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울타리2
“예 그렇게 정리해 주세요.”
메타버스 회의실에서 채인수와 만났다.
“니 재산이 워낙 많아서 정리하는 데 1년은 걸릴 거다. 그보다 계속 거기 있을 거냐?”
“글쎄요. 아무도 모르게 빼낼 수 있어요? 공개적으로 나가면 괜히 암살당할 거 같은데. 억류당하거나.”
“어...렵지. 그냥 거기 있어라. 미래블록 마스터코드 지운 다음이면 나올 수 있겠지.”
“네. 지하실에 5개월 더 있을게요.”
베네수엘라엔 좀 더 있기로 했다.
미국이 포기했고 베네수엘라도 수색을 멈췄지만, 공항으로 가는 길에 잡혀서 억류될 확률이 99.9%다.
답도 없이 무너진 베네수엘라를 생각하면 내 바지를 잡고 늘어져 돈 달라고 찡찡대거나 내 다리를 잘라가며 돈 내놓으라고 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기획실에선 기부 방식에 대해 준비하고 있고... 그리고...”
그간 대화하지 못했던 사업의 방향에 대해 한창 말하고 있는데 채인수가 말을 멈췄다.
“그만. 나중에 말하자.”
“네? 지금 중요한...”
“네 부모님 오셨다. 바로 연결할게.”
메타버스 회의실에 어머니 아버지가 등장했다.
“아들.”
“동욱아.”
두 분이 눈물을 흘리며 다가오신다.
미리 말씀드리긴 했지만, 이래저래 걱정이 많으셨겠지.
불효했다.
“엄마!”
부모님의 눈물을 보니 가슴이 북받친다.
마주 달려가서 쒱! 헛손질.
서로를 통과하고 나니 민망해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버님, 어머님. 인사드릴게요.”
옆에 있던 예하가 조신이 무릎절을 하길래 나란히 가서 절을 했다.
부모님은 어깨를 두드리고 싶은데 닿지 않아서 갑갑한 모습으로 괜찮다 괜찮다 했다.
채인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접속을 해제했다.
사방에 카메라가 달린 메타버스 룸을 나오니 사장실에 불청객이 앉아있었다.
긴 더벅머리. 빨간 체크무늬 남방. 오래 입어서 색상이 바랜 청바지. 흰 양말. 삼선 슬리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8위에 뽑힌 미래IT 사장 김상철 되시겠다.
채인수는 김상철의 떡지고 기름진 머리카락을 보며 말했다.
“왜 왔냐?”
소파에 눕듯이 앉아 졸고 있던 김상철이 눈을 떴다.
“어, 형.”
“안 바쁘냐?”
“하아~ 일단 테스트 끝. 발표할게, 방송 잡아줘.”
세 살 차이 나는 둘은 일하다보니 말을 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거 지금 하게? 괜히 동욱이한테 적을 더 만드는 거 아닌가 싶은데.”
“아 몰라. 끝낼래. 지겨워 정말. 동욱이 재산 기부 한다메. 그 전에 발표해서 이것도 상장해 팔아버리자고. 1조원은 벌겠지.”
1조원이 어디 애 이름도 아니고.
하지만 미래그룹에서 1조원은 작은 돈이다.
“그래. 내일 방송 잡아줄게.”
“내일? 당장 하면 안 돼?”
“야. 방송엔 스케쥴이라는 게 있는 거야. 그보다 너 머리부터 잘라. 자르기 싫으면 감기라도 해. 아놔 가장 섹시한 30대 7위가 너라는 게 말이 돼? 그냥 돈 많아서 뽑힌 새끼가.”
더벅머리 아래 곱상한 얼굴이 반전매력을 줘서 김상철은 가장 섹시한 30대 일반인으로 뽑혔다.
미래메신저와 미래블록을 거의 혼자 만들었다는 데 가산점이 컸겠지만.
“왜 꼬장이야? 형은 순위에 없어서 그래? 에휴. 그러게 자꾸 예하랑 나란히 방송 나가더라니.”
