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스키장
“구리 생산량 세계 1위, 리튬 생산량 세계 2위. 수출액의 절반을 구리관련제품이 차지하죠. 한국이 상섬공화국이라면 칠레는 구리공화국인 거죠. 그런데 구리는 칠레 북쪽 끝 지방에서 나옵니다. 수출의 효과 대부분이 북부에 몰린다는 거죠. 겉으로 보기엔 국민소득도 높고 잘 사는 것 같지만, 오히려 빈부격차는 더 큽니다. 한국은 상위 10퍼 소득이 하위 10퍼 소득의 아홉 배거든요. 한국도 심한데 칠레는 열아홉 배예요. 이 나라는 중산층이 없어요. 광산주만 떼돈을 벌고, 일반 시민들은 구리가 끌어올린 살인적인 물가에 시달립니다.
전 세계 교육비 1위가 어딘지 아십니까?”
이 아저씨 마냥 케세라세라가 아닌 것 같다.
채인수 형이 아무나 지사장을 뽑지 않았을 테고 똑똑하니까 지사장에 앉힌 거겠지.
교육비 1위?
문맥상 칠레 같지만, 세상에 함정 없는 문제는 없다.
“교육비 1위라면 당삼 한국이죠! 교육열은 한국이 세계 최고.”
가오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정 미구엘이 실망했다.
“한국은 2위입니다. 칠레가 1위죠.”
안 끼어들기 잘했다.
닥똥과 힘을 합쳐 가오리를 놀렸다.
멍청이, 머저리, 문맥도 파악 못하는 놈.
“그리고 칠레의 경우는 더 안 좋아요. 한국은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비가 높아 2위인데, 칠레는 공교육 자체가 비싸요. 이게 다 민영화 때문이에요. 전기 민영화, 수도 민영화, 교육 민영화, 대중교통 민영화 등등 모든 걸 민영화 했어요. 그래서 보통 사람이 살기 참 힘든 나라예요. 일반 노동자가 한 달에 60만 원 버는데 살인적인 물가 때문에 그 돈이 전부 교통비나 식비 등으로 빠져나가죠. 물가가 한국과 비슷하고 공공요금은 한국보다 비싸요. 부자만 잘 사는 나라예요. 참 신기하죠? 땅만 파면 구리가 나오니 쉽게 떼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나라인데 전국민 대부분이 하루 끼니를 걱정하면서 살아요.”
정 미구엘이 씁쓸하게 말하며 지나가는 시위대를 봤다.
칠레.
관심 없는 나라였는데 그런 문제가 있었구나.
민영화.
세금.
복지.
극단적 자본주의로 모든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한 국가의 현실.
시위대는 남미 특유의 흥이 묻어있었다.
페스티벌 하듯 춤을 추며 행진하는데 몸사위가 애처롭다.
아 몰라.
한국에만 신경 쓸래.
한참 만에 통행이 재개되었고, 한 시간 가량을 달려 포르티요 스키장에 도착했다.
“겨울 스포츠 선수들은 여름에도 스키장에서 훈련을 해야겠죠? 남반구의 수많은 스키장 중 프로 선수가 가장 많이 찾는 곳이 포르티요 스키장입니다. 미국 대표팀의 전지훈련 장소도 여기로 고정되어 있죠. 포르티요 스키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 미구엘이 연극배우처럼 손을 어셔하며 익살스럽게 소개했다.
고지대 설원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온갖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낙원.
불과 하루 전 한국의 덥고 습한 초여름 공기에 시달린 걸 생각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을 방문했다.
호텔 리조트는 화려하고 깔끔하고 안전했다.
한 달 60만원을 버는 일반 국민은 방문할 수 없는 부자의 낙원.
사람들의 표정부터 여유롭고 인자하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물어볼 게 있으면 전화할게요.”
“예. 즐겁게 지내다가 가시길 바랍니다.”
미구엘 아저씨는 이제 일하러 간다.
월급 받으려면 일해야지.
대신 막내 급 가이드를 남겨줬다.
호텔 최상층 펜트하우스를 빌렸다.
방 다섯 개 욕실 세 개가 있는 룸으로 하루 숙박비는 400만 원 대.
