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정직원3
“거창하게 회장이 아닌 25살 젊은이의 입장에서 말해보죠. 저야 운 좋게 인생이 잘 풀렸지만, 제 동기들, 친구들 모두 같은 나이이고 아직 공부중이거나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세대입니다. 내 친구들의 입장에서 말해보겠습니다.
친구들 입장에서는 평생 고용보장이 되는 직장이 좋습니다. 입학과 동시에 평생고용이 거의 보장되는 교대가 그래서 인기가 좋은 거죠. 반면 경쟁률이 높은 사범대는 인기가 훨씬 낮고요. 졸업 후에는 공무원이 인기 좋고, 회사가 망할 염려가 없는 공기업이 인기 있습니다.
다음으로 대기업의 정직원이 인기가 좋죠. 저도 미래그룹을 만들지 않았다면 공시준비를 하거나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런데 매년 뽑히는 안정적인 일자리는 10만개 안팎입니다. 매년 사회참여자가 50만 명 근처인데 말이죠. 뽑히지 못한, 치열한 취업경쟁에서 패배한 80%의 젊음은 하청업체에 들어가 사회의 바닥에서 갈리고 갈리고 갈립니다. 난 이런 하청의 세계가 싫습니다.”
말을 멈추고 민형수를 바라봤다.
멀리서 울리펴지던 음악도 꺼졌다.
내 발표는 어느새 민형수와의 대담처럼 되었다.
고요해진 광장에서 민형수가 대답했다.
“그 모두 좋아질 수 있습니다. 미래그룹이 앞장서면 됩니다. 미래 그룹이 먼저 전원 정직원으로 전환하시면 그 다음 규모의 기업이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더 작은 기업이 따르고 더더 작은 기업도 따르게 되면 세상엔 정직원만 남게 되겠죠.”
민형수가 원하는 이상의 끝은 모든 근로자가 정직원인 세계인가.
몽상가.
내 안에서 민형수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내려갔다.
“전원 정직원인 나라라면 저도 하나 알고 있습니다. 근로연령이 되면 전원 취직하고, 은퇴할 나이가 되면 전원 은퇴하는 완벽한 나라. 북한이네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말 중간에 민형수가 끼어들었지만, 더 이상 대화할 의미를 찾지 못하겠다.
“대화할 가치가 없네요. 마이크 회수해요.”
내가 나선 이유는 여기 있는 이들과 말싸움을 해서 이기려는 게 아니다.
카메라에, 세계에 미래그룹의 방향을 선언하기 위함이다.
“북한 같은 공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나라가 일본이겠네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평생직장 문화가 생겼고, 노동자 해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세계 시장을 잃었습니다. 지금 자동차를 제외하면 세계1위인 분야가 거의 없죠.
전 이게 정직원제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복지부동. 큰 사고를 치지만 않으면 자리를 잃지 않습니다. 흔히들 비판하는 공무원의 태도와 비슷하죠. 기업은 도전하고 실패를 쌓아 성공해야 하는데 정직원 제도는 직원의 혁신을 막습니다. 문제 만들지 않기 위해 나서지 않는 거죠. 저희는 다릅니다. 업무영역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선재고용을 약속했습니다. 실수와 실패는 감점 항목이 아닙니다. 게으름, 불성실이 감점항목이죠. 그리고 호봉제가 없으며 혁신을 이루거나 제안해내면 큰 폭의 연봉상승이 있습니다.”
물을 마시려고 잠깐 말을 멈췄는데, 경호원 벽에 붙어있던 기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호봉제가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재밌는 걸 짚었네.
“내 친구들과, 나와 나이가 비슷한 세대에게 묻고 싶네요. 사회에 첫발을 디뎌 어느 한 가지 일을 하기 시작하면 평생 그 일만 하고 싶니? 다른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지 않아? 한번뿐인 인생이잖아.
하지만 사회는 도전을 거부하도록 종용합니다. 취직이 힘드니 회사 내에서 야근비용을 없애도, 온갖 불합리한 갑질을 해도, 성추행을 당해도 꾹 참고 인내하고 버티게 만듭니다.
시스템이 그러합니다. 그 대표적인 시스템이 정직원제도와 호봉제입니다. 힘겹게 정직원이 되었으니 너보다 불쌍한 계약직을 보면서 위안을 얻어서 잘리지 않기 위해 불합리한 야근을 감내하고, 회사를 때려치울 생각을 할 때마다 그동안 쌓인 호봉이 아까워서 참고 감내해라, 이렇게 만듭니다.
솔직히 일부 전문적인 섹터가 아닌 이상 업무처리는 3개월이면 다 배웁니다. 분기마다 한 번씩 있는 특별한 돌발상황도 3년이면 전부 경험하고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즉, 연차가 쌓여서 경험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 건 3호봉까지면 충분합니다. 제가 원하는 근로자의 삶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불합리한 일을 참지 않고, 한번뿐인 인생에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력서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에 가산점을 주고 있습니다. 이게 더 낫지 않을까요?
