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울타리
철컹.
철창문이 열리고 양복 입은 사람들이 우루루 들어왔다.
삐.
전자음과 함께 개인 감옥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옥 안에 있던 남자는 열리는 문을 뚱하니 지켜보았다.
“나오세요.”
간수의 말에 남자가 물었다.
“사형입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석방입니다.”
“가석방? 보석? 내 변호사와 함께 왔소?”
“아뇨. 완전한 석방입니다.”
간수의 설득을 보고 있던 뒤편의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흰머리의 노인, 현재 미국의 대통령 바이든이다.
“미국이 미래블록에 패배했습니다. 이제는 공존을 모색해야 합니다.”
남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변호사도 막으며 불법감금 하길래 죽이려는 줄 알았건만.”
“예. 제가 욕심을 부렸습니다. 지금 미국은 큰 혼란에 빠져있고요.”
“그래서요? 대통령이 직접 감옥에 방문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앞으로 발생할 혼란을 수습해야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미국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아 주십시오.”
“똥은 칼 막스와 댁이 싸놓고 나보고 치우라고? 녹음파일을 넘기지도 않았건만 간첩죄로 잡아넣더니 이제 와서?”
“그래도 누군가는 수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안드레 루스텔 연준위원장님.”
“내가 연준 위원장? 언제부터?”
비밀회의 녹취록이 공개된 후 유력한 용의자로 뽑혀 감옥에 갇혔던 안드레 루스텔이 일순간 세계 금융의 수장으로 승진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입니다. 루스텔 연준위원장께서는 미국의 혼란을 잠재운 위대한 인물로 남을 것입니다.”
“그것도 잘 됐을 때 말이겠지.”
라고 말하면서도 안드레 루스텔은 몸을 일으켰다.
개인의 명예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도 거부할 수 없다.
기분이 안 좋다고 저 자리를 내쳤다가 칼 막스같은 양적완화 비둘기파가 권력을 쥐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설득이 어려울 거라 여겼기에 직접 방문한 대통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쪽에 있던 연방준비위원회 직원들이 앞으로 나와 새로운 위원장을 모셨다.
“내일 취임식과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이건 저희가 임시로 작성한 연설문입니다.”
보살핌을 받으며 감옥을 나선 안드레 루스텔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녹취파일을 미래그룹에 넘긴 건 내가 아닙니다.”
바이든이 쓴 웃음을 지었다.
“압니다. 범인은 이미 잡았습니다.”
“허......”
범인을 잡았으면서도 가둬 놓은 건가.
이놈의 미국은 정말 인권을 뭘로 보는 건지. 참.
안드레 루스텔은 다음날 말끔히 단장하고는 기자들 앞에 섰다.
찰칵찰칵.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프롬포터와 단상위에 놓인 대본을 봤다.
보좌관이 미리 적어준 대사들.
윗사람들은 아무 잘못 없으며 미래그룹 때문에 혼란이 발생했다는 변명, 핑계로 가득한 대사.
안드레 루스텔은 대본을 구겨서 앞으로 던져버렸다.
지켜보던 보좌진들이 경악했지만, 지금 막을 순 없었다.
“미국은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안드레 루스텔의 소신발언이 시작되었다.
“예하야. 우선, 달러가 잃을 권력이 뭐가 있을까?”
“어... 기축통화의 지위? 맞나? 기준화폐의 자리를 미래블록에 내준다고 들었어.”
“정확해. 이렇게 되면 달러는 무엇을 잃지.”
“쉽게 쉽게 갑시다요. 뭔데요 그게?”
예하가 건달처럼 껄렁이는 말투로 말했다.
귀여운 건달의 말랑말랑한 볼을 만지며 대답했다.
“달러가 전쟁무기로 사용될 수 없게 돼.”
“어...... 지금 베네수엘라처럼?”
“그래. 달러가 기축통화잖아. 그런데 달러는 미국에서 발행하고 통제하는 미국의 화폐고. 그렇기에 통제가 가능했어. 1930년 대 태평양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일본자산 동결이었어. 중국에서 철수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은 일본의 달러 자산 전체를 동결했고, 미국으로부터 석유, 강철, 고무 등 모든 것을 수입하던 일본은 항복하거나 전쟁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 정작 전쟁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고도 진주만을 공습당한 건 미국이 멍청한 거였고.
지금에 와서는 달러의 힘이 더 강해졌어.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해치우는 데 필요한 조치는 달러자산 동결 하나면 족해.
달러는 그 어떤 무기보다 강한 힘을 가졌었지.”
“과거형이네?”
“그래. 이제 미래화폐가 기축통화가 될 거야. 그리되면 미국 대통령의 의도대로 화폐를 무기로 사용하는 건 불가능해져. 그리고 잃어버릴 것은 화폐의 통제기능. 정치인의 의도대로 돈을 풀고 조이는 게 불가능해져.”
