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신문2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과수원 한쪽에 친척들이 모여 있다.
엄마의 남동생인 외삼촌 가족과 엄마의 언니인 이모가족이 소담소담 대화하며 복숭아를 따고 있다.
돈 보다는 모여서 함께 한다는 데 의의가 더 크다.
“왔냐?”
“여어. 왔어.”
“기특한 조카 왔네.”
이모네 아들과 딸, 외삼촌네 딸까지 셋 다 초딩인데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 다행이다.
걔들 전투력은 솔직히 감당하기 힘들다.
“이쪽은 제 여자친구.”
“안녕하세요. 이예하라고 합니다.”
“아이고. 예뻐라.”
“어쩜 이렇게 고울까?”
“그... 진행자 그분 맞지? 세상에.”
열렬한 환영에 예하가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몸을 배배꼬다가 엄마의 전지가위를 뺏어들고 복숭아 따기에 나섰다.
구름처럼 웨이브 진 머리가 자꾸 나뭇가지에 걸리고, 허리를 계속 접고 있어서 고생하면서도 열심히 한다.
“너보다 낫네.”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이모부와 모여 남자들만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에이. 그래도 제가 더 잘하죠.”
“외발 수레 끌면서 빌빌대는 놈이.”
과일을 따서 모으면 외발수레로 과수원 밖으로 옮긴다.
막내인 아빠 몫이었는데 이제 내 몫이다.
100kg 넘을법한 외발 수레를 질퍽질퍽한 땅 위로 끌면 잘 구르지도 않고 균형 잡기도 힘들어서 땀이 뻘뻘 난다.
운동......
“아버지, 이제 돈도 많은데 쉬어도 되잖아요.”
“돈 때문에 하냐? 사는 방식인거지.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하고 땀도 흘리고 막걸리 한잔하고, 저녁에 수육 먹고. 그게 인생이지.”
아버지는 큰 사람이다.
44살까지 살았던 나와 인생의 길이도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나보다 훨씬 큰 사람이다.
난 미래에서 왔을 뿐이다.
“그리고 전년보다 훨씬 편하다. 돈을 아끼지 않고 일꾼을 세배로 불렀어. 그래서 우리도 슬렁슬렁 하고 있지.”
저쪽에서 외삼촌이 용역들에게 소리치며 일을 가르치고 있다.
매일 천만 원씩 주는데 이게 펑펑쓰는 건가.
라인 따라 네 명씩 조를 나눠 복숭아를 따고 트럭으로 옮기고 있는데 용역아저씨들이 제대로 못해서인지 계속 설명하고 있다.
“벌레. 이건 따로. 오케? 줄기 다치면 안 돼. 물렁한 것 따로 모아. 따로. 오케?”
일단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언뜻 보기에도 대부분 동남아 사람 같고, 서양계와 아프리카계도 보인다.
“저 사람들 한국말 몰라요?”
“단어 정도는 아는 것 같더라. 시범 몇 번 보여주면 곧잘 해. 어이~ 쉬었다 하자. 어이 처남~ 쉬었다 혀.”
“그래요. 아저씨들도 쉬어요.”
쉬라는 말은 잘 알아듣는다.
수다를 떨며 복숭아를 한가득 딴 여성팀이 돗자리로 가 앉았다.
우리도 그리로 가고 외삼촌도 왔다.
“어이쿠 다시 반가워요.”
“가수라고 했지? 우리가 아는 노래야?”
그 노래......
오늘 나 취해도 돼?
덕후삼촌들을 위한 노랜데.
예하마저도 지금만큼은 자기 노래를 부끄러워했다.
32위까지 등수가 올랐음에도.
“어머니 제가 노래 한곡 할까요?”
막걸리가 한 순배 돌고 예하가 일어나서 숟가락 마이크를 잡았다.
“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 지~ 난 아직 몰라~ 난 정말 몰라~ 가슴만 두근두근~ 하이~”
간드러진 트로트에 다들 어깨춤을 추신다.
처음 만난 아들, 조카의 여자친구만 아니었다면 다들 일어서서 엉덩이 춤을 출 기세.
따로 막걸리와 참을 받았던 용역아저씨들도 둘러싸고 박수를 치고 있다.
위아 더 원.
예하의 노래는 인종 언어의 장벽도 초월한다.
와아아아~
예하의 노래가 끝나자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예하는 공손하게 인사드리고 자리에 앉아 막걸리를 받아 마시고, 엄마들의 수다를 받아줬다.
“참하네.”
“네. 예쁜 것도 좋은 데 성격이 더 좋아요.”
내 여친자랑!
“그래. 잘 해줘라.”
아빠는 딱히 잔소리를 하지 않으신다.
