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타우바트섬3
백제 그룹은 시총 29위의 대기업이다.
당연히 백제사태는 모든 기관, 기업, 정계, 언론의 주시를 받았다.
사람들은 재벌을 서로 얽히고설킨 한 몸으로 보는데,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르다.
돈은 무감정하다.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재벌 또한 언제나 최대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을 한다.
백제와 손을 잡는 게 이득이면 손을 잡고, 버리고 함께 요리하는 게 이득이면 적이 된다.
정계, 언론 또한 마찬가지고.
그렇기에 요리하기 쉬웠다.
거대한 백제 그룹을 완벽히 조리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7주.
지혜아빠의 폭로를 시작으로 배정구의 배신까지 걸린 시간이다.
두 달 안 되는 시간동안 주가는 70% 하락했다가 1000% 상승했다가 80% 하락하는 등 미친 듯한 롤러코스터를 탔다.
여타 기업들은 조승학의 폭로가 터지자 일제히 백제를 주시했다.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겠지.
어떤 세력이 공매도 장난질을 치는 구나.
하지만, 민형수의 민사소송과 미래그룹의 인수선언부터 난리가 났다.
그들은 포지션을 정해야 했다.
백제를 살릴까?
백제를 같이 요리할까?
백제에서 떼어먹을 게 있을까?
수천억이 오가는 의사결정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 없다.
모든 그룹이 달라붙어 조사하고 분석하고 가치를 측정한다.
그렇게 포지션에 대한 분석을 하는 와중에 블록딜 함정이 터지고 백제그룹이 자멸했다.
투산이나 대후 등 여타 대기업이 무너지는데 몇 년 걸린 것과 달리, 백제는 딱히 심각한 부실이 없었음에도 스스로 지뢰를 밟고 터져버렸다.
미래그룹은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끼어들 시간도 없이 끝내버렸다.
게다가 여론도 능수능란하게 조작해, 민중을 끌어들였다.
백제생명 보험 가입자들과 자회사 라잉 펀드의 투자자가 수십만 명이다.
백제가 제멋대로 경영권 다툼에 당겨쓴 그 자금으로 인해 수십만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그들의 분노는 정부를 향했다.
시작조차 하지 않은 수사와 그로인해 생긴 피해자들.
백제의 부패와 비리와 범죄행위를 정부가 옹호한 꼴이 되었다.
백제가 한순간 미래그룹에 넘어가자 정부는 잽싸게 미래의 그룹인수를 용인하고 비리 덩어리인 백제에 남은 자산을 미래에 넘기는 대신 보험 피해자 등을 보상해주도록 협상했다.
협상.
덕분에 작전은 윤동욱의 계획보다도 빠르게 깔끔하게 끝났다.
재벌들은 더더욱 끼어들 새 없이 20위 규모의 재벌이 탄생하는 걸 눈 뜨고 볼 수 밖에 없었다.
본래계획으로는 미래와 백제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혈전을 벌이도록 유도해 그 사이에서 이권을 빼앗으며 백기사가 되는 건데 그럴 틈조차 없었다.
다행히 미래그룹은 투자펀드의 본분을 지켜 백제를 조각내 판매한다고 한다.
“우리 그룹이 살만한 기업은?”
“백제 통신, 백제 광업, 백제 제련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많이 붙겠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일단 평가액부터 마련해봐. 대출이든 뭐든.”
“알겠습니다.”
최선의 선택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르다.
백제가 무너지고 군침 도는 먹잇감이 시장에 나왔다.
이제 모든 기업은 백제에서 인수할 만한 기업의 가격을 책정하고 되도록 싸게 사기 위해 할인요소를 찾고 있다.
쏴아아아.
어제보다 바람이 강해 파도가 제법 친다.
따뜻한 여름 바람이 야자수를 흔들고, 바닷물은 보석이 부서지듯 반짝거렸다.
“꺄아아아.”
“여기여기여기~”
해변에서 각 팀들끼리 놀다가 여기저기 섞여 놀고 있다.
인기가 좋은 건 전원 미녀인 탈주팀들.
이국의 해방감이 옷차림에 드러난다.
다들 야하게 입고 튜브에 매달려 놀고 있다.
스트레스 많이 쌓였을 텐데 다 풀고 가라.
“오빠는 바다 안 들어가?”
바닷가 방갈로에 안락의자 두개를 두고 예하와 나란히 앉았다.
