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광역딜
사람들은 생각보다 순수하고, 생각보다 착하고, 생각보다 잘 믿는다.
놀라울 정도로 잘 속는다.
정치인이 ‘나를 믿어 주세요,’ 라고 반복해서 말하면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고위공무원이 불철주야 일하며 부정부패가 없다고 믿는다.
검사판사가 박봉의 월급에도 공명정대하게 언제나 중립적 판단만을 내리며 월급에 비해 호화롭게 생활해도 정의롭다고 믿는다.
언론사가 사실만을 전달한다고 믿는다.
진짜 속 터질 정도로 순진한 인간들이다.
이번에 주공사태가 터졌다.
주공 직원이 개발정보를 미리 알고 땅을 샀다.
사람들이 분노했다.
난 사람들의 분노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주공 직원들에게 배신감 느낀 것처럼 화를 내다니?
진짜 몰랐다고?
순진한 사람들.
주공 직원들은 개국 이래 항상 사전정보로 부동산 투기를 했을 텐데 지금껏 몰랐다고?
진짜?
그래 이제라도 알았으니 좋아지겠지.
주공 직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걸로 끝났다.
놀랍다.
진짜 이걸로 끝이야?
부동산 개발정보를 사전에 알게 되면 3년 간 두 배 혹은 세 배의 수익을 거둔다.
주공 직원은 이 정보를 혼자 썼나?
정보를 팔았다는 생각은 못 해?
고위 공무원은 주공 말단 직원 따위보다 먼저 정보를 알 텐데 그 사람들은 조사 안 해?
그 사람들의 친척은 조사 안 해?
여당 야당 정치인과 그 친척, 친구들은?
돈 많은 사장이나 법인에 정보를 팔면 1억, 2억씩 웃으며 떼 줄 텐데, 정보를 팔았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못 해?
왜 주공직원의 계좌만 조사하고 끝내는데?
땅을 산 사람 모두 조사하면 정치인과 고위공무원과 사장과, 기업법인과 부동산 회사가 껴 있을 텐데 주공직원만 조사하는 걸로 끝내자고?
공무원 입장에서는 최대한 덮고 싶은 거다.
연루된 이가 돈 많은 모든 이들이니 주공말단직원들만 죄지었을 뿐 아무도 죄가 없는 걸로 덮고 싶을 거다.
이걸 확대시키는 게 국민의 역할이고 민주주의의 옳은 방향이다.
그런데 안 해?
진짜 저것만 하면 끝이야?
그토록 분노하던 사람들이 거기서 끝낸다고?
나라를 두 단계 깨끗하게 만들 찬스인데?
사람들은 놀랍도록 착하고 순진하다.
금감원, 혹은 증권거래 고위 공무원들은 사전정보를 알 수 있다.
어느 회사가 거래정지 될지 미리 알 수 있다.
어느 회사가 거래정지 풀릴 지 미리 알 수 있다.
어느 회사가 거래정지 위험에서 해소될 지 미리 알 수 있다.
이 정보는 매번 내 전재산을 50% 상승시켜줄 수 있다.
이 정보를 팔면 수십억을 받을 수 있다.
놀랍도록 사람들은 너무도 착하고 순진해서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증권 관련 공무원이 정보를 팔아 돈을 받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한다.
식약처에선 신약의 허가 혹은 불허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다.
발표 며칠 전 신약이 통과한다고 누군가에게 알리면 바이오주식으로 수백억을 벌 수 있다.
과연 식약처 직원은 정보를 팔까? 안 팔까?
식약처 발표 전 통과하는 회사는 주가가 슬금슬금 오르고, 실패하는 회사는 주가가 슬금슬금 내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놀랍도록 사람들은 너무도 착하고 순수하다.
주공 직원이 ‘부동산 투기했어! 죽여!’ 라고 분노하던 사람들이 놀랍게도 거기서 멈췄다.
