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버블붕괴
이스터 섬처럼 닫힌 문명을 가정해보자.
섬의 사람들이 총 100의 식량을 갖고 있고 100의 돈을 나눠 갖고 있다면 식량 가격은 1이다.
여기에 정부가 돈 100을 찍어낸다면?
돈의 총액은 200이 되고 식량 가격은 2가 된다.
이 경우 전문가나 교수는 물가가 두 배 올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물가가 오른 게 아니라 화폐 가치가 반토막 난 것이다.
돈 100을 찍어낸 정부는 식량 50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식량 100을 살 수 있던 사람들은 이제 식량 50만 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재산이 반토막 난 것이다.
이것이 양적완화다.
물가가 폭등한다면 대개 두 가지 원인 중 하나다.
물가가 올랐거나.
화폐가치가 내렸거나.
가뭄이나 태풍으로 농사를 망쳤을 때는 물건 가격이 오른다.
이때는 식량가격만 오른다.
공급이 부족하거나 수요가 폭등할 때 가격이 오르는 건 물가의 문제다.
공급과 수요는 그대로인데 쌀값이 오르고 모든 물건 가격이 오른다면?
이건 물가가 오른 게 아니라 시장에 돈이 많이 풀려 화폐가치가 추락한 것이다.
이때는 화폐의 금리를 올려 시장에 풀린 돈을 회수해 화폐가치를 정상화 시켜야 한다.
물가와 화폐가치폭락은 엄연히 다른 현상이며 따로 떼어놓고 봐야 한다.
애석하게도 화폐사기를 이어가기 위해 교수와 전문가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일본은 화폐가치가 폭락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폭락했다.
화폐가치를 살리기 위해 일본이 할 수 있는 정책은 단 한 가지.
금리를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부채가 GDP의 300%인 일본은 금리를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금리를 올리면 빚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늘어난 빚을 돌려막기 위해 양적완화를 추가하면 화폐가치가 더욱 추락한다.
외통수에 걸린 일본은 어쩔 줄 몰라 손 놓고 있다가 대규모 반정부시위까지 맞았다.
이대로 가면 국제사채업자 IMF에게 통째로 요리되어 뜯어 먹혀질 운명.
일본은 마지막 수를 준비했다.
“일본긴급비상금융특별대책준비위원회는 미래블록이 야기한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보유한 국가 부채의 90%를 탕감해주며 추가로 1000조엔의 양적완화를 단행할 것을 천명한다.”
욕 먹을 짓이다.
욕 먹을 걸 알기에 이름도 희한한 단체를 임의로 만들고 제멋대로 빚을 삭제했다.
빚의 삭제. 탕감.
일본의 은행이 돈을 찍어 정부에 주고, 장부에 얼마 줬는지를 기록한다.
이것이 양적완화다.
갚을 생각 없는 빚.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찍어낸 돈.
그게 문제를 일으키니 빚 문서를 찢어 없던 걸로 하자고 한다.
말장난. 세계를 상대로 한 말장난이다.
하지만 통할 것이다.
사실 양적완화라는 것부터가 말장난이었다.
내가 돈을 찍어서 내가 쓰겠다니.
누군가 위조지폐를 마구 찍어서 돈을 펑펑 쓰고 다니듯, 국가가 위조지폐를 마구 찍어서 펑펑 쓰고 다닌 게 양적완화다.
이건 화폐의 정의 자체를 무시하는 금융사기다.
그런데 지난 10여 년간 통했다.
-뭐? 양적완화가 사기야? 그럼 쓰지 마. 화폐 시스템 밖으로 꺼지든가!
분명 사기인 걸 알면서도 개인이 공정함을 찾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개인이 시스템 전체와 싸워서 이길 수도 없고.
‘이래도 될까?’ 망설이며 조금씩 돈을 찍던 미국은 의외로 금융충격이 발생하지 않자 마음 놓고 마구 찍었고, 기축통화가 돈을 찍자 환율방어를 위해 주변국 모두 똑같이 돈을 찍으며 ‘미국이 찍으니 어쩔 수 없다’고 지껄였다.
그런 시대가 10년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해결책도 간단하다.
빚쟁이가 빚에 시달리는 게 불쌍하니 너그럽게 빚을 탕감해주겠다.
말장난이지만 될 것 같다.
정부가 돈을 찍었지만, 은행에서 빌린 것처럼 장부 처리한 게 통했듯, 은행이 빚을 없애주는 것도 똑같이 통할 것 같다.
둘 다 사기인 건 같으니까.
화폐가치 폭락을 보다 못한 일본의 은행이 빚의 탕감을 선언하고 추가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세계가 주목했다.
흥미진진.
양적완화 때 화폐 시스템이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버텨내지 않을까?
