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 화폐 시스템이 붕괴된 베네수엘라
옆나라 가이아나 출신인 카를로스가 웃으며 말했다.
“물가가 너무 올라서 현재 베네수엘라 화폐의 가치가 wow의 골드 가치 절반이라고 하더라고요.”
“와우요? 게임?”
“네. 게임 화폐요. 몬스터 잡아서 나오는 골드를 모아서 어떻게 잘 팔아보면 어쩌다 쌀 한줌이라도 살 수 있으니 아무 의미 없는 베네수엘라 화폐보다 가치 있다는 거죠.”
그거 예하가 태어날 때쯤 나온 게임 아닌가.
아직도 그 게임이 있다는 게 놀랍고, 그 게임의 골드보다 현실 화폐의 가치가 낮은 게 더 놀랍다.
신이 났는지 카를로스가 말을 이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해서 외국으로 이민가려 해도 국가가 마비되어 이민 수속이 안 되어서 교수나 기술자마저도 난민으로 탈출하는 실정입니다. 석유 매장량 세계 1위인데 석유 뽑아낼 힘조차 없어서 트럭마저 멈춰섰습니다.”
석유 매장량 1위 국가에 쓸 기름이 없는 위엄.
“아니 그럼 식료품은 어떻게 구해요?”
“달러로 삽니다.”
“다 같이 굶는다면서요?”
“지방에 농장은 있죠. 목장도 존재하고요. 생산하되 도시로 옮길 트럭이 없고 돈이 없으니 거기서 썩는 거고. 나라의 화폐가 의미 없어지니 흥정 자체가 안 되는 거죠.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달러를 조금만 주면 지방에 가서 돼지를 몰아오고 쌀을 짊어지고 옵니다. 그 과정에서 습격을 받기도 합니다.”
“뭐... 갱단이나 그런 것들인가요? 확실히 이정도면 무법천지가 되었겠네요.”
“아뇨. 갱단도 전부 망했습니다.”
“네?”
“총알 살 돈도 없고, 돈이 있어도 총알 만드는 공장이 멈췄죠. 총알이 있어도 뺏을 게 없습니다. 다 같이 굶고 있는데 뭘 뺏겠습니까?”
갱단마저 해체시키는 빈곤의 위엄.
“하... 참.”
“그저 배고픈 이들이 모여 습격하는 겁니다. 그들은 사람도 잡아먹는 다더군요. 습격한다고 해봤자 뺏을 게 몸뚱아리뿐이니. 매달 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수 배가 죽고 있을 겁니다. 통계를 낼 사람조차 없으니 원.”
“여기도 위험한 거 아닌가요?”
“나름 부촌입니다. 이곳만큼은 정부군이 철저히 지켜주죠. 생필품은 군인들이 콜롬비아나 브라질 화폐로 밀수해오죠.”
“그건 다행이네요.”
국가 기능의 정지.
그 폐해는 전 국민의 기아로 이어졌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참혹한 줄은 몰랐다.
그런데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말하는 카를로스의 어투가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내 표정을 눈치 챘는지 카를로스가 정색하며 말했다.
“전 바로 옆나라 가이아나 출신입니다. 베네수엘라가 석유파동으로 돈방석에 앉을 때 할아버지가 베네수엘라에 와서 일을 하다가 돌아가셨고, 2000년 대 초반 2차로 돈방석에 앉을 때 아버지가 베네수엘라에 와서 일을 하다 돌아가셨죠.”
“에... 왜요?”
“알다시피 베네수엘라는 석유 생산이 국가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50년 전, 1970년대 유가파동이 일어나자 베네수엘라는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단체로 미국에 원정쇼핑을 가서 백화점을 털어오고, 전 세계 모든 슈퍼카가 이곳 카르카슈에 가득 찼죠. 나라에서 돈을 뿌리니 국민 누구도 일을 하지 않았고, 나라를 지탱하는 필수적인 일들은 근처 가이아나나 콜롬비아 사람들이 와서 했습니다. 그 후 유가가 안정되며 일을 멈춘 베네수엘라는 큰 혼란에 빠졌고, 그 와중에 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 중국이 성장하며 유가가 오르자 같은 일이 반복된 거죠. 지금의 베네수엘라? 쌤통입니다. 석유 가격이 올랐다고 아무도 일을 하지 않았으니 지금의 결과를 불러온 거죠.”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네.