이 기회에 다른 모든 부정부패를 조사할 줄 알았는데 너무 착한 사람들은 주공 직원이 사전정보로 땅투기를 했다고 끝내고 다른 모든 공무원은 자신의 직분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지 않고 성실히 일만 했다고 상상하나보다.
상상조차 못할 일인가?
괴벨스가 말하길 같은 거짓말을 100번 들으면 진실이 된다.
사람들은 너무 착하고 순수해서 남이 하는 말을 너무 잘 믿는다.
“오빠... 준비는 됐는데 뭐 하려고?”
“응? 그냥... 돈 지랄 좀 하게. 네 방송으로 그냥 하고 싶은 말해도 되지? 네 이미지가 안 좋아 질 수도 있는데.”
10월 25일. 오후 5시.
약간 춥고. 며칠 만에 마신 술에 약간 알딸딸하다.
며칠간 악몽을 꾸느라 잠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냥...
지껄이고 싶다.
“난 괜찮아. 오빠 하고 싶은 거 다 해. 문제 생기면 채변오빠가 수습하겠지.”
노트북 두 대가 연결되어 하나는 송출만 하고 하나는 송출되는 방송을 모니터한다.
카메라를 켜기도 전에 수천 명이 들어왔다.
채팅이 빛의 속도로 올라간다.
전 세계 언어가 다 뜬다.
예하가 카메라를 켜자 배경의 연못과 내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어? 모야?
-한남새끼나왔노
-아 모에요 제시보여조요
-제시년도 좆빨련임
-그년도 공부해야하는데
-돈에 인생판년
-오징어 들어가고 제시님나오시라고해
여기도 오염되었구나.
예하만큼 훌륭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개 같다.
“어... 충동적으로 방송을 켰는데 잠깐. 할 말을 정리 안했어.”
-꺼져라성범죄자
-제시도 강간했겠지
-범죄자는 감옥으로 가라이기야
-성추행한놈이 뻔뻔하게 면상 들이밀고
아 그 사건이 먼저구나.
“성추행에 관해선... 솔직히 기억 안 나. 했다 안 했다가 아니라 기억 자체가 안 나. 그런 여자가 1년 후배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어. 뭐 뭐라 말하든 전부 거짓말로 들리겠지. 그래. 차라리 이렇게 하자. 그때 당시 내 행적을 밝혀줘. 축제니까 여기저기서 사진 찍었을 테고 동영상도 많겠지.
그 날 내가 당신들 사진 뒤에, 혹은 동영상에 지나가는 모습이 있다면 제보해줘. 천만 원씩 줄게. 이정도면 동기부여가 되겠지. 너무 적나? 1억씩 줄게. 당시 내 모습이 찍힌 사진이나 동영상이 있다면 1억씩 준다. 그러니 옛날 사진들 한번 찾아봐. 사진이나 동영상. 혹시 내 모습이 있으면 돈을 버는 거야. 그렇게 사진을 모으면 당시 내가 뭘 했는지 조각모음이 되겠지.”
-ㅋㅋㅋㅋㅅㅂ플렉스 오지네 1억
-10만원도 많습니다 형님
-증거인멸이다 돈으로 증거모아서 지우려고
-한남소추새끼 증거인멸시도
-ㅋㅋㅋ돈지랄오지고지리고요
-사진오조오억개 가져다주면 파산인가
-개간지다 진짜
어차피 믿지 않을 사람은 뭘 말해도 믿지 않겠지.
“어...... 댓글들아 그거 아니야 내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전부 1억씩 줄게. 내가 그 여자 가슴 만진 사진이 있으면...... 그래도 줄게. 일단 익명커뮤니티에 뿌리고 그 다음에 내게 보내. 내가 쪽팔려서라도 1억 줄게. 그러니까 다들 찾아봐.”
이래도.
욕은 멈추지 않는다.
결론을 정하고 말하는 이는 설득할 수 없다.
