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칠레여행
6월 20일.
스키장 여행을 떠난다.
아침에 다들 무수골에 모였고 예하의 2호기, 24인승 버스를 타고 함께 떠났다.
“와아. 여름휴가다.”
들뜬 예하의 어깨가 들썩인다.
해외 스키장 방송은 괜히 위화감을 줄까봐 하지 않기로 했다.
즉, 예하는 순수하게 놀러가는 휴가다.
솔로 가오리는 특유의 웃긴 얼굴로 웃긴 말을 반복해 분위기를 띄웠다.
외각순환도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
곳곳에 공사현장이 보인다.
한국은 여전히 공사중이다.
높게 솟은 타워크레인이 저 멀리서도 공사장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그걸 보다가 말했다.
“공사장도 여름휴가가 있는 거 알아?”
“어? 정말? 비가 올 때 쉬는 거 아냐?”
그냥 중얼거렸는데 닥똥이 받았다.
건축학부에 다니던 닥똥은 이쪽에 관심이 많았다.
“비 오는 것과 별개로 여름휴가가 있어. 게다가 전국의 모든 현장이 동시에 문을 닫고 동시에 쉬지.”
“에... 왜? 그럼 안 좋은 거 아니야?”
“안 좋지.”
공사장은 국내 몇 안 되는 특수장비를 돌아가면서 쓴다.
예약하고, 일정 맞춰서 그 장비를 써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이 참 많다.
그런데 일제히 쉬면 특수 장비들까지 놀려야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아저씨들에게도 안 좋다.
이쪽 현장이 문을 닫으면 다른 현장에 가야 할 텐데 일제히 문을 닫으면 하루벌이가 급한 용역아저씨들은 굶주린다.
“건설회사마다 휴가날짜가 다 다를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일제히 쉬지?”
“휴가 날짜를 회사에서 정하는 게 아니거든. 건설크레인 노조에서 여름휴가 날짜를 정하고 통보해. 그럼 그 날짜엔 모든 현장이 문을 닫아야 해.”
“헐. 왜?”
“무력시위지. 매년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는 거.”
“타워크레인? 저거?”
닥똥이 올라가는 건물 옆에 삐죽 솟은 철탑을 가리켰다.
타워크레인은 찾으려고 하면 어디서든 하나 이상은 볼 수 있다.
“저거. 저게 건설현장의 핵심이거든. 저게 없으면 공사가 진행이 안 돼.”
포크레인이 고장나도 현장은 돌아간다.
지게차가 고장나도 현장은 돌아간다.
하지만 타워크레인이 고장나면 현장은 박살난다.
“모든 타워크레인 기사가 노조에 속해있고, 단합된 힘을 발휘해. 그들이 없으면 현장이 죽는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이렇게 정기적으로 자기네들의 힘을 보여주는 거야.”
예전에 막일할 때 직접 경험했었다.
당시 비가 많이 와서 공기가 많이 늦었는데, 타워크레인노조가 여름휴가를 선언했다.
현장소장은 쉬었다가는 도저히 공기를 맞출 수 없기에 사비를 들여 크레인 기사를 몰래 고용했고, 현장을 돌렸다.
당시 고용한 임시기사는 현장소장의 동생으로 크레인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휴가 날 몰래 공사를 한 지 반나절.
붉은 글씨로 생존투쟁을 적은 봉고차 100대가 오고 노조원 300명이 와서 질서정연하게 드러누웠다.
불쌍한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하라.
투쟁 투쟁 투쟁.
공사는 멈췄고, 이후 일주일 간 타워크레인 기사의 보이콧이 이어져 공기는 더 늦어졌다.
현장소장이 갈리고 나서 공사가 재개되긴 했는데, 협상과정에서 얼마를 더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타워크레인 기사는 월급 300만원을 받어. 원청업체는 기사에게 300을 주고, 노조에게 노조비 300을 줘. 공식가격이야.”
이건 공식 회계에 적혀있다.
노조는 이렇게 돈을 받아서 일을 한다.
타워크레인 노조원 중 현장에 못 나가 대기하는 이에게 소정의 월급을 주고, 휴가통보 때 현장을 돌리는 지 순찰을 돌고, 현장에서 노조원이 아닌 타워크레인기사를 쓸 경우 몰려가서 시위하고 드러눕는다.
“원청의 밑에 골조회사가 있어. 철근 시멘트 구조를 만드는 하청업체지. 골조회사는 기사에게 매달 200 이상을 줘. 이건 회계기록에 적히지 않아. 이 돈을 주지 않으면 타워기사가 일을 잘 안 해. 안 보이는 척 시간을 끌지. 건물 외벽 거푸집인 갱폼이나 철근, 방음자제 등 자재를 건물 위로 올리는 건 타워크레인이 아니면 안 되는데 그들에게 밉보이면 현장소장이 갈려야 해. 여기에 전기나, 안전, 도포, 청소 등 수많은 팀이 타워크레인의 힘을 빌려야 해. 그 때마다 무언갈 쥐어줘야 하지.”