“음... 그게 나쁜 거야?”
“시장 안정을 위해 화폐를 조절한다면 좋은 기능이지. 하지만 사람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특히나 4년 후가 막막한 임시계약직 정치인은 4년 동안 최대한 돈을 벌고 싶어해.”
“나쁘게 이용하는 구나.”
“그렇지.”
“또?”
“마음대로 발행해 뒷주머니에 챙기는 게 불가능해지지.”
“지금까지는 그래왔어?”
“공적자금 투입. 한국항공의 아시안항공 인수 같은 일. 돈을 찍어서 부자에게 돈을 안겨주는 일이 비일비재했어. 미국은 더 심했고.”
“그랬구나.”
“돈을 마구 찍어서 도로나 공항을 만드는 일도 불가능해져. 이제 국가는 세금 걷는 만큼만 써야하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어... 그런데 그것도 문제야? 좋은 일이잖아.”
“예하야. 봐봐. 두 후보가 있어. A후보는 100조원을 찍어서 고속도로 10개 만들겠다고 해. B후보는 경제원리에 맞춰 1개의 고속도로만 만들겠다고 해. 너라면 누굴 찍을래?”
“어... A후보.”
“그런데 100조원의 빚이 나라에 추가돼.”
“어... B후보?”
“그런데 나라의 빚은 쉽게 체감되지 않아.”
“그러면... A후보?”
“하지만 고속도로를 깐 가치는 결국 누군가가 지불해야 하지. 앞서 말했듯이 그 가치는 국민 모두의 자산 가치를 떨구면서 생겨나고.”
“그럼... B후보... 에이 모르겠어.”
“정치는 기본적으로 포퓰리즘을 따라가. 여러 후보 중 가장 돈을 많이 쓰는 이가 뽑혀. 대중들은 미래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당장 많은 돈을 쓰겠다는 후보를 뽑곤 해. 이게 반복되면서 일본처럼 재정위기를 만나게 되는 거야.”
“그게 결국에는 문제를 일으키고?”
“응. 지금 일본처럼.”
“그걸 오빠가 막은 거네. 미래블록이.”
“그래. 이상이 미래블록이 빼앗아갈 가치들이었어.”
“어... 음... 결국 달러에게 나쁜 일이었네. 그런데 왜 미국이 더 부자가 되는 건데?”
예하가 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여러분. 미국은 강합니다. 달러가 미래블록에 빼앗긴 가치들은 별거 아닙니다.”
안드레 루스텔은 달러가 잃어버릴 권력을 나열한 후 반전을 말했다.
“지금껏 제가 말한 달러의 무기기능, 재정조절 기능 등은 모두 정치인의 무기였습니다. 미래블록이 달러에게서 빼앗아간 가치는 정치인이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채찍 뿐 입니다. 정치가들은 돈을 마음껏 찍고, 갑자기 회수하는 방식으로 여러분의 지갑에서 돈을 함부로 빼앗고, 마음대로 써버려 왔던 것이죠. 미래그룹의 윤동욱회장님은 그것을 못하게 막은 겁니다.
탈중앙화된 미래블록이 기축통화가 되는 건 기정사실입니다. 우린 공존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루스텔은 사람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말을 잠시 멈췄다.
“환율이나 결제방식으로 인해 잠시간의 경제혼란이 있을 수 있겠죠. 이건 잠시뿐입니다. 지금도 전문가들이 밤을 지새우며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을 겁니다.
다음으론 국가부채. 지금껏 정치인들은 갚을 생각 없는 빚, 영원히 짊어질 빚을 마음껏 찍었지만 미래블록이 기준화폐가 되었으니 이건 갚아야 합니다. 한동안 힘들 겁니다. 하지만 미국에겐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미국의 부채도 크지만 일본의 부채비율이 더욱 큽니다. 곧 무너질 일본의 자산을 삼켜 갚으면 끝입니다.
게다가 유로화도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스처럼 산업기반이 나약한 나라들부터 무너질 테고, 그들이 연동된 유로화를 폭락시키며 유럽 전체를 도미노처럼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 외 수많은 나라들이 국가부채를 갚지 못해 줄줄이 무너질 것입니다.
미국 또한 빚을 갚아야 하지만, 여타 무너진 국가들의 자산을 흡수해 전체적으로 더욱 부유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갚을 생각 없던 빚.
돈을 찍되 영원히 갚지 말자던 돈을 갚아야 하게 되었다.
GDP의 3배나 되는 빚을 껴안은 일본을 비롯해 유럽국가들이 줄도산하게 된다.
“빚을 정리하는 혼란의 와중에도 사람들은 살아야 하고 경제는 돌아갈 겁니다. 그 시간동안 새로운 질서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질서는 절대적으로 미국에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탈중앙화 화폐 미래블록이 세계의 금융울타리를 걷어줬기 때문이죠.”
