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음악과 방송
“안녕하세요. 신인 가수 제시입니다.”
꾸벅.
“꺄아아아.”
“막내닷. 우리 막내.”
“어쩜 더 예뻐졌니.”
예하가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저 중에 예하의 종아리를 부러뜨린 누군가가 있을까?
예하도 그렇고 트비스타도 그렇고 다들 엄청 반기고 있다.
반기고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인다.
연기일까? 진심 같은데.
과연 범인이 저 속에 있을까? 없나?
사전 녹화한 영상이 끝나고 큐사인이 나와서도 예하는 트비스타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끼고 부둥껴 안고 있는 게 참 보기 좋다.
어여쁜 애 옆에 아름다운 애, 그 옆에 예쁜 애, 그 옆에 가장 예쁜 예하.
그림이 좋군.
긴장되는 발표 끝에 트비스타가 일위가 되었고, 기뻐하는 트비스타 속에서 예하가 함께 기뻐했다.
가식 없는 축하.
예하 니가 1등한 거 같다.
트비스타 한가운데에서 축하해주고 어루만져주고 있다.
저런 걸 인자기급 위치선정이라고 하나.
아니 보싱와급 위치선정인가.
트비스타의 축하무대 시간에 무대 뒷편에선 화기애매한 인사퍼레이드가 열렸다.
반가웠어요. 다음에 봬요. 안녕히 가세요. 조연출님 수고하셨습니다.
가식과 위선이 가득할지라도 소설에서처럼 광년이는 없더라.
쌀알에 몰려든 비둘기 떼처럼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A급부터 떠나갔다.
눈치 보며 인사를 이어가다가 B급 C급이 눈치껏 떠나고.
그리고 트비스타가 축하무대를 마치고 왔다.
무대 뒤에서 인사하며 기다리던 예하와 합류했다.
“예하! 술 마시러 가자!”
“그래. 제시! 가자!”
“우리 막내. 우리 예하. 어떻게 살았어.”
“번호도 없어지고. 후에엥. 우리 예쁜이.”
아무리 봐도 가식 같지 않다.
예하도 신나서 언니들과 술 마시러 갔고, 나 혼자 집에 갔다.
음.
고독하군.
오늘은 솔직히 좀 땡겼는데.
예하의 데뷔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군.
다음 주 재차 출연해 달라는 KBC 음악방송을 포함해 모든 방송 프로그램에 새로운 제안을 제시했다.
계약조건을 공정하게 바꿔달라 했고, 당연히 방송국에선 거절했다.
전화 이후 공문을 보냈고, 조건 변경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예하야. 정말 1위 안해도 돼? 발표는 한 주 늦춰도 되는데.”
“괜찮아. 그보다 1위 못할 것 같은데? 김치국 먼저 마셨네. 웋크킇.”
“그러게.”
노래만 발표하면 당장 1위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자정에 공개된 예하의 음원 성적은 79위.
시간이 지나도 1위 못 할 것 같다.
이래서 대형 기획사가 좋은 건가.
트비스타 언니들과 밤늦게까지 달려 숙취에 지끈거리는 예하와 콩나물 해장국을 먹고, 함께 성수동으로 갔다.
안무팀을 비롯해 예하 전담팀과 만나 방송출연을 거절한 소식을 알리고, 바뀐 일정을 말했다.
이럴 가능성이 있다고 미리 말했기에 큰 반발은 없었다.
하루를 통째로 바쳐 시청률 1%따리 방송에 출연하는 대신 인터넷 방송과 동영상 위주로 활동하기로 했다.
성수동의 스튜디오는 방송국보다 작지만 댄스팀이 춤추고 놀기엔 충분하다.
오가는 직원들이 방청객이 되어 환호해 주니 사운드가 비지도 않는다.
예하가 춤추고 노래하며 방송하는 걸 보며 일처리를 했고, 준비가 끝났다.
“안녕하세요. 새장 속에 갇힌 모닥불피디예요. 요즘 캠핑 방송이 줄어서 슬퍼요. 괜히 계약했엉.”
