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괴롭히는 이유
성수동 사옥에서 임원들이 모여 자료를 점검했다.
병원 문제는 단순히 백제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만하면 됐고, 출발할 시간 되지 않았나요?”
최태수와 만나기로한 시간이 다가와서 말했는데 비서실 직원이 응답했다.
“5분 전에 연락이 왔는데, 갑작스런 진료 요청이 와서 두 시간 늦게 만나자고 합니다.”
“아오. 진짜 의사가 갑이야 갑. 지가 늦었으니 여기로 오라고 해요.”
“네. 연락하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사람들을 둘러봤다.
채인수, 황영석, 병원장, 정한영 의사. 예하.
예하는 무려 본사 홍보팀장이니까 여기 있어도 되지.
“밥 먹으면서 기다리죠. 시켜먹을까요?”
“그래. 짬뽕이나 먹자.”
황영석의 제안에 따라 저녁은 중화요리로 통일.
밥 먹고 적당히 잡담을 나누다가 최태수가 도착했다.
밤 8시.
“늦어서 죄송합니다.”
예의바르게 인사하는 잘생긴 의사.
“하지만,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의사 측의 요구는 전과 같습니다.”
선언하듯 말하고는 자리에 앉아 입을 꾹 다문다.
왜 이렇게 밉보인 거지.
“최의사님. 저희가 나쁜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을 더 뽑아서 의사가 좀 더 사람답게 살게 해주려는 거예요. 하루 8시간 근무하고, 남는 시간에 의술을 더 공부할 수도 있고요. 스스로 노력한다면 피로에 쩔어 끌려 다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잖아요. 환자를 살피고, 배우고, 논문을 보고. 그렇게 학습하면 실력이 늘겠죠. 지금처럼 잠도 안 재우고 부려먹는 것보다 실력향상에 더 좋지 않겠어요?”
침묵.
벽에 얘기하는 것 같다.
스읍, 하.
스읍, 하.
언제까지 참아줘야 해?
아놔 짜증나.
“최씨. 그래. 당신 훌륭한 거 알겠어. 알겠는데 좀 제대로 눈을 뜨라고. 의사를 사람답게 살게 해 주려고 이러는 거잖아. 학교에서 괴롭히는 걸 금지하고 있잖아. 시발. 군대도. 군대에서도 가혹행위를 금지시키고 있어. 직장 내 괴롭힘도 범죄야. 직장에서 괴롭히는 거 걸리면 그 회사 이미지 박살나. 그런데 의사는 뭘 믿고 이렇게 뻔뻔한데? 100일 당직? 전국민이 다 아는 괴롭힘이야 그거. 사람을 한계 이상으로 갈아 넣는 게 옳다고? 영원히 안고 가야할 전통이라 생각해? 진짜?”
빡쳐서 말을 놔 버렸다.
나이차이는 문제가 아니다.
이 벽창호한텐 도저히 존칭을 못 쓰겠다.
내가 막말을 하자 주위에서도 놀라서 나를 바라봤지만, 막는 사람은 없었다.
최태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쁜 제도요. 나쁘죠. 아는데. 그렇게 하면 안 그런 것보다 실력이 더 향상됩니다. 환자를 위해선 그게 낫소.”
와나 이 미친놈.
“그건 당신 생각이지. 환자를 위해. 좋아. 그런데 당신 같은 참의사 말고 당신 뒤에 숨은 개자식들도 그런 생각으로 눈물을 머금고 괴롭히는 것 같아? 아니잖아. 지 편하려고 괴롭히는 거잖아. 너도 알잖아.”
제발 이해 좀 해라.
묵묵부답.
“조사를 해 보니까 말이야. 병원을 찾는 환자의 처치비율을 보니까 전공의가 91% 해치우네. 교수나 펠로우같은 전문의는 차트와 문진을 해 처방을 내리면 실제로 약을 바르거나 꼬매는 건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91% 해치운다고. 물론 교수들이 한 바퀴 돌며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도 힘들긴 하겠지. 하지만 수련의들의 업무과중이 너무하다고 생각지 않아?”
병원을 방문하는 모든 환자가 희귀병환자거나 중환자는 아니다.
대부분 간단한 약처방을 받거나 간단하게 꿰매는 걸로 끝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시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의사만이 해야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환자를 인턴과 레지던트가 감당한다.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군 생활 3년. 이 3년을 의사 인생 최초의 휴가라고 하더라. 또한 마지막 휴가라고도 하고. 남들은 개 같다고 욕하는 군생활을 의사는 천국이라 여긴다는 거야. 이거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의사 생활이 좆같은 군생활보다 더 개좆같다는 거잖아. 그토록 고생해서 의사가 되었는데 왜 꼭 이렇게 살아야 하지? 문제가 딱 보이잖아. 당신 똑똑하잖아.”
묵묵부답.
최태수는 굳은 얼굴로 내 눈을 볼 뿐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래. 내가 돌하르방과 이야기 하는 구나.