“3년 전 가이아나에 유전이 발견되어 우리도 이제 모두 부자가 될 겁니다. 이제는 베네수엘라에서 가이아나로 넘어오려 하지만 과거의 교훈이 있으니 막고 있죠. 베네수엘라는 베짱이처럼 평생 놀았던 벌을 받는 겁니다.”
“고국에 유전이요? 그러면 이런 위험한 일 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요?”
“마지막 일입니다. 이번 일을 끝으로 은퇴하려고 합니다.”
라틴계, 혹은 남미 원주민과의 혼혈인 메스티소들은 다들 마인드가 비슷한 것 같다.
적당히 벌고 은퇴계획을 세우기.
70세까지 회사에서 안 짤리고 일하는 게 인생 목표인 사람들보단 멋져 보인다.
“마지막이면... 잘 부탁드립니다. 힘든 건 바로 말해 주세요.”
“네. 네.”
적당히 인사를 마치려고 하는데 예하가 끼어들었다.
“오빠... 베네수엘라 사람들... 구할 수 없을까?”
굶어죽는 사람들을?
이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카를로스를 바라보자 도윤정이 통역을 해줬다.
“에... 우선 미국의 제제를 뚫어야 합니다. 현재 미국은 베네수엘라를 북한과 같은 수준으로 제제하고 있습니다.”
“네? 그럼 사람들이 굶어죽는 게 미국 때문인 건가요? 그건 너무, 너무 못 됐잖아요.”
예하가 진심으로 분노해서 소리쳤다.
예하의 손을 잡아 진정시켜줬다.
카를로스가 변명했다.
“10년 전, 유가가 한창 비쌀 때, 그리고 세일가스가 나오기 전, 미국은 석유를 수입해야 했고, 베네수엘라에 멱살을 잡힌 채 끌려 다녔습니다. 당시 베네수엘라는 반미 동맹을 형성해 맹주로 활동했고 외국자본 몰수, 외국 기업 몰수 등을 행했습니다. 이것도 미국 때문인가요?”
“에? 에... 몰라요. 그래도 사람이 굶어죽는 것은.”
“당시 베네수엘라는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전국을 농장과 목장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벌었죠. 그래서 일을 했습니까? 그 많은 돈은 사치품과 바꿨고, 전 국민이 아무도 일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든 생필품을 수입해 뿌렸고, 결국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미국 때문인가요?”
“에...”
“반미 동맹을 만들어 전쟁을 걸었으면 이겨야죠. 경제 전쟁을 걸었으면 패할 경우에 대비를 해야죠. 게다가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반미 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에서 먼저 미국과 단교를 선언했습니다. 이게 문제라면 국민들이 대통령을 바꿔야죠. 한국은 대통령을 탄핵해 바꾸던데 이 나라 사람들은 저항도 하지 않고 굶어죽고 있습니다. 이걸 미국이 책임져야 합니까?”
“에... 몰라요. 정치 몰라. 그래도... 사람들이 굶어죽는 건 구해줘야죠. 굶어죽잖아요.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예하는 복잡한 정세를 말하지 않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게 일반적인 마인드겠지. 착하고 순수한 선의.
정치적 이유로 사람이 굶어죽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이게 일반인의 평범한 시각일 것이다.
용병이었던 카를로스나 회귀한 내가 닳고 닳은 거고.
카를로스는 예하의 마지막 말에 할 말이 없는 지 나를 바라봤다.
예하도 비 맞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날 올려봤다.
예하의 손을 꼭 잡아줬다.
“내가 해결책이 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순 있을 거야.”
“에? 어떻게?”
“글쎄... 변수가 너무 많아서 확정할 순 없어. 그래도 1년 후에는 지금보다는 좋아질 거야.”
“어... 기다릴게.”
“그리고 베네수엘라만의 문제가 아니야. 네가 남한이라는 안정된 품에서만 살아서 그렇지 세계에는 베네수엘라 수준의 인세지옥이 수없이 많이 있어.”
예하와 나의 대화를 도사장이 영어로 통역해 주고 있었다.
은쿠베가 끼어들었다.
“내 고국이 그렇죠.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전쟁을 끝내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자국의 다른 민족을 학살했죠.”
“미얀마도 그랬네요.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얀마의 수장이 자국의 다른 민족을 학살했네요.”
뒷말은 도사장이 이어서 했다.
노벨평화상을 받고 자국민을 학살하는 위엄.
예하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이 입을 떡 벌렸다.
“이래서 사람은 세계를 공부해야 해. ‘세계의 역사와 현재.’ 중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넣어야 해.”