점심이 조금 지나 모닥불의 방송이 시작되었다.
“첫소식입니다. 우리의 스타 제시님의 음악방송이 취소되었습니다. 앞으로 제시님이 음악방송에 출연하는 일은 없을 거래요. 대신 저희 채널에서 거의 매일 노래하고 춤추니 방송출연보다 더 이득이겠죠. 이득 맞나? 머 그렇다네요.”
예하의 활동계획을 방송으로 소개해줬다.
“음악방송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방송국의 갑질때문이래요. 제시님의 생각이 아니라, 본사의 결정이래요. 갑질당하면서 출연할 필요 없다며 본사에서 제시님의 활동을 막았어요.”
언제나 그랬듯 미래그룹은 폭탄을 던진다.
방송국하고도 싸우자!
지난 3월 어느날.
영덕의 호텔에 숨어있던 조승학은 미래그룹의 폭로 영상을 보고, 정처 없이 뛰쳐나갔다.
자신에게 걸린 현상금 1000억원.
경호원도, 비서도 믿을 수 없다.
아빠조차 믿을 수 없다.
정처 없이 뛰고 뛰어 시내를 벗어났다.
영덕은 해안가만 관광지로 발전했지, 내륙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시간이 멈춘 듯한 깡촌이 자리하고 있다.
농촌을 지나 산촌에 갈 때까지 뛰고 뛰었고, 지쳐서 발이 떨어지지 않을 때 쯤 정신을 차렸다.
“시발놈. 시발년. 내가 뭘 잘못했다고 시발. 내가 사람은 안 죽였는데 왜 날 죽이려고. 썅.”
성형수술이 자리잡지 못해 얼굴 전체에 붕대를 감고 있고, 입고 있던 옷도 호텔에서 입던 그대로라 얇다.
해가 지니 추위가 찾아왔다.
드문 드문 불이 켜진 농가가 있지만, 찾아갈 수 없었다.
세상 모두가 사냥꾼 같다.
1000억원에 눈이 벌개진 사냥꾼들.
사람이 지나가거나 경운기가 지나갈 때마다 나무 뒤에 숨길 반복하며 산으로 들어갔다.
“시발 시발. 개년 샹년 좆같은 년.”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더 이상 발이 움직이지 않자 폐가에 숨어들었다.
시골의 집 세 채 중 한 채는 반드시 비어있다.
쓰레기와 거미줄로 가득한 집에 들어가 아무렇게 웅크렸다.
“시발. 추워. 시발. 왜 나한테. 시발. 내가 뭘 했다고. 시발.”
춥다.
버려진 신문이라도 덮어야겠다 싶어 들어 올리니 그 밑엔 4년쯤 지난 듯한 똥이.
“시발. 개같네. 시발. 좆같네. 시발 예하년 따먹고 죽인다. 시발.”
똥을 덮고 있던 신문과 박스와 그 외 쓰레기를 그러모아 열심히 덮었다.
잠깐 따뜻했지만, 금새 추워진다.
3월 초의 날씨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추웠다.
너무 추운데 지쳐서 움직일 수도 없다.
조승학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다음날.
“으. 으.”
입이 돌아갔다.
성형한 얼굴이 제멋대로 뭉쳤고 펴지지 않는다.
“으 스블 스블.”
욕을 하며 일어나는데 무릎이 이상하다.
왼쪽 무릎이 안쪽으로 꺾였다.
펴지지 않는다.
“으으으으으 스블뇬. 씅뇬. 쓰앙.”
제대로 걸으려고 해도, 안짱다리가 되어 왼다리가 안쪽으로 들어간다.
비틀.
비틀.
몸도 아프고 열도 나는데 배가 고파서 창자가 찢어질 것 같다.
이대론 죽을 것 같다 싶어서 폐가를 나왔다.
집 세 채가 붙어 있는데 그 중 두 채는 폐가고 한 채만 사람이 산다.
무작정 들어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공기가 확 밀려나오는 집 안엔 할머니 한분이 누워계셨다.
“누고?”
뼈 위에 가죽만 씌운 듯한 노인.