솔직히 호봉에 대해 뭐가 더 나은지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업무에서 3년 일한 27세 젊은이와, 30년 일한 59세 아저씨의 업무처리능력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봉이 낮은 젊은이는 아저씨의 절반 밖에 받지 못합니다. 어리니까 조금 받아라? 30년 일한분이 많이 받아야 한다? 이거 이상하지 않아요?
똑같이 일하는데 왜 청춘이니까 아프라고 강요하는 거죠. 이건 잘못된 시스템입니다. 미래 그룹이 초봉이 높죠? 최소 4000 이상씩 줍니다. 왜 이럴까요? 호봉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일을 하면 비슷하게 받아가야 합니다. 이게 당연하지요. 호봉이 없고, 중간 값으로 임금을 줍니다. 이게 저의 노동정의입니다.”
정직원 제도와 호봉제는 평생 그 일만 하도록 만든다.
불합리한 야근과 무임금 추가근무를 참도록 만든다.
쌓아올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참고 참고 참도록 종용한다.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
“초중고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 전공을 이수해 사회로 나온 젊음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다양한 도전을 하는 세상. 그게 내가 원하는 사회입니다.
그를 위해 저는 정직원 제도와 호봉제를 부정합니다. 저희 인사팀에서도 한 가지 일만 해온 사람보단 다양한 직업을 폭넓게 경험한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고 있습니다. 중고차만 10년 팔아온 사람보다 중고차 3년 식당 3년, 음악 3년 해 본 사람이 더 열린 세계관을 갖고 있고, 더욱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쉽게 튀어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게 미래 그룹이 바라보는 인재상입니다.”
정직원 제도를 부정하고 호봉제를 부정한다.
이건 아프니까 청춘인 사회시스템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직급에 따른 연봉 차이는 있지만, 청춘도 중년과 똑같은 일을 했다면 똑같이 받아야 한다.
회귀 전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이일저일 해보면서 느꼈던 일이다.
똑같이 일하는데 호봉이 쌓여서 많이 버는 아저씨들.
부러우면서도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입만 뻥긋뻥긋 하는 민형수를 슬쩍 보고 화제를 전환했다.
“나먕유업의 갑질 녹음 기억하십니까? 30대 직원이 대리점 사장에게 쌍욕을 퍼붓고 죽인다고 협박했죠. 그게 갑의 위치입니다. 대기업 정직원이 되면 이런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죠. 모든 젊음이 정직원이 되길 간절히 원하는 건, 갑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을로써 당하기 싫은 게 더 클겁니다. 그리고 호봉제의 존재로 인해 일단 입사하면 어떻게든 버티며 평생 한 가지 일만 하게 되죠. 그리고 이런 걸 사회가, 정치권이 좋아하죠. 어찌됐든 사회가 안정되니까요.
정직원 제도는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정직원에게만 좋은 제도입니다. 경쟁에 패배한 대다수를 끔찍히 갈려나가게 만드는 제도입니다. 즉, 아직 취업하지 못한 대다수 젊음에게는 정직원 제도가 없는 게 훨씬 낫습니다.
정직원에게만 좋은, 그리고 정치인이 인기 끌기 편리한 정직원 제도를 부정합니다. 여기 모인 사회단체, 노동단체, 정치인분들, 당신들의 돈벌이에 나를 이용하려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할 일은 높은 임금을 주고 하청을 최소화해 최대한 많은 이를 고용하고 평등하게 대접하는 미래그룹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 갑에게 당해 주 120시간 갈리고 있는 을을 보호하는 것이며, 야근비용 못 받는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서 똑바로 일하세요.
누군가의 부추김에 속아 이 자리에 나온 시위참여자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당신들이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일주일 안에 해산하고 계약에 의거 정해진 일을 해주십시오. 일주일 후 만약 단 한명의 시위자라도 남는다면, 전 정직원을 고용하는 대신 미래 애니메이션을 폐쇄하겠습니다. 이 방송을 보신 해외의 관료들께 말합니다. 미래 글로벌 애니메이션을 유치하기 위한 제안서를 보내주십시오. 제안서를 검토한 후 일주일 후에 협의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회사를 해외로 옮기면 해당국은 법인세와, 고용자의 근로소득세를 얻는다.
당연히 이득이며 정치적 업적이다.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세제혜택과 기반시설을 제공하는 건 아주 당연한 거래다.
한국은 그걸 모른다.
혼자 성장한 미래 애니메이션을 이용하고 장난치며 길들이려 했다.
상장사면 어려울 지 몰라도 전액 내 돈으로 만든 회사다.
옮기는 건 쉽다.
“잠시만요!”
“전부 해고할 겁니까?”
“이건 집회의 권리를 짓밟는...”
기자들이 악다구니를 썼다.
한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질문 딱 다섯 개만 받겠습니다. 괜히 헛소리해서 눈총 받지 마시고 잘 생각해서 질문하세요.”
내 말에 기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한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손으로 가리키자 직원이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
“노동법에 의거한 정당한 집회이며 건강한 요구였는데 이건 재벌의 탄압입니다. 국가의 제재가 두렵지 않습니까?”
