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세이셀 휴가
머무를 호텔에 도착하니 이틀 전 도착한 경호팀이 인사를 한다.
안에는 지혜 부모님과 유현 어머님이 접객팀과 함께 나왔다.
미래 그룹이 세계 곳곳에 사들인 섬이 100개를 넘겼는데 리조트나 숙박시설이 포함된 이 섬들 전체를 관리하기 위해 미래 관광산업을 만들었고 어머니들이 여기 저기 오가며 바쁘게 활약하고 있다.
경호팀과 함께 온 접객팀은 호텔 고용자들을 내보내고 직접 관리한다.
비밀스런 대화도 오갈 테니 우리끼리만 있어야 한다.
“오랜만이에요. 이따 밤에 따로 만나요.”
어머니들에게 인사하고 나니 핀빙빙이 다가왔다.
뉴욕에서 연금 비슷하게 있던 핀빙빙은 미국 CIA의 허가를 받아 여기까지 왔다.
돈을 많이 주면 이런 것도 가능하다.
“잘 지냈어요?”
인사를 하는데 핀빙빙이 다가와 안더니 입을 맞췄다.
볼에 뽀뽀하는 줄 알았는데 입술을 댈 줄이야.
예하 경악.
살짝 살이 오른 루비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덤으로 부모님 경악.
입술을 뗀 핀빙빙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떨어져 채인수와 사장들에게 인사를 했다.
“어...... 내 의지가 아닌 거 알지?”
“넴. 전 화 안나욤. 진짜 화 안나욤. 오빤 내 감정쓰레기통이 아니예욤. 오빤 잘 못 없는 거 알아욤.”
......
입장을 바꾼다면.
예하가 나였다면.
니가 눈웃음 흘리고 다니니 저놈이 홀려서 저런 거지! 라며 화낼 수 있을까.
상대 남자의 아구지를 후려갈기겠지.
화낼 상대는 내가 아니라 핀빙빙인걸 예하가 알기에 부글부글 하면서 참는 거겠지.
“착하다. 예하.”
“힝. 오빠가 빙빙 언니 구해줬잖아. 언니 심정도 이해해. 이해하는데 히잉.”
하면서 안겨왔다.
“예하야. 알겠는데 뒤에 내 엄마아빠.”
“앗.”
화들짝 놀란 예하가 부리나케 떨어졌다.
“어머니 이건 그... 실수로.”
“아니다. 아가. 얼마나 보기 좋은데.”
엄마도 아빠도 예하를 좋아한다. 아들보다 더 좋아하는 거 같다.
다행이다.
방에 짐을 풀었다.
예하와 난 둘만의 스위트룸.
오히려 부모님이 먼저 그러라더라.
북향 통유리를 통해 에메랄드 바다가 부서지고, 해변에 수백 마리의 거북이가 쉬고 있는 해변이 보였다.
북향이지만 해가 북쪽에 있어서 햇살이 방 끝까지 들어왔다.
“밥 먹으러 갈까?”
“그래욤.”
첫날은 부모님, 친척들과 먹었다.
스위트 룸 두개를 친척들이 나눠 쓰는데 그래도 충분히 넓었다.
조리되어 올라오는 음식을 먹으며 천천히 대화를 나눴다.
“미래메신저가 자리 잡으면 제 재산은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요. 최소 100조원을 넘어요. 그러니 이제 진짜 정말로 하고 싶은 거 하세요. 전 하나도 부담되지 않아요.”
“음.”
슬슬 돈 쓰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니 이제 진담이 나올 때도 되지 않을까.
큰 이모가 포문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되니?”
“한국 사달라는 거 아니면 되요. 1조원 드릴까요? 지폐에서 헤엄치면서 사실래요?”
“에이. 무슨 그런. 그보단...... 남편하고 세계여행을 해보고 싶은데. 블로그에 사진 올리면서 전 세계를 몇 년 동안. 그래도 될까?”
“그건 너무 소박하잖아요. 지금 드리는 돈으로도 충분할 텐데. 더 큰 꿈은 없나요?”
“없어. 남편도 나도 여행 다니면서 의미를 찾아보자고 대화했고.”
이모도 이모부도 약간 보헤미안 기질이 있으시다.
욕심 없고, 느긋하고, 돌아다니는 거 좋아하고.
경호팀과 전담 주치의를 붙여드리면 편하고 안전하게 다니겠지.
“좋네요. 세계를 다니면서 하고 싶은 거 찾아보세요. 뭐든 지원할게요. 그런데 동생들은요?”
큰이모는 아들하나 딸 하나가 있는데 둘 다 초딩이다.
“다 컸는데 이제 독립심을 키워줘야지. 돌봐줄 사람 구하고.”
“동생들은 내가 맡을게 언니.”
엄마가 나섰다.
“아니야. 힘들어. 얘들이 얼마나 극성인데.”