“으. 쓰블. 쓰블뉸. 즈믄 즐 슬고.”
세상이 다 원망스럽고 좆같다.
누구라도 때리고 싶다.
조승학은 주섬주섬 일어나는 할머니에게 비틀비틀 다가가 목을 졸랐다.
목을 조르다 때리고 때리다가 욕을 하고 욕을 하다가 때리고.
사람이 죽을 때까지 때렸다.
죽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으 스블.”
이게 다 예하년 때문이다.
그년을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생라면을 뜯어먹고, 할매 시체를 창고에 던지고 이불속에 웅크려 잤다.
돌아간 얼굴과 무릎은 펴지지 않았다.
“죽이인다. 죽이일그야.”
할매집에서 현금을 약간 찾고, 거기 있는 음식을 먹어치우길 닷새째.
사회복지사인듯한 누군가가 방문했다.
창고 구석에 숨겨둔 할매를 찾진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그래도 언젠간 들키겠지.
조승학은 서울로 향했다.
“죽이인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여주마.
강제로 덮치지도 않고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나에게 왜 이래.
“어? 형이 내려왔어요?”
모닥불의 방송을 지켜보는데 김상철 사장 대신 유성주 사장이 왔다.
“어. 메신저 마무리 단계라며 나보고 하란다.”
“그 형은 진짜 코딩 말고 관심이 없나봐요. 자기가 만든 거 발표하는 데.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끝인데.”
“필요없댄다. 말시키지 말래.”
“크크크. 상철이 형은 진짜 괴짜야. 그럼 형이 발표할 거죠?”
“그래야지 뭐. 일단 미래 IT의 업적인데.”
“그럼 여기 대략적인 대본이요.”
유성주와 대본을 보며 방송 순서를 설명했다.
그동안 모닥불의 발표가 끝나고, 예하가 나가 사과를 했다.
예하는 아티스트의 길을 걸어야 하니 굳이 방송국과 척을 질 필요 없다.
소속회사의 반대로 방송출연을 못하는 쪽이 그림이 좋다.
예하가 사과하고 시청자들의 댓글에 답해주고 댄스팀과 데뷔곡을 부르며 춤을 췄다.
이제 유성주의 차례다.
“안녕하십니까, 유성주입니다. 미래 IT의 공동사장이죠.”
모닥불 옆에 앉은 유성주가 꾸벅 인사를 했다.
“우선 제시님의 방송을 회사에서 거절한 사연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나먕유업이라는 회사가 갑질을 하다가 폭망했죠. 그때 갑질이 어땠죠? 절대 을인 대리점에 우유를 마구 떠넘겼죠. 심지어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마저 도매가를 받고 떠넘겼고, 대리점주는 팔지도 못하고 폐기해야 하는 우유를 도매가 주고 사야 했습니다. 이런 걸 갑질이라고 합니다.”
유성주의 말을 모닥불이 받았다.
“그날 이후로 나먕은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죠. 기업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아서 상품에서 기업 이름을 숨기고 있죠. 이 사진 보이나요? 빨대 뒤에 숨겨놓은 기업 이름. 참 씁쓸해요.”
지난 이야기를 괜히 꺼내서 나먕과 적이 될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3년 후에 미친 짓을 하다가 망할 회사다.
“갑질은 나쁜 거고 여러 이유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죠. 예전에 열정페이가 유행하던 거 기억하십니까? 회사에서 인턴을 잔뜩 뽑아 월급 30만원에 일 년씩 써먹고 버렸죠. 사회경험을 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불쌍한 청년들을 노예 생활시키고 버린 거죠. 심지어 관공서와 공기업에서도 열정페이 인턴을 뽑아 부려먹었죠. 물론 이런 갑질은 차츰 사라지고 있고, 이제 노동법의 보호를 받아 인턴도 최저임금 이상을 받습니다.”
유성주의 말이 끝나자 짜집기한 뉴스를 틀었다.
열정페이의 문제, 시급 천원에 고생하는 청년들, 그를 비판하는 뉴스를 모아서 틀었다.
