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음악방송
예하보다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예하보다 노래 잘하는 사람도 꽤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예하처럼 예쁜데 춤과 노래를 함께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예 없는 것 같다.
모든 재능이 최상급인 6각형 스타.
예하만을 위한 전담 팀을 만든 후 BJ제시를 위해 날아오는 수많은 제안을 검토했다.
수없이 많은 작곡가가 자신의 노래를 불러달라는 제안을 했고, 그 중 예하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드렁큰호빵의 곡을 뽑았다.
최고의 작곡가로 항상 이름을 올리는 드렁큰호빵의 노래는 매우 활기찬 하이틴댄스곡이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세이킷 오프가 떠오르는 신나는 노래.
안무를 짜서 계약한 댄스팀과 연습했고, 한국어버전과 영어버전 두개를 녹음했고, 뮤직비디오를 찍었고, 드디어 오늘 자정에 음원이 공개된다.
그간 인터넷방송을 통해 연습하는 장면을 공개했으니 신선도는 떨어지지만, 예하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 덕에 음원 공개와 동시에 1위에 오를 게 확실하다.
“그러니까 성적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굳이 티비 출연 같은 거 안 해도 돼.”
“힝. 그래도 꿈이었어. 엄마하고 약속했단 말이야. 병원에 있는 엄마한테 보여줄 거야. 티비에 나오는 예쁜 내 모습. 오빠는 안 가도 돼.”
예하는 티비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어 했다.
쓸데없는 짓을.
그래도 소원이라니 들어줘야지.
“같이 가자.”
방송국 한번쯤은 가보고 싶었고.
“헤헤. 그럴 줄 알았어. 옷 입어용~”
신난 예하가 옷장에서 정장을 꺼내왔다.
아직 포기 못했구나.
못 본 척 하고 옷장의 문을 열었다.
휑.
“어?”
“빨래... 가 밀려서 다 빨았어.”
“......”
텅 빈 옷장. 아니 한 벌 남아있긴 하다.
눈부신 핫핑크에 약간 작은 트레이닝복.
엉덩이 부분에 BOTTOM이라고 적혀있다.
대체 이런 옷은 어디서 살 수 있는 거지?
“후후후. 선택하시오. 정장이냐 바텀이냐.”
졌다.
데뷔하는 날이니 져 줘야지.
샤워하고 정장을 입고, 예하가 매주는 하늘색 넥타이까지 풀세팅 했다.
“꺄아. 멋져. 잘생겼어.”
잘생겼지.
엄청 미남은 아니어도 상위 10%에 든다고 자신한다.
이거면 됐지.
“머리가 또... 많이 자랐네.”
흠칫.
세달 전 루비예하에게 테러당한 후 한 번도 안 건드려서 옆머리가 윗머리만큼 길어져 초코송이처럼 됐다.
멀리서 보면 마치 귀ㄷㅜ......
“또 잘라줘야겠네.”
“예하야. 오빠가 혹시 실수한 거 있니? 서운한 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푸흡. 아니야. 헤헤. 기분 좋아서 그래. 신난다.”
들떠있는 예하와 옷을 입고 나오니 새벽 네시다.
성수동 스튜디오로 가서 머리와 화장을 하고 나오니 새벽 여섯시.
공개방송 장소인 KBC 방송국에 도착한 건 새벽 일곱시.
우오오오오!
제시다! 손 한번 흔들어주세요.
와아아! 여기 봐주세요.
제 시 예 쁘 다!
찍덕들이 복식환호를 지르며 이런 저런 요구를 해 왔다.
한껏 업 된 예하가 대중 앞에서 활짝 웃으며 인사하고 손을 흔들고 포토타임을 가졌다.
두 명의 경호원과 코디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매니저 둘과 함께 방송국에 들어갔다.
난 매니저 중 하나로 보이겠지.
새끼작가라고 소개받은 이가 지하실로 안내했다.
창고를 개조한 듯 한 넓은 곳에 병원 커튼 같은 칸막이가 쳐져 있다.
여기서 대기하라고 하신다.
등받이 없는 횟집 둥근 플라스틱 의자가 겹쳐 쌓여 있다.
매니저가 의자를 가져와서 나눠줬다.
코디도 매니저도 경험 많은 이들로 뽑았고, 그들 모두 익숙해 보였다.
“원래 이렇게 대기해요?”
“급이 높으면 제대로 된 대기실에서 쉬는데 신인은 대개 이래요. 물론 제시 씨 정도 명성이면 이러지 않아도 될 텐데 왠지 길들이기 하는 거 같네요.”
매니저 경력 14년차 우진청.