“어디사는 누구시죠?”
“예? 그게 중요합니까? 대답을 해 주시죠.”
“누가 날 때리는 지 아는 게 중요하죠. 난 신분을 다 까고 여기 나와 있는데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상대가 누군지 정도는 알아야죠.”
“...... 혁신일보의 김학영 기자입니다.”
“인수형 저사람 샅샅이 조사해 주세요.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국가가 제재한다면 해외로 이전하겠습니다. 막는다면 부도내고 해외에 따로 설립하겠습니다. 그래도 막는다면 모든 회사를 해외로 이전하겠습니다. 제 이상을 이해해주는 국가가 어딘가에는 있겠죠. 다음 질문.”
김학영 기자는 내 첫문장에 사색이 되어 내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지만, 알게 뭐야.
다음 질문자가 손을 들었다.
“북한강 일보의 모지혜입니다. 미래 애니메이션을 폐쇄하고 이전한다면 거액의 피해를 보고 작품의 퀄리티도 떨어질텐데 차라리 정직원 고용이 이득 아닙니까?”
그 말에 채인수를 돌아보니 1500억이라고 귓말해줬다.
“이전금액이 1500억이라고 하네요. 등 떠밀려서 억지로 정직원으로 고용하는 것보다 훨씬 싼 금액입니다. 다음질문.”
다른 기자가 손을 들었다.
“징직원을 부정하고 호봉제를 부정하면 손해가 클 것 같습니다. 차라리 기존 회사들처럼 하는 게 이득 아닙니까?”
이건 예전에 채인수와 기획실과 대화했던 부분이다.
왜 손해를 감수하는지. 내가 무얼 그리는지.
“손해가 맞습니다. 정직원제를 인정하는 대신 중요도가 낮은 업무파트를 쪼개 하청에 넘겨주고, 최대한 많은 열정계약직을 고용하고 호봉제를 적용해 젊은이들의 임금을 박살내면 회사의 인건비가 30%가 줄어듭니다. 우리는 손해를 감수하고 비싼 값에 사람을 쓰고 있는 거죠.
왜 이러느냐. 이제껏 말했는데 모르겠습니까? 내 동갑들, 월 300 받으면 많이 받는 겁니다. 왜 조금 받고 일하냐고요? 지가 무능해서 못 받는 건데 왜 하소연 하냐고요? 돈 많이 벌려면 공부 열심히 해서 치대 가지 지가 못해놓고 왜 우는 소리 하냐고요?
지금 경쟁이 너무 치열하잖아요. 불쌍하지 않아요?
내 동갑들. 결혼 좀 시킵시다. 지금 한국 망하기 직전이에요. 인구절벽 안 보여요? 결혼 좀 시켜줍시다. 돈 좀 공평하게 벌게 해주자고요. 일인당 GDP가 3만 달러면 평범한 일을 해서 두명은 먹여살려야죠. 그래야 사회가 돌아가죠.
주말도 없이 매일 야근하며 일하는데 월 300도 못 벌어요. 이런데 어떻게 결혼해요. 숨통 좀 돌아가게 만들겠다고 내 손해를 감수하고 그룹의 정책을 정했어요. 그런데 저기서 자기 돈 벌겠다고 끼어든 양아치 새끼들이 돈 더 내놓으라고 지랄하는데 굳이 내가 맞아줘야 합니까? 포기. 니들이 인구절벽을 해결하든가. 나야 한국을 떠나면 그만입니다. 다음 질문.”
지금은 청년 실업자 300만 명인 시대.
불과 10년 후엔 일할 사람이 없는 인구절벽의 시대.
이 급격한 변화 속에 한국은 무너져 내린다.
20년 후 한국은 박살난다.
매년 70만명씩 은퇴하는데 졸업자는 30만 명만 추가된다.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일 조차 사람이 없어서 멈춘다.
당연히 기업들은 일할사람이 없어서 전부 해외로 나가고 사회에 들어오는 돈마저 말라버린다.
그게 한국의 미래다.
- 작가의말
정규직, 호봉제의 장점을 빼고, 계단에 오르지 못한 사회초년생이 보는 상층의 단점만 봤습니다
당연히 정규직, 호봉제에 장점이 더 많으니 그 제도가 추천받는 겁니다
다만 이 글은 대상독자 15~29세를 위한 소설이며, 그들의 눈높이로 본 사회불만입니다
(그런데19금 ㄷㄷ)
글을 써넣고 보니 윗세대가 나쁜 것 처럼 매도하는 것 같아 죄송한데, 윗세대도 많이 고생하고 힘겹게 경쟁했으며 계단에 못 오른 이들은 엄청 힘들었다는 것을 알려드리며 글을 이상하게 쓴 것 사과드립니다
엊그제 세계 최고의 경제 학자 슈카님께서 인구절벽에 대한 영상을 올렸더군요. 그걸 보시면 글 막판의 인구절벽 위기설에 대해 이해하기 쉬우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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