모닥불이 말했다.
“잠깐만요. 이거 이렇게 틀면 저작권 문제 있지 않나요?”
“문제 있습니다. 방송국과 저작권료를 내라고 하면 내야 합니다. 미리 협의되지 않았기에 방송을 먼저 틀었으니 방송국이 지불하라고 말하는 금액만큼 내거나 아니면 법정에서 지시하는 벌금을 내야 하죠. 그리고 영상을 어디에 올리지도 못하죠.”
“그런데 왜 틀었어요? 채변 사장님한테 혼나는 거 아니에요?”
모닥불의 애드립. 채형은 채변이라 불리는 거 엄청 싫어하는데.
“저작권. 중요하죠. 열정페이도 중요하고요. 두개 다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뉴스 내용을 보면 방송국에서도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비판했네요. 그렇다면 방송국은 문제가 없을까요? 이제 제시님의 방송출연을 회사에서 거부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음악방송 출연료로 13만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방송에 출연한 제시님의 영상은 100% 방송국이 저작권을 갖습니다. 노래하고 춤춘 제시님은 13만원 이외에 한 푼도 쥘 수 없습니다.”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그게 왜 문젠데요?”
“네. 다들 그렇게 하죠. 그런데 이상한 점이 없습니까? 정작 노력한 아티스트는 돈을 못 받고, 오히려 금전적 손해를 봐 가면서 방송에 출연합니다. 그 방송으로 얻게 될 이익은 영원히 방송국이 갖게 되고요. 막말로 제시님의 뷰리풀한 레게노영상을 방송국에서 하루종일 틀고, 그걸로 1000억원의 수익을 올려도 아티스트는 한 푼도 받지 못합니다. 방송국만 돈을 벌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득이 있으니 출연하는 거잖아요. 금전적 손해를 보더라도 출연해 얼굴을 알리고, 실력을 보여주는 게 이득이니까 서로 윈 윈 아닌가요? 그 자리에 출연하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는 언더가수가 얼마나 많은데.”
“열정페이도 서로 윈윈이라는 같은 논리였지만, 욕을 오지게 먹고 사라졌죠. 방송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는 이득이 있으니 니들 돈을 손해보고 저작권을 포기하면서 음악방송에 나와서 방송국의 100% 수익을 위해 노래를 해라? 이게 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저희는 방송국에 제시님과 스텝, 댄스팀의 17시간 최저임금, 148만원의 출연료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고, 아티스트의 당연한 권리인 영상의 저작권을 분배해 달라 했지만 미쳤냐는 반응을 듣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제시님은 앞으로 방송에 출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유성주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같은 시간 채팅창은 불타올랐다.
예하의 미모와 매력에 찬양하던 이들은 예하가 쉬러가니 잠잠해졌지만, 유성주의 강한 발언에 다들 환호했다.
- 丕刀卜 : ㅋㅋㅋㅋ 미래 또 시비건다
ㄴ 부릉부릉 시동겁니다
-づЙんЙ刀lOk : 백제 다음 목표는 방송국임 ㅋㅋㅋ
- 카인지크리 : 저게 마따 저 말이 마따
- diarta : 또 공매도냐?
- 간장색소주 : 주가!! 방송국 주가를 보자
ㄴ 아직 안 떨어졌는데? 지금이라도 내려야 하나?
ㄴㄴ 빨리 뛰어내려. 저점 잡아!
- 난향 : 돈을 줘서라도 출연하는 세상에서 뭔 배짱이래
ㄴ 넌 못생겨서 돈 내고 출연해야 하지만 제시는 다르지
ㄴ 암 제시님은 시니셔. 신!
ㄴ 솔까 제시 정도면 굳이 출연하지 않아도 되지
댓글이 우호적인 게 마음에 든다.
물론 제시의 방송이기에 그런 점도 있겠지만, 무소불위였던 방송국의 권력이 약해졌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겠지.
좋다.
세상은 옳은 방향으로 꾸준히 변하고 있고, 권력은 이동하고 있다.
- 작가의말
테레비전에 내가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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