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집들이2
예하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걸었다.
야외에선 어딜 가든 경호원이 함께여서 불편했다.
날 지켜주는 사람들이지만,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긴 해방 구간.
CCTV는 돌담을 중심으로 침입자를 막고, 정원은 비추지 않는다.
사람이 정원에 없을 때만 경호원이 나와서 순찰을 돈다.
이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애정행각 막 벌여야지.
“명목상 니집. 너희 엄마 퇴원하시면 들어오실 집. 아니면 대판 싸웠을 때 잠깐 숨 고를 집. 아니면 니 친구들이나 방송용으로 공개할 집.”
“아. 헤헤헤.”
각자 한 채 씩.
엄청난 사치.
“집 넓다. 그림 같아.”
한 채당 150평 복층이다.
슬라이드 폰을 밀어놓은 것처럼, 1층 집 대각선 위에 2층이 연결되어 있다. 2층에선 1층 천장을 넓은 발코니로 쓴다.
천장이 개방된 발코니엔 거울 코팅 유리를 세워 놔서 북한산 정상에서 망원경으로 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옆집은 닥똥 줬고, 그 옆집은 가오리 줬어. 그 옆은 채형, 황형, 권형, 정형 구형. 한 채 남았는데 예하 니 친구 줄 사람 있어?”
저택 사이엔 높은 나무가 울타리처럼 심어져 있고, 각자 넓은 마당을 갖고 있어서 집에서 보면 세상에 혼자 있는 것 같다.
“친구... 히잉. 나 친구 없어. 인생 잘 못 살았나봐.”
......
“힘들게 살았으니 친구랑 놀 수 없었겠지. 이게 다 조승학 때문이다.”
“어. 그치그치? 내가 못 된 거 아니지?”
“그래. 일단 비워두자.”
100평 넓이의 1층엔 넓은 거실과 주방, 방 네 개와 화장실 두개가 있다.
2층은 방 두개와 거실, 넓은 야외 발코니.
이태리 침대, 프랑스 탁자, 스페인 수납장, 한국 가전 등 세계 최고의 제품들만 모아 놨다.
“어때. 이만하면 돈 막 쓴 거 같지?”
“어. 어. 오빠도 쓸 땐 쓰는 구나.”
“후훗.”
얼마 들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새 차를 공개합니다.”
미래 그룹이 너무 유명해져서 옥수동 집엔 파파라치가 들끓었다.
부자인 걸 감추려고 위장택시를 타고 다녔지만, 코팅되지도 않은 택시를 타면 예하의 모습이 비춰지니 오히려 손해다.
이제 제대로 된 차를 타야지.
“짜잔.”
“어... 뭐야?”
“불보SUV.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차.”
라고 블로그에 적혀 있더라.
돈이 아무리 많아도 교통사고로 죽으면 끝이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출퇴근용 차로 내부엔 컴퓨터와 중계기를 설치해 메일과 메신저로 일 할 수 있게 꾸며 놨다.
“어... 예쁘네.”
“그리고 2호기.”
2호기는 24인승 버스를 개조했다.
“예하 니 전용차야.”
미니버스를 개조했다.
컴퓨터는 당연히 설치되어 있고, 샤워실과 화장실, 탈의실이 분리되어 있으며 침대칸도 있다.
야외에서 공연이나 촬영을 하다가 쉬거나 급한 용무를 볼 수 있도록 예하를 위한 선물이다.
“어... 고맙네.”
“그리고 3호기는.”
48인승 대형 버스를 캠핑카로 개조했다.
심지어 수륙양용이다. 달리다가 그대로 바다에 들어가면 배가 된다.
이거 굉장히 비싸다.
20억 넘는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비싼 캠핑카.
“모닥불하고 캠핑 다닐 때 쓰라고. 나랑도 국내여행 갈 때 이걸로 가고.”
자랑하며 보여주는데 예하가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떤다.
“예하야? 왜?”
“승용차나... 세단 같은 건 없어?”
“어? 에이 그런 거 허세야. 쓸데없어. 그런 차 타다가 100톤 트럭이 깔아뭉개면 큰일 나. 차는 큰 게 짱이야.”
회귀 전 온갖 잡일을 하면서 느꼈다.
차는 큰 게 짱이다.
심지어 용역 노가다를 할 때도 50만원짜리 스타렉스로 용역 아저씨 태워주는 사람은 교통비 3000원을 받았다.
노가다로 번 돈에 추가로 8명에게 3000원씩 버는 것이다.
차는 클수록 짱.
“...... 오빠. 고마워. 나 방에 가서 정리 좀 할게.”
예하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음...... 역시 여자는 차에 관심이 없군. 가구나 옷 같은 걸 좋아해.”
에휴.
괜히 차 자랑했네.
가구 소개를 더 길게 할 걸.
쩝.
“여어~ 아앗 예하님. 아니 제시님 오늘은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시커멓게 탄 가오리가 호들갑을 떨며 예하에게 아부를 했다.
닥똥은 영주씨와 손을 잡고 조용히 인사했다.
“두루마리 휴지는 뭐냐. 어쭈 넌 물티슈냐.”
