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근면성실한 한국인2
백제 그룹의 수많은 자회사중에 백제건축사무소가 있다.
약간의 부동산과 5층 빌딩을 갖고 있으며 자산가치는 500억에 지난해 매출 순위 11위를 기록했다.
매출 대비 순이익은 2.9%로 거의 남는 게 없다.
정직원은 62명.
다른 회사들처럼 예쁘게 포장해 판매를 위해 내놓았고, 450억에 낙찰됐다.
부동산가치 400억을 제외하면, 직원과 설계능력, 경험 등을 50억밖에 평가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그냥 팔아치울 생각이었는데, 인수하려는 기업과 건축사무소 직원들 간의 의견차이로 인수가 무산되었다.
무시해도 되지만, 직원들의 의견을 들으러 가는 중이다.
5층 빌딩을 소유하고 있지만, 1,2,3층은 식당과 학원에 임대했고, 4,5층만 백제건축사무소가 쓰고 있다.
황형, 채형과 함께 백제건축사무소에 대해 읽어보는 사이 도착했고, 올라가니 전직원이 줄서 있다.
“안녕하십니까?”
강제로 끌려온 줄 알았는데 좀비 같은 직원들의 눈이 반짝거린다.
백제대학병원과는 180도 다른 분위기.
둘의 온도차 무엇?
“예. 반갑습니다. 다들 일 보시고, 임원 분들만 따로 뵙죠.”
채인수가 자리를 정리했다.
회의실에 가서 앉으니 우리는 셋인데 맞은편에 사장, 부사장, 전무, 상무, 이사,이사,이사,이사가 줄지어 앉았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명함교환식이 이어진 후 채인수가 물었다.
“인수가 무산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퉁퉁한 대머리 사장이 대답했다.
“평광 건설에서 고용승계를 보장하지 않았고, 미래에서 말한 근무시간 보장을 거부했습니다.”
“그... 주 40시간근무 말입니까?”
“예. 미래는 주 40시간에 추가근무시 1.5배, 추가 근무에 야간 근무가 포함되면 2.0배를 주는 걸로 바꿨습니다. 하지만, 평광에선 연봉협상제에 추가근로 금지를 고수했기에 모든 임직원이 반대했습니다.”
사장이 말하는 건 근로노동법에 적힌 내용이다.
국법으로 정한 노동법.
어찌 보면 당연한 법인데 지켜지지 않는 법이다.
연봉을 협상하고, 그 가격만 지불하며, 야근을 금지시키되, 일은 마감 내에 반드시 끝내야만 한다.
“아시겠지만 미래의 근본은 투자회사입니다. 기업을 운영할 생각이 없습니다. 인수가 되지 않는다면, 회사를 해체해 팔아야 합니다. 그러니 되도록이면 인수에 협조해 주시지요.”
채인수가 본사의 입장을 정하자 대머리 사장님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조건은 다른 어디에서도 지켜주지 않습니다. 직원들 모두 새로운 세상을 사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미래에선 백제의 부조리를 고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에 직원들의 기대가 하늘 끝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버린다는 말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후우. 선물을 받았다 뺏기는 격이죠. 룰이 바뀌자마자 예전 상황으로 돌아가려니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어떻게든 직원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룰이라...
업계 시스템인가.
사장의 말을 들으며 내가 설계업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느꼈다.
“사장님. 예전 상황이 어땠는데요?”
대머리 사장은 츄리닝 입은 잘생긴 청년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평균 15시간 근무에 월 1~2회 휴일. 연봉 외에 추가임금 없습니다.”
“왜 그런 불합리를 강요하신 거죠?”
“저도 월급쟁이 사장입니다. 30년 동안 설계만 했죠. 저 또한 그렇게 살았고, 직원들이 그렇게 버티고 있고, 업계 모든 이가 그렇게 버팁니다. 불합리해서 떠나면 어디로 갈까요? 다른 회사들도 모두 똑같은데. 국내 1위 설계업체도 똑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업계 전체가 똥이란 거군.
의사협회처럼 강력한 협회가 있나.
“고칠 수 있나요? 하루 8시간 근무로 최대한 효율을 뽑아낼 수 없나요?”
“사실...... 설계의 특수성 때문에 힘듭니다.”
“특수성이요?”
“건물을 설계할 때 일반인은 자기가 상상하는 멋진 그림을 그리면 땡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
“그런데 기둥 하나 그릴 때도 수십 가지 절차가 있습니다. 기둥 하나를 옆으로 1m 옮겨봅시다. 물리역학을 전부 고려해 새로 설계하고 기술사의 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엔 소방이 붙죠. 소방 설계 변경이 따라오고, 이후 전기, 배관 등 모든 설계가 바뀌어야 합니다. 여기에 건축 공정과 건설 장비의 설치까지 고려해야 하죠.”
