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전리품 수집2
“몰라. 도망갔어. 진짜야.”
새끼.
“네. 그럼 협상 종료. 잘 가시고.”
“정말이야! 부산에서 러시아 선박에 태우기로 했는데 지 혼자 탈출했어. 진짜 몰라. 맨몸으로 혼자 도망갔어. 그 동영상! 그 현상금 동영상이 나온 날 그랬다고 진짜야! 허영수도 말했을 거 아니야! 진짜야. 내가 차를 보내줬는데 아들놈이 나조차 못 믿고 도주했어!”
진짜인거 같다.
허영수의 증언과도 똑같고.
조승학......
찝찝하다.
“보내줘! 다 말했잖아. 진짜야. 그놈 어디로 도주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조준선이 다리에 매달리며 간청하는 데 참 초라하다.
제 살길 앞에선 아들의 안위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내 제안에 응하지 못했잖아. 조승학의 위치만큼 가치 있는 거 있어?”
“그...... 이백만 달러가 더 있어. 그 계좌는......”
“그깟 푼돈 필요 없어. 평생 감옥에서 썩어라.”
“이 새끼!”
조준선이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으려다가 경호원에게 팔이 꺾였다.
“다 말했잖아. 1700억도 줬잖아! 나 경찰에 넘기면 그거 다 불거야! 네놈들이 못 갖는다고! 놔줘!”
“후훗. 아저씨가 숨긴 재산은 전액 우리가 받기로 했어. 라잉 펀드 손해액 벌충하는 대가로 말이야. 세금 없이 합법적으로 들여오려면 애초에 국가 통해 가져왔어야 해. 어쨌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잘 가. 다신 보지 말자.”
절박하게 매달리는 조준선을 떼어내고 돌아섰다.
“검찰에 넘겨주세요.”
한심하다.
내 시간을 1초도 소비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다.
“안 돼! 놔 줘! 러시아로 가기만 하면... 제발......”
경호팀이 포박해 다른 차에 태웠고, 그 차는 곧장 백제그룹 수사 관할 검찰에게 가기로 했다.
긴밀한 협조중이기에 연락처도 있다.
차로 돌아오니 예하가 끌려가는 조준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풀어달라고 발버둥 치며 떼쓰는 조준선의 모습은 같은 인간이란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왜?”
“그냥. 뭐랄까. 심숭생숭해.”
“조준선... 좋아했구나?”
“푸훕. 뭐. 뭔. 뭔 소리래. 진짜 푸풉. 아하하하하 진짜. 오빠.”
갑자기 터진 웃음에 예하가 내 어깨를 치며 한참 들썩였다.
이왕 나온 김에 가까운 양양에 들러 해변 횟집에서 물회를 마셨다.
동해바다를 앞에 두고도 예하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저 동해의 파도만 멍하니 바라봤다.
채형과 그룹 일을 한참 논하고 헤어진 후 차에 타니 예하가 내 무릎을 베고 눕는다.
“허무해.”
예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좀 허탈하네.”
“나는 되게 엄청난 괴물로 생각했거든. 조승학이 그렇게 악마 같았으니 조준선은 지옥 그자체인 대마왕일 줄 알았어.”
“그런데 너무 하찮아?”
“어. 내가 무서워하던 게 한심할 정도로.”
“이미지화 한 게 좀 있지. 대단한 회장님, 가까이 서기만 해도 절대자의 포스가 느껴진다, 이들은 보통 사람과 인종이 다르다, 뭐 그런 이미지를 책과 드라마가 쌓아줬지.”
“아니야?”
“다 똑같은 사람이야. 자기가 평생 하던 거에만 능숙한 사람일 뿐이지. 아랫사람 다루기나 갑질이나, 아니면 돌발 사고에 대처하는 건 낫겠지만, 결국은 똑같은 사람이야. 여자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다만 노는 방식이 다를 뿐. 백미터를 5초에 달리는 사람은 없고, 키가 5미터인 사람도 없어. 그저 앉아있는 의자에 맞춰 다르게 적응한 인간일 뿐이야.”
