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병든 세상
다음날은 보드를 배웠다.
이틀연속으로 타니까 몸이 비명을 질렀다.
일정을 바꿔 비행기를 타고 칠레 남부로 가서 대리석동굴을 구경했다.
남미 여행지를 검색하다가 우유니 사막에 꽂혀서 반쯤 즉흥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볼리비아로 갔다.
전세기를 타고 가 공항에서부터 헬기로 이동했다.
휴식용 컨테이너도 공수했다.
돈을 많이 쓰면 뭐든 가능하다.
별이 쏟아지는 소금호수에서 하루밤을 보냈는데 세계에서 가장 환상적인 풍경일 것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경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가장 아름다운 석양. 별이 담긴 호수. 일출.
거울 같은 소금호수를 보다가 예하가 왜인지 눈물을 흘렸다.
길영주씨도 그렇고.
어째서인지 보는 것만으로 압도당하고 너무도 장엄한 광경에 눈물이 절로 흐르는 경치다.
스키여행을 왔지만 이런 관광이 더 좋았다.
편안하게 향토음식을 먹으며 사진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감동적인 경치를 보며 여유를 즐겼다.
마지막 일정은 이스터 섬으로 갔다.
전세기를 빌려 이스터 섬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친절히 설명했다.
“유럽인이 처음 이스터 섬을 발견했을 때 저 모아이 석상에 놀랐죠. 나무 하나 없는 섬에 거대한 석상만 가득하니 전설의 뮤대륙이나 바닷 속 고대대륙 아틀란티스를 떠올린 거죠.”
개성 넘치는 섬이다.
이모티콘 ㅜ 모양의 석상이 해안가를 따라 줄지어 서있다.
그리고 석상 외엔 볼 것이 없는 작은 섬이다.
차로 한 바퀴 도는 사이에 벌써 지겨워졌다.
“결국 원주민 라파누이가 100명 남짓 남게 되었을 때 학살이 멈췄습니다. 지금은 원주민이 이천 명 정도에 외부인이 오천 명인 섬인데 독립운동이 끊이지 않고 있죠.”
가이드가 느긋하게 이스터 섬의 역사를 설명했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슬픈 역사를 갖고 있는 섬이다.
독립이라.
“독립하면 7000명의 나라가 되요?”
“될 리 없겠지만, 독립하게 된다면 라파누이 2000명의 국가가 되겠죠. 본토인들은 쫓겨날 테고요.”
“흐음.”
원주민의 마을에 방문했다.
기념품을 파는 커다란 상점이 여럿 있고, 고사리 파는 할머니처럼 노점에서 기념품을 파는 이들이 있다.
기념품 대부분이 조그마한 모아이석상이었다.
제주도의 돌하르방 보는 느낌이네.
“차이가 뭐죠?”
“상점은 칠레인의 것입니다. 부자죠. 기념품도 본토에서 만들어 가져옵니다. 노점은 원주민들이죠. 여기서 직접 만든 걸 팝니다.”
그럼 당연히 노점에서 사는 게 낫지.
본토에서 만들어 온 거면 짝퉁느낌 나잖아.
노점에 앉아있는 이들은 죄다 할머니들이다.
길에서 고사리 파는 할머니들 같아서 씁쓸하네.
“몇 개가... 에이 그냥 전부 주세요.”
이것이 15조원 진성갑부의 플렉스.
하나씩 뿌리자.
이스터 섬에서 만든 오리지날 모아이석상이다.
한국 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주지 뭐.
가이드가 가격을 협상하고 할머니 여섯 명의 조그마한 석상을 전부 샀다.
돈벼락을 맞아 감격한 할머니들이 굽신굽신 인사를 하다가 끼야홋 하며 떠났다.
뭐랄까.
“옷이 너무 허름하네요.”
“빈부격차죠. 얼마 전까지 강제 수용소 비슷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농사지을 땅도 갖지 못하고 있죠. 버는 건 얼마 안 되는데 본토에서 공수해오는 식량이 비싸니 살기 힘들죠.”
가이드가 씁쓸하게 말했다.
“본토도 일반인들은 가난하다던데.”
“가난해요. 이들이나 본토의 일반인들이나 비슷하게 가난하죠. 한 달에 백만 원 받으면 엄청 많이 버는 건데, 물가는 서울 물가와 비슷해요. 이러니 먹고 살기가 힘들죠. 단순 노동을 하면 한 달에 40~60 정도 버는데 이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건 꿈도 못 꾸죠. 게다가 교육비가 비싸서 가난이 대물림 되고, 희망도 없고. 뭐 그렇습니다.”
“칠레도 병들어 있구나.”
심각하게.
근사한 남태평양 해변 테이블에 앉아 레스토랑에서 공수해온 해산물 코스요리를 즐겼다.
겨울바다여서 물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돈이 많으면 어디를 가든 이렇게 편안하고 이렇게 즐거운데.
그 돈을 벌기가 힘들지.
오늘 내가 쓴 돈이 아까 할머니의 1년 수입보다 많겠지.
“오빠 또 저 사람들 도와줄 생각하지?”