“살짝만 고쳐도 전부 바꿔야 하는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전문 업체가 따로 있습니다. 기둥을 옮긴 구조설계를 넘겨주면 소방설계가 포함된 설계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소방이 포함된 설계도를 받으면 배관에 넘기고 받았다가 전기에 넘기고 받고 기타등등등을 거쳐야 하며 그중 한 과정에서라도 불가능하다면 다시 해야 합니다. 모두 통과해야 1m 이동한 새로운 설계도가 완성됩니다.”
“왜 하청을 주죠?”
“모든 분야의 전문팀을 회사에서 운영하면 적자입니다. 뽑았는데 일이 없으면 회사가 망하죠.”
“하청 주는 건 어쩔 수 없다는 말이네요.”
“어차피 하청을 주지 않고 회사에서 모든 분야의 전문팀을 뽑는다고 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죠. 그래서 하루 8시간 근무는 아예 불가능 합니다. 디자인을 뽑아 구조를 설계하고, 소방을 기다렸다가 취합하고, 배관 설계를 기다렸다가 취합하고. 자그마한 오류가 발생하면 다시 수많은 팀이 다 고쳐야 하죠. 이러니 야근은 필수입니다. 기다렸다가 일하길 반복해야 하니까요. 야간팀과 교대? 인수인계가 불가능합니다. 한번 자기가 맡은 설계는 자기가 해야 합니다. 이러니 밤샐 수밖에요. 내가 퇴근해버리면 뒷공정 팀까지 모두 손을 놓을 수밖에 없으니 일정을 맞출 수 없습니다.”
8시간만 바싹 일하고 저녁 있는 삶을 살 수 없는 산업이구나.
“계속 기다려야 한다면 업무효율이 너무 안 좋네요. 그런데도 흑자를 보는 걸 보면 설계 비용을 많이 챙겨요?”
“업무 효율. 좋은 말이네요. 업무효율 좋습니다. 차고 넘치죠.”
“좋아요?”
“건축 설계 공모에 대해 아십니까?”
“모르죠.”
“나라에서 하는 공사는 거의 공모로 설계도를 뽑습니다. 그런데 이게 미술대회 같은 겁니다.”
“미술대회요?”
“주제를 제시하고 주제에 가장 알맞은 그림 하나에게 1등상을 주는 대회죠. 위너 테익스 올. 설계 공모가 그렇습니다. 관에서 요구하는 요소를 갖춘 설계도를 모집해 그중 하나를 선택하죠. 이런 공모가 수없이 많은데, 회사 입장에서 중간중간 시간이 비는 직원들을 어떻게 할까요?”
“...... 굴리겠죠.”
“예. 일 하면서 이 공모도 넣어보자. 저 공모도 넣어보자. 그렇게 수많은 미술전에 그림을 뿌리는 겁니다. 이는 당연히 하청업체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이 일 해서 설계도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다른 일 하다가 설계도 오면 받아서 취합하고, 또 다른 설계 하고. 정말 쉴 새 없이 설계하고 수정하기를 반복합니다.”
“그건... 좀 심하네요. 직원을 완전히 갈아 넣는 거잖아요.”
“압니다. 30년간 설계만 했는데 왜 이걸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안하면 회사가 망합니다. 일자리가 사라지죠. 업계 1위 설계업체도 똑같이 주 100시간 굴립니다. 그래야 버팁니다.”
“아.”
안타깝다.
“혹시 저희가 제시한 임금제로 운영하면 적자전환인가요?”
“후우우.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원들의 업무강도는 변하지 않아요. 매출은 그대로일 테고. 게다가 백제그룹이 해체되고 있으니 매출이 오히려 줄겠네요. 그런데 인건비는 두 배 이상 늘어납니다. 설계 업계의 이익률은 4% 근처인데 인건비가 두배가 되니... 큰 폭의 적자를 보게 될 겁니다.”
여기도 복잡하구나.
의사협회만 문제가 아니었어.
내가 고민에 잠겨 있자니 채인수가 물었다.
“백제 그룹 해체랑 매출 떨어지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29살 변호사 채인수.
똑똑한데 경험이 떨어지네.
나도 딱 아는데.
대머리 사장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삼푸건설은 삼푸그룹의 건설을 몰아 받으며 도급순위를 쭉쭉 올렸죠. 그러다가 삼푸백화점이 무너지면서 함께 와르르르. 저희도 매출의 절반이 백제그룹과 그 관계사 일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백제건설도 후려치는 거였군. 어쩐지 안 팔리더라. 계륵이야.”
