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그래도 한국3
전과 똑같은 형태로 만났다.
나와 채인수, 경호팀 20여명.
“3분 드리겠습니다.”
채인수가 책상위에 폰로이어 화면을 켜서 올려놓으며 말했다.
능글맞던 국정원 부장과 과장은 기가 약간 빠진 것 같았다.
“조승학의 처우에 관해 윤회장님의 의사를 따르겠습니다. 윤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도와드리겠다는 것이죠. 북한의 일개조가 윤회장님 납치를 시도한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그들도 최선을 다해 막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저희 요원이 안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킴수키팀이 미래블록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지역에서 접속할 수 없도록 차단해주십시오. 그리...”
랩하듯 용건을 쏟아 붓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실례.”
컵라면에 물 받아놓고 왔다.
니들보다 천 배 중요한 일이지.
부장님은 다음날도 찾아왔고, 혹시 모르니 기다려보라는 말만 전하고 안 만났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애도 아니고 괴롭히려고 잡아둔 건 아니었다.
“얼마나 알아냈어요?”
“윗선의 지시는 확실해. 짜증이 역력한데도 매일 오는 걸 보면 오기싫어도 보낸 사람이 있겠지. 요구하는 게 있을 거야.”
“주변 상황은요?”
“대충 생활하는 모습만 봐도 100억대 부자야. 동생들 아들들 다 노는데 다들 수십억 부자. 국정원 월급만으론 불가능하지. 은닉자금도 있을 테지만 조사능력 밖이야.”
우린 상대에게 원하는 게 없다.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의무도 없다.
기다리라지.
정보를 알아내려고 시간을 끌었다.
함부로 까버리기엔 일단은 국가 권력이니까.
“대놓고 부정부패네요. 이런 놈을 저격수로 쓰진 않겠죠?”
“글쎄. 모두가 저모양이라서 어쩔 수 없이 쓰는 걸 수도 있지.”
“그럴 것 같다는 게. 참.”
CIA의 첩보. 국정원의 납치계획. 그 주인공들.
뭐하는 놈들인지 만나보고 싶었다.
자체조사를 하고 CIA의 협조도 받았고, 온갖 비리가 얽힌 병신인 걸 알아냈다.
그럼에도 놔 둔 건, 바퀴벌레를 치워도 바퀴벌레가 또 자라기 때문이다.
바퀴벌레가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 나서 죽여야 한 마리로 끝나지.
“부장놈의 아비는 시골에 논을 샀고, 정부 일괄수매 토지로 지정됐어.”
“일괄수매요? 요즘도 그거 해요?”
“엄청난 흉년이 들어서 군인들 굶기면 안 되잖아. 일정양은 항상 미리 계약해. 그리고 이런 논은 당연히...”
“관리 안하겠죠. 어차피 계약되었으니.”
“어. 사진은 찍어야 하니 대충 모내기하고 대충 추수하고 끝이지. 얼마가 생산되든 세금 똑같이 받아먹으니 일하는 게 손해지.”
착한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다.
돕기 위한 좋은 제도여도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는 이는 언제나 있다.
“동생은 사기혐의로 피소된 게 세 번인데 세 번 다 증거불충분 불기소. 부장 본인도 지저분하게 묻은 게 많아.”
국가정보원.
외국 테러단체를 파악하고, 입국하지 못하게 막는 일을 하고, 북한 스파이를 찾아내고 한국의 핵심 기술이 중국 등 해외로 유출되지 않게 막는 등 정말 할 일이 많다.
업무자체가 비밀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국 기업의 헤드헌터들이 한국의 반도체 기술자들에게 접근하는 걸 차단하는데 거기 쓴 경비를 조목조목 내역 올려 공개하면 외국에서도 눈치 채고 다른 방법을 쓰겠지.
해외의 기술을 빼 오는 일을 대놓고 출장비 공개해가며 하면 작전에 실패할 테고.
비밀스러워야 하는 직업이기에 건드리기 힘들다.
다만 내 상식으로는 반드시 썩는 직업이다.
주공 직원이 차명계좌, 하다못해 아내 계좌도 아닌 자기 통장으로 땅투기를 한다.
이번에 생긴 일이 아니라 예전부터 쭉 그래왔겠지.
주공 직원이 이럴진대 국정원은 과연?
내 추측으로 공무원 중 가장 깨끗한 건 갓 취직해 윗선의 지시만 따르는 젊은 공무원과 국회의원이 아닐까.