흔들 흔들.
아무것도 안 해도 좋다.
“어떤 바보가 불안해서 못 가겠어.”
“에에에. 힝. 오빠를 위해선데.”
라면서 예하가 앵겨 붙는다.
예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물에서 노는 건 되지 않아?”
“힝. 물이 너무 맑아. 물속에 들어갔다가 내 주위가 빨갛게 물들면 창피해 죽을 거야.”
그거 좀 무섭겠군.
“그리고... 물 밖에 나오면 바닷물 흘러내리면서 내 다리로 빨간 물이 주룩 쏟아질지도......”
그건 좀 부끄럽겠네.
“다들 그냥 놀잖아.”
탈주팀 열아홉 전원 물속에 있는데.
저 중 몇 명은 그날이지 않을까.
“웁.”
“그런 상상하는 거 아니예요.”
내 머릿속까지 꿰뚫어보는군.
“바다 들어가고 싶은데. 힝. 물놀이용 생리대 있는데 못 쓰겠어.”
“왜?”
“삽입형이라 너무 창피해. 야해. 못 넣겠어.”
“어...”
그렇다면야 뭐.
혼자 힘들면 대신 넣어줄 수 있는데.
“상상 그만.”
“네.”
가까운 아이스박스에 가서 차가운 과일맥주 두개를 들고 왔다.
복숭아맛 맥주네.
예하 하나 주고 나 하나 받고.
“어제 말이야. 내가 루비와 하려면 그냥 했을 거야.”
“후잉.”
“아마 쾌감은 비슷할 거야. 너랑 하는 게 가장 좋지만, 다른 여자랑 해도 크게 나쁘지 않아.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힝...... 그런 말 하지 마.”
“그래서 안 했어. 별 차이 없는 쾌감으로 얻는 만족보다 네가 상처받을 게 훠얼씬 크니까 참는 거야.”
“아냐. 내가 해도 된다고 했잖아. 오빠는 자유롭게... 그냥 오빠가 원하는 대로.”
딱.
또 맞아라.
나 여자 때리는 사람 아닌데.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예하를 안아줬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려던 말이 뭐였지. 멋있는 말인데.
“네가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자. 볼펜을 쥐고 그림을 그려. 대신 규칙이 있어. 절대 떼지 않고 한 번에 그려야 하고 매순간 똑같은 속도로 그려야 해. 멈추는 것도 안 돼.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잘 그려질까?”
“에.... 개똥같을 거 같아.”
“그치. 난 그게 인생이라고 생각해.”
리액션 좋은 예하에게서 대답이 없다.
옆을 보니 예하가 대낮부터 취하셨쎄여? 표정으로 보고 있다.
“인생은 한붓그리기라고 생각해. 태어난 순간부터 심장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자는 시간에도 멍한 시간에도 각자의 시계는 멈추지 않고 흘러가지. 우린 볼펜을 거대한 도화지에 대고 한 번도 떼지 않고 인생이란 그림을 그려야 해. 이리저리 볼펜을 긋다보면 낙서든 명화든 뭐라도 그림이 나올 거고.”
알쏭달쏭 듣던 예하는 뭔 소린가 하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짜를 목표로 저쪽을 향해 쭈욱 그리는 이가 있을 테고, 그리 가다가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도 있겠지. 목표에 도달하는 이는 쭈욱 외길로 그림을 그린이일 테고 방황한 이의 그림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겠지. 아예 여러 취미를 익히다가 뜻하지 않은 명작이 나올 수도 있을 테고. 명작이든, 망작이든 뭐가 됐든 각자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게 돼.”
예하는 뭘 상상하는지 눈을 감고 경청했다.
“애석하게도 인생의 그림은 잘못 그려도 지우지 못해. 볼펜의 잘못된 선을 지우는 지우개는 없어. 잘못 그은 선을 감추려면 수십 배의 선을 연장해 꾸며야 하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그래서 처음부터 잘 그려야 해.”
“인생을 그린다고?”
“어렸을 때 모르고 선을 잘못 그을 순 있지. 그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게 잘못된 걸 안다면 아예 그리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 선을 지울 수 없고, 볼펜을 뗄 수 없으니 처음부터 잘 그려야 멋진 그림이 나올 거야.”
“어... 내가 어제 잘못 한 거야?”
똑똑한 예하.
그 소리 하려고 말 꺼냈다.