“에? 오빠 나 무식하다고 놀리는 거야? 지금은 진짜 기분 상하는 말이다.”
계속 놀라던 예하가 진심으로 삐진듯이 말했다.
달래야한다.
자칫하면 지하실 생활이 독방감옥생활처럼 지겨워질 수도 있다.
“어째서인지 방송은 타국의 좋은 점만 말해. 볼리비아 여행기를 보면 세상에 그렇게 멋진 나라가 없어. 인도 여행기를 봐도 너무너무 멋져서 꼭 가보고 싶어지게 되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 인도만 해도 수없이 많은 실종자가 생기고, 가끔 밝혀지는 사건만 봐도 말도 안 되게 처참하지. 볼리비아는... 에휴. 브라질 여행, 아르메니아 여행. 모두 너무 위험해.
언론에는 그런 게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야. 무조건 좋은 것만 보여주고 무조건 환상적으로 포장해. 그래선 안 돼. 세계는 아직 2차대전 수준의 위험으로 가득해. 소말리아는 30년 넘게 정부 자체가 없어서 도시마다 군벌이 제멋대로 학살하며 살고, 콩고민주공화국은 수백 개 부족이 서로 살인 납치경쟁을 벌이고 있어.
서유럽의 범죄율도 끔찍하고 미국만 해도 살인사건 검거율이 60%야. 게다가 수많은 실종자를 살해된 것으로 치면 검거율이 절반 이하야. 네가 미국 가서 죽어도 살인범조차 못 찾을 확률이 절반 이상이란 뜻이야.”
내 말에 예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국 사람들은 뉴스에 간혹 나오는 아동살해, 혹은 끔찍한 강간 뉴스에 헬조선이라며 욕하지. 하지만 세계를 조금만 알게 되어도 한국이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지 알 수 있어. 그런 뉴스가 메인에 뜨는 건 그보다 끔찍한 사건이 없다는 뜻이고, 그렇게 알려지는 사건들이 점점 더 강력범죄를 줄이고 있어. 즉, 계속 좋아지고 있다는 뜻이야. 우리는 세계를 알아야해. 세계가 아직 얼마나 미개한지, 얼마나 끔찍한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면 한국을 사랑하게 돼.”
“어... 어. 나도 한국 싫어하지 않아.”
“베네수엘라. 슬프지. 그런데 베네수엘라 수준으로 못 사는 나라가 정말 많아. 바로 위 북한은 더 끔찍하잖아. 돕는 거? 도울 수야 있지. 그런데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되면 내가 돕는 건 의미가 없어. 북한에 쌀 퍼줄까? 베네수엘라에 쌀 퍼줄까? 그래봐야 독재자를 도울 뿐 국민 자체에게 가지 않게 돼.”
“도움 받을 준비가 되어야 하는구나.”
예하가 정답을 말했다.
“어. 한국은 그래서 위대한 나라야. 이승만이 독재하자 높은 교육을 받은 시민이 들고 일어났고, 사격하라는 지시를 받은 군인들마저 망설였어. 덕분에 해방되었지. 곧장 군사독재자가 생겼지만 시위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총 맞아 죽었고, 또 다른 독재자 이구만은 남쪽 시민들을 학살했지만, 그럼에도 목숨 건 시위가 멈추지 않았지.
덕분에 현재 남당과 북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꽤나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되었어. 이건 세계에 유래 없는 위대한 일이야. 정치인이 매일 싸워서 짜증나? 그게 아니야. 정말 위험한 것은 일본처럼 한개 정당이 꾸준히 집권하는 거야. 지금 한국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아니지만, 세계의 정치에 비교하면 한 발 앞서있어.”
“그... 말 어디 가서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엄청난 욕설이 날아올 거야.”
“그래서 너한테만 하잖아.”
옆에서 도윤정이 우리의 대화를 꾸준히 통역하고 있지만, 모른 척 하자.
“아니면 미국의 정치가 가장 옳게 보여?
“그렇지 않을까?”
- 작가의말
한국을 그토록 욕했지만 사실은 국뽕소설이었다?
따...딱히 한국을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정치적으로 중립이지만... 요즘 댓글이 적게 달려서 우울해요. 댓글보는 낙에 사는데.
그냥 정치댓글 달면서 싸워주세요
참고로 정치충 분들은 서로 상대당의 비리를 찾아내고 들추는 훌륭한 민주주의 투사이며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나만 물지 않으면 돼) 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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