예하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도와준다기보다...... 내가 독립시켜주면 나도 왕이 될 수 있을까? 생각중이야.”
“에? 독립?”
“칠레로부터 이 섬을 사 버리고 돈 줘서 독립을 인정받으면 되지 않을까?”
블록체인 섬 몰타를 근거지로 삼을까 생각했었는데 차라리 여기를 독립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그... 게... 돼?”
“모르지. 일단 돈만 많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헤에......”
“나 왕 되면 넌 여왕임.”
“우와아.”
예하가 헤실헤실 웃으며 상상의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뭘 생각하는 걸까.
일주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6월말 한국은 장마가 한창이었다.
공항에 내리니 후끈하고 끈적한 장마날씨가 몸을 감싼다.
좀 있으면 뜨겁고 습한 한증막 더위가 시작되겠지.
“아. 좋았다.”
“맞아. 맞아. 너무 좋았어엉.”
대부분의 일은 전화와 노트북으로 처리할 수 있다.
하루에 한 시간정도 일하면 딱히 할 일도 없다.
예하와 최대한 여행 다니며 살아야지.
“장마 끝나고 더워지면 북쪽으로 가볼까?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 어때?”
“힉. 아이슬란드! 죽기 전에 반드시 가야할 여행지라던데.”
“그래? 일정 짜보라고 해야지.”
“힝. 나 이렇게 놀러 다녀도 되는 걸까? 오빠 돈으로...”
“너도 많이 벌잖아. 눈치 보지 마.”
“힝. 넹. 일하러 가야지. 방송 스케줄 최대한 잡을 거야. 그래서 다음 여행은 내가 쏠거얌.”
“그래. 착하네.”
예하와 함께 출근해 헤어졌다.
예하는 자신의 전담팀과 스튜디오로 갔고 난 채인수에게 갔다.
놀러 갔다 오니 할 일이 많았다.
“꼭 읽어야 할 서류야. 오늘 다 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거의 모든 권한을 채인수에게 맡겼지만, 채인수는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배신해서 내 전 재산을 가로채려 한다면 막기 힘들겠지만, 몇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해뒀다.
채인수도 의심받기 싫은지 일처리를 최대한 보고하고 있다.
위임받은 대로 일처리를 하고 도장 찍으면서도 모든 내용을 내게 성실히 전달한다.
“아오. 사소한 건 좀 빼주세요.”
“봐야지. 니 재산인데. 수백억짜리 투잔데 어디 가서 사소하다고 하면 돌 맞는다.”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읽으면서 그간 진행된 사업을 머릿속에 넣었다.
“맞다. 니가 해야 할 작업도 있어.”
비영리법인 미래경제연구소 하반기 보고서.
“이게 뭐예요?”
“무수골 집 우리가 인수했잖아. 그런데 거기를 개인 택지로 돌리는 건 불가능 해. 경제연구소라는 간판은 그대로 둬야 해. 껍데기뿐이지만, 형식적인 보고서를 내야 하거든.”
그렇군.
미래경제연구소.
2018년 하반기 경제를 예측하라는 거지?
A4용지 한 장을 꺼내 일필휘지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떨어짐-
“끝.”
“어?”
“보고서요. 하반기에 주가 떨어진다고요. 기획팀에 넘겨서 나머지 대충 꾸며 달라 해 주세요.”
똑똑한 사람들이니 잘 포장해 주겠지.
“어...”
뇌에 공황이 온 채인수를 앞에 두고 2019년 상반기 보고서도 작성했다.
-오름-
심플 이즈 베스트.
이보다 좋은 보고서가 어딨어.
“진짜 이걸로 끝이야? 그 이유나 예측되는 상황 같은 건?”
“그런 건 기획팀에서 알아서 꾸며달라고 해 주세요.”
정식으로 이력서를 받아 훌륭한 엘리트들로 꾸려진 기획팀.
그날 미래그룹 기획팀엔 밀레니엄 문제급 난제가 과제로 주어졌다.
“또 해야 할 거 있어요?”
“어. 정화팀에서 최종결제 해 달래.”
채인수가 서류를 뒤적거려 하나를 뽑았다.
정화팀.
옳은 사회 만들기 시민행동연대라는 사회단체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들이 몇 달 간의 조사를 끝내고 보고서를 제출했다.
FVV 식품.
청한 무역.
둘 다 코스피 300위대 기업으로 대기업이라 하긴 힘들다.
두 회사의 아들들은 조승학의 친구이자 부하 비슷한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갖은 못된 짓을 함께 했다.
자살한 하지혜의 영상 속에 목소리가 들어가기도 했고, 그들의 단톡방에 서로 자랑하듯 올린 이야기를 토대로 과거의 범죄를 파냈다.
2세의 죄를 찾고, 회사에서 일하다가 그만둔 이를 찾아 회사에 문제가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백제 때처럼은 어려워. 회사가 작아서 공매도 때릴 사이즈도 아니고. 회사 자체를 보면 완전히 깨끗하다고 보긴 힘들어도 웬만큼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회사야. 횡령 배임으로 엮으면 잡아넣을 수 있겠지만, 몇 천만 원 벌금형으로 끝날 사이즈야.”
