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대안없는 비판
넘겨준 서류를 다 봤다.
날 위해 준비된 방에 가서 놀려는데 채인수가 잡았다.
“니 전담팀 꾸리는데 면접 같이 볼래?”
“전담팀이요?”
“어. 수행비서 둘과 스케줄 비서 둘. 추가로 무수골에 상주할 코디와 헤어 아티스트 한명. 피지컬 트레이너와 마사지사.”
비서가 필요하긴 하다.
예하가 바빠져서 못 챙기는 시간이 많아졌고.
하지만 나머지는 과한데.
“에? 아니 무슨.”
“예하의 의뢰다. 니 전담팀. 월급은 자기가 내겠대.”
“헐.”
예하가 단단히 마음먹었구나.
내가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닌 게 그렇게 답답했나.
머리도 안 자르고.
운동도 한다고 말 만 하고 안 하니.
“아... 귀찮은데.”
아침마다 코디가 붙고, 매일 머리 다듬는 사람이 붙고, 매일 마사지는... 괜찮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중엔 100명을 궁녀처럼 고용해서 옷까지 다 입히는 거 아냐.
“받아둬. 예하가 간곡히 부탁하더라. 자기 오빠 멋진 옷 좀 입혀주고 싶대.”
에휴.
의도가 나쁘지 않으니 참아야지.
“예하가 돈이 어디 있다고. 제 개인돈으로 고용할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예하가 기뻐하겠군.”
이 인간 청탁받았군.
예하가 애교부리면서 부탁했을 거야.
예하의 애교에 넘어가지 않을 철혈의 남자는 없을 테지.
“할 일 없으면 같이 보자. 이력서 좀 솎아내서 면접 준비해야지.”
채인수가 산더미 같은 이력서 더미를 밀어줬다.
“우와 이렇게나 많아요?”
“니 수행비서 하려면 너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막 뽑을 수 없잖아. 비밀엄수 조건으로 연봉을 쎄게 불렀더니 이렇게 많다. 그마저도 10분의 1로 줄인 거야.”
“이거의 열 배가 지원했다고요? 어떻게 줄였는데요.”
“명문대 더하기 학점 좋은 사람, 부모 재산이 많은 사람, 혹은 이력이 엄청 훌륭한 사람만 남기고 커트했지.”
“...... 실망스럽네요.”
학연, 지연, 혈연.
좆같은 사회.
과거 아버지가 조승학에게 돈을 떼이고, 아들놈이 빚을 져 오면서 집안이 망했다.
더 이상 도봉대학교를 다닐 수 없었기에 최종학력은 고졸이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발버둥 치면서 사회의 벽을 실감하게 되었다.
온통 대졸인 사회에서 고졸이 받는 차별은 상상이상이었다.
그런데 채인수가 학력으로 사람을 차별한데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무슨 말인지 알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 변명도 실망스럽고요.”
“사람은 사람 속을 절대 알 수가 없어. 이력서의 자소서는 인터넷에서 가장 좋은 글만 모아놓은 모두가 똑같은 영웅담이고. 최소한 몇 번은 만나봐야 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 텐데 지원자가 1400명이야. 고작 네 명 뽑는데 1400명을 모두 만나서 며칠의 시간을 두고 관찰한다? 그 비용과 시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저런 기준이라도 세운거야.”
“명문대 나왔다고 꼭 똑똑한 건 아니잖아요. 후진 대학, 고졸이라도 똑똑하고 재치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맞지. 그런데 우리가 그걸 파악할 수 없다니까. 최소한 글자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있지. 명문대 졸업장을 증거로, 중고등학교 때 좀 더 똑똑했거나, 좀 더 성실했다는 것을 알 순 있잖아. 학점을 기준으로 학점 낮은 이보다 대학수업에 충실했다는 것도 알 수 있고. 만약 지원자가 열 명뿐이라면 다 만나보겠지만, 지원자가 천명을 넘어가니 이런 식으로 솎아낼 수밖에 없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낫다는 건 아니잖아요.”
“알아. 사람 속은 누구도 알 수 없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겉치레에 매달리는 거야. 천 사백명을 전부 수일간 만나 심층면접을 하지 않는 한, 이런 식으로 솎아내는 게 실패확률이 적을 뿐이야. 고졸이지만 현명한 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확률보단 명문대에 학점 높은 이가 현명할 확률이 높아. 확률의 문제, 단지 그뿐이야.”
“어...”
말문이 막히네.
“그리고 이미 회사를 다니는 명문대출신들이 있어. 그들에게 물어물어가면 대학생활이 어땠는지, 고교생활이 어땠는지도 알기 쉽고. 반대로 생각해볼까. 명문대생이 입사했어. 그런데 과선배와 동아리 선배가 즐비해. 사람의 삶에 과선배와 동아리 선배는 자신의 평생인맥이야. 그런 상황에서 회사생활을 하면 미친 짓을 하기 힘들지. 미친 짓을 하면 회사에서 짤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인맥마저 박살나거든. 이건 오히려 회사에 안전장치가 돼.”
구구절절 옳은 말 같다.
그래서 더 좆같다.
“부모 재산은요? 그건 진짜 개 같은 기준인데.”
“네 수행비서가 되면 회사의 기밀을 알 수밖에 없을 거야. 이번에 에첼비 팔고 공매도한 것 처럼 수천억짜리 정보를 다루게 될 테지. 그러면 배신할 유혹에 꾸준히 빠질 거야.”
“부모재산이랑 인성하곤 상관없잖아요.”