감시가 너무 심해 뭐 해먹기 힘든 국회의원이 어쩌면 깨끗하지 않을까.
가장 깨끗한데도 그렇게나 많은 비리가 적발되는 거고.
생각하면 참 답답하다.
그나마 이런 한국이 경제규모가 비슷한 이탈리아보다 100배 깨끗한 건 말문이 막히는 거고.
“지금까지 모은 것만으로도 조질 수 있겠어요?”
“국법의 처단은 어렵지. 증거불충분 불기소 100%. 하지만 미래커뮤니티에 공개해서 인격살인은 가능해. 아비형제아들 다 썩었으니 몽땅 죽이자고. 평생 정보 업그레이드 하면서.”
사는 동네, 다니는 회사, 주변 친구 모든 이에게 어떤 인간인지 알린다.
죄 지었으면 벌 받아야지.
하는 일 없이 어떻게 형성했는지 모를 재산을 획득했으면 그간 편히 산 죗값을 받아야지.
이게 월 300에 주말없이 야근하는 진짜 서민에 대한 예의지.
다만 걸리는 게 있다.
“그런데 국정원장의 지시라면? 더 높게 대통령의 지시라면?”
“일단 제의부터 들어보고.”
“그래요. 그럼.”
무기는 준비됐다.
다음날은 곧장 만나줬다.
둘은 진실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1m 두께의 알루미늄 방입니다. 현재까지는 어떤 전파도 뚫을 수 없습니다. 이 방의 존재는 물론 아실 테고요.”
나와 채인수, 도팀장 아니 도사장 세 명만 들어갔다.
채인수가 방에 대해 설명해 주고 도윤정이 모든 전자기기를 빼냈다.
“녹음 도청 위험 전혀 없습니다. 이제 솔직하게 대화해보죠.”
“예. 감사합니다. 하핫. 처음부터 이랬어야 하는데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했겠죠.”
응 아니야.
니들 죽일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어.
“저희에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조승학은 순수한 호의입니다. 선물이죠. 윤회장님이 원하신다면 이대로 해외로 빼돌려 넘겨드릴 수 있습니다. 타우바트섬으로 보내드릴까요?”
은근히 정보력 자랑을 하네.
조승학과 원한이 가장 깊은 지혜부모님이 지금 그 섬에 계시니, 우리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대화는 채인수가 주도했다.
“그리고 용건이 없으십니까?”
“지난번 말했던 대로 해외의 자회사들을 저희 나라로 옮겨 주시면 한국의 위상도 올라가고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이면 미래 홀딩스나 미래메신저를 한국시장에 상장하시면 한국의 국격도 오를테고요. 하핫.”
국정원 부장이란 인간이 참 유들유들하다.
20살 이상 어린 상대에게 말하면서도 윗사람 대하듯 살랑거리는데 어색함이 없다.
이런 성격으로 윗사람을 열심히 빨아줘서 출세했겠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없습니까? 혹시 돈이 필요하다거나.”
“예? 아닙니다. 저희야 우국충정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부탁드리는 겁니다. 윤회장님께 위험한 것도 치워드리고 말이죠.”
개도 안 믿겠다.
채인수가 곧장 말했다.
“저희가 매우 바쁩니다. 분단위로 1조, 10조 짜리 거래를 합니다.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기회를 내기 쉽지 않고 쉽게 만나드리기도 힘듭니다. 누구의 의중입니까?”
“저 위쪽의 바램입니다.”
“대통령님?”
“하핫. 예.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돈이 필요한 건 아니란 말씀이시죠? 저희는 해외 계좌로 백억 천억 쉽게 쏴드릴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죠? 아니라고 하시면 그냥 넘어갑니다.”
“하핫. 그게. 해외에서 불철주야 구르고 있는 저희 공작원들이 박봉에 시달리며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저 회장님이 여기 저기 기부하실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직원들의 노고를 조금만 신경 써주신다면 저희도 최선을 다해 북한의 암살 위협을 막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유용한 정보도 저희가 열심히 찾아서 드리고요.”
“얼마를 달라고요?”
“아니 돈을 달라는 게 아니라 그 고생하는 직원들을... 최근 소방관들에게 천억을 쓰셨는데 저희도 그분들만큼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는데 다른 업종을 보면서 사기가 떨어져서 안타깝다... 뭐 그런 말씀입니다.”
아 짜증나.
“솔직한 자리.”