“의사가 왜 힘들게 사는지 말해줄까? 돈 때문이야. 의사수를 늘리면 편해지지만, 평균 급료가 내려가니 막는 거야. 최씨 당신처럼 참의사도 한둘은 있겠지. 하지만 나머지 99%는 돈 더 벌려고 괴롭히는 거야. 왜? 어차피 어린놈들, 배우고 있는 놈들은 발언권이 없고, 전문의 자격증을 딴 윗대가리들은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니까. 그러니 의사수를 늘리지 않는 거야. 당신은 진심으로 고생하면 의술이 빨리 는다고 믿겠지. 실제로도 그럴 테고. 그런데 그거 가혹행위야. 범죄라고. 알아?”
꿈틀.
최태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국의 의사수는 천 명당 2.3명. 50%를 더 늘려야 OECD 평균이 돼. 단순하게 평균보다 50% 더 일해야 하겠지. 그런데 한국의 외래 진료환자 수는 OECD 평균의 2.5배야. 평균 입원일수 또한 2.5배고. 무슨 뜻인지 보여? 한국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OECD 평균보다 네 배 더 많이 일하고 있다고. 그렇게 과중된 업무를 인턴과 레지가 전부 감당하고 살았어. 이게 옳다고 생각해?”
전에는 자료 조사가 부족해 말싸움 하지 못했다.
의사의 파업으로 갑자기 마주쳤으니.
이제 제대로 조진다.
“의사가 돈 못 번다. 망하는 병원도 많다. 환자들이 전부 종합병원으로 가지 동네 개인병원은 거의 다 망한다. 난 이 말이 참 웃겨. 대체 어떤 개새끼들이 이런 헛소문을 퍼트리는 걸까. 당연히 의사협회겠지. 한창 늘고 있는 요양병원의 의사가 최저 8000만원 벌어. 세전으로 하면 1억을 넘지. 전문의도 아닌, 의대를 갓 졸업한 의사가 이렇게 받는다고. 그런데 의사가 망해? 개인병원 망하면 아무데나 취직해도 1억 넘게 받는데 대체 뭐가 문제란 거지? 진짜 문제가 안 보여? 최씨 아저씨. 똑똑하잖아. 말해봐. 왜 이런 소리가 나온 걸까?”
최씨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돈이야. 돈 때문이라고. 어차피 댁 같은 교수들은 이미 힘든 시기를 거쳤고, 주 5일 중 이틀은 대학에서 강의하고 3일만 진료 보는 댁 같은 교수들은 전만큼 힘들지 않아. 죽어나가는 건 인턴과 레지고, 그들의 고통은 니놈 알 바가 아니겠지. 그들의 업무과중을 줄이기 위해 의대 정원수를 두 배, 세 배로 늘리면 전체 의사가 두 배 세 배로 늘어나니, 벌 수 있는 게 줄어들게 되겠지. 그게 싫은 거야. 의사 풀이 늘어나서 벌수 있는 돈이 줄어드는 게 좆같으니까 의사 정원을 늘리지 않는 거야. 그 고통은 새로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이 받고 있어. 어린 애들에게 나중에 버는 돈을 생각해서 이 악물고 버티란 거지. 이게 문제야.”
긴 말을 끝내자 최태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말은 끝났나?”
“아니. 하나만 더.”
내 말에 최태수가 입을 닫고 기다려줬다.
스읍, 하.
스읍, 하.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예전에 원양어선을 탄 적이 있다.
예전이 아니라 4년 후구나.
선금으로 3천만 원을 받아 집에 드리고 1년 계약으로 배를 탔다.
1년 후 내릴 때 성과급 5500만원을 받았으니 금전적으론 괜찮은 1년이었다.
다만 생활은 지옥이었다.
배에는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 등 귀족이 10명 있었는데 전부 한국인 직원이었다.
그물질과 어창 관리 등을 하는 잡부가 30명 있었는데 그들은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등지에서 싸게 고용했다.
잡부 중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항구를 출발한 첫날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인니와 필리핀 선원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다녔다.
귀족인 선원 사이에 끼지 못하고 잡부의 언어를 알지도 못하니 어디에도 끼지 못했다.
귀족 계급인 한국인 선원들은 잡부가 할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실수할 때마다 낄낄대며 웃을 뿐이었다.
눈치껏 남들 하는 일을 하다가 발에 채이고 뒤통수를 쳐 맞는 나날이 이어졌다.
단순히 따돌림만 당한 게 아니라 힘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개잡부가 되었다.
그물을 올리면 어창에 고기를 넣는 본업을 비롯해, 청소, 빨래, 이불개기, 짬처리, 요리보조, 물 떠다 주기, 커피타주기, 빨래개주기, 잔심부름 등 모든 잡일을 다 했다.
거의 1년을 이 악물고 버티고, 계약 연장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이후 가장 많이 부딪치던 한국인 갑판장에게 물어봤다.
왜 이렇게 괴롭혔냐고.
대답은 상식적이었다.
괴롭힐수록 편해지니까.
예전엔 잘해준 적도 있는데 어차피 힘들다고 그만두더라.
차라리 괴롭히면 내가 편해지니까 괴롭힌다.