“선물. 크크.”
“집들이 선물은 이거라던데. 집들이가 처음이다 보니.”
25살 나이에 집 산 이가 없으니 친구네 집들이 자체가 처음이다.
집들이래 봤자 나란히 한 채씩 가졌는데.
집들이를 핑계로 술 마시는 자리다.
예하도 한껏 들떠서 자기가 집들이 음식 차리겠다며 이것저것 검색 했었지만 못하게 했다.
띵동.
본관 식당에서 음식이 배달 온다.
본관에는 식당도 있는데 본관에 상주할 경호팀과 저택관리팀, 비서팀을 위해 호텔 요리사를 고용했다.
전문분야가 다른 특급 쉐프가 요일마다 하루씩 출근해 매일 새로운 요리를 한다.
오늘은 멕시코 전문 요리사인데 집들이를 위해 코스요리를 준비해줬다.
전채요리를 먹으면서 소주 한잔.
한국인은 안주가 뭐든 간에 소주가 제일 낫더라.
뒤이어 온갖 화려한 요리가 줄줄이 배달됐다.
“평생 필리핀에 있을 줄 알았는데 벌써 왔냐?”
“에휴. 내가 비를 좀 좋아하잖냐. 우기 내내 필리핀에 있으려고 했는데 후아. 장난 아니더라. 그냥 막 쏟아 부어. 1시간 퍼붓고 10분 쉬었다가 또 한 시간 퍼붓는데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퍼부어. 바람은 또 어찌나 부는지 장난 아니야. 우산도 우비도 소용없이 쫄딱 젖고, 도로는 패이고, 파도는 집채만 하고. 이러다 죽겠다 싶어서 비행기 예약했더니 비 때문에 연착이야. 이틀이나 세부 공항에 잡혀 있었네.”
시커멓게 탄 가오리가 고생담을 말하자 나와 닥똥이 어이쿠, 잘됐네, 꼴 좋다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즐겁게 소주를 마셨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저런. 한국도 이제 곧 장만데. 비가 널 좋아하나보다.”
“이를 어쩐다. 쯧쯧.”
나와 닥똥이 이를 드러내 웃으며 진정어린 위로를 해 줬다.
치어스.
가오리를 빼고 나머지가 짠하고 소주 한잔 마셨다.
“으으. 싫어. 비 싫어. 월드스타 레인이 날 스토킹한다아.”
“장마 전선 올라오면 그때 다시 필리핀 가든가.”
“오오. 천잰데?”
“이 새끼들이 누굴 바보로 아나. 장마기간에도 거긴 우기야. 아아. 비 싫어. 비 없는 곳에 가고 싶다. 스키장 가고 싶다.”
“비가 싫다고 겨울을 찾다니.”
“스키장? 우와. 스키장. 가보고 싶다.”
예하가 덥썩 물었다.
“스키장 가고 싶어?”
“어. 한 번도 못 가봤어.”
“그래 가자.”
예하가 원하면 언제든지 데려가 줘야지.
“어. 쪼우아~ 1월이 좋겠지? 폰에 체크해놔야지.”
“뭐하러 그래? 가고 싶으면 가면 되잖아.”
“6월인데?”
이런 구질구질한 가난뱅이 습성을 고쳐줘야겠다.
“후훗. 남반구로 가면 되지.”
“아. 우와. 오빠. 천재다.”
“으빠므찌나?”
“어. 짱. 짱짱. 그럼 언제 가지?”
“스케줄 좀 보고. 난 전화로 해결 가능하니까 예하 네 스케줄에 맞추지 뭐. 곧바로 가 버리자. 방송이야 가서 스키장 방송해도 되고.”
“우와. 그러네. 조우아. 신난드아.”
예하가 앉아서 어깨춤을 추자 모두가 멍하니 빠져들었다.
곧장 비서실에 연락해 칠레 쪽 스키장 여행을 준비하도록 했다.
돈이 많으면 뭐든 편하다.
“야. 나는?”
“어?”
“내가 가자고 했는데?”
아. 가오리. 잊었네.
원래 그런 거지.
“에이시 번거로운 놈. 닥똥 넌?”
“어? 갈까? 영주야 갈래?”
영주씨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결혼한다면서? 축하해요.”
가오리가 갑자기 주제를 바꿨다.
원래 우리가 모이면 항상 이러지.
“제가 결혼 선물로 스키 타는 법 가르쳐 드릴게요.”
가오리가 헛소리하자 낯가림 심한 길영주씨가 쑥스러운 척 고개를 숙였다.
분명 속으로 욕하고 있을 거야.
“그럼 저는 이번 여행 경비 쏠게요. 결혼 선물로.”
길영주씨가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어줬다.
이로써 방금 가오리한테 속으로 욕한 거 확정.
스키장 여행에 들떠 한참 떠들고, 핸드폰으로 칠레를 검색하며 술을 마셨다.
“상철이 형은 괜찮아?”
“괜찮은 거 같아. 적어도 죽을 고비는 넘겼대. 입원은 오래해야겠지만.”
