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진실의 문4
두 가지 선택지를 들은 예하가 짜증을 냈다.
“선택지가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그럼 당연히......”
“두 번째지. 누구나 두 번째를 선택하겠지. 저들도 그랬을 뿐이야.”
공산당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어? 어... 알 거 같아. 공산당을 배신하면 자신과 가족이 죽고, 지금까지처럼 공산당에 충성하면 모르는 사람들이 고통 받지만, 그런 건 느껴지지 않고, 변함없는 일상을 보낸다? 이거 맞아?”
역시 똑똑하네.
“정확해. 그게 독재자의 통제 원리야. 북한이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해? 이정은 국왕을 저격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게 수백 명인데 그들 중 누구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게 이상해? 간단한 거야. 저격하면 자신과 가족 모두가 죽거든. 저격할 위치에 있는 이들은 잃을 게 많은 귀족층이고. 아프리카의 수많은 독재자들 또한 마찬가지고. 영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던 방식도 이런 식이었고, 일본이 조선의 친일파에게 특권을 준 것도 같은 원리였어.”
“그래도... 잘못된 게 분명한데도... 이러는 건. 결국 그것 때문에 세상이 변하지 않는 거네.”
예하가 안타까워했다.
“그렇다고 저들을 욕할 수 있겠어? 공산당이 잘못된 거 뻔히 알면 너와 네 가족을 죽여서라도 옳은 길로 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
“아니...... 어떻게 그래... 의미 없을 것 같아.”
예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활 쏘는 손이 멈춰서 다시 화살을 건네줬다.
“그래. 그래서 세상에 독재자가 넘쳐나고 부조리가 넘쳐나는 거야.”
“그럼 방법이 없는 거야?”
“방법이 없긴.”
손으로 전장 한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 핀빙빙이 보인다.
그녀와 친위대는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공산당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외치고 있었다.
“빙빙언니? 그런다고 공산당이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을 것 아냐? 상대는 다들 신분이 공개되어 있으니 배신하면 가족과 본인이 죽을 거 아냐.”
“아까 독재자가 뭘 한다고 했지?”
“어...... 옵션을 줄인다. 첫째 둘째 극단적 선택지만 남긴다.”
“그래. 사람들은 두 번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두 번째 선택으로 인해 100명이 죽지만, 본인은 알지 못하지.”
여기까지 말하자 예하가 빙빙을 다시 바라봤다.
“아.”
“알겠어?”
“알리는 거구나.”
“그래. 당신이 침묵하고 공산당에 충성함으로 인해 100명이 죽습니다. 당신은 100명을 간접살해하게 됩니다. 핀빙빙이 2년 째 꾸준히 하는 말이야. 독재자가 극단적인 선택지만을 남겼으니 핀빙빙은 거기에 새로운 선택지를 추가해 주는 거야. 빙빙과 민주화 단체들이 진실을 알리고 현실을 직시하기를 호소하는 이유지.”
“아아아.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니구나.”
예하가 활 쏘는 속도가 빨라졌다.
게임.
즐기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
그들은 이곳에서 진실을 배워간다.
“그럼 곧 끝나겠네. 누구도 자신이 100명을 죽이길 원치 않을 테니까.”
“에이. 세상이 그렇게 순수할 리 없지.”
내 말에 예하가 홱 돌아봤다.
기본 아바타의 AI가 방긋방긋 웃었지만, 하이바를 쓴 본체는 째려보는 게 분명했다.
“100명 죽이는 걸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리 없잖아! 어쩌다 나쁜 사람 한두 명만 존재할 걸. 내기해도 좋아.”
“터스키기 실험.”
“응?”
“미국 정부는 세금으로 고용한 보건의와 간호사, 일꾼들을 터스키기로 파견했어. 페니실린이라는 치료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치료하지 않고, 병세와 증상을 관찰하고 기록했어. 모든 보고서는 매년 정부로 올라갔고, 수많은 사람이 보고서를 봤어. 그런데도 자국민을 죽이는 생체실험이 40년 동안이나 지속된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해?”
“......”