“호호호. 나도 사람 구해서 살아보려고. 아들 체면을 생각해서 사람 열 명 고용해야지. 내가 손에 물 묻힌다고 아들한테 혼난다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다.”
이모와 엄마가 손을 잡고 쎼쎄쎄 했다.
이모를 시작으로 다들 소박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진심을 알렸으니 조금씩 욕심을 내겠지.
예하는 열심히 먹었다.
복스럽게 먹는 게 예쁘다는 말을 듣고는 더 열심히 먹었다.
“예하야. 억지로 먹지마.”
“어머. 아가. 억지로 먹는 거니? 미안해라. 먹지마. 그만 먹어.”
“아니에요. 어머니. 저 너무 맛있어서.”
“예하야 거짓말 하지마. 불편한 자리면 다음부터 안 끼워준다. 솔직하게 행동해.”
“히잉. 죄송해요. 예쁘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아가. 그러지 않아도 예뻐. 에구 에구.”
엄마들이 모여들어 예하의 손을 주무르고 배를 쓰다듬어 주는데 더 불편할 것 같다.
쟤 체하겠네.
고부갈등이란.
모르겠다.
인간과 인간 사이는 미래메신저 개발보다 어려운 거니까.
어른들과 할 말 하고 적당히 술을 마시니 해가 저물고 있다.
시차 때문에 다들 피곤한 상황.
“저희 나가서 산책 좀 할게요.”
“그래. 이제 서울 갈 때까지 보지 말자.”
아빠가 웃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따로 전담팀이 붙어 해수욕과 관광, 잠수함 여행 등 일정이 잡혀 있다.
진짜로 못 볼 수도 있다.
예하의 손을 잡고 호텔 앞 해변으로 가니 거북이가 더 많아졌다.
고운 모래사장이 호박바위 가득한 계곡처럼 보인다.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는다.
인간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북이들.
밀렵이 절대 금지된 나라라더니 자연 또한 인간을 거부하지 않는다.
“우와. 멋있다. 어? 오빠 저기저기.”
커다란 거북이가 모래 구덩이를 만들고 있다.
“알 낳나 보다.”
“그러게.”
손을 잡고 걷던 예하가 멈춰 서서는 한참 바라봤다.
“신기해?”
“아니... 그냥.... 뭔가 따뜻해 보여서......”
알쏭달쏭 퀴즈인가.
“애 갖고 싶어?”
“아니 몰라. 모르겠어. 생기면 갖고 싶고, 안생기면 그런가보다 할 거고. 그냥 몰라. 아무 계획 없어.”
알쏭달쏭.
한참 거북이를 보다가 해변을 걸었다.
모래가 너무 고와 맨발로 걸었는데 해가 진지 얼마 되지 않아 모래가 따뜻하게 발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그냥...... 생기면 낳아야지. 사랑해줘야지. 그러고는 있는데. 왜 안 생길까? 피임 같은 거 하지 않았는데.”
“낳고 싶으면 낳자. 서울 가면 풀게.”
“풀어? 어? 묶었어?”
“말 안했나? 작년 10월에 묶었지.”
“어? 왜?”
그건 말이지.
방구석에 처박혀 코인거래만 죽어라하면 상상의 바다에 빠지게 되거든.
부자가 되어 전 세계 수천 명의 미녀를 마음대로 골라먹을 건데 내 재산을 노린 여자의 임신어택을 당할까봐 미리 펜스를 쳤던 거지.
“절대방어.”
라는 짧은 말로 축약했다.
“오빠... 그 하얀 거 나오잖아.”
“그치? 난 그 하얀 게 올챙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어... 신기하네.”
말이 끊겼다.
이게 주제가 아니었는데.
이상하네.
한참 걷다가 물어봤다.
“풀까? 네가 원하면 풀게.”
“오빠는 애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애기 싫어해서 묶은 거 아니야?”
“이상한 여자한테 뒤집어 쓸까봐. 그땐 그런 생각에 지배당했거든. 그런데 이젠 상관없어. 너랑만 할거니까.”
“에? 에헤헤. 헤헤. 아니야. 불안하면 묶어둬. 괜찮아.”
“괜찮대도. 니 애기면 열 명도 괜찮아.”
“어.... 그러면 오빠는 풀고 내가 묶을까? 나도 묶으면 좋겠다는 생각 많이 했었는데.”
“어?”
뭔소린겨.
“여자의 난소는 태어날 때 개수가 정해져 있대. 몸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 만들어져서 보관하다가 하나씩 나오는 거래.”
“어.”
그런데?
“이게 하나씩 나가다가 다 나가고 나면 생리가 끝나고 갱년기가 시작된대. 여성호르몬도 줄어들고. 목소리도 굵어지고. 수염도 나고. 그런데... 만약 묶어둬서 얘들이 못 나가면 갱년기가 늦어지지 않을까? 얘들 나갈 때마다 아깝고, 뭔가 상실감이 들더라고. 헤헤헤. 그런 생각도 해본거야. 그냥 그런 생각.”