다들 약간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 인간은 다들 비슷하다.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참...... 저런 사람이...... 별 차이도 없는 사람이...... 어찌 그렇게 많은 사람을 괴롭혔을까. 조승학이 하던 짓도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왜 안 말렸을까?”
“평범하니까 아들 사랑해서 챙겨줬겠지. 좋아하는 거 하고픈 대로 하라고. 평범한 지능을 가진 놈이 평생 재벌의 삶을 살았으니 뇌기능이 망가졌을 수도 있겠지. 난 특별하다. 가난뱅이는 죽어도 된다. 뭐 그런 사고방식을 갖게 됐겠지.”
한고철강의 부도는 IMF사태의 직격탄이 되었다.
전국민이 분노한 가운데 진행된 국회청문회에서 한고의 회장은 실실 웃으며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뭘 알아?’ 라고 했다.
공감능력 제로.
심지어 저기서 말하는 머슴은 계열사 사장이다.
그리 큰 차이 없는 인간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인간이.
과분할 정도로 대단한 삶을 살면서.
어딘가 망가진 인종.
재벌.
“돈이 대단하고 주식증서가 대단하지. 하지만 소유한 사람은 거기서 거기야. 똑같이 똥싸고, 똑같이 섹스 좋아하고, 똑같은 자세로 똥 닦는 똑같은 인간들이야. 재벌이라고 트리플악셀 밟으면서 똥 닦는 인종이 아니야. 딱 한걸음 차이의 삶을 살 뿐이야. 물론 그걸 좁히기 힘들지만......”
“허무해.”
“애초에 이럴 줄 알았어. 조준선은 예상을 벗어나지 못해서 전부 작전대로 진행됐고.”
“그래도...... 그 무서웠던 괴물이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말없이 예하의 머리를 결 따라 쓰다듬었다.
“그런데 조승학은 어디 갔을까?”
“글쎄.”
허일수는 배정구의 전화를 받고 즉각 자수해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허일수의 설득에 성형수술한 의사와 간호사도 우리에게 보호를 요청해 왔다.
백제에서 꼬리 자르기를 시작했으니 미래의 보호를 받고 가족이라도 챙기는 게 낫지.
허일수에 의해 조승학의 행방도 밝혀졌다.
‘영덕 시내에서 탈출했습니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사라졌어요. 그때, 지혜씨의 아버지가 영상을 올린 직후였습니다. 본사에서 차량이 왔는데도 타지 않고 영덕시내 어디론가 갔습니다.’
사라졌다.
얼굴에 붕대를 감은 조승학은 어디론가 도주했다.
조준선이 몰래 챙긴 줄 알았는데 아까 반응을 보니 조준선조차 모르는 듯 했다.
“잡을 수 있을까?”
“잡아야지. 죗값을 받게 해야지.”
“죗값이 너무 크잖아. 무기징역?”
“글쎄. 가능하면 필리핀에 데려가서 처벌하고 싶은데?”
“어...... 힉? 죽이려고?”
“지혜아빠가 살려주라고 하면 살려줄 거야.”
“용서할 리 없잖아.”
“죄인이 정당한 죗값을 받는 것 뿐이야. 그딴 놈이 평생 세금으로 감옥에서 놀고 먹는 건 아무도 바라지 않아.”
“오빠... 무섭다. 한없이 착한 사람이 어떻게.”
“아냐. 난 착하지 않아.”
니가 착각하는 거야.
“나도 보통사람하고 똑같아. 조준선 같은 재벌과도 똑같아. 보통사람만큼 착하고, 보통사람만큼 나빠. 딱 그 정도야.”
“힝... 몰라... 어쨌든... 그래 나도 조승학이 사라졌음 좋겠어.”
“그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느낄 수 밖에.”
빨리 좀 잡혀라.
돈도 없고 백제도 무너졌으니 혼자 거리를 헤맬 텐데 왜 안 잡히지.
어디 산속에 죽어있나.
찝찝하게.
백제 그룹에 대한 정리가 진행되었다.
경영지원팀에서 미리 준비한 각 사 인수팀을 중심으로 미래그룹 거의 전 직원이 달라붙어 계열사를 살폈고, 내부 회계자료와 비공개 문건들을 확인하고, 비리가 있는 이를 조사했다.