같은 30대인 채인수는 명단에 없었다.
“이새끼. 방송 찍는다. 당장 찍어주마! 어이~ 김비서~”
“나갈게. 사우나 가서 한숨 자고 올게. 내일 방송 준비해줘.”
김상철이 나가자 거대한 사장실이 조용해졌다.
“그걸 발표하면... 사법기관 전체가 적이 될 텐데... 뭐 원래도 많았으니까 뭐.”
채인수는 사법기관이 적이 되는 것 따위 가볍게 생각하게 되었다.
“반가워요. 모닥불이에요.”
“안녕하세요. 민지민지에요. 철밥통이냐고요? 맞아요. 윤회장님과 제시와의 인연으로 아직까지 잘 붙어있어요. 회장님 사랑해요!”
“쓸데없는 답글 따위 무시하자고. 초대손님 모실게요. 전 세계 30대 일반인 중 가장 섹시한 인물 7위인 분입니다. 올해 서른살, 미혼인 김상철 미래IT 사장입니다.”
“와아아아.”
짝짝짝짝.
둘이 떠드는 곳에 김상철이 등장했다.
여자 둘 사이에 김상철이 앉아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AI변호사를 출시합니다. 접속 방법은...”
“잠깐. 잠깐만요. 대본 순서가 있잖아요. 순서 좀.”
“응 그런 게 있었어? 아 이거. 안녕하세요. 김상철입니다.”
-ㅋㅋㅋㅋㅋ
-시트콤이다 시트콤
-저형은 진짜야
-형 냄비에 시계 넣은 적 있어?
-섹시하다~ 옵빠야(덜렁덜렁)
“네, 그런데요. 이번에 미래IT에서 새로운 앱을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에이씨 대본 따라가야 하는 거야? 벌써 말했잖아.”
-ㅋㅋㅋㅋㅋ 모닥불 화남
-닥불아! 물어! 물어!
-현타 왔네 닥불이
-ㅋㅋㅋㅋ
대본을 던진 모닥불 대신 민지민지가 말을 받았다.
“그럼 이건 변호사를 대신하는 건가요? AI변호사가 대신 재판해주고 대신 변론해주고 막 그런 거예요?”
“아니. 대본이...... 귀찮으니까 그냥 하자. 미래 커뮤니티에서 AI변호사 설치하고 검색해봐. 일단 한 번 써보자.”
송출 화면의 절반이 휴대폰 화면으로 바뀌었다.
김상철은 AI변호사 앱을 켜고 준비된 문장을 입력했다.
“횡단보도 적색신호에 길을 건너다가 청신호를 받아 달려오는 차에 부딪쳐 전치 7주의 진단을 받음. 이렇게 자기가 겪은 일을 적으면......”
휴대폰 속 AI변호사가 결과값을 뽑았다.
“90%이상 일치하는 사건이 과거 8000번 정도 있었어. 이런 식으로 AI변호사는 과거에 있었던 비슷한 사건을 키워드로 검색해서 가져와 주는 앱이야. 보면 100% 운전자 과실 판결이 1100건 정도, 100% 보행자 과실이 700건 정도 있었네. 나머지는 서로 과실비율 분담했고. 왜 이렇게 나오냐면 키워드가 같아도 사건마다 날씨나 조건, 위치, 변호사 로비능력, 판사성향에 따라 결과가 조금씩 달라지거든. 그러니 자기가 사고를 당했다면 키워드로 검색한 후 하나하나 살펴봐야지.”
“에이... 그럼 그냥 라인지식인 같은 거네요. 제가 사고를 당했는데 도와주세요, 이러면 답변 달리고 그러는 거.”
“비슷하지. 대신 이건 모든 판례를 입력했으니까 좀 더 자세하게 찾을 수 있어.”
“모두 입력했다고요?”