합치면 대충 월 천 이상을 가져간다.
노조가 압도적인 단합력을 갖게 되면 그들의 권익을 충분히 보장받게 된다.
문제는 자신의 노조만을 위해 움직인다.
그들의 이익은 애꿎은 다른 이들의 손해를 유발한다.
“타워크레인. 할 만하네.”
닥똥놈이 딴 소리를 했다.
“좋은 거 알겠지? 그럼 너만 알까? 다 하고 싶어 할 텐데.”
아빠는 도져기사를 하며 월 천을 챙겼다.
주로 시골에서 일하고, 하루종일 진동과 소음과 급경사와 에어컨으로 막을 수 없는 엔진 열기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게 천만 원이다.
타워 기사는 고소공포증만 없다면 높고 조용한 곳에서 무전기의 신호에 따라 좌우 앞뒤 위 아래로 레버만 이동시키면 된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러고 버는 게 천만 원이다.
“하긴. 그러네.”
“타워크레인 기사가 되는 건 간단해. 자격증을 따기도 쉬워. 그런데 노조에 가입할 수 없어. 노조비를 내고 대기해야 해. 지금 기사 수가 건설현장의 두 배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대기야. 그러니 마구 노조원을 늘릴 리 없지. 듣기로는 수천만 원의 뒷돈을 줘야 가입할 수 있다고 하더라.”
타워크레인을 갖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 크레인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더라도, 노조원이 아니라면 건설현장에서 자기가 자기의 기계를 운전할 수 없다.
노조의 강력한 저항과 맞닥들이게 된다.
“헐.”
“세상이 다 그렇지 않을까? 항구에서 귀족은 항만크레인노조야. 크레인이 컨테이너를 떠주지 않으면 배가 묶이고 항구전체가 마비되지. 하루만 일정이 늦어지면 수억원의 손해가 나는 회사입장에선 뒷돈을 쥐어주면서 제발 빨리 떠달라고 하지. 현기차 노조는 유명하고, 금속노조도 들어봤지?”
“어. 그러네. 세상에 귀족이 참 많다.”
“노조, 협회, 시민단체. 다 똑같지. 돈 벌려고 조직되었고, 조직원의 최대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단체지. 그중 힘 있는 단체는 큰 돈을 벌고, 그 조직이 굳어지고 나면 조직 상부에선 엄청난 뒷돈을 벌게 되지.”
당장 의사협회와 싸우고 있다.
의사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된 사조직 의사협회.
의사협회는 사회 정의나 환자를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소속 조합원인 의사의 최대 권익을 위해 투쟁한다.
다른 노조나 시민단체도 모두 똑같다.
“이 모든 걸 일거에 바꿔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할 지 싶다.”
“바꿀 수 있겠냐? 결국 누구나 어디 한군데에는 들어가 있을 거 아니야? 그럼 모두가 반대하게 될 테고.”
“플랫폼이 바뀌어야지. 탈중앙화. 작은 울타리가 없어지고 강성노조의 억지주장을 언론이 제대로 꼬집고, 노조 없이도 진입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야지.”
울타리가 사라지고 있다.
언론이 해방되고 있다.
사람의 관심사가 다양해지고 있다.
그늘 뒤에 숨어 불로소득을 얻던 수많은 집단이 자기의 비밀 이권을 까발려지게 된다.
몇 년 후 주공 직원의 땅투기 불로소득이 지탄받게 된다.
이건 굉장히 긍정적인 신호다.
이후 공정위 직원이 공정위의 철퇴를 받게 될 기업정보를 발표 전에 공매도 세력에 넘겨 큰 이익을 챙기던 관행이 지탄받게 된다.
그 후 식약처 직원이 의약품 허가, 불허가 정보를 발표 전에 자산운용사에 넘겨 바이오사의 상한가 혹은 하한가로 수억씩 챙기던 관행이 알려져 박살나게 된다.
이후...
수많은 불로소득이 다 박살나면 세상은 좀 더 정직해진다.
물론 불로소득을 주워 먹던 그늘 속 알부자는 바뀐 세상을 저주하고 정부를 욕하고 옛날이 좋았다며 그리워하겠지만 근면 성실한 월급쟁이의 삶은 조금 더 나아진다.
사람의 관심 너머.
울타리너머 그늘을 보는 것 만으로 세상이 좋아진다.
“울타리를 박살내야지. 그것만으로 세상이 훨씬 좋아져.”
“야야. 놀러가면서 뭔 헛소리를 하고 있냐? 와봐. 게임하자.”