나라에선 되도록 조용하고 깔끔하게 수습하길 바래서 미래그룹이 먹는 걸 적극 협조하고 있지만, 우리가 오히려 들쑤시는 형국.
증거를 찾아다가 횡령죄로 민사고발을 하면 국가에서 어쩔 수 없이 잡아넣을 수 밖에 없다.
내부 고발로 죄인이 잡힐수록 백제 계열사의 지분가치는 올라갔다.
구르는 돌에 붙은 똥찌꺼기가 떨어지면 속도가 빨라지는 게 당연하니까.
민형수 변호사와 협조해 임금을 못 받은 이를 챙기고, 과거의 소송을 빠르게 합의했다.
그 과정에서 주가는 서서히 빠져 40조 근처에서 놀고 있다.
조씨 일가가 운영할 때보다 두 배 상승한 가격.
자사주 소각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백제그룹......”
수많은 계열사와 비상장 자회사가 붙어있고 타사와 지분교환 등 복잡하게 얽혀있다.
고용인 수만 3만 명에 달한다.
캐쉬카우인 광업과 비철제련, 통신을 제외하면 큰 이익도 큰 손해도 없이 현상유지 하는 기업들이다.
“...... 인수 희망자는요?”
“아직. 다들 군침은 흘리더라고.”
“반년 주죠. 반년 안에 인수할 회사 없으면 미래란 이름으로 바꾸고 편입한다고 하죠.”
“그럼 조금 손해 볼 텐데.”
빨리 팔아야지.
갖고 있어봤자 그룹 전체의 연 순이익은 6000억 밖에 안 된다.
우리가 챙길 수 있는 건 세금 제하면 연 3000억이 한계.
팔면 10조를 챙길 수 있는데 그 돈으로 코로나 때 투자하면 200조를 만들 수 있다.
3년간 9000억과 200조의 차이. 너무 크잖아.
“네. 그리고 이거랑 이것만 바로 편입하죠. 비리 다 털어내고.”
수많은 회사 중 필요한 것만 챙기자.
백제배터리.
미래산업이다.
슈우우웅.
작은 바람소리를 내며 원반이 바닥을 헤엄쳐 다닌다.
일은 잘 못해도 성실한 로봇청소기가 휩쓸고 간 후 예하가 물걸레를 들고 벽면가 닿는 구석부분을 사사삭 닦으며 지나간다.
엎드려서 걸레를 손으로 누르고 벽을 따라 와다다다 하며 닦는 게 귀여우면서 섹시하고 참하다.
매일 이불과 침대 시트를 빨고, 갈아 끼우고, 청소하고, 아침밥은 직접 차리고.
예하의 하루는 바쁘다.
“예하야.”
“어?”
“일하는 사람 쓸까? 21층 여자 중 한명 지원 받을까?”
“에? 왜? 나 일 잘 못해?”
“아니. 이런 거 하지 말라고.”
“어...... 그래도 원래 내 일인데.”
“이 일 하는 시간에 방송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아?”
“욕먹지 않을까? 아무것도 없는 년이 남자 잘 물어서 귀족처럼 산다고. 그냥 내가 집안일 하면 안 돼?”
“너 뭔가 계산을 잘못하는 거 같은데, 니가 개인방송 했으면 얼마 벌었을 거 같아? 잡일 할 시간에 작곡가 만나서 매달 한곡씩 녹음해 등록하거나, 웹드라마를 찍거나, 그러는 게 낫지 않겠어? 너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을 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누군가에게 맡기자.”
“에...... 그래. 네. 그래도 누가 여기 오는 거 싫은데. 우리만의 공간.”
그런 의미도 있구나.
“네 뜻이 그러면 그렇게 하든가. 대신 회계팀에 말해서 네 성과 정확히 계산해서 네 통장에 넣으라 할게. 단순한 일은 일할 사람한테 맡기고 넌 너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나만 할 수 있는 일?”
예하가 잠시 생각하다가 발그레 웃으며 볼을 붉혔다.
야. 진정해.
그거 아니야.
“오빠오빠. 그럼 우리 벚꽃놀이 갈까?”
“언제?”
“다음주! 군함제가자. 군함제! 벚꽃놀이!”
