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버블 붕괴2
“EU면 선진국의 모임 아니야? 이렇게 쉽게 무너진다고?”
예하가 오랜만에 먼저 의문을 표시했다.
기쁘다.
“유럽은 생각보다 약해. 유럽이 잘하는 산업이 뭐가 있을까?”
“어? 어...... 신기술?”
“의약품 빼면 굵직한 건 없어. 정작 신기술 대부분은 동아시아와 미국에서 나와.”
“그럼... 관광? 예술?”
“돈 안 되는 거네. 그거 말고 딱 떠오르는 게 없지?”
“그러네.”
“건축이나 토목 설계를 낙찰 받는 건 유럽이 앞서 있지만, 기술적으로 딱히 앞서 있지 않아. 백인 우월주의와 긴 세월동안 쌓아올린 이미지로 수주할 뿐이야. 초호화 가구와 초호화 유람선 같은 사치품들은 꽉 잡고 있지만, 이 또한 이미지 덕에 팔아치우는 거고. 실제 유럽을 부자로 만드는 건 원자재야. 주로 아프리카의 광산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캐낸 원자재의 지분 수익으로 유럽이 부유하게 살았지.
프랑스의 청년 실업률이 항상 30% 이상인 것처럼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다 보니 다들 일할 생각이 없고 그렇다보니 제조업 능력은 해마다 추락하지. 이게 근대화의 허상 뒤에 감춰진 유럽이야.”
“... 유럽 야캐요?”
“어. 게다가 유로화 때문에 더 시원하게 무너지고 있고.”
“유로화 때문에 무너진다고? 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해하기 어려울 텐데.
“예산안 갖고 정부 부처가 매년 싸운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
“응? 응. 국회의원 아저씨 멱살 잡는 거?”
“국가 각 부처는 매년 예산을 더 달라고 하지. 장관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예산을 많이 받아오는 일이고. 국방부는 예산 1000조를 원하고, 여가부도 예산 1000조를 원해. 필요하든 말든. 연말에 돈을 보도블럭 뒤집는 데 써버리는 한이 있어도 일단 많이 달라고 해.”
“우.... 이상한데? 같은 나라고 한 나라의 세금인데? 가장 중요한 곳에 먼저 써야 하는 거 아니야?”
“장관이나 공무원 입장에선 예산을 많이 받을수록 여러가지 사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니 정치적 입지도 굵어지고 뒷돈 챙길 건수도 많아지지. 그래서 모든 부처가 최대한 많은 돈을 원해. 각자 자기에게 최선의 선택을 한 거야.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그걸 찍어 누르면서 배분하는 거고.”
“어... 음. 알았어. 유럽은 장관들끼리 이러는 게 더 심한가보네.”
“한국은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예산을 정해주지. 그런데 EU는 국가 연합이잖아. 그들은 각국의 수장이 유로화를 더 찍어서 달라고 서로 짹짹대. 정부 위에 누가 있어? 없어. 교통정리를 할 권력이 없는 거야. 정부의 대표들이 모여 회담을 한다지만 평등한 입장에서 교통정리도 힘들지.”
“그래서 유럽에 빚이 많아진 거야?”
“양적완화가 사기라고 했지? 그리스 입장에서 보자. 화폐통합으로 그리스에 관광 오는 비용이 증가해서 관광객이 줄었어. 국민들의 불만이 대단해져. 그리스 총리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유로에 가서 드러누웠어. 우리 망했으니 돈 달라. 우리 무너지면 유로화 전체에 구멍 뚫린다, 돈 줘~ 빼애애액. 이랬어. 배째 라면서 드러누워서 진상부린 거지. 그리스는 이렇게 돈을 타내서 복지예산에 썼어. 그걸 본 주변국들은 어떻게 했을까?”
“어... 말리지 않았을까?”
“나란히 드러누워서 돈 달라고 빼액 거렸어.”
“풉. 아하하. 국가들이? 대통령들이?”
“응. 재밌지?”
“아니 그래도... 그게 빚이잖아. 결국 갚아야 하잖아.”
