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쇼핑
“안녕하십니까? 칠레지사장 정 미구엘입니다.”
동글동글한 한인교포 아저씨가 싱글싱글 웃으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전에 뵀죠?”
“건강하시네요. 반가워요.”
“제시님 방송 잘보고 있습니다. 저 혹시 사인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정미구엘은 예하의 사진이 있는 사인지 스무장을 꺼냈다.
이 아저씨를 보니 케세라세라 마인드가 또 생각난다.
“이동하죠.”
경호인원 100여명과 함께 호텔로 이동했다.
예하가 낑낑대며 사인하는 동안 상황에 대해 들었다.
“인수 희망 업체 열두 곳과 기본적으로 합의를 마쳤습니다. 정부협의를 마치면 지겨운 가격협상이 이어지겠지만, 대략적 골격은 잡았습니다.”
커다란 지도에 구리광산, 리튬광산이 표시되어 있고, 각각의 생산량, 매장량이 적혀 있다.
칠레는 세계 구리 생산량 1위, 리튬 생산량 2위인데 둘 다 미래 산업의 핵심자원이다.
게다가 현재는 트럼프와 시진핑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2년째 가격이 폭락해 칠레 전체가 죽으려고 하고 있다.
사려면 지금이 막차다.
협상하다보면 2020 대폭락이 오겠지.
물론 이것도 내가 할 필요는 없지만...... 예비군 훈련 빠지는 김에 왔다.
“음... 여기 x표시는 결렬인가요? 생산량 3위인데.”
“하핫. 그...... 그것이.”
정미구엘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흘렸다.
“왜요? 돈 때문에?”
“저... 혹시 지난번에 스키장 갔을 때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그때 사진 지금도 있어요.”
예하가 손을 번쩍 들며 방긋 웃었다.
“그렇군요. 그때 야외 수영장에서 성희롱과 인종차별을 당하셨다고.”
아, 그런 일이 있었지.
“잊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났네요. 그런데 왜요?”
“그때 가해자가 그 3위 업체 아들입니다.”
제기랄.
“당시 최대한 박살내라고 해서 열심히 조졌죠. 합의하지 않고 언론에 꾸준히 흘리면서 인간말종 쓰레기인걸 칠레 전체에 알렸고, 미래그룹이 성장할수록 싸움이 격해져 이제는 원수사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수하려고 하니 잘됐다고 보복하려나 보네요.”
“그렇죠.”
“해결방안은 없나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선...... 금융치료가 제일 낫죠. 화가 풀릴만한 돈? 안 되면 더 많은 돈?”
자본주의가 이게 좋아.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들어주거든.
3위 업체의 광산 위치와 생산량을 확인하니 포기하기 힘들었다.
광산간 장비와 인부 연계를 통해 생산가격을 낮추려고 했는데 가운데 콕 박힌 광산지대를 남기면 생산 경로가 깨진다.
사긴 사야겠는데.
“분석자료 주시고, 약속 잡아주세요. 만나보죠.”
돈 줘보고 안되면 싸우지 뭐.
“정부조약은 언제죠?”
외국 기업이 국가 기간산업인 광산을 사려면 당연히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
광산주와의 협상과 정부의 허가 둘 다 얻어내야 한다.
“나흘 후입니다.”
“예. 예하야 뭐 할까?”
“응? 에... 앗. 칫. 또 놀리려고 그러지? 일정 있는 거지?”
나에 대한 신뢰가...
“없어. 진짜.”
“그래? 에헤헤. 음... 시내에서 쇼핑.”
“어...... 너님 혼자 자유롭게 즐겁게 쇼핑하셈.”
“아아잉. 같이. 쇼핑하고 구경하고 군것질하고. 막 그러자. 평범한 데이트으으. 한 번만. 마지막으로오오오.”
한국에선 할 수 없는 거지.
그래도... 쇼핑이라니.
“에휴. 하자. ...... 내일.”
“어. 나이스으으.”
오랜만에 경호팀이 비밀경호를 한다.
호리호리한 분들 위주로 사복을 입고 주변을 떠도는 와중에 산티아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선글라스 모자 없이 거리를 걷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셀카봉을 든 예하는 인터넷 방송을 하며 추천받은 거리 음식을 먹고 산티아고 시내의 유명 성당을 방문하고 이런 저런 악세서리를 장착하며 돌아다녔다.
꽤 괜찮았다.
가끔 휘파람을 부는 놈팽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초여름 날씨도 좋고, 경호팀의 벽이 없으니 속이 시원하다.