채인수가 짧게 말을 끊었다.
“그... 저희도 소방관들처럼...”
“공개계좌로요?”
“아이고. 국정원이 비밀스럽게 일을 해야 하는데 그걸 공개적으로 받으면 전부 국고로......”
“비밀계좌요?”
“하핫. 그... 예.”
잡았다.
“알겠습니다. 계좌 주시고 언급하신 내용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협상도 끝났는데 저녁이나 함께 하시면서...”
“죄송합니다. 저희가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핫. 알겠습니다. 큰일 하시는 분들이신데 바쁘시겠죠. 감사합니다. 애국하는 마음을 모두가 찬양할 겁니다.”
알루미늄방은 금방 더워진다.
답답하기도 하고.
국정원 부장과 채인수의 달콤살벌한 대화가 끝났다.
당연히 중요한 회의는 없다.
녹음한 대화를 다시 한 번 들어보고 고민했다.
“대통령이라... 진짜일까요?”
“우리가 부장급이 요리할 레벨은 아니잖아. 대통령은 그냥 툭 던졌겠지. 미래 그룹 저 회사들 한국 소속이면 좋겠다. 그러면 밑에 것들이 알아서 오리발을 열심히 놀리는 거지. 국정원 저놈들은 거기 끼어들면서 천억 달라고 조건 추가한 거고.”
“어쩌면 여성부도 위쪽 의중이었겠네요.”
“맞네. 갑자기 지랄했지? 위에서 생각 없이 한마디 하니까 법도 모르는 낙하산년이 자기가 하겠다고 나대다가 제대로 처맞고 사표 쓴 거지.”
“음......”
팔짱끼고 잠시 고민했다.
채인수는 이럴 때 조용히 기다려준다.
“대통령. 자기 업적으로 삼을 생각일 테고. 의견을 전하러 온 국정원은 겸사겸사 자기들이 사찰한 거 풀어서 돈 뜯는 거 추가했고.”
고소할까?
그냥 익명으로 공개해도 좆 되게 하는 건 쉬운데.
문제는 쓰레기를 치워도 쓰레기장엔 계속 쓰레기가 쌓인다는 것이다.
저걸 치우면 국정원 직원들이 자기들이 모욕당한 느낌이라며 개처럼 달려들겠지.
대통령을 실각시키는 건 무리고, 똑같은 야당에 정보를 줘봤자 이용해먹고 말 테고.
“형.”
“응?”
“다 치우죠.”
“어...... 어디까지?”
“싹 다.”
“어...... 그래. 이제 싸울 만 하지.”
나는 지시한다.
방향만 잡는다.
불철주야 일하시는 기획실에서 열심히 계획을 다듬는다.
기획안은 검토에 검토를 거쳐 3일 후에 나왔다.
채인수가 미래그룹 공식방송에 나왔다.
“반갑습니다. 채인수입니다.”
-아 모에요 제시나올차렌데
-오징어 들어가고 제시나와
-형 눈치좀
-ㅋㅋㅋ 25살 따까리쉑
-저형도 31살인데?
-앗 엄청젊네
-제시님보고싶다
언제나 평화로운 채팅창.
오늘은 중대발표니 뭐니 하는 예고를 하지 않았다.
핵폭탄은 예고 없이 던져야 제맛.
“저희 회사는 재계약 평가할 때 정의 가산점이 있습니다. 국가유공자가 2점, 군필자가 1점인데 정의 가산점은 무려 3점이죠. 아이 셋 낳은 분과 똑같습니다. 엄청 크죠. 지금까지는 회사 내에만 적용했는데 이제부터는 이 정의 가산점을 사회전체로 확대하겠습니다.”
-?
-정의가산점? 그런것도 있어?
-모르냐? 에휴 취업을 해봤어야지.
-미래그룹만 있는 사내규칙. 내부고발로 회사의 손해를 줄여줬을 때 주는 거. 저거 한번 받으면 평생 계약갱신가능
-뭔소리냐?
-사회전체로 확대?
-아 그래서 제시 언제 나오냐고
-뭐 별것도 아닌걸 대단한 것처럼 발표하네
-엌시발 또 전쟁이다
-졸라 쎈데?
-쎄다고? 그럼 무슨 주식 사야하는데? 뭔데?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지만 눈치 빠른 사람도 있다.
이건 지금까지 해왔던 행보 중 가장 강력한 선전포고다.
죽어라.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