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백제대학병원2
이동하면서 백제병원에 대해 읽었다.
병상수 2015개, 정직원 142명, 고용인 1259명.
의사는 291명 등등등
매출 9201억, 순이익 78억. 등등등
개요를 읽는데 채인수가 부연설명을 했다.
“의사는 정교수만 정직원이야. 평생고용이 보장되는 건 교수뿐이고, 이마저도 이직이 잦지. 순이익은 아마 최대한 축소돼 있을 거야. 니가 사는 옥수동 아파트가 회사 사택인 것처럼 웬만하면 법인 지출로 만들어 순이익을 줄였을 거야. 비자금도 많이 만들었을 테고.”
“흠.”
생각보다 정직원의 비율이 낮다.
각 과의 과장급이나 되야 정직원이고 나머지는 거의 다 계약직이다.
병원임에도 의료계 인원은 정직원이 거의 없다.
간호사나 조무사 등등은 거의 다 계약직이고, 청소업체나 병원식 등은 아예 외부업체다.
이 바닥은 원래 이런가.
기업 개요를 살피는 와중에 백제병원에 도착했다.
일산과 인근 서울인구를 감당하는 거대한 대학병원.
입구부터 본관까지 거리가 꽤 길다.
“공원이 크네요.”
“지을 땐 시골이었으니까.”
땅값 많이 올랐겠네.
“환자가 걸어오기 힘들겠어요. 할머니라면 정문에서 30분 걸리겠네.”
“그런 얘기였군. 뭐 여러가지 뜻이 있겠지. 차탈 돈 없는 거지는 오지마라 라던가.”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넓은 공원을 지나 본관에 도착했다.
거대하고 세련된 건물이 있고, 한쪽엔 출입이 편리한 응급실이 있다.
본관 뒤쪽으론 여러 개의 건물이 건물 간 유리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겉보기엔 제대로 차려진 건물이다.
“티나지 않게 조용히 가보죠. 연락은 안 했죠?”
“안했지.”
본관에서 제법 떨어진 주차장에 내려 걸어갔다.
채인수와 예하 셋만 걸었고, 캐쥬얼 복장의 경호원들은 일행이 아닌 듯 적당히 떨어져 저들끼리 수다를 떨며 따라오고 있다.
“오늘 끝나고 뭐할까?”
“클럽? 홍대갈까?”
“난 강남역 쪽이 좋던데. 수진이네도 부르자.”
“좋다좋다.”
경호팀 누나들아.
비밀 경호를 위해 수다 떠는 척 하는 거 맞지?
슬쩍 돌아보다 눈이 마주쳤는데 주팀장님은 ‘뭘봐요? 별꼴이야! 흥.’ 표정을 지었다.
연기 진짜 잘하네.
... 연기 아닌가.
본관 정문에 들어섰다.
기사에는 미래그룹이 의사를 죽인 병원, 천하에 못돼 처먹은 병원으로 묘사됐는데 본관에서 그런 분위기는 전혀 못 느끼겠다.
아픈 사람이 많고, 돕는 사람도 많다.
대기표를 받아들고 접수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음.”
“뭘 보고 싶은 거야?”
채인수가 귓속말을 했다.
“글쎄요. 진짜모습?”
“......”
“예하랑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한 바퀴 돌아볼게요.”
“어. 나도 조용히 돌아보지 뭐.”
채인수와 헤어졌다.
뒤따르던 경호팀도 자연히 나눠졌다.
오늘 방송이 없는 예하는 날 따라 트레이닝복을 입고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 썼기에 둘이 손잡고 다녀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자취하는 대학생 커플처럼 보인다.
아픈 사람들을 지나치고, 줄서서 기다리는 환자들을 지나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간호사를 지나치며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오빠. vip실은 못 가겠지?”
“그러지 않을까? 아무나 들락날락하면 vip실이 아니지.”
“움.”
예하는 뿌우하면서도 병실이나 시설을 열심히 둘러봤다.
현재 엄마가 입원중인 부평의 병원과 비교하는 중이겠지.
백제가 무너졌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똑같이 근무 중이다.
대후가 무너져도 소속 근로자들은 모기업 없이 수십년간 열심히 일하고 일부는 흑자를 내듯이 백제 또한 근로자는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북당 대통령이 남당 대통령으로 바뀌어도 일반인의 일상생활은 똑같은 것처럼, 백제그룹 이사장이 미래그룹 이사장으로 바뀌어도 월급 받는 고용인들은 똑같이 열심히 일한다.
똑같이 피곤하고, 똑같이 힘들게 일한다.
“다들 표정이 죽었어. 힘든가봐.”
“너희 엄마 병원의 사람들도 이럴걸.”
“그런가. 병원일이 힘든 건 어쩔 수 없나봐.”
“글쎄.”