정말 큰 잘못을 하면 후두려 패고 말지 작은 일엔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막걸리가 한 순배 더 돌고, 남은 작업량을 계산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겠네요. 6시는 넘어야 끝나겠네요.”
과수원 주인 외삼촌의 말에 아빠가 노동자들을 봤다.
각자 언어가 다른 이들이 어색한 한국어로 두런두런 대화하며 예하를 훔쳐본다.
예하에게 시선이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지. 봐주마.
그들이 미친 짓을 할 까봐 경호원 서넛이 근처에 와 있으니 위험은 없다.
아빠가 그들에게 턱짓을 했다.
“저치들은 갈 거 아냐?”
“다섯 시 땡 치면 가겠죠. 에휴. 손이 안 맞아 늦는 건데 조금만 더 해주면 오죽 좋을까.”
내가 끼어들었다.
“돈 더 주면 되잖아요.”
“한 시간만 더 해도 반나절 치를 더 줘야 해. 그러느니 내일 몇 명만 따로 부르지 뭐.”
아. 노가다 법칙이구나.
잠깐 옛 기억을 떠올렸다가 용역들을 봤다.
“한국 사람은 없어요?”
“없어. 시골은 외노자 없으면 일이 안 돼. 아예.”
“예...... 음. 혹시 저 사람들 다 불체자예요?”
“모르겠다.”
그렇지.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용역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키고 용역회사에 돈을 준다.
그렇기에 저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 받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불법체류자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사람을 관리하는 명목으로 용역회사는 임금의 10%를 떼 가는 것이고.
“그런데 왜 왔어? 과수일 싫어했잖아.”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구나.
회귀한 시간을 빼면, 군대와 대학 등을 제하고, 공부해야 했던 고등학교 때를 제하니 중학교 때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했던 게 마지막이다.
“그냥요. 얼굴도 보고 운동할 겸 나왔어요. 예하가 인사하고 싶다고 한 것도 있고.”
“그래. 아들아, 잘 왔다. 돈이야 가장 중요하지만 돈 말고도 중요한 게 많지.”
아빠는 그렇게 말하면서 예하를 보고 흐믓하게 웃었다.
아들이 예쁜 여친 데려와서 행복한가 보다.
다시 일이 시작되었다.
엄마들은 예하에게 말 걸고 좀 쉬라고 말리느라 진행이 느렸다.
예하는 엄마들 일하는데 혼자 쉴 수 없으니 더 열심히 했고, 원체 운동신경이 좋고 체력도 좋은 애라 온갖 칭찬을 받았다.
나는 일 못한다고 계속 혼났고.
아... 운동...
4시에 작업이 끝났다.
어차피 오늘 끝내긴 틀렸고, 예하라는 특별초대손님도 있으니 일찍 접은 것이다.
다국적 용역아저씨들이 활짝 웃으며 빛의 속도로 뒷정리를 했고, 집에 도착하니 다섯시가 되지 않았다.
다들 각자 집에 가서 씻고 우리 집에 모였다.
원래 거실이 가장 큰 집이었고, 예하 때문이기도 하고.
한 시간 먼저 빠진 엄마들이 준비한 수육이 금방 나왔다.
주인공 예하는 공손하게 대답하면서 노래시키면 노래하고, 담금주 주면 넙죽넙죽 받아먹어서 금방 얼굴이 빨개졌다.
취하면 애교가 많아지는지라 예하는 더 큰 사랑을 받았다.
예하가 실수하면 어쩌나 조마조마 보면서 외삼촌을 불렀다.
“삼촌.”
“어.”
“신문사 좀 맡아주면 안 돼요?”
“신문사?”
“네. 저희가 언론사 하나 필요한데, 대표가 필요해요. 아무나 해도 되지만 아무한테나 맡길 수가 없어서.”
“직접 하면 되잖아.”
“저희가 직접 언론사를 가지면 문제가 많아요. 규제도 많아지고.”
기자는 취재자료나 엠바고 등을 통해 사전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사전정보를 팔거나 주식에 넣으면 문제가 된다.
물론 기자들 모두 사전정보로 이득을 얻지만, 이건 주공 직원이 땅투기로 돈을 버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적이 많은 우리가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래그룹이 언론사를 소유하면 자산운용사의 엄청난 수익이 기자의 부정정보를 이용한 것으로 왜곡될 수 있다.
우리의 적은 분명 그걸 물어뜯을 것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언론사를 소유해선 안 된다.
“나도 네 외삼촌이잖아.”
“법적으로는 문제없어요. 눈 가리고 아웅이죠. 우리가 지분투자만 하지 않으면 돼요. 삼촌이 삼촌 돈으로 설립하는 걸 막을 수 없죠.”