“그건 그렇게 처리하고... 내가 방송 켠 이유는 예하... 아니 제시가 사과했거든.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더라. 여자들이 지랄하니까 제시가 미안하대. 그 순간 너무 열 받더라고. 아무 죄 없는 제시가 사과하는 게 너무 빡치는 거야. 그래서 방송을 켰어.”
-역시 제시님. 올바른 인식
-저년들 전부 아프간에 보내야
-돈에 영혼판년이네
-미친년들 다 추방할 수 없나
-좆빨아서 가수된년
-아모르겠고 제시님보여줘요
-세상에저런 걸레가또있나
-대걸레제시
구역질 난다.
댓글을 보지 말까.
“어...... 솔직히 미래그룹의 방향은 여자한테 오히려 좋았다고 생각해. 완전 평등인지는 몰라도 다른 기업들보단 여자한테 유리한 점이 많거든. 호봉제가 3호봉까지고, 전원 계약직이고, 재택근무를 장려하니까 여자들이 일하기에 다른 기업보다 좋았다고 생각해.
출산하고 쉬다가 다시 일자리 찾을 때 항상 사람을 뽑는 우리가 원서 넣기도 편하잖아.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일할 수 있는 기업환경을 만들었으니. 공개된 점수항목에 집에 아이가 있고 가난하면 가산점을 줘서 우선채용하게도 했어.
사실 난 이렇게 욕먹을 이유가 없는 거 같은데 내 이미지가 박살나고 있거든. 그게 좀 열 받네. 어 물론 가장 열받은 건 예하... 제시가 대신 사과했다는 거지. 뭐... 어쨌든. 고민해봤어. 제시가 사죄하게 된 세상 분위기. 문제가 뭘까? 이걸 어떻게 고칠까. 그런 고민을 했지.”
말이 길어져서 멈추자 카메라 너머에 채인수가 보였다.
내가 방송을 시작하니 소식을 듣고 왔나보다.
손에 캔맥주를 들고 있는 채인수는 웃으면서 계속 하라고 손짓을 한다.
저 형은 점점 마음에 들다.
현명하고 좋은 사람이다.
“남녀 갈등은 오래된 일이고... 그냥 내가 기억나는 기준을 말해볼게. 과거 어떤 여자가 방송에서 말했어. ‘남자 키 180이하는 루저. 호홋.’ 솔직히 그 여자는 별 생각 없이 말했을 거야. 그런데 트리거가 된 거지. 광역딜을 날린 여자는 대다수 남자를 명예훼손 한 거지.
그런데 이걸 듣고 열 받은 남자들이 인터넷에 전쟁을 선포했지. 모든 여자를 공격한 거야. 별생각 없이 있던 여자들은 남자들에 맞서서 마주 욕하고. 욕이 욕을 낳고. 서로 욕하고. 그 여자 이전에도 남녀 서로 비방하고 헐뜯고 욕한 일도 많았지.
뭐... 어쨌든 말이야. 이렇게 해서 젠더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온 거 같아. 그렇다면...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까. 그걸 생각해봤어. 문제가 뭔지. 왜 이렇게 사태가 커졌는지. 출산율 0.4명이 어떤 의미인지. 왜 제시가 대신 사과했는지. 이걸 다 바로잡으려면 뭘 해야 할까. 생각했어.”
말해놓고 보니 답답하다.
너무 사태가 크다.
소주잔을 뻗으니 가오리가 싱글벙글하면서 따라줬다.
한잔 마시고 안주... 이름 모를 고급 요리를 먹었다.
댓글창은 지저분함의 극치다.
어린새끼가 대낮부터 술 처먹고 술방한다, 중국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술 처먹는다, 플렉스 어쩌고.
“죄를 짓고. 벌을 받지 않으면. 사람은 또 죄를 지어.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해.
벌을 줘야. 비슷한 죄가 줄어들어.
