키로 되서 예하 너 밑에서 숨도 못 쉴 정도로 무거워도 좋아할 거야?”
“... 어.”
“더 이상 서지 않아서 못하게 되도 좋아할 거야?”
내 질문에 예하가 고개를 숙이면서 진지한 고민을 했다.
“흐음.”
로뎅인줄.
“야야야. 땡! 틀렸어! 탈락!”
“후헤헤.”
하면서 예하가 안겨온다.
일단 등을 토닥토닥.
“괜찮아. 잘 될 거야. 옳은 일은 옳은 평가를 받게 되어 있어.”
“넴.”
스트레스의 원인은 살찐 것 말고 다른 것들이었나 보다.
예하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다.
무수골 정원엔 매미소리와 온갖 새소리가 청명한 백색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저... 사장님.”
일하던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만 평에 가까운 대지가 정원인데 고용한 정원사가 세 명이고, 정원을 휘감은 시냇물과 연못 관리인이 한 명 있다.
부른 이는 연못 관리인이다.
“네. 무슨 일이죠?”
“제가... 이 연못 관리하는 걸 유투브로 올려도 될런지요...... 관리팀에 말했더니 권한 밖이라 해서......”
“연못 관리를 찍는 걸로 돈이 될까요?”
“요즘은 남들이 하지 않는 다양한 영상이 나름 경쟁력을 얻는 추세라...... 연못 청소하고 관리하는 영상도 꽤 인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냥 연못만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수익은 전부 회사에 내겠습니다. 그저 영상을 올리고 싶어서......”
아저씨가 자신 없이 말했다.
정원 곳곳에 연못이 세 개 있는데 다양한 나무와 풀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멋진 정원.
울 아빠가 만들었다.
설계도를 그대로 따라했지만.
“해도 되는데 저희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해요. 저택이 찍히는 것도 싫고요. 이곳의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고요. 서울 시내에 이런 저택에 산다는 게 알려지면 욕먹을 것 같네요. 이걸 지킬 수 있다면 해보세요.”
딱히 피해볼 일 없으면 허가하는 게 낫겠지.
연못관리에 더 힘을 쓸 테니 더 좋아질 것 같고.
“네. 감사합니다. 아... 혹시 어종을 제가 선정해서 키워도 될까요? 연못에 자치양식을 해보고 싶은데.”
“...... 자치가 뭐죠?”
“한반도 최고의 물고기입니다. 북한에선 북한의 왕 이정은만 먹을 수 있게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외에 잡아먹으면 사형당하는 귀한 물고기죠. 남한은 멸종했고요. 그 정도로 굉장한 고기인데 제가 운 좋게 치어를 얻을 수 있게 되서... 이걸 양식해 남한 곳곳에 번식시킬 수만 있다면 저희나라 수산업이 더욱 윤택해지고 또......”
연못 아저씨가 행복에 겨워 말을 쏟아냈다.
그런데 말이 굉장히 전문적이다.
“저... 여기 오기 전에 뭐하던 분이세요?”
“아. 관련 박사학위 받고 해수부 민물양식 연구소에 4년 있었습니다. 37세 류안구입니다.”
스펙이 엄청나네.
“그런 분이 여기서 연못만 관리하려니 답답하셨겠네요.”
“하하. 아닙니다. 일단 스트레스가 없지 않습니까. 페이도 올랐고요. 전 완벽히 만족합니다. 그저 이 예쁜 연못에 비단잉어와 금붕어만 넣어둔 게 아까워서...”
뭐랄까.
사람은 참 다양하다.
내가 개개인을 규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시스템이 명확히 잘못 되었다면 고칠 수 있지만, 사람 개인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마음대로 꾸며보세요. 유투브 수익도 전부 갖고요.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되요.”
“어이쿠. 아닙니다. 그저 허가해준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그럼 반씩 나누죠. 그쪽도 성과급이 있어야 열심히 하시겠죠. 전 연못만 더 예뻐지면 되요. 대신 소모되는 제반비용은 사측에서 전부 내는 걸로. 일단 치어가 비싸겠죠?”
“예... 중국의 밀수업자인데 수천만원입니다. 마리당.”
“아저씨... 속은 거 아니에요?”
“검사법이 있습니다.”
“그럼 제 말대로 하죠. 치어비용이나 펌프 같은 제반비용은 저희가 다 내고 유투브는 반반. 대신 잘 해봐요. 피해 끼치지도 말고요. 전 연못만 더 예뻐지면 그걸로 좋아요.”
푼돈은 별 의미 없다.
그저 열심히 해보라고 말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연못 관리사 류안구는 인생의 은인을 만난 것처럼 감격해 인사하고 관리인실이 있는 본관 쪽으로 뛰어갔다.
왠지 시야에서 벗어나면 높이 뛰어올라 공중발바닥마주치기 하며 얏호 할거 같은데.
잠시 아저씨를 보다가 옆을 보니 예하가 눈을 반짝이며 올려본다.
“왜?”
“또 오빠가 이렇게 사람의 꿈을 이뤄주는구나. 오빤 진짜 너무 착한 거 같아. 진짜. 너무. 너무 착해. 이런 오빠한테 내가... 감히... 아깐 내가 왜 그랬지.”
