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덕유산2
7년 전 예하의 정강이가 부러져 트비스타 데뷔가 무산되었다.
뒤에서 누군가 발로 차서 다친 거였고.
예하에게 맡겼지만, 너무 진전이 없으니 궁금해서 흥신소에 몰래 의뢰했다.
절대 비밀수사를 지시했고, 그래서인지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게 신경 쓰여서 트비스타에게 마음을 못 열겠다.
저 중 누군가가 범인이라면...
예하가 발걸음을 우리 테이블이 아닌 오솔길로 틀었다.
“난 괜찮아.”
“뭐가?”
“범인이 누군지 찾지 않기로 했어.”
“바보냐?”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발로 찾는 지 찾을 수 없어. 그냥... 행복한 것만 보고 살래. 날 위해서. 답 없는 거 붙들고 사느니 내 행복을 챙길래.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사는 게 진짜 복수가 아닐까?”
부글부글.
스읍, 하.
스읍, 하.
“바보 맞네.”
너 세뇌되었구나.
사기꾼 새끼들이 쓴 개좆같은 책에 세뇌되었어.
“죄지은 자가 벌을 받아야 복수지. 니가 말하는 그거 매 맞고 사는 불쌍한 아줌마들이 이혼 못하게 하는 세뇌야. 학폭 피해자가 자살로 몰리는 세뇌고. 따라와.”
피해자가 저항해야지 참고 인내하는 게 모두에게 좋다고?
그딴 소리하는 새끼들은 다 가해지다.
예하의 손을 당겨 술자리로 돌아갔다.
쿵쿵쿵쿵.
발소리가 거칠어졌다.
멀리서 부터 우리를 본 루비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트비스타들도 돌아봤다.
“어솨요.”
“왤케 오래 걸렸대? 혹시?”
“동욱오빠 뺨에 립스팁.”
“예하 너 옷이 흐트러졌는데?”
까르르륵.
신났구만.
“미안하지만 찬물을 좀 끼얹을 게.”
“왜요?”
“민원 들어왔어요?”
“코로나 신고?”
“괜찮지 않나?”
“예하랑 깨지심? 이제 내 차례?”
루비 쟤는 중병이다.
잠시 트비스타의 얼굴을 지켜봤는데 순진무구하다.
범죄자가 연기하는 거라면... 진짜 연기대상감이다.
하지만 연예계에 있는 애들이잖아.
“친해지려면 이것부터 해결해야 해. 예하의 부상. 트비스타 데뷔조 탈락. 그때 예하를 민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기 전엔 너희 소속사 누구와도 친해질 수가 없어. 마음에 돌이 걸리잖아.”
너희 중 누군가가 범인일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다.
실례되는 말이지만. 했다.
취해서인지 나답지 않게 쏟아냈다.
내 발언에 예하가 몽크의 절규처럼 경악했다.
“오빠아......”
풋.
웃어? 누구야?
푸하하.
또?
술기운에 잘못 들었나?
“아하. 그거. 범인 잡혔잖아.”
“앗 웃을 일이 아니네.”
“마음에 돌이 얹혀있었구나. 우리가 말했어야 하는데.”
“예하 속상했었겠다.”
“왜 예하가 모르지?”
트비스타들. 예하와 동갑부터 나보다 한살 어린애까지 포진한 여자들이 예하에게 달려가 안았다.
“그거 잡았어. 연습생 나정이였어. 데뷔조가 다친 거였잖아. 걔 부모가 4억 물었을 걸? 나정이는 짤렸고.”
뭐야? 끝난 일이었어?
“예하 넌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네 상처가 클 까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었는데.”
“와... 회사에 손해배상하고 끝? 제시한텐?”
“돈 안 주려고 비밀로 했나?”
“그러네. 기획사놈들이 또.”
범인은 즉각 잡았단다.
데뷔조가 삐끗한 일로 손해배상까지 받아냈단다.
그래놓고 진짜 피해자한텐 비밀로 했다니.
병원에서 재활까지 마친 후 계약해지하고 조승학의 BJ엔터로 옮겼으니 예하가 따로 묻지 않았다면 숨길 수 있었겠지.
사건이 정말 어이없게 해결되었다.
허탈하네.
“우아앙. 언니 미안. 미안해에엥. 나는 범인이 누군지 몰라서 한번씩 의심하고 또 막 그때 상황 기억하고 떠올리고.”
예하가 대성통곡을 한다.
아주 목 놓아 운다.
“마음고생 심했네.”
“우리가 미안해. 데뷔조라 만나지도 못하고.”
“나정이 벌 받는 거 알려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어쩌다 보니 눈물이 전염된다.
예쁜 애들이 부둥껴 안고 우는 게 뭐랄까... 느낌 있네.
참... 이건... 허무한데.
터덜터덜 술자리로 가서 앉았다.
“잘 해결됐네?”