예를 들어 학폭 가해자를 조져야 학폭이 줄어들겠지.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고 감싸니까 또 괴롭히고 또 다른 가해자가 태어나지. 누구하나 자살할 때까지 계속 괴롭혀.
뭐 이런 게 내 결론이야. 남녀갈등도 처음부터 벌을 줬어야 하는데 왜 이러지 않았을까. 비용 때문이지. 증명하기 어렵잖아. 그래서 죄를 짓든 말든 무시하고 무시한 게 쌓여서 여기까지 왔어. 그래서 내가 내 돈 날려가며 벌을 주려고. 법에 의거 올바른 처벌을 내리면 죄 짓는 사람이 줄어들겠지. 그걸 말하려고 방송을 켰어.
이게 처음은 아니지만 기준점부터 보자. 어떤 여자가 키 180이하는 루저라고 광역어그로를 날렸어. 굉장히 많은 남자가 명예훼손 당했지. 이 여자를 고소할게. 180이하 모든 남자에게 1000원씩 보상하라. 이 정도면 되겠네. 각자가 받을 돈은 얼마 안 되지만, 이 여자는 배상금이 200억, 인생이 끝장나겠지. 불쌍하지만 진작 그랬어야 해.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수천만 명을 욕했으면 욕한 벌을 받아야지. 그래야 비슷한 죄가 되풀이 되지 않지. 같은 식으로 모든 남자는 잠재적강간범, 모든 남자는 예비살인범. 이년들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할게.”
-여윽시형님 우리의 우상
-믿었사옵니다황제시여
-ㅋㅋㅋ소추새끼그게되겠냐
-ㅈㄹㅈㄹㅈㄹ
-오조오억번고소해도넌성추행범
“그 다음은 남자들. 어떤 여자가 남자 전체를 명예훼손 했어. 그렇다면 명예훼손한 여자를 욕하는 건 옳아. 그런데 거기서 끝내지 않고 모든 여자를 욕했어. 이건 미친 짓이야. 솔직히 그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해도 거기에 동의하는 여자는 10%도 안 될 거야. 그런데 가만히 있던 모든 여자를 욕했어. 취집이니 된장녀니 돈 훔칠 궁리만 한다느니 하는 증명되지 않는 사실로 모든 여자를 모욕했어.
이것 또한 명예훼손이야. 정확히 욕 먹을 여자만 욕해야 하는데 멀쩡한 모든 여자를 욕했으니 이건 죄야. 오늘부터 자료조사 들어가고 고소를 시작할게. 당시부터 지금까지 불특정 모든 여자를 욕한 남자 전원을 모든 여자를 명예훼손한 죄로 모든 여성에게 천 원씩 배상하도록 고소할 게. 익명이든 아니든 어떻게든 찾아내서 신원이 밝혀진 사람에게 명예훼손죄 고소장을 날릴게.
여기서 끝이 아니지. 남자들의 광역딜에 발끈 했더라도 그걸 본 여자는 실제 욕을 한 일베같은 남자만 욕해야 해. 하지만 모든 남자를 욕했지. 이 여자들 또한 전원 명예훼손으로 고소할게. 음.... 조사와 고소를 진행할 사람 2만 명 정도 필요하겠네. 끝까지 가보자. 전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거야. 물론 이 방송에서 광역딜 날린 모든 사람도 고소대상이야.”
댓글창이 조용해졌다.
깨끗해졌다.
진작 이랬어야지.
수천 억 써서 세상을 정화한다.
이게 돈 쓰는 맛이지.
기분이 풀리니 술이 확 오른다.
- 작가의말
댓글쓰려고 일베어 메갈어 찾아봤는데 어려워요...
전작 보신분들은 비슷한 내용이 또 나와서 죄송해요... 겹치는 거라서 안쓰려고 했는데 1년이 지났어도 세상이 여전하네요 이번파트는 전작과 메세지가 같아서.. ㅈ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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