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정직원2
기획실의 분석자료를 보며 본사 현관으로 내려가니 국회의원과 서울시장, 구청장 등 고위정치인이 몰려있다.
“대통령 각하께선 되도록이면 미래그룹이 임직원 전원을 정규직 채용해주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
“제가 재선에 성공한다면 미래그룹 근로자 전원을 평생 고용하도록 돕겠습니다. 그에대한 혜택도 충분할 터이니 미래그룹에서도 만족할 것입니다.”
시장.
“지난해 한푼의 법인세도 내지않은 미래그룹과 소득세를 고작 4000만원만 낸 세계 1위 부자의 절세행태를 바로잡겠습니다.”
구청장.
안 만나줘서 삐졌나.
왜들 지랄이여.
“글로벌 선두기업 미래그룹이 직접고용인원 120만명을 평생 고용한다면 그만큼 세계의 노동자 인권이 안정됩니다. 미래그룹과 관계를 맺은 글로벌 기업 300개 이상이 눈치를 보며 뒤를 따를 테고, 이는 곳 세계 노동계 전체에 낙수효과로 이어집니다. 미래그룹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미래그룹이 모든 고용인을 정직원으로 전환할 때까지 무한히 노력하겠습니다.”
저 남자는 어딘가 익숙하다.
“누구죠? 본 거 같은데?”
“인권 변호사 민형수. 기억 안나? 백제그룹 2계. 노동자 보호에 앞장서는 사람이라서 백제를 무너뜨릴 때 손잡았잖아. 그 후로도 타기업 공매도 할 때나 외국인 노동자 가혹행위 등에 대한 자료를 넘겨줘서 해치웠어.”
“아 맞다. 훌륭한 사람이었지. 그런데......”
“저 사람은 저게 옳다고 느끼는 거겠지.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신념.
“진심으로 정직원 전환을 요구하는 거네요. 따로 돈 벌려는 생각이 아니라.”
“그렇지. 그래서 나서지 말라는 거야. 수습은 내가 하고 욕도 내가 먹을 테니까 넌......”
“아뇨. 제가 할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채인수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앞서나간 경호팀이 본관 앞에 넓은 공간을 만들고 마이크와 미래방송 카메라 등이 세팅된 후 건물을 나섰다.
현관을 통과하자 시끄러운 시위현장이 조용해졌다.
멀리서 봉고차 스피커가 틀어놓은 민중가요가 눈치 없이 떠들다가 하나 둘 꺼졌다.
-와, 부자등판
-아무말도 안했는데 조용해지는 거 봐
-이게 세계 1위 부자의 플렉스
-대통령도 만나기 힘들다는데 시위한번 하면 나오네
-과거 자료 보면 백제병원 파업 때도 등장했더라
라이브로 송출되던 개인방송 화면과 미래그룹 공식 채널이 난리가 났다.
반면 현장은 조용해졌다.
돈의 힘이거나, 돈이 해낼 수 있는 불합리한 힘이거나, 어쨌든 무서운 건 내가 아니라 돈이겠지.
잠시 침묵하고 시위현장을 둘러봤다.
계약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뎀마팀 작화가들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다.
무엇이 저들을 분노하게 했을까.
되도 않는 요구를 진짜 들어주리라 믿었나?
지난해 평균 월급 400만원, 성과급과 보너스 6000만원을 받았으니 1년에 1억 이상 받았는데 부족했나.
올해도 그 정도 보너스가 나갈 테고, 이는 계약만료와 상관없이 주기로 약속했는데.
돈.
뎀마 원작자의 그림체를 모사하는 재주꾼을 모았고, 형편없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대우보다 세 배는 잘해줬고, 보너스를 생각하면 신의 직장이었을 텐데 고마움은 없나.
아니지.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평생 계속 꿀을 빨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라도 한 거겠지.
누군가 정직원 만들어 준다니까 속는 셈치고 나선거니 이용당한 거지.
계약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애니메이션 혼자레벨업 팀도 같은 처지일 테고.
미래병원측에서 나온 100여명은 한국의사협회의 사주를 받은 거겠지.
병원 청소 노동자나 기기를 다루는 기술자들이 왜 저기에 끼어있는 거지.
씁.
시위인원의 표정은 딱 두 종류로 나뉜다.
부끄러워하는 사람.
정의구현을 실천하는 중인 사람.
노총에서 나온 사람들도 같다.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표정의 젊은이들.
귀찮게 됐다는 표정의 노인네들.
사회단체도 똑같네.
정의를 이끌고 있다는 신념에 찬 젊은이들.
뒤에서 조종한 이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 시원한 데서 누워 배를 긁고 있겠지.
민형수 인권변호사.
어려운 노동자를 돕는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정의로운 인물.
침묵이 길어지자 눈치를 보던 노총에서 다시 노래를 틀고 감동적인 80년대 합창을 재개했다.