“넌 날 위한 희생이라며 뿌듯하겠지만, 선이 그어지면 영원히 흔적이 남아. 마음에 오래 남을 테고, 그걸 지울 순 없어. 이해하겠어? 네 지시대로 내가 잠깐 다른 여자랑 해서 쾌락은 얻을 수 있겠지만 네 상처가 더 클 거고 흔적은 도화지에 남을 거야. 난 네게 미움 받는 게 일탈의 쾌락보다 싫어서 안 한 거야. 아예 잘못된 선을 긋지 않겠다고. 쾌감보다 널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크니까. 이해했으면 앞으로 그런 제의는 하지 마.”
어휴 닭살.
이런 말 하려던 게 아닌데 어쩌다보니 졸라 느끼하네.
가오리닥똥놈들이 들었으면 평생 놀려먹겠다.
“어... 어. 히힛. 오빠오빠. 히. 이이잉. 그럼 루비언니가 너무 불쌍해. 평생 다른 남자 못 만날 텐데.”
웃다가 울려하는 예하. 취하셨쎄요?
“루비는.... 잠깐 만나주는 게 더 큰 상처일거야. 루비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내가 전념해야 하겠지. 내가 너 버리고 루비한테 가길 바라는 게 아니면 어줍잖은 호의 보이지 마.”
“에... 어줍잖은 호의였던가요?”
“그래 이누마. 너 갑자기 바보가 된 거 같다.”
“힝. 그런 거였어? 미안해라. 언니... 미안......”
“나중에 사과하고. 물에 들어가자. 저쪽 사람 없는 쪽으로.”
“...에. 그럴까? 그래. 헤헤. 도전!”
해변 한쪽 사람 없는 곳에 들어갔다.
래시가드 입은 예하는 수영도 잘하더라.
예하의 걱정처럼 바닷물이 빨개지는 일은 없었다.
3박4일의 휴가를 끝내고 다들 돌아갔다.
이후 교대 팀이 왔다.
전부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반 반 휴가 온 것이다.
첫 휴가에 나름 고위직들이 왔으니 이번엔 낮은 직급끼리 왔다.
팀장 부장들하고 섞여서 오면 휴가가 아니라 봉사지.
예하와 나는 남았다.
서울 가서 할 일은 여기서 해도 되고, 예하의 방송은 여기서도 송출할 수 있다.
와보니 너무 좋아서 서울로 돌아갈 이유를 못 찾겠다.
그냥 여기 살아야지.
2번째 팀이 즐기고 간 후 다음 팀이 왔다.
“우와아아. 여기 짱이다! 핸플 형. 시발 형. 너무 멋져. 앗 예하씨.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가오리랑 닥똥이 왔다.
앵겨 붙는 가오리를 떨궈 냈다.
“핸플. 다음 휴가 올 팀 있냐?”
“당장은 없어.”
“그럼 우리 팀 여기서 한 달 있어도 되냐?”
미래 애니 기획발굴팀.
검색해 명작을 찾는 게 일이니 필리핀에서 일해도 되지.
야구단은 시즌이 시작됐기에 외국에서도 전화로 일할 수 있는 홍보팀과 스카우트 팀 일부만 휴가 왔고.
“...... 제대로 일 할 수 있겠냐?”
“더 빡세게 하지 않을까? 성과 적으면 돌려보낸다고. 더 열심히 하겠지?”
“놀기만 할 거면 안 되고 일만 제대로 한다면야 여기 얼마든지 있어도 되지. 어차피 시설은 노는 거고 식비 얼마하지도 않고.”
“조우아. 물어보고 와야지. 너도 계속 남을 거지?”
“어. 일단은.”
“여윽시 사장님. 투자의 천재는 어디서 투자하든 상관없지. 캬하하. 밤에 술 먹자.”
가오리는 자기 팀의 의사를 물으러 떠났다.
어차피 할 일 없는 구단주 놈은 평생 여기서 놀아도 되고.
나는.
“슬슬... 바닥에 와 가는데.”
비트코인은 작은 반등 후 하락을 이어간다.
800만원 아래로 가면 매집해야 하는데 프로그램이 있다 해도 옆에서 봐줘야 한다.
다음에 올 땐 이 섬에서 거래 할 수 있게 세팅 해둬야겠다.
“오빠. 오빠... 나 그 거 끝.”
예하가 귓속말을 하고 수줍게 웃었다.
두근.
드디어!