소식이 나온 당일 일본의 주가가 떡상했다.
각종 계약에 묶여 매출의 10배에 달하는 적자를 보고 있던 수입업체들이 구제금융을 받아 살아났다.
망할 게 분명한 회사들이 살아나자 반사적으로 주가가 상승했다.
그런데 이 가치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국가가 위조지폐를 찍어 펑펑 쓴 가치는 어디서 왔고, 그들이 탕감한 가치는 어디서 왔고, 추가한 양적완화의 가치는 어디서 왔을까.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서 조금씩 거둬들인 보이지 않는 세금이다.
수천 조에 달하는 가치를 국민 모두에게서 거둬들여 정부 마음대로 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언론의 울타리가 막혔을 때는 좋게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제 통제를 벗어난 언론들이 진실을 알려준다.
빚을 탕감한 다음 날 일본의 증시는 장이 열리자마자 20% 추락했다.
서킷브레이크가 작동했지만 30% 40% 추락했다.
충격 받은 일본 정부는 아마추어처럼 일본증시를 폐쇄해버렸다.
그 다음날 조심스레 문을 열어봤지만 또 폭락이 이어졌다.
지금껏 일본 증시는 역대 최고가를 찍고 있었다.
2020년 고점 대비 3배까지 치솟았다.
물론 증시의 숫자로만 보면 올랐지만, 화폐가치가 1/5토막 났기 때문에 달러로 환산하면 -30% 가격이다.
나름 선방한 수치.
국가가 혼란스럽고 화폐시스템이 부정당하는 와중에도 개미는 성실히 일을 했고, 수출, 수입은 여전했고, 최소한 망하지는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버텨왔다.
그런 와중에 화폐가 드디어 위조지폐임을 인정해버렸다.
내가 내 빚을 스스로 탕감하다니.
-엔화는 위조지폐입니다 여러분~
이라고 일본 정부가 선언해 버린 것이다.
모두가 엔화를 팔아 미래블록으로 피하려다보니 엔화의 가치는 끝없이 추락했고, 외국과 수출입계약이 맺어져 있는 기업들 만 여 개가 단 하루 만에 부도가 났다.
“일본 증시는 어디까지 빠질까?”
권순진이 물었다.
메타버스 속에서도 반짝이는 앞이마를 보며.
‘형 머리카락 만큼요...’
라고 대답하려다가 맞을 것 같아서 멈췄다.
“글쎄요... 형이 바닥 잘 잡아 보세요.”
“준비는 하고 있지. 절대 망하지 않을 기업 리스트 만들어놨고. 미래리츠에선 200조 어치 부동산을 살 준비를 하고 있다.”
“어... 유럽쪽을 보세요. 유럽이 무너지면 그때 저점 갱신할 거예요.”
“유럽이라... 유럽도 이럴 거란 거지?”
“네. 국가부채는 한번 털고 가야 하는 거니까. 이건 필수 순서예요.”
“그래... 그래도 어느 정도 선이 있지 않을까?”
이 똑똑한 인간이 나한테 너무 의지하네.
물론 내가 주식의 신처럼 투자하긴 했지만, 이제부터는 미래블록이라는 변수 때문에 맞출 수 없는데.
그래도 지금껏 해온 게 있으니 모른다고 말하긴 민망하다.
“형.... 일본 차트 보시고 2004년을 찾아보세요.”
“2004? 그렇게 옛날?”
“서프 버블이 거기서 시작되었어요. 리만 사태가 터졌을 때 세계 증시는 2004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했어야 했죠. 그런데 주가를 인위적으로 올린 게 양적완화죠.”
“그... 랬지.”
“그럼 2004년 차트를 기준으로 잡고, 그 후 산업 성장률을 계산해봐요. 통화량 증가에 따른 주가 버블은 빼고요.”
“아. 버블 쫙 빠질 테니 산업 능력만 계산하면 되겠구나.”
“네. 통화량은 미래블록이 리셋 시키니까 산업이 성장한 만큼 주가를 올리면 그게 적정 가격이에요.”
“그래. 그거야 간단하지. 저점 잡기도 쉽겠구나.”
“폭포수는 수면에서 멈추지 않는 거 알죠?”
“낙차에너지 만큼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가 오르겠지.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좋아. 고맙다.”
현인에게 정답을 얻어낸 귄순진이 속 시원하게 웃으며 나갔다.
이제 메타버스에서 마음껏 활동하고 있다.
어차피 위치는 들킨 것 같지만 베네수엘라에선 날 잡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되려 나에게 호의적인 뉴스를 내보내며 스스로 나와서 우호적으로 방문해주길 요청하는 중이다.
카라카스에는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다국적 단체들이 잔뜩 들어와 활동중이다.
그들을 쫒아내지 못하는 게 그들이 식량을 가져와 무료 배급하고 있다.