장내가 시끄러워지자 기자들이 달려왔다.
“미래그룹의 행보를 말해주십시오. 정직원으로 받아들일 겁니까?”
“착취당하는 근로자들에게 미안하지 않습니까?”
“한국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근로자들도 정직원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경호팀의 벽에 막힌 기자들이 악다구니를 썼다.
다들 젊고 잘생겼고, 예쁘다.
공부를 많이 해서 명문대에 갔을테고, 대학교에서도 노력을 많이 했으니 이 어려운 시대에 취직을 한 거겠지.
그런데 질문의 수준이 왜 저럴까.
바보라서 저러진 않을 테고, 저런 질문을 해내는 뻔뻔한 이만 저 바닥에 붙어있을 수 있는 거겠지.
한심하고 씁쓸한 기자들을 보다가 민형수를 봤다.
백제그룹 해체부터 인연이 닿은 민형수도 조용히 마주보고만 있다.
만난 적은 없지만, 많은 일을 함께 하면서 내 성향도 파악했겠지.
내가 착취나 불평등을 조장하지 않는 것도 알겠지.
그럼에도 저 자리에 나온 건.
민형수가 그리는 이상적인 미래를 위해 ‘내가’ 못 이긴 척 양보해주길 바라는 거겠지.
신념을 이루기 위해 ‘옳은’ 아군을 찌르는 행위.
날 호구로 봤구나.
지금까지 너무 퍼줬다.
스읍, 하.
스읍, 하.
“한국에는 세계최고의 제조회사가 있습니다. 모두가 아는 상섬전자죠.”
두서없이 말을 시작했다.
미래그룹 방송은 처음부터 나만 찍고 있었으니 제대로 송출되었겠지.
다른 방송국 카메라와 개인방송 카메라가 날 향하는 게 보인다.
“작년, 그러니까 2018년 영업이익이 세계 4위였죠. 국영기업 아람코와 중국의 국영은행을 제외하면 애플에 이어 세계 2위입니다. 독점적 소프트웨어 기업 애플과 다르게 경쟁자와 치열한 단가경쟁을 하는 제조기업으로는 세계 1위죠.”
예전 같으면 몰랐겠지만, 자리가 자리다보니 공부해야 할 게 많다.
그룹의 사업영업이 넓어지면서 많이 공부하고 공부하다보면 미래지식이 생각나 투자방향이 정해지기도 한다.
“상섬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진 정말 많은 도전과 혁신, 실패와 현명한 손절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반도체만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죠. 상섬카메라는 고점에서 손절했고, 상섬이 카메라 사업부를 매각한 후 세계 카메라 시장은 10년 만에 10분의 1로 작아졌습니다. 상섬은 프린터사업부를 매각했고, 현재 프린터, 복합기 시장은 거의 사장되었습니다. 상섬은 HDD를 매각하고 대신 SSD에 올인 했으며 상섬카메라를 매각한 대신 이미지센서에 올인해 세계 1위 소니를 기술력에서 역전시켰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냐고요? 기업이 성장하고 존속하기 위해선 혁신과 폐쇄가 끝없이 뒤따른 다는 걸 알려드리려고요.”
-25살 젊은이의 패기
-ㅅㅂ 그래서 정직원 반대한다는 얘기 아니냐
-결국 똑같은 개갞기란거네
홍보실에서 방송을 하다가 송출화면이 멈춘 예하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댓글창을 봤다.
화면에 나오는 오빠의 모습은 좋았지만 챗창의 분위기는 매우 안 좋았다.
왜 굳이 총대를 메는 거지. 대본도 없이.
“기업의 입장에서 기업은 계속 변하고 도전하고 다양한 실패를 바탕으로 큰 성공을 거둬야 합니다. 그런데 정직원제가 혁신을 막습니다. 카메라 사업? 실패했으면 손절하고 다른 사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직원은 해고할 수 없습니다. 상섬은 사업을 매각하며 고용승계를 조건으로 함께 내보내지만, 그게 안 되는 적자기업이 무수히 많습니다. 카메라 전문가를 고용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적자로 손해를 보고 이미지 센서에 올인하려면? 이미지센서 전문가를 고용해야겠죠? 하지만 뽑을 수 없습니다. 기존 할 일이 없어진 정직원들을 전공이 다른 이미지센서쪽으로 돌려야 합니다. 이건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죠.”
내 말이 이어질수록 소란이 커졌다.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이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노총의 확성기가 소음을 내뿜고 간악한 자본가라고 헛소리를 합창했다.
소음은 커져도 마이크에 입을 대고 말하면 방송엔 내 목소리가 분간되겠지.
거짓말이 직업인 눈앞의 이들과는 대화할 가치가 없다.