대형 기획사 팀장까지 올랐던 이로 작곡가와 협의하고 방송국 스케줄 잡고, 데뷔일정 잡는 등 모든 일처리를 해 낸 능력자다.
“우리가 언론하고 사이 안 좋아서 그런가보네요. 차에서 대기하면 안 돼요?”
예하용 차는 보통 연예인 차라 부르는 대형 밴이다.
안에서 춤출 수 있을 만큼 넓어서 이 인원이 전부 편히 쉴 수 있다.
“방송국에서 싫어하죠. 부르면 제깍제깍 튀어와야 하니까.”
“오빠. 오빠는 차에서 쉬어. 옆에 안 있어도 돼.”
예하가 미안해했다.
난 투정을 부린 게 아니라 불합리한 걸 말한 것뿐인데.
“아니야. 한 번 경험해보고 싶었어. 말로 듣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오늘은 옆에 있을 게.”
길고 긴 대기시간.
노트북으로 이메일을 읽고, 차트를 보고 전화로 일을 처리하고, 매니저가 사온 밥을 먹었다.
9시 반에 드라이 리허설이 있었다.
호출하면 대기할 장소를 숙지시켜주고, 녹음한 큐 사인에 맞춰 무대로 나가고, 무대에 한번 서보고 돌아왔다.
이후 세 시간 대기.
열두시에 마이크 리허설을 했다.
안무팀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했다.
예하는 라이브를 하고 싶었지만, 방송국에서 절대 불가를 외쳤다.
과거 오리사태 이후로 신인은 라이브 절대 금지라고 한다.
또 세 시간 대기.
이번엔 인사를 하러 다녔다.
아침 리허설은 고참급이 거의 빠지기에 지금 도는 게 낫다더라.
“안녕하세요. 신인가수 제시입니다.”
매니저인척 따라다니며 연예인 구경을 실컷 했다.
소설 속 텃세나 미친년은 없었다.
갓 데뷔하는 신인이라 그런지 웃으며 인사 받아주고 덕담해주고, 몇몇은 모닥불처럼 앵겨붙기도 했다.
역시나 예하만큼 예쁜 연예인은 없었다.
다들 너무 말라 뼈만 앙상해 보였다.
오후 세 시에 제대로 음악을 틀고 제대로 칼군무를 추며 노래를 불렀다.
라이브 느낌은 나지만 음원과 거의 차이 없는 실력.
이 녹음을 입혀 라이브 느낌을 낸다더라.
이제야 제대로 리허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섯 시가 넘으니 방청객이 들어오고, 머리 위가 소란스러워진다.
무대의상과 화장을 풀 세팅한 예하는 어디 기대지도 못하고 등받이 없는 의자에 꼿꼿이 앉아있었다.
“안 힘들어?”
“어? 어. 괜찮아.”
“힘들어 보이는데.”
“버텨볼래.”
“그래. 그러셈. 오늘만 버텨봐.”
고집은.
저녁 7시에 예하의 차례가 되었다.
갓 데뷔한 신인이니 중간 애매한 순서다.
앞 팀의 무대가 정리되는 동안 무대에 나가 댄서들과 자리를 맞춰 선다.
무대 한쪽 관계자 자리에서 보는데, 풀세팅한 예하는 전투력 최강.
화장이 너무 진해서 평소보다 별로였는데, 모니터로 보니 세상에 이보다 예쁜 인형이 있을까 싶다.
이게 프로의 손길인가.
노래 컨셉에 맞게 하이틴 청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예하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큐.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 이보다 상큼할 수 없다. 이 분 분명히 뜹니다.”
“제시가 부릅니다! 나 오늘 취해도 돼?”
아이돌 출신 엠씨 둘이 틀에 박힌 소개를 했다.
방청석에선 약간의 환호와 예의를 갖춘 박수가 나왔다.
방송엔 녹음된 환호가 흘러나오겠지.
어? 나 옆에 앉아도 돼?
어? 나 더 마셔도 돼?
어? 어빠? 어빠? 어빠?
어? 집에 아직 안가도 돼
어? 괜찮아 좀 더 있을래
어? 괜찮대도. 괜찮대도
후크로 가득한 방송댄스곡.
예하는 여우처럼 수줍은 척 연기하면서 고난이도 춤을 소화해냈다.
마이크가 꺼져 있음에도 목에 힘줄이 설 정도로 힘껏 노래를 불렀다.
술집에서 술이라는 거 처음 마셔. 괜찮지?
이시간에 밖에 있는 거 처음이야. 괜찮지?
어지러운데 기분 좋아
목이 쓴데 기분 좋아
어? 어디가? 가지마.