“안녕하세요. 칠레예요. 너무 좋아요. 해방감을 막 느껴요.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인가. 댑따 좋아요~”
-생얼!
-선글라스 모자만 없어도 좋은가벼
-연예인들의 소원이 아무도 자기를 모르는 곳에서 사는 거라자나
-뒤에 저 오징어가 세계1위부자냐?
-여친쇼핑끌려온 평범한 20대 ㅋㅋ
-맞넼ㅋㅋㅋㅋ
-졸라 피곤해 보인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쇼핑 따라 다니는 건 똑같이 괴롭나보네ㅋㅋ
어. 쇼핑하기 전까지 좋았다.
쇼핑 따라다니는 건 예비군 훈련보다 힘든 것 같아.
아름다운 해변에서 밍기적밍기적 놀고, 다이버의 도움을 받아 해저탐사를 하다가 예하의 승부욕이 발동해 해녀처럼 칠레에서 해루질을 해 잡은 걸 직접 먹었다.
칠레 정부와의 협정일이 되었다.
“미래 그룹이 아닌 미래 칠레지사에서 모든 지분을 소유합니다. 정부의 허가 없이 지분 거래가 불가능하며 영업이익의 절반은 칠레 내에서 재투자 혹은 기부 형식으로 분배합니다.”
적자가 나면 미래그룹이 떠안고 흑자가 나도 절반이상 기부, 재투자해야 하는 악조건.
지분을 마음대로 팔수도 없는 독소조항도 있다.
광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 어쩔 수 없다.
“또한 영업이익과 별개로 매출의 3.95%를 칠레사회발전기금으로 조성합니다.”
이건 부패한 공무원들의 뒷돈이 되겠지.
나름 좋은 일 하는 척 하면서 거의 대부분을 뒷주머니에 꽂아 넣고 쓱싹.
그나마 칠레 정도면 덜 부패한 거다.
같은 협상이 진행 중인 아프리카 쪽은 매출의 절반을 달라느니 어쩌니 해서 아주 지랄 같다.
한국 밖에 나가봐야 한국이 좋다는 걸 깨닫게 되지.
칠레지사장 정미구엘의 발표가 끝나고, 칠레 고위공무원들의 찬사와 미래 그룹에 줄 혜택 등을 발표하고 자기업적이라며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릴레이 연설이 계속 이어졌다.
통역을 통해 전해 듣다가 나중엔 질려서 통역도 하지 말라고 했다.
다섯 시간.
릴레이 발표가 끝나는 데 걸린 시간.
곧장 파티홀로 안내되었다.
화기애매한 억지웃음으로 가득한 파티 형식의 만찬이 이어지니 아주 죽겠다.
“괜히 왔다. 안 와도 되는 걸.”
“그래? 난 재밌는데.”
가슴이 폭 파인 비단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가득한 파티장.
늙고성공한 고위관료와 젊고 예쁜 여자의 조합.
예하는 그나마 덜 노출되는 옷을 입었지만, 여기서도 존재감이 남다르다.
왠 거지같은 놈들이 예하에게 자꾸 춤신청을 하고 퇴짜 맞기를 반복하고, 기업가들이 다가와 굽신거리기를 반복한다.
파티장에서 광산주들을 만났다.
인수에 대한 대략적인 합의를 마쳤는데, 정부의 허가가 떨어졌으니 이제 정식으로 사인하고 협상 할 수 있다.
지정가 구매.
미래쇼핑 지분과 스왑딜.
미래 게임즈, 미래 뮤직 등 비상장 자회사들과 스왑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주었지만 누구도 선뜩 광산을 팔지 않는다.
미중무역분쟁으로 구리값이 폭락하고 있지만 그래도 구리는 구리다.
광산주는 최대한 비싸게 팔고 싶어 한다.
협상은 한두 달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광산주는 계속 버티고 버티다가... 코로나 빔을 맞아 폭락하면 그때 살려달라고 하겠지.
인수팀에게도 절대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비싸면 안 사도 된다고.
버티고 깎다 보면 헐값에 살 수 있다.
“이쪽입니다.”
파티장 한쪽 귀빈테이블에 예하와 앉아있는데 히스패닉들이 안내받아 왔다.
일단 일어서자 안내해온 정미구엘이 소개를 했다.
“칠레 3위 구리채굴업체 무타나 코퍼의 회장과 부사장입니다.”
정식으로 소개하고 귓속말로 추가 정보를 줬다.
“성희롱범이 부사장인 아들이고 회장이 그의 아버지입니다.”
부자가 인사하러 왔구나.