대학엠티 온 기분으로 가오리 닥똥과 함께 쓰기로 했다.
“왔드아~ 우와 경치 봐.”
호텔 최고층에서 스키장이 보이는데 끝없는 설원과 슬로프, 계곡과 호수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나가자! 스키타자! 빨리빨리!”
가오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피곤해. 오늘은 쉬자.”
시차문제. 지금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새벽 4시다.
“그럼 술 마실까? 룸서비스 시킬까?”
“예하야. 어떡할래?”
“어? 어어.”
약 먹은 병아리처럼 꾸벅 졸던 예하가 멍하니 대답했다.
길영주씨 상태도 비슷하고.
“일단 자고나서 생각하자.”
예하의 손을 잡고 우리의 룸으로 들어갔다.
닥똥도 길영주에게 묻고는 길영주의 손을 잡고 자기네 방에 들어갔다.
넓고 넓은 거실엔 가오리 혼자 남겨졌다.
“...... 개새끼들.”
넓다.
“반갑습니다. 일일 강사를 맞게 된 도윤정입니다. 지금부터 모든 대답은 악 으로 통일합니다. 알겠습니까?”
“도팀장님......”
“어허. 도조교라 부르십니다. 악 으로 대답합니다. 알겠습니까?”
“... 악.”
스키를 처음 타보는 예하를 위해 강사를 부탁했더니 도팀장이 왔다.
경호팀 열 명이 주위에서 함께 타며 경호 겸 강습을 해 주기로 했다.
이를 위해 칠레에 함께 온 경호팀은 전부 스키나 보드 상급자로 꾸렸다.
“우선 낙법부터 배우겠습니다. 넘어질 줄 알아야 크게 다치지 않습니다. 자 보십시오.”
검도를 하다가 부상으로 은퇴한 도윤정은 다양한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수상 안전, 서핑, 트레이너, 경호 등 수 많은 자격증을 땄는데 그 모든 게 치열한 삶의 흔적 같아서 씁쓸하다.
먹고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겠지.
스키는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수업으로 한번 타봤다.
이후 군대 가고 20년을 살다가 회귀했으니까 거의 25년 전에 타봤다.
기억이 완전 리셋 됐다.
“이제 평지 걷기부터 해보죠. 자세는 이렇게.”
스키어를 위한 평지 슬로프도 있었다.
스케이트 타듯 V자로 밀며 가는데 굽이굽이 만나는 경치가 장관이다.
이 코스를 보기 위해 일부러 다 같이 스키를 탔다.
얼음 호수, 눈 산, 계곡 등 화려한 풍경이 전부 인생샷 각이다.
느긋하게 트레킹 하듯 전진하며 관광을 즐겼다.
“여기 여기. 저 여기서 사진 찍을래요.”
예하도 신나서 자꾸 멈춘다.
이동하다가 사진 찍고 다시 이동하다가 길영주와 사진 찍고.
기초 교육 할 때만 엄했던 도팀장은 가르치기가 끝나니 생글생글 웃으며 사진을 찍어줬다.
그러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고 경호에 신경 쓰고 있다.
김상철 피습사건 이후로 경호팀의 태도는 갓 자대배치 받은 신병 같다.
“평지 코스는 끝났는데 슬로프 타시겠습니까?”
“예~”
“그럼 지금부터 조교모드로 들어가겠습니다. 모든 대답은 악으로 통일합니다. 알겠습니까?”
“악.”
도팀장은 뭔가 역할 놀이를 즐기는 것 같다.
예하도 생글생글 웃으며 맞춰주고 있다.
제대로 된 강사가 붙어서 가르치니 금방 익숙해졌다.
고작 대여섯번밖에 넘어지지 않고 중급 슬로프를 내려올 수 있게 되었다.
예하는 고작 한번 넘어졌고.
확실히 운동신경이 좋다.
“흐아. 힘들다. 점심 먹고 하죠.”
“네.”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경호팀은 오후조로 교대해 주위 테이블에 앉았다.
“술은? 맥주만 간단히 먹을까?”
우리 셋 다 술을 좋아한다.
“술 마시면 스키타기 위험하지 않아?”