계륵이라.
맞는 말이네.
건축사무소도 안 팔리고, 백제건설도 안 팔린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를 제하면 거의 제로 값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가 갖고 있으면 손해 볼 게 분명한 회사들.
이것들을 어떻게 할까.
“직원분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죠?”
“여러 공모전에 넣고 있습니다만... 이건 수많은 그림 중에 1등 하나만 뽑는 거라서...... 여기 이사님들이 열심히 영업해 자잘한 거 받아오고 있지만, 말 그대로 자잘한 것들입니다. 3층 빌라 같은 것들.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적자를 면하긴 어려울 겁니다.”
대머리 사장이 진짜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선처를 바라는 눈망울이... 어우야. 하지마.
“궁금한 게 있는데요. 휴일 없이 하루 15시간 근무라는 게 솔직히 말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직원들은 다들 만족해요?”
“죽지 못해 사는 거죠.”
“아니. 그게 아니라, 집단 반발이나 노조 같은 활동 없어요?”
“원론적인 이야깁니다만 건축학부에서 디자인 설계가 가장 인기가 많습니다. 가장 인기 없는 건 토목이고. 차이가 뭔지 아시나요?”
“깔끔한 거?”
“그렇죠. 건축학개론. 영화 얼마나 멋있게 나왔습니까? 내가 설계한 꿈같은 집. 좋죠. 흙먼지 마시면서 현장에서 땅 팔래? 아니면 에어컨 나오는 사무실에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같은 멋진 건물을 디자인 할래? 답이 딱 나오죠? 다들 가우디를 꿈꾸며 설계를 선택하죠. 게다가 여자도 많아요. 건축학부에 발을 잘못 디딘 몇 안 되는 여자들은 다들 디자인, 설계로 오죠. 이러니 인기가 있죠. 덕분에 매년 졸업생이 쏟아집니다. 대학 4년간 4000만원 써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하고 산업기사, 기사 자격증까지 땁니다. 이렇게 자기 20대를 건축디자인에 올인 했는데 버텨야죠.”
“하루 15시간 노동이 버틴다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개 신입사원은 이십대 후반입니다. 이제와 다른 길로 가기엔 너무 멀리 왔죠. 지금 회사만 나쁘면 몰라도 업계 전체가 그런데 어디로 옮깁니까? 그래도 못 버티는 이가 많긴 하죠. 그래도 회사는 괜찮아요. 매년 수없이 많은 신입생이 쏟아집니다. 15시간 노동을 버티는 이는 남고, 못 버티고 떠난 자리는 새로운 신입생이 채워줍니다. 그렇게 거르고 거르다 보면 15시간 업무를 감당할 수 있는 이만 업계에 걸러져 남게 되는 거죠.”
맞다.
이거다.
세상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최대한 잔인하다.
졸업생이 쏟아진다.
그중 강한 업무강도를 버틸 이만 남는다.
매일 15시간 업무강도를 못 버틴 이는 수천만원짜리 대학 졸업증과 자격증을 포기하고 치킨 튀기러 간다.
모든 관계사가 발맞춰 움직인다.
시스템이 이렇게 짜여졌다.
톡톡톡톡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시스템 로직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
계륵.
회사의 부실이라면 걷어내면 된다.
하지만 이건 업종 전체의 문제다.
업종 특성상 연장근무와 야근이 당연시되는데 업계 전체가 연봉제에 추가급료 없이 일하는 게 고착화 되어 있다.
추가 수당 없이 일하는 근로자가 다 같이 일어서야 업계가 바뀔 텐데 이미 고이고 고여 그 생활에 적응한 이만 남았다.
고치기 힘들다.
고민된다.
- 작가의말
예. 어제 글 올리면서 혼날 줄 알고 있었어요. 선작수도 떨어질 것 같았고요...
그래도 올려야죠 현실 그 자체가 그런데...
지난화와 이번화는 대조를 이룹니다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면... 스스로 느껴보시죠
인기 생각하면 이렇게 안썼죠. 재벌과 만나 오오오 대단해 하며 플렉스 하고 메가 요트타고 여행다니고 세상안타까운 고아와 마주쳐 돈 퍼주며 눈물의 감격 클리세로 채웠겠죠
이글은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고, 바로 현재를 돈퍼부어서 고치려는 이야기라서 어쩔 수 없이 현실의 및낯을 꺼낼 수밖에 없네요. 전 화는 그나마 순화하기 위해 최태수를 꺼냈는데 이렇게 화내실 줄이야
건축설계 쪽은 도화다니는 친구의 인터뷰와 인터넷 자료를 참고했으나 공식자료가 아니며 회사마다 환경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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