“안녕하세요.”
억지웃음 지으며 회장과 악수를 했고, 옆에 놈에게 손을 내밀자 억지로 끌려온 게 분명한 부사장 새끼는 인상을 팍 쓰고 무시했다.
예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걸로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내 회사를 사고 싶다고?”
회장이 거드름을 피우며 상체를 뒤로 기댔다.
“예.”
“그런데 그 전에 풀어야 할 것이 있지 않나.”
“그렇죠. 그래서 꼭 좀 보자고 한 거죠.”
“그래. 후후후.”
회장이 기분 좋다는 듯이 웃으며 와인을 꼴깍 마셨다.
옆에선 젊은 부사장이 ‘너 좃됐다!’ 하는 표정으로 비웃고 있다.
“통역이 제대로 된 거예요?”
“예? 예.”
“그런데 왜 이러지? 음...”
상대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데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가 많이 괴로웠네. 별 같잖은 꼬투리를 잡아 언론을 이용해 이미지를 하락시키고, 경찰의 소환조사까지 이어지고, 벌금형까지 받았네. 그것부터 풀어야지.”
어라.
내가 들은 게 맞나?
자기들이 피해자라는 거야?
성희롱에 인종차별을 해 놓고 그걸로 화낸 것 때문에 괴로웠다고?
우리가 얄미웠는데 자기 회사를 사겠다고 하니 옳다쿠나 하며 꼬투리 잡으려 나왔구나.
“혹시 협상할 때 저자세로 나갔나요?”
정미구엘이 이마에 땀한방울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모든 광산을 사는 게 목적이었으니.”
“하... 그럴 필요 없었는데. 통역해주세요. 협상을 하기 전에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고. 저 망나니 새끼가 예하한테 진심으로 사과하면 그 후 협상을 진행하겠다고 전해주세요. 혹시 거부하면? 안 삽니다. 대신 망하게 한 후 주워옵니다. 옆 테이블에 cia 앉아 있고, 저 앞에 칠레 정부 관계자들이 있습니다. 이용할 거 전부 최대한 이용해서 망하게 하세요. 이 회사 노동자들 인터뷰하고 조사하고, 사건사고 전부 조사하고,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들 조사해서 불법행위 모든 걸 찾아 어떻게든 엮고 들출 수 있는 거 전부 찾아 박살내세요. 그대로 통역해요.”
정미구엘은 더욱 난감한 얼굴로 쩔쩔매며 무타나 코퍼 회장에게 통역했다.
붉은 얼굴이 더 붉어진 회장이 벌떡 일어났다.
“뭣이! 전쟁을 하자고! 전쟁을 원해?”
“전쟁은 지랄. 한방 톡 치면 뒤질 놈들이. 니들이 사과하면 용서해주고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그대로 전해요.”
정미구엘이 땀을 줄줄 흘리며 통역하자 회장을 정미구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아들놈을 데리고 휙 가버렸다.
“오빠... 괜찮은 거야?”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예하가 겁먹은 것 같다.
어깨를 감싸줬다.
“별거 아니야.”
“나 때문에 그런 거면 그러지 마. 기억도 안 나는 걸.”
“어. 나도 기억 안 나는 건 마찬가지야. 그냥... 저놈들이 적반하장인 게 재수 없어서 그랬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된다.
난 장관인데 고작 이것 가지고 뭐라 하기는...
난 재벌인데 고작 이걸로 꼬투리 잡기는...
잘못한 놈이 이따위 태도를 취하면 안 되는 거다.
“지사장님.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조져요. 본사에서 추가인력 보내줄게요.”
“예. 그래요. 그래야죠.”
땀을 흘리며 굽신거리는데 마음에 안 든다.
이제 칠레 지사가 한국지사에 이어 글로벌 2위 규모가 될 텐데 맡겨도 되나.
“조지는 거 보고 계약 연장 검토할 겁니다. 제대로 조져요.”
“예? 예. 알겠습니다.”
정미구엘이 입술을 깨물고는 정부관계자를 찾아갔다.
“오빠, 이러면 손해가 많지 않아?”
“손해? 내가? 저놈 손해가 천배는 더 크겠지.”
곧 코로나인데 버틸 수 있을까?
1년 후면 가격이 떡상하지만 그때까지 버티겠어?
“건드리면 문다. 그걸 보여줘야 해.”
웬만하면 봐주려고 했는데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협상 결렬되면 안 사면 그만이다.
큰 돈이 되는 사업이지만, 울며 매달릴 필요 없다.
- 작가의말
광산을 왜사 또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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