“말했잖아. 양적완화는 사기라고. 갚을 생각 없었다고. 지금 일본처럼 ‘없던 일도 하지 않을래?’를 시전하려고 했지. 그게 성공했다면 빚은 많을수록 좋겠지?”
“응? 왜?”
“유로화를 당겨 쓴 양은 국가마다 달라. 화폐통합으로 큰 타격을 받은 관광 위주 국가들이 많이 받았지. 그런데 무너지고 있는 지금 봐봐. 유로화가 무너지면 그 타격을 서로 다르게 받아?”
“어......”
내 말에 예하가 모니터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닌 거 같아. 동등하게 망한 거 같아.”
“그래. 유로화가 망하면 다 같이 똑같이 나락가.”
“...... 쓸 땐 우리가 많이 쓰는 게 좋지만 망하면 똑같이 망하니까 망하지 않으려고 내 빚까지 해결해 주겠지...... 이게 맞아?”
“그래. 항해에 비교해도 좋겠다. 배를 운전하는 데 각자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치자. 식량이 아슬아슬해. 그런데 키를 잡은 누군가가 밥 더 달라고 삐약거려. 걔를 버리면 배가 멈춰. 어쩔 수 없이 걔한테만 식량을 더 줬어. 이러면 주위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자기도 더 달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러면 안 되잖아. 항해 자체를 실패할 수도 있잖아.”
“정부 예산이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교통정리를 하지. 그런데 이 배에는 선장이 없어. 모두가 동등한 선원이야.”
“... 국가의 연합이 그런 뜻이구나. 결국 서로 식량 더 달라고 하다가 침몰하겠네.”
“응. 현재의 유럽연합이 딱 그 꼴이야.”
“이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패턴이고?”
“각자의 최선의 이익추구지. 대통령으로써, 국왕으로써 유로화를 최대한 가져와서 국민에게 뿌릴수록 인기가 올라가지. 하지만 유로화가 망하는 건 모두가 함께 짊어질 빚이니까 돈 잘 버는 독일이 어떻게든 하겠지... 이게 유럽 국가들의 마인드야.”
“하아... 그렇게 들으니 진짜 약해 보인다.”
“유럽 약해요.”
“어. 그러네. 엄청난 유로화 빚도 그렇고, 빚을 갚을 산업도 거의 없고...... 유럽이 약하다니......”
예하는 색안경을 벗은 도로시처럼 충격 받은 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야지. 늦었다.”
“어? 어.”
“오늘도 따로?”
“어... 미안 오빠. 며칠만 더......”
“그래. 편히 자.”
“엉. 잘자.”
예하가 자기 핸드폰과 손가방을 주섬주섬 챙겨서 방에 들어갔다.
자기 방에.
예하의 뒷모습을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혼자.
각방이라...
지하실에 각자의 방이 있지만, 따로 잘 줄은 정말 몰랐다.
예하와 사귀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따로 잔다.
일정 때문에 떨어진 적은 있어도 이렇게 한집에 있으면서 다른 침대를 쓴 적은 없는데.
혼자 누운 침대는 유난히 넓고, 차갑다.
문제는 왜 이런지 모른다는 것.
답답하다.
지하실에 갇혀 있어서 그런가?
해를 볼 수 없다는 게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나.
미국의 압박이 사라졌는데도 지하실에 남아서?
하지만 지금 나가면 암살당할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충분히 설명했는데. 예하도 납득했고.
혹시 돈 때문에?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예하도 돈 많잖아.
예하가 그럴 리 없잖아.
그래도 혹시. 설마.
돈 때문에 날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믿었는데.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선언하고, 그 말을 뒤집을 수 없게 된 이후 이러는 건......
밀당 인가?
이제 돈이 없으니 자기 말 잘 들으라고 조련하는 건가?
이제와서?
예하가 그 성격에?
설마......
온갖 부정적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난다.
시발 미국...... 시발 중국... 시발 한국...
잠이 안 온다.
침대가 유난히 쓸쓸하다.
엑스레이 찍듯 몸을 이리 저리 뉘여 고정시키다가 잠자는 걸 포기했다.
