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덕유산3
“잘 쉬고 갑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차정미는 촬영하러 간다.
가오리는 썸타는 여자랑 약속이 있다고 떠났다.
“오빠! 이제 우리도 패밀리야!”
“동욱팸! 꺄하하하.”
“술 좀 깨 인년들아.”
트비스타가 떠들썩하게 떠나갔다. 무주에 행사 뛰러 간다.
크리스마스에 한가하기 힘들겠지.
전날 스케줄 뺀 것도 내가 하는 여행에 낀다니까 소속사 사장놈이 나한테 잘 보이라며 보내줬다고 했다.
하루 만에 너무 친해진 느낌.
트비스타가 떠나니 세상이 조용해지네.
고요한 산.
평화가 몰려온다.
중국 공장이 코로나로 멈추고 싼샤댐 붕괴로 중국전체가 고장 나면서 겨울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맑다.
맑은 하늘 아래 둔중하니 거대한 능선엔 아침의 눈꽃을 잃고 앙상한 가지만 수북히 쌓여있는데 그 여백에서 고요한 평화가 느껴진다.
굳이 화려하게 움직이거나 가득 채울 필요 없다.
탁 트인 시야 가득한 숲은 멈춰있기에 안식이 된다.
시야 하단에 들어오는 주먹 네 개.
그 아래엔 무릎 꿇고 손 들고 있는 예하놈과 루비놈.
이것들을 보니 평화가 깨진다.
“뭐하냐? 니들.”
“힝. 죄성해성...”
비 맞은 강아지와 비 맞은 고양이가 처량하게 올려다본다.
“어. 하지마. 안 해도 돼.”
“아니잉 그게.”
루비는 입도 못 열고 눈만 뜨고 있고.
“됐으니까 옆에 앉아.”
“어? 응. 응.”
둘이 벌떡 일어나 내 평화로운 벤치로 오더니 또 양쪽에 나눠앉는다.
“보통 커플 더하기 여자면 여자 옆에 앉지 않냐?”
루비를 보면서 말했더니.
“오빠 추울까봐. 이게 그림이 좋잖아.”
루비 이년 뻔뻔한 거 봐라.
“예하야. 여친으로써 내 남자한테서 떨어져. 라고 하는 건 어때?”
“하지만... 루비언니는 진심인데?”
“맞아. 오빠. 난 진심이야.”
쿵.
두 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전혀 반성 안 했구만.”
“끼이잉.”
“어디서 강아지 성대모사야.”
모닥불과 노노노와 쥐며느리 커플은 저쪽에 앉아서 싱글벙글 구경하는데 저것도 다 짜증이 나네.
산을 보자.
덕유산 멋지다.
“오빠? 코코아 타줄까? 커피?”
“아니면 나?”
평화가......
“예하야. 이거 소문 못 막는다.”
내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트비스타도 있었고, 걔들 매니저팀도 있었다.
내 이미지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둘의 이미지도 망가진다.
차라리 내가 돈이 없으면 진짜 사랑하나보다 하겠지만, 내 재산을 생각하면 두 여자가 최악의 꽃뱀 취급 받을 텐데.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네.
“소문나도 돼.”
“난 악플에 단련 되서 전혀 아코.”
쿵.
이것들아.
“좀 상식적으로 살자 우리.”
“오빠.”
예하가 정색했다.
“오빠는 상식 밖의 사람이야. 법 밖의 사람이고.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아.”
“그래도 임마. 야. 난 니가 욕먹는 게 싫다고.”
우우우.
모닥불과 길영주가 야유를 보낸다.
“니들 들어가라. 엿듣지 말고.”
“싫어.”
......
모닥불 쟤는 이상해.
쟤 무한전생자인가.
“난 욕먹어도 괜찮아.”
“예하야. 너 왜 이렇게 루비를 챙기는데? 루비가 너한테 니 남친 쩔더라 이러면 피꺼솟하지 않겠어? 난 니가 딴 남자 만난다고 상상만 해도 열 받는데.”
“그래도... 루비언니도... 언니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옆에 앉은 루비를 봤다.
이 여우같은 게 새색시처럼 다소곶이 앉아 내 눈을 글썽글썽 바라보고 있다.
너 대체 예하를 어떻게 세뇌한 거냐?
“루비언니는... 힘든 일 때문에 영혼 없는 껍데기만 남았어. 아직도 남자를 무서워하고. 행복한 것도 없고. 그냥... 의지 없이 움직이는 안드로이드 같아.”
예하가 루비를 극딜 했다.
“루비 언니의 영혼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오빠밖에 없어. 오빠 없인 평생 빈껍데기일 거야. 그러니... 사람 살리는 셈 치고 함께 하자. 내 마음은... 괜찮다고 하네.”
생각해보니 조승학에게 가장 잔인하게 당한 게 루비였지.
회귀 전엔 벌써 자살했을 아이.
몇 년이 지나 잊었는데 아직도 그렇구나.