“맞아. 대신 포기비용이 많아지지. 부자집 아들과, 고아가 후보로 있고, 둘 다 겉으론 완벽해. 속마음은 모르고. 그런데 너에게서 귀한 정보를 들었어. 어디든 전화한통 하면 10억은 충분히 받을 수 있어. 부자집 아들이 배신하면 10억을 벌지만 부모의 재산 등 포기할 게 많아. 고아는 포기할 게 없고.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사람 속마음을 모른다는 거지. 그렇다면 누굴 뽑는 게 날까.”
“하. 참. 와나... 좆같네.”
좆같다.
그런데 반박하기 힘들다.
“세상이 그러한 것은 그러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혈연 지연 학연을 사회의 미풍양속으로 아끼고 후손에게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어. 단지 그쪽이 이득이 되니까 이어지는 것이야.”
“그래도 기분 나쁘잖아요.”
“기분 나쁘지. 당장 나도 부모 재산이 없어서 대형 로펌에 못 들어갔으니. 그럼에도 그런 공식을 따르는 건 그나마 그게 가장 확률 높은 방식이기 때문인 거고. 기분 나쁘다고 욕하고 마는 건 도움이 안 돼. 그런 건 정치인 식 헐뜯기 일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좆같은 현상을 보게 된다면 왜 그런지 원인을 찾아야 해. 그래야 발전해.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면 대안을 내봐. 사람 속을 알 수 없다는 명제 하에 가장 도움이 되는 채용법을 말해준다면 그대로 따를게.”
“......”
말문이 막혔다.
돈을 왕창 써서 모든 지원자를 면접 볼까.
흥신소 아저씨들에게 한 달 간 뒷조사를 시킬까.
비서 네명을 뽑는 데 1400명이 몰렸다.
미래 그룹은 꾸준히 사람을 뽑고 있다.
업계 평균보다 높은 연봉에 여러모로 화제가 되고 있는 기업이기에 지원자가 많이도 몰린다.
그들 전부를 뒷조사한다?
비용과 시간의 문제는 무시하더라도 분명 문제가 된다.
“후우. 없어요.”
“그래. 일단은 이 방식으로 뽑을게.”
“그렇게 하세요.”
씁쓸한 입을 축이며 채인수를 바라봤다.
29살의 변호사.
생각해보면 이 사람만큼 이력서가 화려한 인물도 없다.
아버지 없이 가난한 집에서 명문대로 갔고, 3학년 때 사시를 통과했다.
연수원 졸업 후 3년 만에 미래그룹 한국지사장이 되어 백제를 무너뜨렸고.
원 역사에서도 스스로 백제에 타격을 주고 후에 아시아 최대 자산운용사의 주인이 되었다.
나 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능력자.
사람을 뽑는데도 단순히 따라하거나 욕하는 게 아니라 원인까지 파악한다.
대단한 사람.
“형은 불만 없어요?”
“응? 갑자기?”
“뭐 하고 싶은 일이라던가, 바뀌었으면 하는 거.”
“딱히... 아 하나 있다. 모닥불이한테 나를 채변으로 부르지 못하게 해.”
“아 크크크. 알았어요. 전할게요.”
전하되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또 없어요? 답답한 거나 이러지 말았으면 하는 거.”
“갑자기 왜? 아하. 나의 진가를 깨닫고 충성심 관리 하는구나.”
“와... 그걸 직설적으로 말하면... 대충 맞아요.”
“후후. 딱히 불만은 없다.”
“이것저것 답답해했잖아요. 말리기도 하고.”
“그랬지.”
하면서 채인수가 얼음이 녹은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대충 보니까 이제 큰 그림이 보이더라. 니가 뭘 하려는지 몰랐는데 불체자 조사하는데서 감이 오더군.”
“뭔데요.”
“나라를 통째로 바꾸려는 거 아니냐? 더 좋게.”
“헐.”
“니 돈 갖고 한다는 데 막을 수 없지. 멋있기도 하고. 니 돈을 다 날릴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조용히 응원하기로 했다. 나도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지.”
“헐.”
역시 똑똑한 인간이다.
조심해야 해.
“내일 상철이 일반실로 옮긴다. 중환자실 퇴원. 백제 병원 VIP실 잡아뒀어.”
“잘 됐네요. 내일은 병원 가 봐야지.”
“그래.”
대화가 끊겼다.
한켠에 앉아 자소서나 읽었다.
붙어있는 증명사진은 다 예쁘고 잘생겼고 깔끔하다.
이력은 다 훌륭하다.
자소서는 다 환상적이다.
참 대단한 사람이 많다.
이렇게 수많은 자격증을 가진 이가 왜 비서일을 지원하는지 놀랄 정도로 대단하다.
“전부 대단해서 오히려 솎아내기 힘든데요.”
“그렇지. 그래서 그런 편법을 쓴 거야. 나도 그게 좋다는 게 아니야. 좆같지만 그렇게라도 후보를 줄여나갈 수밖에 없는 거야.”
“네. 네. 알았다고요. 악습의 계승자 같으니.”
“아놔. 나도 가난한 집안이라고.”
“네. 네. 팀킬 오지고요.”
“제길.”
사람 뽑는 건...
다음부터 관여하지 말아야지.
“원래는 인사팀에서 하는 거야. 니 비서라서 특별히 내가 하는 거고.”
“네. 고생하십니다.”
열심히 일하고 예하와 함께 퇴근했다.
- 작가의말
때리시면 겸허히 맞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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