“아 맞네. 저녁에 마셔야겠다. 여기 정말 좋지 않냐?”
“어. 가슴이 뻥 뚫린다.”
경치를 보며 스테이크를 먹는데 마냥 기분이 좋다.
앞으로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렇게 돈이나 펑펑 쓰며 살아야지.
“어? 오빠. 저기 수영장 있다. 야외수영장이야. 히익. 안 추운가?”
호텔 앞에 야외 수영장이 있다.
사람도 꽤 들어가 있다.
“김이 올라오잖아. 따뜻한 물이겠지. 노천 온천 느낌인가.”
“우와. 우와아. 저기 들어가면 기분 짱 좋겠다.”
“그래? 오후엔 스키타지 말고 온천이나 갈까? 사실 좀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도 돼? 리프트권도 끊었는데.”
“얼마나 한다고. 즐기러 왔으니까 하고 싶은 거 하자. 스키는 내일 또 타고.”
“오빠도 들어가고 싶어? 어라 수영복 있어야 하네.”
“사지 뭐. 너희도 같이 갈래?”
“어? 어.”
닥똥이 덥썩 물었는데 길영주씨가 등짝을 때렸다.
“아 왜?”
소근 소근.
하면서 예하를 보는데 왜 인지 알 것 같다.
고글과 방한모로 꽁꽁 싸맨 예하와 함께 있는 건 괜찮아도, 수영복 차림으로 예하와 함께 공개된 수영장에 가는 건 어떤 여자라도 싫겠지.
예하가 잘못했네.
가오리도 스키나 타면서 여자를 꼬신다고 했고, 둘만 내려갔다.
수영복을 사서 갈아입고 야외로 나갔다.
오우야.
예하는 수수한 디자인의 원피스 수영복 위에 긴 바람막이를 걸쳤는데 그럼에도 여신이다.
휘이익.
어떤 놈이 휘파람을 분다.
다음엔 프라이빗 수영장을 예약해야지.
경호팀이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경호팀 열 명은 수영복을 입고, 경호가 아닌 척 두 걸음 떨어져 스크럼을 짜고 있지만, 그래도 그 안의 예하에게 시선이 쏟아진다.
“으으. 추워. 빨리 들어가자.”
예하가 팔짱을 끼며 말하는데 입김이 하얗게 나온다.
한겨울의 야외수영장이라.
여러 개의 풀 중 사람이 가장 적은 곳에 들어갔다.
뜨끈한 물이 잠깐 사이 언 몸을 녹였다.
“아. 좋다.”
몸은 뜨거운데 머리만 차가우니 왠지 현자가 된 것 같다.
여기 있으니 왠지 냉철하고 현명해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뭔가 신기해.”
목까지 담근 예하가 바싹 붙어 앉으며 말했다.
“한잔 할까? 저 사람들 뭔가 마시는데?”
“어? 그럴까?”
물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앞에 쟁반을 띄우고 맥주나 알 수 없는 음료를 마시고 있다.
뜨거운 물에서 술 마시면 위험한데.
그래도 마시고 싶다.
신선놀음.
딱 그 느낌이다.
둘 다 스페인어를 모르기에 따라온 가이드에게 부탁했다.
“술 좀 시켜 주세요.”
“그렇다면 피스코 사워를 드시죠. 칠레의 국민소주 같은 술입니다.”
“좋아요. 주문해 주세요.”
얼마 후 커다란 칵테일 잔 두개가 대야에 담겨 나왔다.
물 위에 대야를 동동 띄우고 한 모금씩 마셨다.
거품이 잔뜩 들어있는 달달한 와인 맛.
일부러 따뜻하게 데워서 나오는 듯 했다.
“하아. 맛있다.”
예하가 술 맛있다고 하는 일 거의 없는데 그 말이 나올 정도로 확실히 좋다.
맛도 좋고, 목 넘김도 좋고, 따뜻한 술이 추운 얼굴을 확 뎁혀준다.
“뭔가. 너무 엄청난 사치를 부리는 거 같아.”
“그러게.”
이렇게만 살자.
백제 무너뜨렸으니 얌전히 살지 뭐.