“돈은? 어차피 네 돈이잖아.”
“코인 보내드릴게요. 그거 출금하고 담보로 해서 차리면 되요.”
“음. 감투만 쓰면 되는 거지? 형님이 하실래요?”
“아니다. 난 수상레저로 충분해.”
이모부는 청평 근처에 수상레저샵을 갖고 있다.
수상스키와 웨이크보드, 바나나보트등을 태워주고 샵 근처 캠핑장을 같이 운영한다.
원래부터 여유 있는 삶이었고, 딱히 욕심 없으신 분이다.
그래서 외삼촌한테 부탁한 거고.
“그래. 도와줄게. 큰 형님이 백제병원 이사장 하는 것처럼 이름만 올리면 되는 거지?”
“네. 직접 뭔가 하고 싶으면 하셔도 되고요.”
“에휴. 내가 뭘 안다고. 그냥 과수원이나 하면서 유유자적 살고 싶다. 조카가 돈도 많이 줬으니 더 편하게 살아야지.”
다들 유유자적한 삶을 좋아하신다.
엄마네 특성인가.
아빠네도 그러한데.
“그럼 부탁해요. 사람 보낼게요.”
“그래. 맡겨라. 그런데 언론사는 왜 필요해?”
“후후후. 싸우려고요. 기자 천명 고용해서 우리를 까는 언론사들 다 조져버리려고요.”
나의 파이터 기질은 회귀 덕에 온 것 같다.
“아. 너희 기사가 많이 나오긴 하더라. 뉴스에도 매일 등장하고. 좀 심하다 싶긴 했는데.”
“이제 공식적으로 싸우려고요.”
국민의 알 권리.
내가 천배 충족시켜 드릴게요.
기자와 기레기를 분간하게 해 줄게요.
또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예하가 취한 기색을 보이자 더 이상 술을 권하지 않았고, 술자리 중간에 꿀물까지 타다주는 등 아주 어화둥둥 업어주고 있다.
곁에 앉아 살짝 풀린 눈으로 헤실헤실 웃는 예하는 잘 먹는 게 보기 좋다는 말에 열심히 먹고 있고.
예하 많이 긴장했구나.
“그 노동자들은 얼마 받아요?”
외삼촌이 대답했다.
“16만원.”
“많이 주는구나.”
“모르지. 용역회사에서 얼마나 뗄 지는.”
“10% 아니에요?”
“외노자들은 불쌍한 애들이야. 밉보여서 일 끊기면 당장 먹고 살게 없어져. 알아서 더 바친다고 하더라. 거기다 비자가 연장되지 않아 불체자가 되면 반 이상 뺏기지. 딱 밥값만 손에 쥘 걸. 그래도 그걸 아끼고 아껴서 고향에 송금하는데 불체자는 은행을 이용할 수 없으니 또 똥 떼이고 송금하지. 에휴. 잘해줘야 해.”
외삼촌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요... 불체자가 몽땅 쫓겨나면 시골에 문제될 게 많을까요?”
“당연히 큰일나지. 당장 일할 사람이 없어. 양평이야 좀 젊은 축이지만, 조금만 시골로 가면 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밖에 없어. 모판 하나 못 옮기는 분들이 어떻게 농사를 짓나. 농촌보다 어촌이 타격이 더 크겠다. 배 타는 게 워낙 힘들어야지. 당장 그쪽은 전부 불체자일걸.”
“흐음. 그렇군요. 알겠어요.”
예하가 꾸벅꾸벅 조는 관계로 엄마와 아빠가 빨리 데려다주라 성화를 부리셨다.
덕분에 해가 지기도 전에 나왔다.
이틀 후 매출 40위권 신문사를 구매했다.
발행부수 0부인 인터넷 언론이다.
기자가 기레기 소리를 듣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돈 벌려고 직업을 선택했고, 기자라는 직분으로 최대한 돈을 벌려고 무리수를 두니 기레기다.
그렇기에 오히려 좋다.
돈만 많이 주면 말을 잘 듣는다.
언론고시를 통과한 기레기 쉰 명을 고용했고, 흥신소 직원 200여명을 공식적인 정보원으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지불하는 돈은 불법행위의 대가로 비춰질 수 있었는데 이제는 반 합법적인 언론의 정보원이 된 것이다.
외삼촌이 대표이사로 취임한 후 미래를 공격하던 언론사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와 별개로 다른 임무를 줬다.
-전국의 불체자 현황과 사는 곳 등을 조사해 주세요.
특집기사가 줄지어 나갈 것이다.
- 작가의말
저도 읽을땐... 근면성실열혈 주인공이 좋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니까 최대한 나태하려고요... 운동 해야지 마음만 먹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우리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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