이제 곧 4월이구나.
“군항제 말씀하시는 건가요?”
“군항제야? 쳇. 싸람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넘어가는 센스가 없으셔.”
“나한테 화내심? 안감.”
“아아아아. 가자. 군항제 가자.”
“다음 주면...... 바쁜데. 혼자 갈래?”
“어?”
예하는 거절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정말?”
“어. 다음 주에 필리핀 갈 거야. 사냥 종료 기념 단체 휴가. 뒷정리도 하고.”
“아?”
“너도 갈 거야.”
“꺄아아아~”
예하가 달려와 안기며 방방 뛰었다.
가슴도 방방 뛴다.
내 가슴도 방방.
어... 방방이 한번 해야겠군.
평화롭다.
경호팀 배치인원을 줄이고, 홍보팀 스튜디오도 성수동에 마련했다.
백제와의 항쟁이 끝나자 한결 자유로워졌다.
이제 고생한 이들을 위한 휴가다.
“오빠. 자. 이거 입어효오오. 따 단!”
짜잔하며 건네준 것은.
정장?
“왜?”
“공항패션. 내 첫 월급으로 샀어.”
“정장을 입으라고?”
“공항하고 비행기에서만. 주총 같은 행사할 때나. 아잉. 딱딱한 거 아냐. 패셔너블한 타입이야. 오빠 슈트패션 멋있을 거 같아.”
“......”
예하의 첫 월급으로 빨간내복 대신 받은 정장.
“이게 어디가 예쁜지 모르겠는데.”
“예쁜 게 아니라 멋.”
“그것도 모르겠는데.”
“오빠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오빠가 입으면 너무 멋있고 내가 행복할 거 같아.”
여자는 왜 슈트패션을 좋아하는 걸까.
내켜하지 않자 예하가 억지를 부렸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미래 기억이랄까.
가오리는 평소에 캐쥬얼 복장으로 출퇴근을 했다.
틀니 만드는 회사였으니까.
어느날 퇴근길에 얼굴이나 보자며 양수리에서 만났는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웬일?”
“제사. 바로 큰집에 가야 해. 짜증나 죽겠어.”
“제사 때도 캐주얼 입고 하지 않았냐?”
“지난 제사 때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욕먹었다. 한복 아니면 정장 입으란다.”
그랬었다.
“이상하지 않아? 조상에 대한 예의를 왜 양복으로 챙기지.”
그런가.
그랬었지.
“예하야. 난 양복이 정말 병신같이 보여. 셔츠 카라는 왜 딱딱하지? 아무 기능성도 없잖아. 왜 안 없애지? 셔츠 단추도 쟈크라는 위대한 발명품으로 교체하는 게 편리하지 않아? 슈트 앞가슴 열어둔 부분도 이상해. 목카라부터 접어 내려가 가슴부분에 번개모양으로 넘겨 붙인 이중 구조. 이게 왜 필요해? 무슨 의미가 있어? 기능성 제로. 그렇다고 이게 유서 깊은 의복이야? 유럽 귀족이 이런 거 입었어? 아니잖아. 전통을 생각하면 한복이나, 유럽 귀족의 복장을 입던가 기능성을 생각하면 츄리닝이 백배 훌륭하지 않아?”
셔츠와 슈트를 하나하나 짚으며 정장의 무쓸모와 근본없음과 허접함을 설파했다.
정말 입기 싫다.
“사회적 상식이란 게 있잖아! 츄리닝이 편하면 청바지에 남방 입지 말고 츄리닝만 입든가!”
“어? 그러네.”
나조차 사회적 상식에 갇혀 있었구나.
부자라는 티내기 싫으면 좀 더 편한 트레이닝복 입고 다녀도 되잖아.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츄리닝 입고 다닐래.”
“우이씨이이! 싫으면 그냥 입지 마!”
예하가 첫 월급으로 사준 정장을 홱 낚아채 자기 방으로 갔다.
예하는 진심으로 삐졌다.
- 작가의말
모두가 예! 라고 할때 나혼자 노! 를 외치면 또라이가 됩니다만...
아몰랑 정장조까
제가 좀 삐뚤어져서 모든 상식에 일단 왜! 를 붙여봐서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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