루비가 잔을 든다.
“그러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였나.”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결말.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거였는데.
흥신소 아저씨한테 절대 비밀로 수사하라고 해서 못 찾은 거였나.
조사를 어떻게 한 거야?
누구 한명한테만 물어봤어도 알아냈겠다.
아저씨들 돈 토해내야겠어.
궁금해 하는 닥똥가오리모닥불한테 사건의 전말을 말해줬다.
세상에 세상에 하다가 날 바보처럼 보는데.
“바보는 예하지. 예하한테 전적으로 맡겼으니까. 나 바보 아니다.”
푸후훕.
제길.
한참 울고 안고 핥던 트비스타가 귀환했다.
“그럼 사장오빠도 우릴 의심 한거네요?”
“어. 너희 중 누군가가 범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멀리했고.”
돈이 많다는 건 솔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솔직해서 사고가 나도 수습할 수 있다는 뜻.
“와. 대놓고.”
“크윽. 마음의 상처가.”
“우리 의심받았어.”
“야. 상황이 그랬잖아. 그래 미안.”
“이거 어떻게 치료해줄 거에요?”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아아. 크루즈 여행......”
“그래. 미안하다. 카니발 사줄까?”
말하고 보니 말이 헛 나왔다.
지금 사려던 회사가 갑자기 떠올랐다.
“카니발?”
“차요? 난 크루즈 여행 말했는데.”
“브라질 축제 말하는 거 아냐?”
“크루즈라고 하길래 크루즈 회사가 떠올랐어.”
이렇게 된 이상 밀어붙인다.
“...... 급이 다르다.”
“그건 뭐하는 회산데요?”
“크루즈 회사라잖아. 얼만데요?”
“20조.”
“......”
“사 달라고 해볼까?”
“진짜 사줄려나? 크크크.”
“대신 회사 빚은 너희가 갚아. 코로나 장기화 되면 빚이 계속 늘 테고. 너희 돈 20조 정도 추가로 부으면 정상화 될 거야.”
“님아. 즐.”
“와. 이렇게 넘어가네.”
“일단 사달라고 해보자. 말아먹자.”
“아 몰라. 마셔.”
“제시야 마시자. 짠하자.”
휴우. 잘 넘어갔군.
예하의 마음고생과 트비스타의 상처핥기 속에 다들 만취해버렸다.
크리스마스 대목에 휴가 써서 여기까지 온 트비스타들은 그동안 절제한 것을 모두 버렸다.
고삐가 풀린 것 처럼 다들 술을 마셨다.
“아 오빠. 또 꺾었어.”
“아니 이사람이 진짜.”
“핸플 시캬. 마셔.”
가오리는 트비스타랑 한 그룹인양 놀고 있고, 낯가리는 쥐며느리 부부도 목소리가 커졌다.
매니저팀에 말해서 거대한 모닥불을 피웠고, 겨울임에도 적당히 따뜻하다.
“나만 안 취하네.”
모닥불이는 불 앞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쟤 오늘 깨졌지?
“어? 별똥별이다.”
“진짜? 와 별 많다.”
“밤 되니까 좀 무섭네.”
“그치 낮에 볼 땐 산이 진짜 예뻤는데.”
두서없는 말들.
“맞다. 니들 사장한테 내가 좀 보잔다고 해라.”
“꺄아. 패기.”
“혼내줘요. 그 인간.”
“와... 생각해보니 다 그놈 잘못이잖아.”
“피해보상은 예하가 받아야 하는데 왜 지가 돈을 챙겨? 우리 막내 얼마나 힘들었누.”
“흐어어엉. 언니이이.”
취한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사회 생활은 어쩔 수 없이 직급으로 사람을 대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편하게 대하라고 말하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것 안다.
그래서 이런 관계가 좋다.
모닥불 쟤는 애가 신기한 애고.
“오빠. 글램핑. 몽골텐트에서 자자아.”
“캠핑카가 더 편할 텐데.”
“아잉 싫어어엉. 떨어져 있잖아. 몽골텐트에서 자자아.”
“어. 그래.”
예하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글램핑 안 침대에 들어갔다.
부축?
나 잠들었었구나.
으음.
입에 누군가의 입이 닿고 있다.
가그린맛 키스.
“예하야?”
“나 루비야.”
루비구나.
“예하는?”
“오빠 귀에.”
귀를 핥는 건 예하구나.
“어.”
그렇구나.
덥다.
너무 더워.
목말라.
물.
눈을 떴다.
밝다.
숙취는... 약간 지끈 정도.
몸이 무겁고 덥다.
예하가 내 몸 절반을 덮고 있다.
루비가 나머지 절반을 덮고 있다.
둘이 손을 뻗어 서로의 허리를 감고 있다.
예하는 내 왼쪽 겨드랑이에 얼굴을 파묻고 침을 흘리며 자고 있고, 루비는 내 귀에 대고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다.