빨래 개고 커피 타오는 잔심부름을 빠릿빠릿하게 시키기 위해 괴롭힌 거였다.
당연한 거지.
지랄하면 말 잘 듣는다.
괴롭히면 내가 편해진다.
당하는 이의 고통?
알게 뭐냐?
내가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그걸로 좋지.
이게 세상이고, 이게 사람 사는 이치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할 거다.
외적요소, 괴롭힘을 금지시키는 장치가 없는 한, 괴롭힐수록 편해진다면 인간은 얼마든지 잔인해진다.
“최씨는 그렇게 말했지. 수련의 5년간 고통스런 생활을 해야 의사로써 실력이 빨리 는다고. 참 좋은 말이네. 우리나라 스포츠팀도 그래. 초딩들조차 그래. 6학년이 5학년 집합시켜서 대가리 박게 만들고 빠따 갈겨. 5학년은 4학년을 집합시켜서 대가리 박게 시키고 빠따 갈겨.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프로팀 가서도 똑같고. 왜? 댁 말대로 실력 빨리 늘라고 그런거겠지? 아니면 내 생각처럼 밑에 것들을 노예로 길들여 내가 편하려고 괴롭히는 걸까. 뭐가 정답일까?
스포츠만 이래? 일진들도 아래학년 일진을 괴롭혀. 왜? 내가 편하려고. 군대도 아래 계급 괴롭혀. 왜? 내가 편하려고. 똥군기가 강한 곳이 어디 있을까? 연예계? 연기계? 나 다니던 연극영화과도 그랬어. 선배에게 90도 인사 시키고, 가끔 선배가 1학년들 집합시키고 지랄했지. 왜 이랬을까? 연기실력 쑥쑥 늘어나라고 눈물을 머금고 어쩔 수 없이 괴롭혔을까?
아니잖아. 재밌고, 즐겁고, 밑에 것들이 말 잘 들으면 내가 편해지니까 괴롭힌 거잖아. 인간의 가장 저열한 본성으로 남을 괴롭히는 거잖아. 넌 그걸 옹호하는 거지? 의사들이 인턴레지 5년간 괴롭히고, 극한으로 모는 이유가 실력 향상을 위해서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너 머리 좋잖아. 이봐 최씨. 말해봐.”
긴 말이 끝나자 최태수가 눈을 감았다.
“하아아. 그래. 미안하다. 나도 알고 있다. 가혹행위를 정당화 하면 안 되지.”
사과를 받았네.
시발.
그 딴 사과 필요 없어.
“내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잘생긴 외과의사가 말을 끊었다.
“환자를 위해서였다.”
아이씨발놈아.
아 답답해.
“협회와 분란이 생기면 이길 수 없고, 분란기간 동안 제대로 처치 받지 못한 환자가 죽을 테니까. 그래서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그런 뜻이었으면 인정.
“그래서? 그냥 두고 보자고? 영원히? 20년 후에도 100년 후에도 의사의 생활은 고통스러워야 하고 대신 돈을 많이 버는 보상을 주자고? 피곤에 쩌든 의사가 실수하는 건 무섭지 않냐?”
“바꿀 수 있다면 바꾸는 게 낫지. 당연히. 하지만 이길 수 없다면 본업에 충실하는 게 옳지 않나? 실력을 키우고, 환자를 돌보고. 그러다 내가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면 그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 너도 긴 계획이 있었구나.
그런데 20년 후에도 변한 건 없었단다.
- 작가의말
이번화를 쓰면서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직군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기에 문제될 것 같았죠
차라리 역사속 성리학자 깔 때는 시원하게 조졌는데 이건 무섭네요
그래서 앞에 최태수라는 가공의 유명인물을 넣었습니다
모든 의사가 나쁜 게 아니고 참의사도 있다, 그리고 참의사의 시각을 먼저 넣었습니다
그래도 불편하신 분들껜 사죄드립니다.
저는 농담처럼 백일당직, 간호사태움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건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놓고 가혹행위를 하는데 왜 문제제기가 없죠?
없어져야할 악습 맞잖아요
개인적으로 의학소설들 좋아하고, 근면성실노력파 주인공이 보편적으로 사랑받는다는 것도 알지만 그런 주인공들이 백일당직조차 긍정적으로 웃으며 즐겁게 받아들이는 게 싫었어요
악습을 이어나가는 거잖아요
최태수란 캐릭터는 그래서 데려왔어요
따로 자세한 설명을 거칠 필요 없이 노력파 참의사 이미지가 잡혀 있으니 데려왔고 사용했고
제가 생각한 문제, 의학소설의 노력파 주인공들이 악습을 보전해 나가는 게 싫었던 것까지 싸잡아 전했습니다
혹시 캐릭터에 문제가 제기된다면 일괄 수정하겠습니다
글 하나가 얼마나 바꿀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천명이라도 백일당직이 인권을 유린하는 악습이란 걸 알게 된다면 세상이 조금은 더 좋아지겠죠
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제... 선작수가 오히려 많이 줄었네요. 몰아보셨으면 좋았을텐데... 죄송해유 제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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