“기업 입장에서 정직원 제도, 평생 고용을 보장하는 것은 기업을 둔하게 만들고 고정비용을 증가시키는 독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업은 기업업무를 조각내 하청을 줍니다. 청소? 자그마한 하청업체에 청소를 통째로 맡기니 회사를 청소하는 분들은 최저시급 이하의 돈을 받으며 추가근무 등 온갖 불합리한 대접을 받습니다. 기자재를 채워 넣는 사소한 일은 하청을 주고, 업무지원류의 계약직을 잔뜩 뽑아 정직원의 3분의 1 월급에 일하게 합니다. 고객지원센터, 보상 수리, A/S등 파트별로 쪼개고 쪼개 최대한 하청을 줍니다. 결국 하나의 건물 안에 정직원이라는 귀족과 계약직, 하청업체 직원이 피라미드 계급 구조를 갖게 됩니다.
전 이 차별이 꼴보기 싫습니다.
미래 그룹은 120만명의 직원이 함께 합니다. 전부 계약직이며 저기서 날 막으려고 하는 채인수 사장님도 5년 계약직입니다. 타사로 가선 안 되는 일부 코더나 비밀엄수 조건이 있는 분들은 계약기간이 길고, 연봉도 높지만 어쨌든 계약직입니다. 업무 내용과 주특기가 다르고 저마다 계약기간이 다르며 연봉도 다 다르지만, 모두 평등한 계약직입니다. 일례로 얼마 전 미래쇼핑 상장기념 보너스 5000만원은 전세계 모든 직원에게 비슷하게 돌아갔습니다. 미래쇼핑 상품등록 업무를 맡은 직원과, 핵심 코드를 만든 직원과, 에티오피아지사에서 청소를 하는 직원이 모두 똑같이 받았죠. 이게 내가 생각하는 공평함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자 온갖 잡스러운 전문가들이 자기 앞의 기자를 붙잡고 떠들고 있다.
그딴 놈들 무시하고 민형수만 바라봤다.
생각에 잠긴 채 내 눈만 보고 있는 민형수.
저 똑똑하고 열정에 찬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래 뮤직이 처음 오픈했을 때 저희는 세계적으로 10만 명의 단기계약직을 고용했습니다. 각국 엔터와 뮤지션들이 보내준 음악파일을 등록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죠. 과거의 거의 모든 음악의 등록이 끝난 후 이들 대부분은 계약만료로 회사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정직원으로 고용했다면? 그들이 할 일이 없어도 월급을 줘야하고 억지로 일을 만들어 시켜야 합니다.
물론 저희는 계속 확장했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재고용되고 있습니다. 완벽한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면 과거 일했던 분들을 우선 고용하는 게 원칙이죠.
하지만 이건 정직원 보장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미래 애니메이션의 뎀마 파트는 팀 해체까지 1개월이 남았고, 마무리 작업 중입니다. 현재의 뎀마 팀은 계약이 종료되지만, 이후 생길 다른 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미 6개월 전부터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다음 프로젝트에 모사화가로 들어가는데 가산점을 주고 있으면 150명이 통과했습니다. 이게 미래그룹이 생존하기 위한 변화이며 경쟁이며 혁신의 과정입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이게 아니죠. 이번 사태에 저런 정치세력이 등장해 완전고용을 보장하라 강압하면 저희는 기존 기업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뎀마프로젝트 팀을 페이퍼 컴퍼니에서 고용하고 저희는 하청을 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하청구조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뎀마팀 뿐만 아니라 120만 고용인 중 119만명을 하청업체로 분산시켜야 합니다. 기존 기업들처럼 말이죠. 우리가 이렇게 바뀌길 원하십니까?”
민형수의 눈을 보며 말했다.
민형수가 대답하려고 두리번거리니 비서팀의 사람 한명이 다가가 마이크를 건네줬다.
“고용과 책임. 근로자 삶의 안정감. 미래는 그걸 해낼 여유가 있습니다. 미래에서 해 주십시오. 젊지만, 혁신적이고, 사람의 행복한 삶을 돕고자 하는 윤 회장님의 사상을 이해하고 지지합니다. 그러니 먼저 해주십시오. 미래가 나서면 많은 기업들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양보해주십시오. 사회 전체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민형수가 지극히 저자세로 간청했다.
뒤에서 소리 지르던 머저리들이 ‘내가 분위기 파악을 잘못했나?’ 하며 입을 닥칠 정도로 저자세였다.
차라리 욕을 하고 싸움을 걸지.
그러면 역으로 피해자 입장이 될 텐데.
저 아저씨 때문에 나만 악역이 되잖아.
뒤에서 채인수가 이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크게 내쉬는 게 들렸다.
- 작가의말
??? : 와 나 이 ㅁㅊ새끼가 까다 까다 정직원 제도를 까네 ㅁㅊ
이라고 욕먹을게 뻔해서 연참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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