그 흉터는 평생 남겠지.
“소문은 못 막는다. 셋 다 욕먹어.”
“상관없어.”
“너희 둘 다 얼굴 못 들고 다녀.”
“오빤 좋은 일 해도 욕먹잖아. 그냥 욕먹을 짓 하고 욕먹자.”
“이거랑 그거랑 다를 텐데.”
“나를 아는 사람이 수십억 명. 내가 아는 사람은 만여 명. 말 트고 지내는 건 천여 명. 친한 사람은 백여 명. 하지만 내가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의 십여 명 뿐이야.”
“...... 뭔 소리냐?”
“멀리서 손가락질 하고 욕해도 어차피 안 들려. 매일 만나고, 갑자기 우울할 때 전화하고, 그냥 심심할 때 계획 없이 만나는, 진짜 마음을 트고 대화할 십여 명에게만 미움 받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항상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떳떳하고, 내가 행복하면 돼. 10년 후 20년 후? 몰라. 이게 옳은 것 같으니까 할래.”
예하도 많이 생각했구나.
루비와 듀엣으로 활동하면서 대화도 많이 했을 테고.
오른손을 올려 예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하는 그게 기분 좋은 지 헤헤 거리며 꼬리를 맹렬히 치는... 환각인가.
예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데 루비가 내 왼손을 잡아 자기 머리 위에 올린다.
루비도 고양이처럼 꼬리를 치는 환각이...
고양이가 꼬리치는 건 사냥할 때라던데.
“이제 나도 모르겠다.”
“법에 매달릴 필요 없잖아. 어차피 법이 공정한 것도 아니고. 악법은 법이 아니라며. 오빠가 옳다고 생각하면 해.”
“그래.”
강간은 나빠.
안 한다.
범죄자 신원보호는 악법.
의도적으로 익명커뮤니티에 뿌려지게 유도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한다.
예하놈과 루비놈이 날 공유하는 건 옳은가. 떳떳한가.
“야. 니들 근데 내 의사는 안 묻냐?”
“어? 남자는 무조건 좋은 거 아냐? 여자 둘이 동시에 사귀어도 된다고 하는데 싫다고?”
어, 그렇긴 한데.
“야, 사람을 뭘로 보고. 니들 이거 성차별이고 성추행이다. 확 마 감옥에 쳐너불라.”
“에헤헤. 괜찮아. 괜찮아.”
예하가 허리를 안으며 꼬리를 맹렬히 휘둘렀고, 루비는 내 목을 쓰다듬으며 유혹의 몸짓을 하는데 유혹은 개뿔. 진짜 뻣뻣하네.
이제 모르겠다.
두 놈을 냅두고 하늘을 보니 눈부시게 파란 하늘이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프다.
“오올 하렘엔딩. 그럼 나도 예하 허락 받으면 되는 거야?”
모닥불이 놀렸다.
“안돼요. 더 이상 안 껴줄거야.”
“아잉. 나도 껴줘. 나 어제 깨져서 상처받았단 말이야.”
“안대에에에.”
예하 소신 있네. 왠지 모닥불이 마음먹고 달려들면 금방 설득당할 것 같지만.
두 여자가 양쪽에서 안겨 응석 겸 애교 부리는 것 받아주다 보니 마음도 풀린다.
들키면 뭐 어때. 욕먹고 말지. 욕 따위 무시하자.
이성적 계산으로는 절대 손해지만... 뭐. 마음이 채워지잖아.
두 여자가 나 때문에 죽고 못 살겠다고 한다.
이 상황이 엄청난 정복감과 성취감을 준다.
바람둥이들이 이 맛에 사는 건가.
비서실에서 인근 맛집에서 공수한 특급 백반을 가져다 줄 때도 둘은 떨어질 생각하지 않고 계속 엉겨붙어 있었다.
그냥 욕먹고 말자.
점심을 먹은 후 내내 말이 없던 한민선이 서울로 올라갔다.
쟤도 마음이 복잡하겠지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흔한 엇갈림일 뿐이다.
2021년 1월 1일.
“새해 복 많이 받아.”
“오빠도. 오빠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아. 스물일곱 살이다.”
한국사회나이 스물일곱. 한국정식나이 25세.
“아. 스물 셋. 세월 너무 빠르다.”
“넌 만으로 스물하나 잖아. 방송에서 그런 말 하면 많은 저항을 받게 될 거야.”
“헤헤헤. 엄마 보러 갈 거야?”
예하가 말하는 엄마는 내 엄마다.
내 엄마는 이제 나보다 예하를 더 좋아한다.
내 엄만데......
“아니. 구정 때 보재.”
“어. 그럼 전화 드려야겠다. 아, 나 오빠한테 선물 샀어.”
“선물?”
예하가 내 손을 잡고 1층의 네 개 방 중 창고방으로 안내했다.
“짜잔.”
커다란 천에 덮여 있던 커다란 물건.