이런 심리를 뭐라 하더라.
“피터팬 신드롬?”
“그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생 어리고 싶고 평생 예쁘고 싶어. 평생. 평생 제일 예뻤으면 좋겠어.”
“포레버 영.”
“아. 그 노래 좋더라. 핑크언니들. 떠나~ 지마~ 젓스테이~ 지금 이 시간을 멈춘 채~”
갑자기 예하가 활짝 웃으며 노래를 했다.
하와이안 춤처럼 하늘하늘한 율동을 하는데 산호초바다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알파 빌 노래 말한 거였는데. 이게 세대차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신나게 춤을 추니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처음 듣는 노래지만 좋기도 하고.
뜨뜻한 모래에 앉아 예하의 공연을 봤다.
예하의 노래와 춤은 언제 들어도 빨려든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춤이 너무 좋아서, 노래가 끝나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민망한 듯 얼굴을 살짝 돌린 예하가 옆에 바싹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이 너무 좋아. 완벽해.”
“어. 나도.”
“그래서 모르겠어. 동서남북 어디로도 갈 수 없어.”
...... 또 알쏭달쏭 퀴즈인가.
“어디로 가도 지금보다 완벽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래서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있어.”
“그거 말하는 거구나. 모두 이뤘으니 선택할게 없다는 뜻.”
“어. 맞아. 그거였어. 아니다. 이게 아닌데. 아니거등요. 으휴.”
아 맥주 마려워. 누가 뿅하고 맥주 가져다주지 않으려나.
“오빠가 너무 대단해서. 너무 멋져서. 너무 멀리 날아가서 따라가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일단 손이 닿는 데까지 가야하는데.”
“...... 돈만 보면 그래도 사람 자체를 보면 네가 나보다 뛰어나. 네가 더 우수하고 나보다 존경받을만해.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그만해.”
“아니야. 아니. 오빠는 몰라. 내가 얼마나 욕먹는지, 무능하고 얼굴만 밀고 있는 애인지.”
고개를 숙이며 읊조리는 예하가 안쓰럽다.
미래그룹의 간판.
안 좋게 말하면 총알받이. 고기방패.
돈에 미쳐 멀쩡히 잘 사는 기업들을 괴롭히는 년.
열심히 고소하고 있지만, 지금도 우회적 욕설이 쏟아지고, 다크웹에선 원색적이고 끔찍한 욕이 넘쳐난다.
왜 예하가.
이건 노래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래그룹을 싫어하는 사람은 예하의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춤이 아무리 멋져도 바라보지 않는다.
예하의 노래는 전부 좋은데 성적이 안 좋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듣고 있지만, 노래에 달린 댓글들은 욕설로 가득하다.
사이가 안 좋은 언론사와 방송국은 아예 순위표에서 빼고 거지같은 캡쳐로 조롱만 할 뿐이고.
씁쓸하다.
“예하야. 넌 최고야.”
“아니야 난... 짐이야. 오빠에게 짐.”
“아니야. 니 노래가 제일 좋아. 이건 모든 사람이 같아. 니 노래와 춤은 완벽해. 너한테 잘 보이려고 거짓말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래. 그냥 미래그룹이 헤쳐 나갈 때 네가 선두에서 파도를 맞아서 그럴 뿐이야. 넌 내 뒤에 숨어서 편하게 논 게 아니라 네가 앞에서 나를 보호해 파도를 막아줬어. 내가 정체를 들키지 않고 편하게 쉴수 있는 것도 네 덕이고.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 나 혼자 이룬 게 아니야.”
“...... 어.”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마.”
“어. 잘 모르겠지만, 힘이 나네.”
“그래. 내말은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었어.”
“넵. 땡큐.”
안고 한참 있었더니 거대한 육지거북이 슬슬 다가왔다.
얼마나 무거운지 모래가 진동으로 살살 떨렸다.
근처에 다가와 입을 쩍 벌리는데.
무섭다.
잽싸게 피했다.
달팽이의 속도로 덥쳐 오던 입은 허공을 가른 후 한참 바라보더니 노인의 눈을 꿈뻑꿈뻑하고는 쿵쿵 지나갔다.
“푸흡. 쟤 뭐야. 와아아. 숨도 못 쉬었네. 뭐지? 무서운데 신기했어. 우왕.”
“예하 너 방금 민서 말투했다.”
“아하핳. 민서 너무 예뻐.”
기분이 풀어진 예하와 해변을 걸어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앞엔 여기저기 술자리가 벌어져 있는데 큰 나무데크에 여자 셋이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핀빙빙하고 루비하고 수행비서 공은진.
“헤이!”
“여~”
“앗. 안녕하십니까.”
묘한 조합이네.
- 작가의말
해외여행은 구글어스와 유튜브와 나무위키로 하는 겁니다
직접가면 위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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