조사한 자료를 보니 자잘한 건밖에 없다.
아들들의 성폭행, 협박 등에 대한 자료는 얻었지만 이걸로 회사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조승학의 친구들만 감옥에 보내죠.”
“그래. 잘 생각했어. 그들과 협상을 할게. 아들들을 자수시키고 모든 죄를 실토하게 해라. 그러면 조용히 넘어가준다. 아니면 전쟁이다. 이러자고.”
“...... 그게 협상이 되겠어요?”
“백제가 무너졌잖아. 본 게 있으니 꼬리 내리겠지. 그쪽도 우리가 조사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러니 아들을 지킬 수 없다는 거 알 테고 타협할거야. 문제는 우리가 돈만 쓰고 얻는 게 없다는 건데.”
“됐어요. 뜯어내봤자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깔끔하게 포기하자.”
“네. 이번 건은 성과급 돌리고 앞으로는 머디 워터스처럼 알아서 활동하라 해 주세요.”
“그래.”
머디 워터스는 공매도는 전문으로 하는 헤지펀드인데 철저한 사전조사로 유명하다.
부실기업을 타겟으로 잡아 철저한 자료를 모은 후 공매도에 들어간 후 비리를 폭로한다.
그들은 중국 최대의 커피회사 루이싱 커피를 상장폐지 시키기도 했는데, 루이싱 커피가 회계자료를 조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만시간 이상의 CCTV와 포장종이 수량, 영수증 등을 분석한 후 공매도에 들어갔다.
이익을 위한 행위지만, 부실기업의 분식회계로 피해가 더 커지기 전에 박살낸 의로운 행위다.
이게 정화팀이 지향하는 방향이다.
정화팀이 자료조사를 하고 펀드에서 공매도를 치고 정화팀이 분식회계를 고발한다.
돈도 벌고 사회정의도 실현하고.
“한국이나 미국에 상장한 중국 자본을 위주로 조사하라고 해 봐요. 중국기업은 공산당에 바치는 돈이 회계에 들어가지 않으니 분식회계 할 수 밖에 없어요. 하나씩 박살내죠.”
“그래. 그래야지.”
얼추 서류를 다 보고 기지개를 끄응 폈다.
오랜만에 일한 기분이네.
이제 놀아야지.
똑똑.
사장실에 미래펀딩 로보츠 구단주 비서가 방문했다.
길영주씨.
“본사 사장님께 컨펌 받을 게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우리 말 놓기로 했잖아.”
“회사에선 직급을 따라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목소리 조용한 사람인데 지금은 또렷이 말한다.
업무 중엔 성격이 바뀌는 건가.
“그러세요. 무슨 일인데요?”
길영주가 내 앞에 서류 한장을 건네준다.
“1차 드래프트 평가입니다. 확인해주시고, 지목할 신인이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구단에서 내 눈은 신의 눈으로 불린다.
주전을 버리고 큰 손해를 보면서 유망주를 긁어모았는데 그 유망주들이 중간정도의 활약을 해 주고 있다.
연봉은 낮추고, 나이도 어려졌고, 앞으로 성장도 기대되는 아주 훌륭한 팀이 되었다.
심판의 견제가 없었다면 지난해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뒀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그렇기에 신인을 뽑는데도 조언을 구하러 왔다.
서류를 살펴봤다.
가진형 1(7)
이형찬 2(11)
주용수 3(21)
문영준 4(47)
나선인 5(48)
...
선수의 이름과 키, 몸무게, 특성 등이 적혀 있는데 숫자는 이해가 안 된다.
“이 숫자는 뭐죠?”
“앞에 숫자는 저희 팜 영서지역 내의 평가순위입니다. 괄호안의 숫자는 전체 신인의 평가순위입니다. 컨설팅업체와 스카우트 팀이 공동으로 작성했지만 공식 순위는 아닙니다.”
“그렇구나. 그럼 나선인은 전체 48순위라는 건가요?”
“네.”
“1차는 마음대로 뽑되 나선인을 뺏기지 않도록 해 주세요. 아니다 2차 명단도 제가 볼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나선인의 이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얘가 뭐로 유명하더라.
야구를 잘 모르는데도 알 정도면 나중에 슈퍼스타가 될 자질이 있겠지.
몇 년 만 지나면 리그를 지배할 수 있겠지.
“그런데 구단주는 어디 갔어요?”
“영국 출장 갔습니다. 저도 며칠 후 합류해야 합니다.”
아. 닥똥한테 축구단도 맡겼지.
“네. 고생하세요.”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길영주는 딱 부러지는 태도로 사장실을 나갔다.
- 작가의말
세계 아무 나라가 골라서 한국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한국이 좀 더 낫다는 걸 매우 쉽게 알 수 있게 되요
진짜 아무나라나 골라서 비교해보세요
츤츤한국뽕
한국을 욕하지만 사실 ㅅㅏㄹㅏㅇㅎㅐ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