“어. 이게 짜증났다니까. 아니 사람들은 AI를 무슨 인간의 두뇌로 생각해. AI가 학습하면 IQ가 올라가서 스스로 생각해서 결론을 도출하는 줄 알아. AI는 그런 게 아니야. AI는 아직도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지 못해. 그저 수천억가지 정보를 입력받으면 그중에서 가장 많은 선택을 따라가는 것 뿐이야. 즉, 졸라 데이터를 입력하는 게 일의 99.99999%야. 아 짜증나. 이거 이제 업데이트 안한다.”
갑자기 김상철이 폭주했지만 채팅창은 평화로웠다.
그 전에도 곧잘 이랬으니까.
-ㅋㅋㅋㅋ 저형 또 저런다
-ㅋㅋ 저 빨간남방 왜 이렇게 거슬리지
-ㄴ잘어울리는데? 저게 저형 아이덴티티지
-머리는 자른듯
-천재의 영역인가 나도 저런데ㅋㅋㅋ
-ㄴㄴ 702호환자 약먹을 시간입니다
“결국 조언 받는 정도로 끝이겠네요.”
“그래도 법원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검색하는 게 좋을 거야. 예를 들어 담당검사가 정해지면 그 이름을 입력해.”
김상철이 입력창에 김기춘이라고 입력했다.
“봐봐. 학생간첩조작사건, 재벌 무죄 선언, 유서조작 사건. 등등등 이 사람이 과거에 맡은 사건들과 결과가 뜨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사건을 맡은 검사가 어떤 성향인 지 알 수 있게 돼. 비슷하게 판사의 이름도 검색할 수 있어.”
여성의 말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는 판사.
여성을 혐오하는 판사.
부자를 사랑하는 판사.
공정한 판사.
그들의 재판기록이 AI에 뜬다.
“이렇게 검사와 판사의 성향을 알 수 있고, 그들을 교체해주길 요청하는 건 국민의 권리야. 이거 도움이 되겠지?”
“그러겠네요. 사건에 말려들면 일단은 찾아봐야겠네요.”
“범죄에 휘말리거나 민사에 휘말리면 사람은 피가 마르거든. 변호사에게 물어보려 해도 시간당 50만원을 부르니 쉽게 묻기 힘들고. 그래서 필요한 거야. 일단 검색해보면 비슷한 사건들이 한두 개씩은 나오니까. 비슷한 사건들의 처리과정과 결과를 보고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좋은 거네요? 당연히 무료죠?”
“어. 광고로 운영비 충당. 변호사 알선도 하고. 꽤 벌긴 벌 거야. 대신 꾸준히 판례를 업데이트 해야 하긴 한데 이건 내가 할 게 아니니 됐고.”
“좋은 거네요. 참 잘했어요.”
모닥불이 김상철을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다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오빠! 머리 안 감았죠!”
“머리? 어제 사우나 가서 감았는데.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만져줬고.”
“으으으. 생방송 하는 사람이 머리도...”
욕설을 퍼붓기 직전인 모닥불의 마이크를 민지민지가 빼앗았다.
“자 다음 뉴스. AI변호사 말고도 또 개발한 거 없나요?”
별거 아닌 것처럼 발표를 끝내고 넘어갔다.
-있어. AI변리사. 이것도 똑같아. 아이디어를 넣으면 AI가 찾아줘. 대신 이건 정답률이 낮아.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다양하게 검색해봐야 할 거야.
-네. 그렇구나. 별거 아니네요. 또 있어요?
-응. AI세무사. 장부를 넣으면 세금을 정리해줘. 이건 수수료 받고 할 거고 보안을 위해서...
줄줄이 쏟아진다.
김상철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나란히 누워서 보고 있던 예하가 하품을 했다.
“후엥... 뭐야.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했잖아. 흐앙 졸려.”
한국에서 발표하는 시간은 베네수엘라에선 새벽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챙겨볼 정도의 재미는 없었다.
“이 오빠가 오래 준비한 거란다.”
“푸흡 느끼해. 으으으.”