벌떡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도미노 유럽.]
암스테르담 제방에 구멍이 나면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긴다. 유럽은 그리스에서 시작된 구멍을 막지 못해 다 같이 침몰하는 중이다.
[껍데기만 남은 중국.]
중국인이 쓰는 모든 IT 소프트웨어가 탈중국했다. 이제는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상황. 중국이 이를 바로 잡으려면 중국 인민 전원의 IT기계를 수거해 북한처럼 폐쇄하는 수밖에 없다.
[열도침몰. 후지산이 폭발했다.]
차라리 후지산이 폭발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도쿄의 30평 아파트 가격이 8000만원까지 추락했다. 8000만원을 미래블록으로 바꿔 도쿄의 아파트를 사면 한국과 비슷한 인프라를 20분의 1 가격에 누릴 수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30평 아파트가 4000만원까지 폭락했는데 도쿄가 비슷한 가격까지 내려온 것이다.
모든 물가가 폭락한 덕에 도쿄에서 한 달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은 50만원이면 충분하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 돈이면 도쿄에서 네 달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외채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 폭락의 끝이 어디인지 모른다. 이정도로 추락했으면 멈춰야 할 텐데 여전히 떨어지고 있다. 돈을 들고 있는 이들도 더 싼 값에 사기 위해 돈을 풀지 않고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일본 멸망, 중국 멸망, 유럽 멸망.
이건 미래블록 때문인가?
아니다.
양적완화가 쌓아올린 버블이 터진 것뿐이다.
본래대로라면 중국과 미국이 서로 돈 찍어내며 싸워서 몇 년 더 버블을 키우다가 중국이 망한 순간 미국이 강력한 테이퍼링을 하면서 펼쳐진다.
전 세계 모든 화폐의 가치추락.
그리고 그 결과는?
[역대 최강 미국]
미국이 쇼핑에 나섰다. 미래블록과 연동되어 있는 미국은 현재 달러가치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반면 유럽 중국 일본이 일제히 폭락하면서 전 세계 모든 국가의 화폐가 가치를 상실했고, 이에 따라 부동산과 기업들의 가치가 최소 반 토막난 상황. 미국은 전 세계 모든 기업과 건물을 사들일 여력이 있다.
미국에 돈이 쏠린다.
양적완화를 모든 국가가 한다. 국가 간 환율을 맞추기 위해선 싫어도 돈을 찍어야 한다.
양작완화 버블이 쌓이고 그게 터지면 화폐의 가치가 폭락한다.
그런데 폭락의 정도가 다르다.
달러는 기준화폐.
다른 화폐들보다 가치하락이 적다.
한국의 원화가 100분의 1토막 날 때 달러는 1/2 토막 난다.
이 갭을 통해 미국은 돈을 번다.
양적완화로 돈을 벌고 양적완화가 무너져도 돈을 번다.
이게 기준화폐의 이점이다.
게다가 이 미래는 미래블록이 없는 암울한 미래.
달러말고는 어딘가 몸을 기댈 곳이 없다.
모든 국가가 달러를 구해야 하는 상황.
미국 자체가 IMF가 되어 수십 년간 전 세계의 알짜배기를 쏙쏙 뽑아 먹게 된다.
아 꼴 보기 싫어.
파괴하고 싶다.
파괴!
파괴!
피와 절망!
노트북에 마스터코드를 적었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구글. 일본의 70개 기업 쇼핑]
[애플, 대만의 폭스콘 인수]
뉴스가 줄줄이 뜬다.
미국기업들이 세계의 기업들을 사들이고 있다.
달러를 무기로 부정하게 돈을 번다.
개새끼들.
이 꼴을 보기 싫어 미래블록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 전 재산을 기부해야 했고.
그 결과 예하와 각방을 쓰게 됐고.
그랬는데도 쇼핑하고 있어?
감히.
개새끼들아.
딸깍!
죽어라!
우주파괴버튼을 눌렀다.
띠링. 띠링.
드드드드.
드르르륵.
......
..응? 어?
나 뭐한 거지?
- 작가의말
지구가 멸망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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