“사람은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한다. 실험에 참가한 의사, 간호사들이 폭로한다면 사건은 멈추겠지. 하지만, 폭로한 개인은 어떻게 될까? 정부의 암살자에게 죽지 않을까? 터스키기에서 일하다가 다른 곳으로 갔으면 언론사를 만나서 조용히 폭로해도 될까? 그런다고 무슨 이익이 있지? 일단 일자리를 잃잖아. 게다가 그 생체실험을 한 죽음의 의사임이 밝혀지는 거잖아. 일자리를 잃고, 비난을 받게 돼. 그래서 잘못된 걸 알면서도 평생 침묵하며 현상유지를 하는 거야.”
“그래도... 그건 너무......”
“사회 전체로 보면 말도 안 되지.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선 침묵하는 게 이득이야. 적어도 나빠지지는 않지. 정부 관료의 입장? 세금 집행 내역과 세세한 실험과정과 결과가 공중보건국을 통해 정부로 올라가. 수많은 관료가 자료를 열람했어. 그걸 본 공무원이 그만두자고 호소하지 않은 이유는? 짤리기 싫으니까. 윗사람들에게 큰 뜻이 있겠지. 어차피 흑인은 사람이 아닌걸. 서로 책임지지 않으려 미루고 미루다가 40년이나 지속된 거야. 어차피 사회를 만드는 건 개인의 선택들이야.”
“오빤... 너무 사람을 비관적으로 보는 거 같아.”
“복종 실험. 버튼을 누르면 죽을 걸 알면서도 65%가 450V 버튼을 눌렀어.
사람은.
시키면.
해.
이것 또한 사람의 본성이야. 시키면 하고, 뻔한 죄악을 보면서도 대다수는 눈을 감아. 폭로한다고 이득이 없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아.”
“그......”
“한국에 있었던 수많은 비리들. 내가 어떻게 뿌리 뽑았지?”
“...... 현상금.”
“맞아. 난 하나의 선택지를 더 준거야. 폭로하면 네가 직업을 잃는 게 아니라, 엄청난 상금을 받는다. 선택지가 추가되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지?”
“...... 고발했지. 철저히. 증거까지 모아서.”
“그게 세상의 시스템이야.”
예하가 입을 아오아오 벌리며 할 말을 찾다가 한참 만에 소리를 냈다.
서로의 대화는 나란히 앉은 현실의 귀로 들어온다.
“그래도... 너무 염세적이야. 오빠.”
“중국 공산당원은 머저리라서 저러는 걸까? 북한은? 영국인은 학살자의 피를 타고나서 그렇게 학살했을까? 현대 프랑스와 미국인은 민주주의의 피를 갖고 태어나서 자유롭게 사는 걸까?
아니야. 태어나보니 그 나라였던 거야.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져 있고 주어진 선택지 중에 최선의 선택을 고르다보니 그렇게 살게 된 거야. 시스템을 이겨내고 버그를 심고 프로그램 자체를 고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
“오빠... 세상을 너무 삭막하게 보지 마.”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 그냥... 시스템이 그러하다면 시스템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을 뿐이야.”
“힝... 나도 그런 선택을 하겠지?”
“아니... 넌 내가 좋아하잖아. 넌 올바른 선택을 했을 거야. 얼굴보다 마음이 예뻐서 좋아하는 거야.”
“어? 어... 헤헤... 에... 오빠.”
고장 났나?
옆자리의 예하가 안겨왔다.
뭉클한 감동이 가슴에 닿았다.
“예하야, 활 멈췄다.”
“조용히 하세요.”
“넵.”
잠시 안고 있던 예하가 컨트롤러를 다시 잡고 활을 쐈다.
“선택지를 늘려주기. 사람들에게 침묵과 복종이 살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빙빙 언니가 하는 일.”
예하가 중얼거렸다.
“당장 이 자리에서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저들은 서로 신분이 밝혀져 있고, 윗선의 지시로 움직이니까. 하지만 독재자에 대한 충성이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반응하게 돼. 터스키기 의사들처럼 침묵하는 게 대다수일지라도 일부는 양심의 선택을 하게 되지. 매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사람마다 성향이 달라서 조금씩 다른 결과가 나오니까. 대놓고 분신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증거를 모으며 조용한 싸움을 하는 사람도 생겨날 거야.
한국 시민이 이구만에게 학살당하면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아 끝내 이구만을 몰아낸 것처럼 이들도 해낼 수 있어. 핀빙빙도 그걸 원해서 이런 싸움을 하는 거고.”
“계속 싸우다보면 현실의 공산당이 무너질 수 있겠네?”