“... 나 당한 건가.”
그래 보이네.
목말라.
애들을 밀어서 치웠다.
나무에서 떨어진 송충이처럼 꿈틀대던 놈들이 서로의 몸을 찾아 안고 또 잔다.
몽골텐트 안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니 조금 정신이 든다.
양치도 안하고 잤네.
내 복장은 롱 패딩 입은 채 그대로.
어제 내가 이 옷 입고 술 마셨었지.
어...... 아무 일 없었나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네.
여긴 남녀 역전 세계인가.
몽골텐트의 입구는 자크로 되어 있는데 활짝 열린 채 얌전히 내려져 있다.
겨울이라 다행이지 여름이었으면 수천만 마리의 모기가 피의 축제를 벌였겠구만.
텐트 밖으로 나오자 기분좋은 추위가 귀에 달라붙는다.
동쪽에 동이 터오르고 있고, 어둠이 밀려난 새벽의 숲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분이 나무에서 얼어 하얀 결정을 만든다.
눈꽃.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함박눈을 맞은 것처럼 하얀 눈꽃에 덮여 있다.
멋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옆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한민선과 모닥불이 퉁퉁 부은 눈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을 들고 있다.
“코코안데 줄까?”
“어.”
모닥불이 일어섰고, 그 자리에 앉았다.
벤치에 앉으니 경치가 더 잘 보인다.
모닥불이 큰 머그잔에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타 왔고, 한 모금 마시니 정신이 든다.
“애들은?”
“...... 자. 알고 있었냐?”
“어제 오빠가 제일 먼저 잤어. 술 센 양반이 피곤했나보네.”
“그랬나.”
다 알겠군.
이게 퍼져나가면... 빌 클링턴 스캔들의 백 배 폭발력을 가지려나.
“걱정 좀 하지 마. 세상일 별 거 아니야.”
“응?”
“의외로 별거 아니라고. 넌 너무 완벽주의야. 불안해하는 것도 많고. 그냥 신경 쓰지 마. 뭐... 그런 성격 덕에 부자 된 거겠지만.”
모닥불 얘는 가끔 오래 산 구렁이 같다.
“그래.”
“소문 나봤자 루머 정도로 끝나겠지.”
“어.”
“그냥 살어. 뭐 대단한 거라고.”
“네 할머니.”
말이 끊겼다.
나와 모닥불이 동갑이니까, 한민선까지 셋 다 동갑이네.
멍하니 앉아서 눈꽃에 덮인 절경을 봤다.
새벽에만 볼 수 있는 경치.
조용하고, 운치 있고, 좋다.
트비스타도 하나 둘 깨어나 화장실 갔다가 가까운 벤치에 앉아 멍 때린다.
딱히 복잡할 필요는 없다.
해리포터 마법학교에 놀러간 것처럼 멋진 여행을 하루 하는 거다.
가오리가 트비스타 몇과 물을 끓이고 라면 열댓개를 끓였다.
“핸플. 가서 애들 깨워.”
둘러보니 나오지 않은 건 바보콤비 뿐.
세상 행복하게 서로 안고 자고 있는 루비와 예하.
찰싹.
둘의 엉덩이를 강력하게 때렸다.
“악.”
“아 5분만.”
서로 더욱 강하게 안는다.
“정신차려, 이 성범죄자들아.”
“힉!”
루비가 벌떡 일어났고 예하는 매달려 끌려올라가다가 떨어져 몸을 둥글게 만다.
찰싹.
찰지구만.
찰싹. 찰싹.
“오빠? 아. 그 있잖아.”
“나와. 라면 먹자.”
“어? 어. 예하 깨울게.”
남겨두고 나오니 벌써 라면 배식을 하고 있다.
어제 술을 마셨던 난장판 술자리는 벌써 치워져 있다.
“다 치우고 잔거야?”
내 말에 차정미가 대답했다.
“새벽에 경호팀이 치워줬대요.”
“아. 고마워라.”
깨지 않게 조용조용 움직이셨겠네.
텐션이 한껏 떨어진 사람들이 조용히 라면을 먹는다.
속이 쓰린지 국물만 먹거나 물만 계속 먹는 이도 있다.
다들 조용히 먹으며 눈꽃 덮인 숲에 빠진다.
“아... 일하러 가기 싫어.”
“제끼고 싶다.”
코와 귀가 빨개진 아이돌들이 푸념했다.
예하와 루비가 쭈뼛쭈뼛 나와 자리에 앉았다.
잔뜩 불어버린 라면을 한 그릇씩 떠 주니 민망해하면서 후루룩 마신다.
“오빠.”
“다 드셈.”
“넴.”
평화롭다.
- 작가의말
이 아저씨 또 헛발질하네
...가 들리는군요
첫째별님 키리취님 후원감사합니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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