외래진료가 주를 이루는 본관은 수많은 방문객으로 돗떼기 시장 같았다.
건물 사이에 지어진 유리복도를 지나자 입원병동이 나왔고 분위기가 확 바꼈다.
병원 특유의 우울함이 침전된 공기.
목적 없이 구경 다녀도 누구하나 잡는 사람이 없다.
중환자실처럼 출입이 금지되는 곳은 아예 막혀있고.
“아니 왜 산재가 안 된단 말입니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문패를 보니 원무 3과라고 적혀있다.
원무과를 건물마다 따로 두나. 이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겠네.
“이게 어떻게 산잽니까?”
“병원에서 시킨 일하다 죽었는데 산재지 그럼 뭡니까?”
“남들 다 버티는 거 못 버텨서 죽었는데 이걸 어떻게 산재처리 합니까? 이 일로 줄줄이 징계 맞을 텐데 산재처리까지 해주라니요. 자살이 어떻게 산재가 되요? 자살을 산재로 해주면 다 자살하지. 함부로 산재처리하면 공단포인트 떨어져요.”
여기서도 본성이 나오네.
내 선에서 덮는 본성.
모든 회사는 직장 내 사고가 발생하면 돈을 더 쓰는 한이 있어도 덮으려 한다.
산재처리를 하면 국가기관에 보고가 되고, 그게 회사에 불이익이 되거나, 그런 거 없어도 상사로부터 갈굼 당할 수 있으니 가능한 한 돈으로 덮는 게 일반적이다.
원무과에선 주인이 바꼈든 말든, 원래 하던 대로 자기 직분에 충실한 거겠지.
잠시 대화를 듣고 있는데 간호사와 의사인 듯한 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면회 오셨습니까? 안내해 드릴게요.”
꺼져달라는 소리.
서너 걸음 물러서서 듣고 있으니 이번엔 대놓고 비켜달라고 한다.
“실례지만 안에 있는 의사선생님 이름 좀 알 수 있을까요?”
“왜 그러시죠? 기잡니까?”
“에.... 미래그룹 관계잡니다. 인수 때문에 왔습니다.”
“안 됩니다. 그거라면 병원장님과 말씀하시죠.”
쉽게 안 되네.
소신 있는 남자야.
“알겠습니다. 그럼 병원장실에서 저 의사선생님을 부르죠. 준비하세요.”
“에?”
“병원장이 호출하면 저 의사 선생님 곧장 오도록 데스크에 말해둬요.”
“네?”
무시하고 채인수한테 전화했다.
“인수형. 병원장실에서 만나죠.”
전화를 끊고 소신 있는 의사를 봤다.
“병원 인수 문제로 병원장실에 갈 건데 안내 좀 해주시겠습니까?”
“예? 아, 그게. 예.”
소신이 꺾였군.
소신 있던 의사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병원장실에 들어갔다.
병원과 연결되지 않은 독립된 5층 건물이 있는데 거기 5층을 원장과 이사들이 쓰고 있다.
잠시 기다리니 채인수가 왔고, 함께 들어갔다.
“어이쿠우 연락을 하고 오시지. 반갑습니다. 병원장 김학춘입니다.”
나이 지긋한 뚱보 아저씨가 90도 인사를 하고 두 손을 뻗어 채인수와 악수를 했다.
너무 굽신거리는데.
“반갑습니다. 채인수입니다. 이쪽은 사원들이고... 저 의사는... 모르겠군요.”
“예. 예. 반갑습니다. 핫. 미래 뉴스를 진행하시는 아나운서님이시군요. 하이구 반갑습니다아.”
하며 악수하는데 기분이 나쁘네.
감히 예하를 만져.
굽신거리며 손을 내미니 쳐내기도 뭐하고.
나한텐 악수제의를 안한다.
이시키가.
“예. 바쁘실 테니 본론부터 말하죠. 홍의사님 사건에 대해 조사한 것 좀 볼 수 있을까요?”
“별거 없습니다. 그저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떠난 것뿐입니다. 별 거 아닙죠.”
아무리 봐도 정치의사같다.
병원장 이력 좀 봐야겠네.
채인수에게 아까 엿들은 상황을 설명했다.
“적응하지 못했다라...... 거기 의사님 아까 원무과에서 소리치던 의사님 좀 데려오시겠어요?”
“네? 네.”
얼결에 따라온 젊은 의사는 채인수의 명령을 받고 빠릿빠릿하게 대답을 한 후 원장실을 나섰다.
병원장의 끝없는 변명과 잘 해결 될 거라는 대책 없는 희망론을 들었다.
비서인 듯한 분이 헤이즐럿향 원두커피를 내오고 예하와 향 좋다, 하며 마시니 젊은 의사 두명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신경외과 펠로우 정한영입니다.”