너 잠 깨우려고 그런 거였어.
난 느끼한 사람이 아니야.
“AI를 오래 준비한 거야?”
“아니. 변리사 변호사 세무사를 없애는 걸 준비한 거지.”
“어? 어...... 음... 어려운 얘기 할 거 같네. 잘게. 나 자요. 코오오.”
적응이 빠르군. 4년 걸렸나.
“울타리 철폐. 직업을 갖는 순간 부자가 되는 특권. 그걸 없애는 거지. 앞으로 변호사는 잘하는 사람만 부자가 되는 직업이 되고, 변리사도 똑같고, 세무사도 똑같아 지지. AI는 특권직업의 울타리를 없애게 될 거야.”
“후아암. 그럼 그 사람들은 오빠를 미워하게 되지 않을까? 돈 잘 벌던 사람들이 앞으로는 못 살게 되잖아.”
“미워하겠지.”
“그냥 돈 잘 벌게 놔두면 안 돼?”
“내가 아니어도 AI 기술이 발전하고 있으니 금방 생겨나. 어차피 생겨날 거 내가 미리 방향을 잡고 움직인 거지.”
“그래도 원한을 사는 건 싫은데. 그 사람들이 뭘 잘못했기에 그래?”
“사법고시 10년 도전. 변리사 시험에 합격하면 인생이 바뀐다. 세무사는 언제든 취직할 수 있다. 이거 좀 이상하잖아.”
“그게 뭐...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해서 좁은 문을 통과한 거잖아.”
“그 좁은 문이 울타리지. 울타리 안에서의 부유함. 그건 나쁜 거야.”
“하암. 모르겠어. 그냥... 졸려.”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게 있어. 그런데 각각 협회가 필요보다 훨씬 적은 숫자로 제한해 버렸지. 변호사 변리사는 큰 돈을 벌고, 대신 이용자는 큰 돈을 내야 하는 구조가 완성되었어.
이러면 안 돼. 매년 일정 숫자만 뽑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운전면허 시험처럼 중간 이상 점수 모두를 통과시킨다면 세상이 공평해지겠지. 변호사끼리 경쟁해서 서비스가 좋아지고, 이용자는 더 저렴하게 변호사의 도움을 받게 되겠지.”
“어... 이용자 기준인거야?”
“자본주의는 그렇게 발전했으니까. 서로 서비스 경쟁을 해서 가격을 낮추고 더 좋은 물건을 내놓지. 성공한 이는 큰 돈을 벌고, 실패한 이는 다른 직업을 찾고, 사람들은 더 저렴하고 좋은 물건을 이용할 수 있어. 반면에 공산주의는 그게 아니라 직업의 숫자를 정해. 마치 변호사 변리사처럼 말이야. 변호사 변리사가 위대해서 큰 돈을 버는 게 아니야. 전국의 치킨집 면허를 1년에 990명만 통과시키면 어떻게 될까?”
“부자가 되겠지.”
“택시기사를 1년에 900명만 허가하면? 미용사 자격증을 1년에 900명만 허가하면?”
“부자... 변호사 변리사가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거야?”
“그래. 꼭 필요한 직업인데 자격증을 쥐똥만큼 풀어서 많이 버는 거지. 자본주의 경쟁사회는 자격을 제한해선 안 돼.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 모두에게 자격증을 주고 그들끼리 경쟁해야 사회 전체가 발전하고 서비스 가격도 저렴해지겠지.”
“어... 그래서 특권이구나. AI가 그 특권을 없애는 거고. 오빠는 그들을 보호하던 울타리를 걷어찬 거고.”
“그래.”
“잘했어. 착하다. 착해.”
예하가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멈췄다.
잠들었네.
관심도 없겠지. 대개 그렇겠지. 쳇. 몇 년을 준비한 건데.
괜히 심술나서 예하의 가슴을 만졌더니 깨어난다.
요염하게 눈을 뜨고 날 올려다 보는 예하.
안 할 거야. 삐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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