옆에 있어줘. 가지마.
옆에 있어줘. 어디가지마.
취해서 무섭단 말이야.
취해서 무서워 도망가지마.
손 놓으면 안 돼
빠른 박자에 신나게 지르는 후렴.
여우가 취한 척 작업 거는 연기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땐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감탄하더라.
가장 잘 먹힐 노래라고.
반복되는 훅과 신나는 멜로디, 여우같은 가사까지.
여드름 삼촌팬들의 심장을 녹여 지갑을 열게 만들 노래라더라.
실제로도 그러하다.
예쁘다.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가 부끄러운 척 살살 웃으며 꼬시는 거 같다.
어디 가지 마.
손 놓지 마.
나 오빠 믿는다
나 오늘 취해도 되지?
와아아아아~
노래가 끝나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노래가 시작될 때보다 열배 정도 크다.
역시 타고난 매력은 감출 수 없다.
사회자가 의례적인 마무리멘트를 해주고, 예하는 관중석에 절하듯이 인사를 다섯 번 꾸벅꾸벅하고 돌아왔다.
“잘했어.”
“어. 오빠오빠. 나 너무 씐나.”
“축하해. 들어가자.”
“어. 와아. 관중석이 다보여. 막 입 벌리고 박수치는 게 다 보여. 너무 좋아. 무대에 선다는 게 너무 좋아.”
그래보였다.
여우처럼 눈을 흘기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감추지 못했는데 그게 심장을 쿵쿵 거리게 하더라.
한껏 하이한 예하가 재잘재잘 떠드는 걸 들으며 지하 대기실로 돌아갔다.
갭.
무대 위에서 가장 화려했던 아티스트가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지하실에 폐품처럼 처박힌다.
신인이고, 명성이 부족하고,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너무도 큰 갭이 느껴진다.
“한 시간쯤 후에 1위 발표 때 올라가야 해요. 그때까진 차에서 쉬어도 될 겁니다.”
14년차 우진청도 피곤해보였다.
스케줄 매니저라서 내내 붙어있을 필요 없지만 내가 여기 있으니 못 쉰 거겠지.
“오늘만은 예하 옆에서 신인처럼 있어보고 싶네요.”
하루 종일 대기하면서 오기가 생겼다.
어디 끝까지 경험해보자.
예하는 댄서 언니들하고 손뼉을 와다다 치며 언니 예뻤어요, 너무 멋졌어요 하며 수다를 떨고 있다.
코디와 아티스트가 다시 오를 무대를 위해 예하를 꾸미고 있고.
난 노트북을 뒤져 음악방송 출연에 대한 계약서를 찾아 읽었다.
“우진청 매니저님.”
“네.”
상호 존칭이다.
우진청은 나를 본사 높으신 분 겸 예하와 비밀연예하는 사이로 안다.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에 예하 전담팀 전부 입이 근질근질 할 거다.
“다른 방송국 스케줄 전부 취소해주세요.”
“네? 그래도. 신인 때는......”
“예하는 그럴 필요 없어요. 하루 종일 대기해서 한곡 부르느니 컨텐츠 열 개 만드는 게 이득이죠. 매니저님이 보기에 예하가 방송출연 못 하면 망할 것 같아요?”
“아니죠.”
“유투브 중심으로 활동해도 충분해요. 1년이면 체조 경기장 가득 채울 수 있어요.”
“네. 이해했어요.”
“그래요. 이런 부당한 계약으로 갑질 당할 이유가 없어요.”
방송국에 적응했는지 예하는 로드 매니저 언니와 경호원들과 함께 여러 가수를 방문하며 재차 인사를 다녔다.
음악방송은 동네 반상회 느낌이 난다.
시간이 되자 무대 위로 올라갔다.
오늘의 1위 후보 중에 예하가 데뷔 할 뻔 한 7인조 걸그룹 트비스타가 있다.
사전녹화를 하고 다른 스케줄을 소화한 트비스타는 시상 시간에 맞춰 도착한 상태.
안녕하세요 신인그룹 업... 안녕하세요. 아 네. 멋있었요. 아.
줄지어 대기하던 가수들의 상호인사로 시끄럽다.
세 팀의 1위후보가 먼저 나가고 뒤에 오늘의 출연진이 우루루 따라나갔다.
예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어 나갔다.
예하와 트비스타의 만남.
제 3자인 나조차 긴장해서 지켜봤다.
예하와 트비스타가 눈이 마주쳤다.
- 작가의말
T.be star 트비스타......
요즘 댓글이 많이 달려서 막 막 신나요 절반이상 비판이지만 그래도 좋하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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