“저.. 저는 신경외과 레지던트 4년차 한적찬입니다.”
이름이 특이하네. 적찬.
다시 자기소개가 있은 후 채인수가 질문을 했다.
“정한영 의사님. 홍 의사님을 산재처리 해야 한다 했는데 자살도 산재가 됩니까? 일하다 죽은 거랑 좀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당시 홍레지는 100일 당직 중이었어요. 잠 잘 시간도 없고, 여의사가 거의 없는 외과 특성상 남자 틈에 끼어 잠깐 잠깐 눈 붙여야 했고, 특유의 태움으로 극한에 몰렸어요. 게다가 테이블 데스도 몇 번 경험하니 정신이 붕괴됐죠. 이걸 병원에서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집니까?”
정한영의 분노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단순한 회사 동료 사이가 아닌 것 같다.
잠깐 정한영이 하는 말을 듣다가 병원장을 봤다.
“산재처리하면 문제가 커지나요?”
일개 사원인 내가 말하자 병원장은 채인수의 눈치를 봤다.
채인수가 가만히 있으니 그제야 내 말에 대답했다.
“자살이면 개인문제로 끝나는데 산재로 올리면 병원의 문제가 됩니다. 당장 내년의 정부 보조금이 줄어들 수 있고, 가뜩이나 시끄러운 언론이 먹잇감 잡았다고 더욱 강하게 파고들 겁니다. 공단 포인트도 문제될 거고 의사협회에서도 싫어할 테고... 병원 이미지 등 여러모로 계산해보면 대충 100억 손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걸 개인 문제로 할 순 없어요! 정경이가 얼마나 긍정적인 애였는데 고작 두 달 사이 정신이 붕괴될 정도로 피폐해지게 만든 건 병원 책임이죠! 개인 문제가 아니에요!”
정한영이랑 홍정경 사이에 뭔가 있었구나.
평의사가 병원장에게 소리칠 정도면 옷 벗을 각오까지 되어 있겠지.
아니 연인이 자살한 곳이라면 당연히 그만두겠지.
“정 의사님.”
“후읍 후읍. 네.”
“개인 문제가 아니라 병원 문제라면 살인자도 있겠네요?”
“네?”
뭘 멍청하게 반문하세요.
“병원에서 괴롭혀서 자살했다면서요. 자살로 이끈 죄가 병원에 있다면 병원에서 괴롭힌 모든 이를 살인자로 엮어야죠. 그걸 바라는 거 아닌가요?”
“아.”
거기까지 생각 안한 거야?
“거기 그... 4년차 선생님.”
“넵!”
바싹 긴장하고 있던 레지던트 4년차 한적찬이 소리치듯 대답했다.
아깐 소신있는 남자였는데.
“제가 알기로 수련의들은 치프란 분이 관리한다고 했는데 누가 홍정경씨를 관리했죠?”
“제... 제가 치픕니다.”
“그럼 홍정경씨가 자살하게 된 원인 제공자네요.”
“아닙니다. 그건...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정의사님. 저 치프가 괴롭혀서 홍의사님이 죽은 게 맞죠? 산재처리하면 당연히 경찰에 신고 넣어서 자살로 내몬 이들을 감옥에 넣어야죠. 이걸 원하시는 거죠?”
“저는 그게 아니라... 병원의 근본 문제를 말하는 겁니다.”
의사 둘이 사색이 되어 횡설수설했다.
사람의 문제는 생각 안하고 마냥 병원 문제라고 떠든 거였나.
사람없이 법인이 살인할 수가 있나.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화를 잇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병원장에게 말했다.
“산재처리하면 손해가 100억이라 했죠? 돌아가신 분은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고, 100억 드리고 합의 봐요. 돈은 본사에서 지원할게요.”
“네? 백억씩이나요?”
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김학춘 병원장.
그럴 돈 있으면 나줘! 라고 얼굴에 쓰여 있다.
“가족에게 100억 주고 관리 실수를 사죄하고 합의하되 거부하면 돈은 드리지 말고 산재처리해요. 제대로 수사해보죠.”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꼭 합의 보겠습니다.”
“정리되면 다시 보죠. 형 우린 가요.”
자리에서 일어서자 예하와 채인수가 따라온다.
방문을 나가려다가 정신을 못 차리는 의사들을 봤다.
“두 분은 따라오세요.”
외과의사 둘을 데리고 나왔다.
본관1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넘쳐나는 활기찬 병원.
한 시간씩 기다리는 환자.
뛰어다니는 간호사.
피곤에 쩌든 의사.
환자를 위한 의자에 앉아 그들을 지켜봤다.
예하와 채인수는 말없이 옆에 앉았고, 따라오는 의사들은 뭘 해야 할 지 몰라 조용히 서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잔인할까. 똑똑해서 잔인한 걸까.”
병원은 참 잔인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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