“마밇러삐나빠따이. 조장하실 분. 누군가 해야 하지만 아무도 총대매기 싫어하는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을 기다리며 미묘한 시선을 교환하는 일. 그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렴풋이 대다수가 변화를 원한다는 걸 알게 되면 불현듯 혁명이 일어나고 공산당이 무너지겠지.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야.”
“아... 위대한 싸움을 하고 있었구나. 생각보다 훨씬. 빙빙 언니는 대단해. 아니 잠깐. 잠깐. 오빤 그걸 다 생각해서 판을 깐 거야? 몇 년 전에? 처음 설계할 때부터 익명성을 그렇게 강조했잖아.”
아니, 돈 벌려고 게임 개발 시켰는데. 나 아니었어도 나올 게임이었어. 일부러 유성주를 영입했잖아.
“당연하지.”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익명의 공간. 메신저와 커뮤니티. 게임까지. 과거 같으면 공산당의 정보통제로 절대 알려지지 않을 정보를 마음껏 퍼트릴 수 있는 플랫폼. 야동이나 금지된 영상이 퍼지기도 하지만, 감춰진 진실을 퍼트리는 게 더 중요하니까. 세계를 바꿀 플랫폼을 만들었어. 탈중앙화라는 건 국가의 압박마저도 벗어난다는 뜻이니까.”
“오빠... 멋져.”
현실 예하가 또 안겨왔다.
좋네.
기분 좋다.
보람을 느낀다.
“결국 공산당은 무너지겠지?”
“언젠가는.”
“독재자들도?”
“세상의 수많은 비리가 익명을 통해 알려지고 있어. 국가마다 독재자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고, 그들이 진실을 퍼트리며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어.”
“북한도 무너지겠지?”
“...... 거긴 안 돼.”
“왜? 그 사람들도 우리 민족이잖아. 우리민족은 훌륭하다며? 오빠가 진실의 판을 깔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시위하고 목숨걸고 저항해 자유를 쟁취했잖아.”
“일단 북한은... 스마트폰이 없어.”
“아.”
북한은 답이 없다.
못 살아도 너무 못 살아서 진실을 전할 창구가 없다.
남수단이나 라이베리아처럼 답 없는 나라들이 정말 많다.
“그럼 평생 고통스럽게 사는 거야?”
“미래 대학이 해야지. 학교마다 중고 스마트폰 하나씩이라도 공급해 교육하고, 진실을 알리고. 그러다보면 사람들이 깨닫고 스스로 일어나게 되겠지. 북한은... 모르겠다.”
“...어. 오빠는... 지구 평화를 위해 움직였구나. 오빠 혼자...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야?”
살다보니 그렇게 됐네.
적당히 돈 벌어서 모든 미녀를 만나며 방탕하게 살려고 했는데.
“나야 방향만 잡을 뿐이지. 미래 대학 만들어, 한마디로 끝났잖아. 일은 형들이 다 했지. 어차피 지금 가진 돈도 혼자 쓰려면 평생 다 못 쓰는데. 돈이 너무 많아서 그래.”
“멋져요......”
예하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활을 들었다.
전선은 성벽을 넘어 정주시 내부로 들어갔다.
성벽이 뚫렸으니 이제 금방이다.
민주화 세력이 다시 정저우를 점령해 진실을 알리고, 하나 둘 진실을 깨달은 이가 늘어나겠지.
한 걸음 씩 걸어간다.
진실의 문이 열리면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바뀐다.
다음날부터 예하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더 열성적으로 음악실에 처박혀 노래를 만드는 데 전념을 다했다.
“예하야. 쉬면서 해. 같이 자자.”
“어? 어... 조금만 더.”
예하의 눈에 굳은 집념 같은 게 보인다.
예하의 마음이 뭔지는 알 것 같다.
나처럼, 자신도 족적을 남기고 싶은 거겠지.
말릴 수 없다.
덕분에 매우 심심해졌다.
“다 죽여 버리겠다!”
빨갱이나 죽여야지.
- 작가의말
100% 망상입니다.
매우 거시적으로 추측한 혁명과정입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위대한 드라마가 쓰여져 있겠죠
뿌려둔 복선을 모아서 정리하는 건...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네요... 역시 글은 처음 구상할때가 제일 재밌어
후원너무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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