물속으로 손을 잡고 한 모금씩 마시며 먼 산을 봤다.
눈 쌓인 산에서 스키와 보드를 탄 사람들이 저마다 즐겁게 내려오고 있다.
여유 있는 땅이다.
“휘익~ 치키티타~”
이런 시비만 없다면 계속 있고 싶은데.
돌아보니 취해서 얼굴이 빨개진 남자 셋이 다가오려다가 경호원에게 막혀 있다.
수영복만 입은 경호원들의 다리가 빨간 게 눈에 보인다.
뒤쪽도 지켜야 해서 물 밖에 있었구나.
미안해지네.
“예하야 그만 갈까? 경호원 형들 엄청 고생한다.”
“어? 어어. 그래.”
나중에 온천을 통째로 빌려서 쉬어야겠다.
예하가 벗어놓은 긴 바람막이를 걸치며 일어서자 그놈들이 또 휘파람을 분다.
근육질 몸에 금발 양아치 새끼들.
딱 붙는 삼각팬티만 입었는데 그 속에 자부심 부릴 만한 권총이 들어 있다.
나도 한국인 중에선 밀리지 않는데. 제길.
예하를 가리키며 뭐라고 떠드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가이드의 얼굴이 빨개졌다.
“뭐라는 거예요?”
“일단 인종차별에... 돈 얘기를 하면서 데려오라고 소리칩니다.”
별거 아니네.
“주팀장님 녹음 했죠?”
“예.”
“고소해요. 최대한도로. 좆 되게 만드세요.”
“예.”
폰로이어는 참 좋단 말이지.
돌발 상황도 전부 녹음할 수 있단 말이야.
금발 백인 양아치들보다 훨씬 몸이 좋은 우리 경호팀이 막아주는 사이에 수영장을 나왔고 따뜻한 물에 샤워 후 옷을 입었다.
“시간이 애매하네.”
“그러게. 다시 스키 타러 가 볼까?”
“어......”
통역을 위해 대기하던 가이드가 끼어들었다.
“오늘 갑작스런 운동으로 근육이 놀랐을 겁니다. 내일 전신에 알 베길 텐데 오늘 마사지를 받으시면 내일 편할 겁니다.”
“오. 좋네요.”
호텔에 마사지룸도 있었다.
예하와 나란히 누워서 최고급 마사지를 받았다.
확실히 프로의 손길은 다르다.
시간당 단돈 2만원에 제대로 된 테라피 마사지를 받았다.
노곤노곤 몸을 풀고 올라가 다 같이 술을 마셨다.
가오리 닥똥과 끝없는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유쾌하게 술을 마시고, 분위기에 적응한 예하와 길영주씨가 조금씩 적응해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방에 들어갔다.
육중한 방문을 닫고 예하를 불렀다.
“예하야!”
크게 불러도 예하가 안 온다.
전화했다.
-왜 오빠? 방에 있는 거 아니야? 왜 전화를.
“큰일났어. 빨리 와봐. 빨리.”
-어? 어어.
예하가 뛰어왔다.
“왜 무슨 일이야?”
일단 문을 닫고 잠갔다.
그러고 키스.
“힉. 밖에 오빠 친구들.”
“방금 내가 소리쳐 불렀거든. 들렸어?”
“아니. 전혀 몰랐는데.”
“안 들리지? 방음 시험해본 거야. 괜찮겠지?”
“어? 그래도...... 안 되는데...”
예하야 너 표정관리 실패했어.
표정이 음흉해.
다시 키스.
방음테스트 통과.
몰랐는데 잠시 후부터 가오리 혼자 술 마셨다고 하더라.
- 작가의말
가오리 혼자 솔로인 이유를 고르시오
1. 말빨이 너무 좋고 유머가 넘쳐서
2. 얼굴이 까맣게 타서
3. 양평에 살아서
4. 못 생겨서
2018년 칠레에서 실제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피켓도 등장했는데 당연히 스페인어였고요
앞 장의 구리포올은 안내하는 아저씨가 영어와 한글을 섞은 유머였어요.
다들 스페인어를 모르니 그렇게 소개... 너무 진지한 댓글에 제가 죄스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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