내게 극히 호의적인 단체들이기에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지하실에 있지만, 조금은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일본 붕괴 이후 유럽 붕괴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작은 그리스다.
그리스.
고대 유적과 에게해의 관광자원으로 먹고사는 나라.
관광산업은 편한 사업이다.
한국처럼 0.1% 원가절감을 위해 노동자를 갈아넣거나 수십 조의 시설을 투자했다가 실패해 흉물만 남는 일 없이 천해의 자연에 도로와 매표소만 깔면 끝이다.
하지만 관광업은 부의 쏠림이 심한 산업이다.
리조트나 유람선 등을 가진 부자가 큰 돈을 벌며, 시설을 만들 공간의 한계가 있으니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기도 힘들다.
한편 관광산업을 지탱하는 노동자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에 임금상승을 기대할 수 없다.
연차가 쌓여 임금이 오르면 자르고 새로 성장한 어리고 파릇파릇한 애들을 고용하기를 반복한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로 얼룩진 국가라면 노동자 지옥이 펼쳐지기 딱 좋은 조건.
다행히 그리스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노동자의 노동시간과 고용기준을 보장했고, 잘 정비된 실업수당 제도로 최소한의 생계를 챙겨줬다.
이러한 복지제도의 완비는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관광지 직원의 월급으로는 사다리 위로 올라갈 수 없다.
어차피 승진할 일도 없고, 급여가 크게 뛸 일도 없으니 다들 적당히 일하며 인생을 즐기는 멋진 삶을 살게 되었다.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근로일자를 채우면 일을 때려치우고 실업수당을 받으며 노는 게 패턴처럼 되었다.
사람 개인의 삶으로 보면 워라벨이 균형 잡힌 멋진 삶.
하지만 국가의 성장동력은 매년 약해졌고, 유로존 통합 이후 관광산업으로 먹고사는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이 똑같은 위기를 겪었다.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GDP의 2배 이상으로 세계3위 규모다.
이탈리아의 재정적자는 GDP의 1.5배이며 스페인은 1.2배로 재정적자 순위 세계 최상위권이다.
사실 EU국가 대부분의 재정적자가 GDP의 1배 이상으로 모두 위기상태다.
누가봐도 빨리 탈출하는 순서로 살아남는 난파선.
그리스가 가장먼저 선포했다.
“우리는 유로화를 포기하고 미래블록을 국가화폐로 삼겠다. 모든 세입을 미래블록으로 거둬들이며 모든 국가 지출을 미래블록으로 하겠다.”
그리스 총리의 발표가 끝나자 한 기자가 물어봤다.
“재정부채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가오는 만기일에 맞춰 제대로 갚을 겁니다. 당연히 액면에 적힌 숫자만큼.”
유로화 폭락 예고.
지금 당장은 GDP의 2배를 갚아야 하지만 유로화가 1/10토막 난다면 GDP의 20%만 갚으면 되는 마술.
그 즉시 그리스의 자산이 미래블록 기준으로 바뀌었고, 모든 그리스 기업이 미래거래소로 뛰어들어갔다.
워낙 급하게 자산을 전환하느라 적정가치의 30% 선에서 거래되었지만, 그조차도 많이 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스 총리의 발표 직후 유럽 전체에서 난리가 났다.
유로화 통합으로 손해를 본 나라들이 그리스와 똑같이 탈출을 생각했고,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이득을 본 국가들은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한편 사람들은 너도나도 미래블록으로 탈출을 했으며 당장 현찰이 없는 이들이 달러를 구하느라 난리가 났다.
유로화-달러의 교환비율이 1:1이 아닌 2:1까지 바뀌었고, 다음날엔 4:1까지 치솟았다. 이는 달러가격에 연동해 있는 미래블록 가격이 달러 환율을 기준으로 발행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뒤를 이어 몰타가 탈 유로화를 선언했고, EU에서 가난한 순으로 탈출 러쉬가 시작되었다.
EU가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 작가의말
이번화는 특히 마음에 들지 않네요... 썼다지웠다썼다지웠다... 글이 어려운거 같아서 간단한 예시를 넣는데... 소설에 저런걸 넣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뭐랄까 모든 걸 정리해야 하니 글이 지저분해 보이고 막 그래서 올해안에 완결 실패할듯ㅋㅋㅋ 아몰랑
글 중간에 '외국과 수출입계약이 맺어져 있는 기업들 만 여 개가 단 하루 만에 부도가 났다.' 이부분이 이해가 잘 안가신다면 한진해운과 조선사들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진해운은 계약 한번 잘못해서 망했고, 조선사들은 계약된 배를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보는 구조였죠. 조선사의 현재 주가가 고점 대비 1/100인걸 생각하면... 주식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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