타우바트 섬에서도 내내 붙어있었고, 더욱 가까워졌지만, 밤마다 못내 아쉽긴 했다.
예하에게 잡기술을 많이 가르치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진짜보단 못하지.
“그래. 그렇다면... 저놈들은 버리고 오늘은 예하와.”
“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잖아. 난 괜찮으니까.”
“아냐. 저딴 것들보다 너와의 하룻밤이 천배 중요해!”
저놈들은 혹시나 너와 깨졌을 때 술 마시는 용도지.
띠리리리.
아우씨.
이 타이밍에 전화가 오면 보통 재수 없는 전환데.
띠리리리.
채형이네.
“예. 형.”
-어. 문제가 좀 생겼다.
“네. 뭔데요?”
-백제 재단. 백제전문대와 백제대학병원을 합친 재단을 매각하려고 했는데 틀어졌다.
“...... 왜요?”
-2000억에 도장 찍기 직전이었는데 어제 한 명이 죽었어. 병원 레지던트 자살. 우리한테 반감이 많은 언론에서 엄청 때리고 있다. 그러니 1500억 밖에 못 주겠다는 거야.
“음......”
가야하나.
백제대학병원이라......
무시할까.
“예하야. 서울 가자. 오늘밤은 서울에서.”
“어. 오빠. 짐 챙길게.”
사람들에게 알리고 경호팀과 한국에 온 시간은 늦은 밤.
피곤한 몸을 씻고 예하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예하야.”
“어.”
왜 긴장하는데.
“피곤해서 못 할 거 같아.”
“어... 그래. 나도 사실 피곤했어...”
왜 실망하는데.
“예하야. 병원. 우리가 운영할까? 팔아버리려고 했는데.”
“오빠 하고픈 대로 해. 그런데 왜 팔려고 했어?”
“큰돈이 안 되서.”
“오빠는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 막 뿌려서 사람들 돕는 게 취미잖아.”
뭔 소리지?
야구단이든 뭐든 돈이 될게 확실해서 한 건데.
무슨 착각인지 몰라도 굳이 바로잡진 말자.
“어... 쨌든 병원은 돈이 안 되지만 가져갈까? 너희엄마 치료도 그렇고 우리 부모님 진단도 그렇고 소유주 가족이면 좀 더 잘 해주겠지?”
그래. 돈 좀 쓰더라도 가져가자.
“아아. 우리 엄마도 이리 옮길 수 있겠구나. 내 엄마 병원비는 내가 낼게 최고로 모셔주세용~”
까불기는.
예하는 방송수익 정산을 받으며 한층 당당해졌다.
월평균 1억 이상 찍힌다.
보기 좋다.
“병원은 일단 가져가는 걸로 해볼게.”
“코올.”
- 작가의말
총 5챕터 중에 1챕터가 끝났습니다. 종이책으로 세권 분량이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신분들 수고하셨습니다
1챕터의 제목은 별이 되지못한 불똥을 위한 시 입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짐작가실런지요
보다시피 이글은 영웅소설이 아니에요. 백제그룹을 삼키는 걸 중심으로 진행했지만, 자꾸 딴소리가 나왔죠
챕터가 너무 길어져서 라잉펀드출신 권순진이 대활약하는 장을 지웠고, 카타르시스가 폭발해야 할 백제해체과정을 10화에서 3화로 줄여버렸어요
보통사람의 소설, 아니 도전에 실패한 보통사람 이하의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죠
덕분에 긴장감과 텐션을 올리기 힘드네요
예하의 특별한 점을 계속 강조해놓고 예하조차 보통사람과 별 차이없다는 묘사만 계속 하니...
굳이 챕터로 나누지 않은 이유는 중간 중간 뒷챕터 사전작업이 들어가기 때문이죠
시간 순서로 진행하다보니 다음 이야기를 미리 준비해야 해서... 그래서 글이 난잡한 거 같네요
아 글 구려 내글똥구려 리메이크하고 싶어 다시쓰고 싶어
그런데 누가 자꾸 추천글올리고 후원해줘서 리메이크 포기 ㅜㅜ
1화 조회 대비 선작 4:1 이상이면 유료화 하려고 했는데 후원과 추천글 때문에 리메이크도 못하고 유료화도 포기 ㅜㅜ
그냥 무료로 완결까지 갈게요 ㅜㅜ 완결까지 무료 ㅜㅜ
미래에 대한 상상 가득한 글을 즐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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