얘가 또 착각을.
손을 잡고 정원 산책로를 걸었다.
참 잘 꾸며 놨다.
채인수의 가족과 마주쳐 인사하고, 황영감님의 가족과도 마주쳐 인사하고, 연못에 도착했다.
200평 정도 되는 연못 중간엔 작은 부교섬이 있고, 무지개다리가 있고, 연못 주위론 온갖 형형색색 꽃들이 피어있다.
맑은 물속엔 비단잉어와 붕어들이 밥 주는 사람인가 해서 몰려와 파닥거린다.
“여기다 양식하겠다는 걸까?”
“그렇겠지. 남한에 멸종된 걸 복원한다는 거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지.
너무 맛있어서 이정은만 먹게 정해졌다고 하니 양식 잘 되면 먹어봐야지.
뚜루루루.
예하의 주머니에서 내 전화기가 울렸다.
예하가 전화를 받고 내 팔을 끌었다.
“오빠. 본관으로 오래. 나갈 준비하재.”
“아아. 귀찮아.”
10초 걸리던 외출준비가 30분 걸린다.
본관에 가서 의자에 앉아 헤어아티스트의 수선을 받고, 코디가 준비한 옷을 그대로 입고, 은은한 향수를 뿌리고, 얼굴에도 가벼운 화장을 받는다.
내 전담팀.
특히 코디에게 신신당부한 게 있다.
가격은 상관없는데 귀찮고 불편하고 번거로운 옷 입기 싫다고. 복잡하고 불편한 옷 입히면 해고라고.
그랬더니 대부분 하늘하늘한 비단 같은 옷들을 입게 되었다.
“꺄아. 멋져. 오빠 진짜진짜 멋져.”
옆에 앉아 자기팀에게 화장을 받던 예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거울을 보니.
“잘 생겼네.”
네 배 정도 잘 생겨졌다.
좋군.
역시 돈을 쓰면 잘 생겨져.
옷도 굉장히 고급스러원 느낌인데 허리끈은 고무줄이다.
고무줄 위에 벨트인 듯한 장식이 있는 고급스러운 몸빼바지.
코디가 고생했네.
내 준비시간을 30분 이내로 맞추게 했기 때문에 예하의 팀도 비슷한 시간에 끝낸다.
내가 기다리면 예하가 미안해해서 스스로 주문했다.
여자가 준비하는데 오래 걸리는 건 선택장애가 왔을 때 뿐 여자도 화장을 한 번에 끝내고, 옷을 미리 골라두면 30분에 준비되더라.
눈부시게 예쁜 예하와 함께 미니버스인 2호차에 탔다.
예하와 나, 경호원 둘과 비서와 매니저가 탔다.
뒤에 몇 대의 차가 따라붙고.
이제 무수골 저택 밖에 나갈 땐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
포크레인 테러도 당해봤으니 더 조심해야지.
“미래 아트스쿨의 개원을 축하합니다.”
성수동 옆 화양동에 준비된 미래 아트스쿨이 열렸다.
무려 서울 시장이 축사를 했고, 뒤이어 구청장이 올라가 자기가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떠벌이고 있다.
“모든 미성년자 학생의 전입을 최대한 빠르게 돕고, 기숙사 주변에 경찰인력을 추가로 순찰시키며 인근 상권 활성화를 위해 본 구청장은...”
매년 2000억 이상을 투입하고 수익을 요구하지 않는 자선사업.
미래 그룹의 이미지가 나쁘더라도 이 일 자체는 욕할 수 없다.
구름처럼 몰린 기자들은 어떻게든 악담으로 엮으려 눈을 부라리겠지만, 흠집 잡기 힘든 일이다.
숟가락 얻는 정치인들의 자화자찬이 끝나고 드디어 본론에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연예계 원로인 원장 소개, 가수파트 각 분야의 선생 소개, 연기계 각 분야의 선생 소개, 강좌 소개, 작곡 스쿨과 미술 스쿨등 수많은 파트를 설명하고, 선생들이 맡을 강좌를 소개했다.
이후 그룹의 학습 시스템과 주의사항을 발표하고, 사장이 소개되었다.
“안녕하세요. 어쩌다가 사장이 된 루비입니다.”
몇 달 만에 다시 본 루비는 살이 10kg은 더 빠진 거 같다.
해골만 남았다.
미래 게임즈 유성주만큼 마른 거 같다.
“어떡해, 언니. 밥 안 먹나봐.”
예하가 걱정한다.
“그러게. 일이 힘든가. 사장이 할 일이 뭐 있다고.”
“부담감 아닐까?”
“하긴. 그게 문제일수도.”
연예계 경력도 일천하고 각종 구설수로 엮여 있는 루비가 빵빵한 이력의 선배들을 제치고 사장이 되었다.
본인에겐 중압감이 엄청 심하겠지.
대화해보고 해고해줘야겠다.
무대에 오른 루비가 모여 있는 선생과 직원, 입학생들과 기자 등을 훑다가 미래그룹 중역들과 함께 있는 나와 예하를 보고 잠시 시선을 멈췄다.
눈인사를 하고.
“딱 하나만 당부할게요. 절대 폰로이어를 끄지 마세요.”
루비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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