“미국이 부자가 되는 이유는... 쉽게 설명하자면. 앞으로 모든 화폐가 미래블록을 기준으로 더 쉽게 더 빠르게 더 편하게 교류돼.”
“어... 그런데?”
“비슷한 일이 유럽에서 있었어. 유로화 통일.”
“어... 그래서?”
“유로존에서 강국이었던 독일과 프랑스는 유로화로 통일된 후 하늘높이 날았어. 화폐를 공유하면 산업 경쟁력이 강한 나라는 수출이 더 쉬워지거든. 한편 그리스나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약소국들은 화폐통일이후 유럽의 환자가 되어 골골되게 되었지. 미래블록이 기축통화가 되면 같은 일이 전 세계에 발생해.”
“에에에? 그럼 오빠가 나쁜 짓 한 거잖아. 미국은 자기들한테 좋은 일이었는데 왜 반대한 거래?”
“내가 한 건 탈중앙화야.”
“... 그냥 쉽게 말하세요. 맞을래요?”
반전영화의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예하가 폭력적으로 변했다.
“정부가 지멋대로 세계를 조작하는 일. 화폐 권력을 통해 정치인이 떼돈을 벌고 비자금을 만드는 일. 이런 게 개같아서 한 거야. 미국이 마음껏 양적완화를 할 수 없게 되고 일본은 망할 수밖에 없게 되고 경제는 순리대로 돌아가게 돼. 이게 미래블록이 만들어낼 결말이야.”
“... 순리. 미국은 경제력이 원래 강하니까 더 부자가 될 거라는 거지?”
“어. 탈중앙화 덕분에 경제가 정치간섭에서 한 걸음 벗어나게 되었으니까. 지금까지처럼 사기 쳐서 돈 버는 건 줄어들고, 대신 순수한 실력으로 강자가 큰 돈을 벌게 돼. 미국은... 아주 약간 더 부자가 될 거야.”
“어...... 모르겠어.”
“정치인의 경제 간섭은 대개 나쁜 방향으로 흘러. 돈을 찍어서 국민들의 자산가치를 빼앗아 자기 주머니에 넣었지. 하지만 그런 간섭이 가능했던 이유는 뭘까?”
“... 순기능이 있어서?”
“어. 제대로 사용한다면 자국 경제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 그런데 내가 그걸 막아버린 거지. 앞으로 세계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바뀌고 국가 간의 보호무역이나 관세장벽을 설치하기 어렵게 돼.”
“아... 그래서 미국이 더 부자가 되는구나.”
“국가마다 저마다의 통신사가 돈을 벌던 세상인데 앞으로는 글로벌 통신사가 등장하게 될 거야. 페이스북은 더 쉽게 세계 경제에 침투하게 되고, 애플이나 상섬폰은 더욱 쉽게 점유율을 올리게 되겠지.”
“경제 단위가 국가에서 세계로 바뀌는구나.”
“어. 정확해.”
“흠... 그러면 결국 세계는 변화가 없는 거 아니야? 미국은 계속 미국이네.”
“예하야. 난 미국과 싸우려고 시작한 게 아니야. 양적완화와 싸우려고 한 거지. 돈을 마음대로 찍어서 뿌린다? 이게 사기라고. 사기꾼이 사기 치는 걸 막지 못하면 경제대공황 이상의 충격이 발생하니까. 그걸 막으려 한 거였지 괜히 미국을 때리려고 시작한 게 아니었어.”
“우웅. 이해했어. 그래도... 오빠 또 욕먹겠네.”
“경제 울타리가 사라지면 수많은 양아치들이 나한테 욕을 하겠지. 단통법 뒤에 숨어서 싸게 팔면 과징금을 무는 이상한 회사들이 박살나고 나서 나한테 난리치겠지. 하지만 글로벌 무한경쟁체제가 시작되면 통신비용은 더욱 저렴해지고, 사람들은 더 합리적인 가격에 서비스를 이용하게 될 거야. 결국엔 내가 옳았다는 걸 알아주겠지.”
“에휴 또 시간이 필요하구나.”
“사라진 울타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거야.”
“음. 알았어. 결심했어.”
“뭘?”
“내가 오빠를 잘 돌봐줘야 한다는 것을.”
예하는 내가 가난해진 게 많이 기분 좋은 것 같았다.
날 가지고 인형놀이를 할 생각인가.
“잘 보살피세요.”
“에. 헤헤헤. 재밌겠다. 헤헤헤. 오빠는 앞으로 내 운전수닷. 윤기사~”
예하가 엄청 신났다.
갑자기 어깨춤을 춘다.
“아 그런데.”
예하가 춤을 멈췄다.
“우리 집에 언제 가?”
- 작가의말
세상엔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다는 게 제가 보는 시각입니다... 그렇다보니 글의 흐름이 미적지근한 거 같네요 다음에는 절대 악의 제국을 만들어서 뿌슝빠슝통쾌상쾌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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