천을 치우니.
“지구본이네?”
“어.”
사람 키만한 엄청 큰 지구본이 있다.
동그랗지 않고 커피콩처럼 약간 찌그러진 실제 지구 모형.
산맥의 높이도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게 선물이야?”
“응. 원래 세계의 지배자나 어둠속의 보스는 지구본 갖고 있잖아. 오빠는 세계에서 제일 세니까 큰 지구본이 있어야지. 잠깐 거기 서봐.”
찰칵.
“오오. 지구의 지배자 같아. 멋있어.”
“지배자인가. 내가 지배자가 될 상인가. 크하하하.”
“어. 짱짱맨. 멋져.”
“후후훗. 예하도 서봐.”
“내가 지구의 주인이다 크하하하. 아 웃겨 나.”
찰칵.
키만한 지구본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세계를 정복하고 싶은 욕망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내 사진 어때?”
“예뻐.”
예하 is 뭔들.
“헤헤헤. 이거 어디에 둘까? 침실? 컴퓨터 방?”
“컴퓨터 방에 자리 없어. 거실에 두자.”
“그래.”
뭘로 만들었는지 혼자 들 수 있을 정도로 가볍다.
거실 한쪽에 두고 예하가 이리저리 보면서 자리를 잡았다.
떡국을 먹고 예하의 손을 잡고, 컴퓨터실로 갔다.
메신저 전용 컴퓨터.
검색용 컴퓨터.
예하 것도 똑같이 두대.
루비 것도 똑같이 두대.
루비도 우리 집에 들어왔다.
셋이 아주 방탕한 밤을 보내고 있지.
이러다 깨지면... 뭐 깨지는 거지.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길게 생각하지 말자.
그 뒤로 스무대의 컴퓨터가 있다.
항상 켜져 있고 항상 로그인 되어 있는 컴퓨터.
컴퓨터마다 복잡한 오토 프로그림이 돌아가고 있다.
“예하야. 하나씩 세팅값 잡아. 이건......”
비트코인 거래 전용 컴퓨터들.
미래블록의 성공으로 역사가 바뀔까 걱정했지만, 비트코인 차트는 원 역사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미래블록이 달러 연동 화폐처럼 되어서인 것 같다.
총 7조의 비트코인을 광고로 찾아낸 개인 간 블록딜, 거래소 매수 등으로 구매했고, 평균 550만원에 산 비트코인이 지금은 3000만원을 넘겼다.
현재까지 6배 수익.
여기서 1.5배 더 오르니 열다섯 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뭐 뭐 사야해?”
“전부. 모든 알트코인을 다 사.”
작년, 2020년엔 비트코인 혼자 올라갔다.
비트코인 가격이 6배 오르는 동안 대부분의 알트코인들은 제자리 걸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알트코인의 펌핑이 시작된다.
비트코인이 두 배 오르는 동안 알트코인은 열 배 이상 오른다.
이건 2017년 버블 때와 비슷하다.
비트코인이 먼저 오르고, 뉴스가 나가면서 신규 불나방들이 들어오고, 신입생들은 이미 쭉쭉 오른 비트코인 대신 기능도 모르는 알트코인을 사면서 열배씩 펌핑이 이뤄졌다.
역사는 똑같이 반복된다.
개중 스무배, 백배 씩 오르는 코인도 기억나지만 그것만 사기엔 시장에 풀린 양이 부족하다.
모든 코인을 다 사고 열배가격이 되면 프로그램이 조금씩 정리할 것이다.
“아직도 꼭 우리가 해야 해? 이제 맡겨도 되지 않아?”
“이 포지션은 중요해. 시장이 작아서 정보가 풀리면 제대로 팔지 못할 수도 있어. 지금 내가 비트코인의 8%를 갖고 있거든. 한화로 42조야. 이걸 15배로 늘릴 거니까 그러면 600조 정도 되네.”
“어... 별거 아니네.”
이게 문제야.
억 단위면 몰라도 조 단위는 실감이 안 난대두.
“예하야. 미래펀드를 제외한 미래그룹 전체가 작년에 총합 200조를 벌었어. 900만명의 직원이 일해서 200조야. 그 중 내 지분이 40%니까 내가 번건 80조네. 그런데 이 코인거래로 1년 만에 600조를 벌어요. 별거 아니에요? 대단해요?”
예하의 눈이 똥그래졌다.
“900만 명이 8년 동안 벌 돈을 오빠 혼자 버는 거네. ... 스... 스고이.”
이 시국에 일본어냐.
“이해했으면 일해라.”
“예. 옙. 일하겠습니다.”
예하에게 세팅값을 알려주고 뒤늦게 집에 온 루비에게도 정신교육을 시킨 후 작업에 투입했다.
이건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
예하와 둘이 하던 걸 루비까지 셋이 하니까 더 편해졌다.
- 작가의말
3p씬은 음슴. 당신의 상상력에 맡기겠음. 여백의 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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