들뜬 가오리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한 이 위대한 이야기에 관심이 없나?
세상을 밝게 가꾸는 위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의 사람이 이렇겠지.
쳇.
칠레 산티아고까지 직항기가 있지만, 고급 전세기를 빌렸다.
전세 비용은 2억.
리프트 할인권과 왕복 버스, 장비 할인권을 패키지로 파는 당일치기 여행사 상품이 10만 원대고, 이마저도 중고나라 등에서 할인해 살 수 있는데 이번 여행은 편도 교통비만 2억이다.
비서실과 경호팀 등 추가 인원은 서른 명이고, 그룹에서 추가로 휴가 지원자를 모집해서 백 명을 채웠으니 큰 손해는 아니겠지.
18시간의 기나긴 비행동안 모여서 떠들고 술 마시고 놀다가 침대칸에서 자다보니 칠레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자 싸늘한 겨울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반갑습니다. 칠레지사장 정 미구엘 입니다.”
새까맣고 동글동글한 교포2세 아저씨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가 안내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일은 어때요?”
“잘 되고 있습니다. 하하. 잘 되요.”
이 아저씨 마인드가 약간 케세라세라같다.
스페인 마인드가 묻어있다고 해야 하나?
칠레 지부의 경우 한국에서 파견한 파견 직원이 넷이고, 현지 교민이 셋이고, 현지인이 열 명 있다.
그들이 번역을 하고 채널을 관리하고 녹음기와 미래뮤직을 광고 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펀드 자금 100억만 끌어와도 이득이다.
“아시겠지만, 한 나라 안에서 언제든 사계절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나라 칠레입니다. 세계적 구리 생산 국가로 남미에서 가장 잘 살며, 남미에서 부정부패가 가장 덜하고, 남미에서 치안이 가장 좋고, 남미에서 가장 백인화 잘되어 있고, 남미에서 살인사건이 가장 적은 나라입니다.”
한인교포 2세인 정 미구엘은 약간 어색한 한국어로 칠레에 대한 자랑을 쉴 새 없이 늘어놨다.
지나는 거리 풍경도 깔끔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멋진 산세가 잘 어우러져 있다.
“그래봐야 남미에서 좋은 것뿐이잖아요.”
제한 조건. 남미에서.
“에이. 단순히 남미에서만이 아니죠. 칠레의 살인사건 발생률은 디트로이트나 시카고 같은 미국 대부분 도시보다 낮아요. 정말 살기 좋은 나라죠.”
칠레의 치안이 그렇게나 좋다고?
예전에 와 봤을 땐 정말 위험했는데.
미국이 안 좋은 건가.
원양어선을 탔을 때, 나 같은 잡부를 모선이 와서 실어가지 않는다.
칠레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후 칠레 항구에서 소형유조선에 타서 배에 기름을 채울 때 옮겨 타는 방식이었다.
그 당시 왔던 칠레는 엄청 무서웠는데.
“스키장 휴양 하시면서 한번 보십시오. 칠레는 정말 끝내주는 나라입니다. 모아이 석상이 있는 이스터섬도 있고, 연평균 강우량 1mm인 지구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도 있습니다.”
미구엘 정이 칠레의 대표적 관광지를 프린트한 종이를 한가득 넘겨주었다.
요즘 세상엔 이메일이 대세인데 거참.
종이뭉치는 예하와 길영주에게 넘어갔다.
현지인이 추천하는 관광지로 둘이 머리를 맞대고 어머어머 대리석동굴~ 하며 어딘가 방문할 계획을 짜고 있다.
일주일간 스키장에 콕 박혀 있고 싶은데.
끼익.
버스가 멈춰 섰다.
“뭐죠?”
“시위대가 지나가네요. 잠시 기다려야겠네요.”
저 앞 교차로를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지나가고 있다.
저마다 똑같은 피켓을 들고 있다.
“뭐라고 써진 거예요?”
“구리포올. 구리를 모두에게, 라는 뜻입니다.”
“음...... 문제가 큰 가봐요?”
시위대의 행렬이 끝이 없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계속 지나간다.
시차 안 맞아서 졸려 죽겠는데.
- 작가의말
과거의 타워기사는 공기를 단축하려는 건설사때문에 하루 20시간 일해야 했고, 비바람 강한 날도 무리해서 일하다가 많이 죽었다고 해요
그같은 혹사가 반복되어 살기위해 똘똘뭉치게 되었고 그게 현재의 단합력 강한 노조를 이룩했다고 봐요
절대악은 없고 절대선도 없다고 봐요
그저 주식처럼 위아래로 흔들리며 중심점을 찾는 과정이겠죠
주공사태도 그래서 긍적적으로 봐요 주공이 들켰으니 주공을 계기로 기타 수많은 불로소득이 사라지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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