김상철의 부상엔 큰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나로 착각한 범인의 습격이었으니.
꾸준히 찾아가고 상태를 보고받고 있다.
다만 중환자실이라 면회를 막고 있어서 보진 못했다.
“어휴. 참. 미치광이 하나가 큰일을 저지르는구나.”
“그러게.”
이 녀석들에겐 조승학의 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야지.
탈옥시켜서 죽여 버리려면.
“그 얘긴 그만 해.”
칼부림이 났다.
내게도 충격이었는데 예하는 바로 옆에 있었다.
지금도 그땔 생각하면 몸이 오슬오슬 떨리는데 예하는 오죽할까.
슬쩍 눈치를 보니 예하는 다행히 못 들었다.
갈비찜 비슷한 요리를 앞에 두고 길영주와 양주를 마시며 수다삼매경에 빠져있다.
다행이다.
그래 술자리에선 각자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 거지.
“어머 어머 그래요? 그럼 결혼 준비는요? 안 해요?”
예하 목소리밖에 안 들린다.
길영주씨 또한 닥똥과 성격이 비슷해서 목소리가 작다.
“내일 거제도 간다고요? 와 좋겠다.”
“거제도 간다고?”
닥똥을 보고 물었다.
“어. 새벽 출발.”
“정신 나간 놈아. 그럼 빨리 자야하는 거 아니야?”
“어마. 너무했다.”
갑자기 예하가 이쪽으로 끼어들었다.
정신없어.
“뭐가?”
“오빠오빠. 두분이 내일 거제도 여행간대. 그런데 장인어른도 같이 가신대. 세분이 사흘 동안 간대.”
“어...... 잘 모시면 좋은 거 아니야?”
“셋이 가서 이틀 동안 갯바위 섬에 산대.”
“...... 왜?”
“낚시하러! 장인어른하고 닥똥오빠랑 2박 3일동안 낚시만 하도 온대. 숙소도 안 잡았대. 야생의 갯바위 위에서 노숙한대.”
“와......”
여윽시 내 친구.
닥똥이 변명했다.
“노숙이 아니라 낚시는 원래 밤에 하는 거라서.”
“그럼 길영주씨는 숙소에 버려져? 설마 갯바위 위에서 함께 노숙이야?”
길영주씨가 작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무 계획 없어요. 저 알아서 하래요.”
“너무하네요.”
“그쵸? 얘가 저랑 결혼하려는 건지, 울 아빠랑 결혼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저랑 통화한 것보다 울 아빠랑 통화한 적이 더 많아요.”
“아니야. 이번엔 낚시에 대해 맞추느라 자주 통화한 것뿐이야.”
“뻥치시네. 낚시 얘기 말고도 잡담을 30분 넘게 떨었잖아. 식당에 나 혼자 심심하게 남겨두고 내 아빠랑 전화로 30분 동안 떠들었으면서.”
여윽시 범상치 않은 내 친구.
흑가오리가 끼어들었다.
“안되겠네. 이 결혼 무효. 헤어져! 솔로가 되어라! 1커플이 헤어지면 2솔로가 탄생하니 수학의 기적!”
혼자 솔로인 가오리는 모든 커플이 찢어지길 바랬다.
흑가오리의 개소리에 길영주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했다.
“헤어지면...... 헤어져도 얘 울 아빠랑 낚시 다닐 것 같은데. 헤어진 딸의 남친과 낚시여행 다니는 아빠라니......”
으으.
듣기만 해도 소름끼친다.
이건 불륜도 아니고.
한참 닥똥을 물고 뜯으며 술을 마셨다.
예하와 길영주가 적극적으로 참전함으로써 위아더 원, 위아더 월드 했다.
그러다 또 각자 하고픈 말을 했다.
서로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
상대가 말하면 기다렸다가 내 차례엔 내가 하고픈 말을 한다.
“너 요새 좀 파이터 같다? 왜 그렇게 싸움을 걸고 다니냐?”
그래서 자기 말을 듣게 하려면 상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스킬이 있어야 한다.
가오리는 이런 걸 잘 한다.
“뭐가?”
“병원이랑 싸우고. 또 방송국이랑도 싸우고 있잖아. 그래서 칼 맞은 거 아니냐? 이번엔 정신병자였지만.”
정신병자가 아니고, 실제로 싸움 걸다가 적을 만든 게 맞지.
먼저 때린 건 조승학이지만.
“왜냐면... 난 한국 최고가 될 거니까. 한국 말고 한반도 역사상 최고.”
회귀했으면 이쯤은 해야지.
“어...... 그럼 난 해적왕이 될 거야!”
가오리의 개드립이 나의 선언을 퇴색시켰다.
영주씨와 투닥거리던 닥똥이 끼어들었다.
“난 내일의 낚시왕 악!”
짝!
닥똥의 등짝을 길영주씨가 강하게 후렸다.
정신없다.
“나는.... 어...”
안 돼 예하야. 물 들지마. 지지야.
- 작가의말
읽으면서 술취한 것처럼 정신없으시다면 정상이십니다
글속의 술자리인데 논리정연하게 대화하면 저는 몰입이 깨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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